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스크랩] 중용 해설(11장 귀신 ~20장)

Borealis 임박사 2011. 12. 28. 06:40

子ㅣ曰 素(⇒索)隱行怪를 後世에 有述焉하나니 吾弗爲之矣로라공자 말씀하시기를 은벽한 것을 찾아내고 괴이한 짓을 행하는 것을 후세에 칭술하는 이가 있나니 나는 그렇게 하지 않노라

素 : 본디 소, 여기서는 索(찾을 색)으로 보아야 함.

[본문 해설]
이 세상에는 옹벽한 곳에서 귀신이나 도깨비 등 잡된 것을 찾아내 여기에서 기이한 것이 생긴다며 괴이한 짓으로 사술이나 조화를 부리고 세상을 현혹되게 하고, 더 나아가서 후세 사람들은 이를 칭술(稱述)하며 책으로 엮어내고 가르쳐 전파하기까지 한다. 공자께서 이는 결코 중용지도가 아니기에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참고] 주역의 鬼神觀
흔히 사람들은 神의 신령스러움은 알지만 그 神이 神이 된 바는 알지 못한다(人이 知其神之神하고 不知其神之所以神이라)고 황제음부경은 말하고 있다. 자연의 신묘한 이치를 알아서 깨우쳐야 함에도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어떤 초인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기이한 사술에 현혹되어 중용의 도에서 벗어나기에 공자는 이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대개 儒家에서는 신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 모르는 사람들의 얘기이다. 주역에서 공자는 신을 두루 언급하고 있다. 특히 계사전이나 설괘전을 보면 神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까지 나온다.
계사상전 제9장에 “凡天地之數ㅣ 五十有五ㅣ니 此ㅣ 所以成變化하며 而行鬼神也ㅣ라(무릇 천지의 수가 오십오니, 이것으로써 변화하며 귀신을 행하느니라)” 하여 天數와 地數의 합인 55 속에서 음양이 변화를 하고 그것을 귀신이 행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陰이 변하는 것, 즉 음적인 작용은 鬼가 되고, 陽이 변하는 것, 즉 양적인 작용은 神이라고 한다. 鬼는 죽어가는 것(自有而無)을 말하고, 神은 살아나오는 것(自無而有)을 말한다. 앞서 계사상전 제4장에서 “精과 氣가 물건이 되고 혼이 놀아서 변이 되어 이로써 귀신의 정상(情狀)을 안다“(精氣爲物이오 游魂爲變이라 是故로 知鬼神之情狀하나니라)”고 한 뜻도 음양의 변화이기에 “신은 방소가 없고 역은 체가 없다(神无方而易无體)”라 하였다. 따라서 ‘음양은 쉽게 헤아리지 못하기에 이를 神이라(陰陽不測之謂ㅣ 神이라 : 계사상전 제5장)’ 정의하였다.
설괘전 제6장(妙神文)을 보면 구체적으로 神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神也者는 妙萬物而爲言者也ㅣ니 動萬物者ㅣ 莫疾乎雷하고 撓萬物者ㅣ 莫疾乎風하고 燥萬物者ㅣ 莫熯乎火하고 說萬物者ㅣ 莫說乎澤하고 潤萬物者ㅣ 莫潤乎水하고 終萬物始萬物者ㅣ 莫盛乎艮하니 故로 水火ㅣ 相逮하며 雷風이 不相悖하며 山澤이 通氣然後에아 能變化하야 旣成萬物也하니라(
(신이라는 것은 만물을 묘하게 함을 말한 것이니 만물을 움직이는 것이 우레보다 빠른 것이 없고, 만물을 흔드는 것이 바람보다 빠른 것이 없고, 만물을 말리는 것이 불보다 말리는 것이 없고, 만물을 기쁘게 하는 것이 못보다 기쁘게 하는 것이 없고 만물을 적시는 것이물보다 적시는 것이 없고, 만물을 終하여 始하는 것이 艮보다 성한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물과 불이 서로 따르며, 우레와 바람이 서로 거스르지 아니하며 산과 못이 기운을 통한 후에야 능히 변화하여 만물을 다 이루느니라)

