마음공부
[스크랩] Re:도교의 도사와 불교의 스님과 의 대결(도움이 되시길)
Borealis 임박사
2011. 7. 3. 17:02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과정은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인도의 승려들이 육로나 해로를 통하여 기원전후를 즈음에 전래된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가장 신빙성이 있는 자료에 의하면
"후한 명제 영평 10년 ( A.D 67 ) 어느 날 밤에 금인이 서방으로부터 방광을 하면서 왕궁에 하강하는 꿈을 꾸고, 서방에 불교가 있음을 알고 채음, 진경 등 18명을 인도에 파견하여 불교를 알아보게 하였다. 그들은 중도에서 백마에 불상을 싣고 동행하는 섭마등과 축법란을 만나 함께 중국으로 갈 것을 권유하고, 마등은 불교를 알리려는 강한 염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고생을 무릅쓰고 사막을 건너서 낙양에 도착하게 된다. 명제는 기쁘게 환영하여 낙양문 밖에 백마사를 짓고 그곳에 거주케 하였다. 이것이 중국에 사문이 들어온 시초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당시 중국은 유교와 도교가 사상적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유교와 도교와의 마찰은 피할수 없게 됩니다. 결국 중국 역사상 4번의 법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첫번째 법란은 북조시대 무제 때 일어난 법란으로 도교부흥을 꾀하려던 일종의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불교를 배척한 사건이 있습니다. 서위를 이은 북주(北周) 무제(武帝) 건덕(健德) 3년에 이르러 두 번째 법난이 일어납니다. 이 때 도교를 신봉하고 내심 불교를 배척하고자 하던 무제는 폐불의 구실을 찾기 위해 문무백관, 승려, 유학자, 도사 등으로 하여금 삼교의 우열을 논의토록 하였는데 그 이유는 불교에 대한 박해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논의 때 마다 도교는 오히려 불교계에 의해 논박 당하고 여론마저도 불교계에 호의적이자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 도사 장빈은 폐불을 단행하고자 결심하고 지현(智炫)과 필사의 논쟁을 벌렸지만(574) 오히려 논박을 당하고 만다. 무제는 이에 격분하여 직접 그 자리에서 지현과 대론을 벌이지만 그 역시도 논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불교만 탄압할 명분을 찾지 못하게 된 무제는 할 수 없이 불교와 도교를 함께 배척하였다. 그러나 무제의 속뜻은 불교 탄압에 있었기 때문에 법난을 단행하면서도 통도관(通道觀)등을 세워 도교만을 암암리에 보호하였다. 이와 같은 종교정책은 건덕(健德) 6년(577)에 멸망 시켰던 북주의 불교마저도 탄압할 정도로 심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피해는 불교계만 입게 됩니다.
그후 북위 태무제때 또한번의 불교탄압이 있고 당대에 무종때 법란이 있게됩니다. 그리고 네번째 법란은 후주 세종때 일어 납니다. 그래서 중국의 법란을 삼무일종의 난이라고 합니다. 이들 법란의 배후에는 도교와 중화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도교는 원래 중국의 민속신상으로서 신선사상, 음양오행, 현세적이며, 장수법을 구하던 종교였으나 나중에 노장사상을 흡수하여 하나의 종교로서 탄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불교와 많은 마찰이 있게되는데, 불교에서는 인과응보을 가르치고 정신은 죽지않고 윤회하여 과보를 받는다는 것등을 반박하였습니다. 특히 유교에서는 승려들은 일하지 않고 먹고 논다고 공박하였고, 부처도 없고 정신도 멸하며, 인과설이 아닌 자연설, 우연설, 운명설로 만물을 설명하였으나 언제나 불교 스님들에게 논박당하기 일수 였습니다.
우리가 잘알고 있는 달마대사와 혜가의 첫 만남도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날 신광이라는 도교 수행자가 달마대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을 걸었습니다. 자신은 경전을 읽고 깨달음을 얻었노라고...그러자 달마대가가 말을 합니다.
달마는 흰 것은 종이이고 검은 것은 글자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광(神光)이 경전을 보고 깨달았다고 말한데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달마는 종이 위에 떡을 그려 놓고 그것을 먹어 보라고 신광에게 내밀었습니다. 경전을 보고 깨달았으니 그 떡도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광은 농락당한 분풀이로 달마를 내리쳤습니다. 그 신광이 바로 혜가(慧可)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깨달은 신광은 소림사 뒷산의 석굴에 은거한 달마를 찾아갔습니다. 잘못을 빌고 자기의 왼쪽 어깨를 계도(戒刀)로 베어 버렸습니다. 신광의 법기(法器)를 일찍부터 알아차린 달마는 신광을 거두었습니다. 혜가라는 법명을 주고 법통을 잇게 한 것입니다.
가장 신빙성이 있는 자료에 의하면
"후한 명제 영평 10년 ( A.D 67 ) 어느 날 밤에 금인이 서방으로부터 방광을 하면서 왕궁에 하강하는 꿈을 꾸고, 서방에 불교가 있음을 알고 채음, 진경 등 18명을 인도에 파견하여 불교를 알아보게 하였다. 그들은 중도에서 백마에 불상을 싣고 동행하는 섭마등과 축법란을 만나 함께 중국으로 갈 것을 권유하고, 마등은 불교를 알리려는 강한 염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고생을 무릅쓰고 사막을 건너서 낙양에 도착하게 된다. 명제는 기쁘게 환영하여 낙양문 밖에 백마사를 짓고 그곳에 거주케 하였다. 이것이 중국에 사문이 들어온 시초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당시 중국은 유교와 도교가 사상적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유교와 도교와의 마찰은 피할수 없게 됩니다. 결국 중국 역사상 4번의 법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첫번째 법란은 북조시대 무제 때 일어난 법란으로 도교부흥을 꾀하려던 일종의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불교를 배척한 사건이 있습니다. 서위를 이은 북주(北周) 무제(武帝) 건덕(健德) 3년에 이르러 두 번째 법난이 일어납니다. 이 때 도교를 신봉하고 내심 불교를 배척하고자 하던 무제는 폐불의 구실을 찾기 위해 문무백관, 승려, 유학자, 도사 등으로 하여금 삼교의 우열을 논의토록 하였는데 그 이유는 불교에 대한 박해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논의 때 마다 도교는 오히려 불교계에 의해 논박 당하고 여론마저도 불교계에 호의적이자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 도사 장빈은 폐불을 단행하고자 결심하고 지현(智炫)과 필사의 논쟁을 벌렸지만(574) 오히려 논박을 당하고 만다. 무제는 이에 격분하여 직접 그 자리에서 지현과 대론을 벌이지만 그 역시도 논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불교만 탄압할 명분을 찾지 못하게 된 무제는 할 수 없이 불교와 도교를 함께 배척하였다. 그러나 무제의 속뜻은 불교 탄압에 있었기 때문에 법난을 단행하면서도 통도관(通道觀)등을 세워 도교만을 암암리에 보호하였다. 이와 같은 종교정책은 건덕(健德) 6년(577)에 멸망 시켰던 북주의 불교마저도 탄압할 정도로 심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피해는 불교계만 입게 됩니다.
그후 북위 태무제때 또한번의 불교탄압이 있고 당대에 무종때 법란이 있게됩니다. 그리고 네번째 법란은 후주 세종때 일어 납니다. 그래서 중국의 법란을 삼무일종의 난이라고 합니다. 이들 법란의 배후에는 도교와 중화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도교는 원래 중국의 민속신상으로서 신선사상, 음양오행, 현세적이며, 장수법을 구하던 종교였으나 나중에 노장사상을 흡수하여 하나의 종교로서 탄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불교와 많은 마찰이 있게되는데, 불교에서는 인과응보을 가르치고 정신은 죽지않고 윤회하여 과보를 받는다는 것등을 반박하였습니다. 특히 유교에서는 승려들은 일하지 않고 먹고 논다고 공박하였고, 부처도 없고 정신도 멸하며, 인과설이 아닌 자연설, 우연설, 운명설로 만물을 설명하였으나 언제나 불교 스님들에게 논박당하기 일수 였습니다.
우리가 잘알고 있는 달마대사와 혜가의 첫 만남도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날 신광이라는 도교 수행자가 달마대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을 걸었습니다. 자신은 경전을 읽고 깨달음을 얻었노라고...그러자 달마대가가 말을 합니다.
달마는 흰 것은 종이이고 검은 것은 글자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광(神光)이 경전을 보고 깨달았다고 말한데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달마는 종이 위에 떡을 그려 놓고 그것을 먹어 보라고 신광에게 내밀었습니다. 경전을 보고 깨달았으니 그 떡도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광은 농락당한 분풀이로 달마를 내리쳤습니다. 그 신광이 바로 혜가(慧可)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깨달은 신광은 소림사 뒷산의 석굴에 은거한 달마를 찾아갔습니다. 잘못을 빌고 자기의 왼쪽 어깨를 계도(戒刀)로 베어 버렸습니다. 신광의 법기(法器)를 일찍부터 알아차린 달마는 신광을 거두었습니다. 혜가라는 법명을 주고 법통을 잇게 한 것입니다.
출처 : 청봉스님의 장군죽비
글쓴이 : 미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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