공자는 만물을 묘하게 하는 것이 신이라 하였다. 그래서 ‘신은 묘하다’ 해서 神妙하다고 한다. 위의 건삼련 하늘과 아래 곤삼절 땅, 곧 천지는 곧 하나의 신이 된다. 이 신묘함에서 우레와 바람과 물과 불과 산과 못이 되는 후천 팔괘 방위도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즉 건곤괘를 제외하고 나머지 여섯 괘인 자녀괘에 대해서만 설명하고 있다. 神也者라는 속에 건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유가에서 죽은 조상과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부모는 신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신묘함으로 아들이 나오고 딸이 나오는 것이기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즉 자식은 부모의 신이 아니면 나올 수 없고, 만물은 천지의 신이 아니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妙神文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만물을 움직이는 것은 우레보다 더한 것이 없어 봄에 만물이 약동해 나오는 것을 東方震 우레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만물을 마구 흔드는 것은 바람보다 더한 것이 없다. 바람은 장녀인 음괘( )이므로 장남인 양괘( ) 우레보다는 움직임이 부드러워 물체를 흔들어준다. 신을 말함에 있어서 우레신은 움직이는 것만 맡고 있으며 바람신은 흔드는 걸 맡고 있다. 만물을 우레와 바람으로서 동요시키는 것이다.

만물을 말리는 것은 불보다 더한 것이 없다. 중녀인 離虛中( ) 불신은 젖은 것을 말려주는 신이다. 만물을 기쁘게 하는 것은 못보다 더한 것이 없으며 소녀인 兌上絶( ) 못신은 기쁨의 신이다. 만물을 불리는 것은 물보다 더한 것이 없다. 중남인 坎中連( ) 물신은 적셔서 윤택하게 해주고 생명을 불려주는 신이다.

만물을 끝내고 만물을 비롯하는 것은 艮보다 더한 것이 없다. 소남인 艮上連( )은 후중히 그치는 신으로 終則有始의 매듭 역할을 한다. 다른 자녀괘들의 경우는 형이하적 괘상인 雷 風 火 澤 水를 들어 표현했지만 만물을 종시하는 이 산괘의 경우는 유달리 형이상적인 괘명인 艮으로써 표현하였다. 이 간괘가 선천을 마치고 후천을 여는 근본 핵심(형이상적인 태극의 역할)이 된다는 것을 공자가 특별히 강조한 듯하다. 여기서 천지는 숨어버렸다. 말하자면 부모가 돌아가서 신으로 화한 것인데 부모는 자식한테 재산도 넘겨주고 혈육의 대까지 넘겨준다. 왕가의 인군으로 말하자면 태자에게 다 넘겨주는 것이다. 저 위에 있던 하늘이 서북방으로 가서 쭈그리고 있고 아래에 있던 땅은 서남방으로 가서 쭈그리고 있다. 이렇게 하여 천지는 서북과 서남에서 신이 되어 움츠리고 있다. 신이 되어 ‘動만물, 撓만물, 燥만물, 說만물, 潤만물, 終만물과 始만물’의 후천적인 用事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용은 선천팔괘의 교역으로 인한 것인데 六坎水( )와 三離火( )의 물과 불이 서로 미치고(水火相逮), 四震雷( )와 五巽風( )의 우레와 바람이 서로 거슬리지 않으며 七艮山( )과 二兌澤( )의 산과 못이 기운을 통하고(山澤通氣) 그런 뒤에야 능히 변화해서 모든 만물을 다 이루게 되고 후천의 이치가 정립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만물을 묘하게 하는 신의 작용이라는 설명이다.

다시 말해 천지자연의 지극히 정미롭고도 신묘한 작용에 의해 변화해서 調和를 이루는 이치가 곧 주역에서 말하는 귀신이자 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귀신은 가득찬 것을 해롭게 하고 겸손함에는 복을 준다(“鬼神은 害盈而福謙이라 (: 주역 15번째괘인 地山謙괘 대상전)”하여, 교만한 자에게 재앙과 손해를 입히고 겸손한 자에게 복과 길함을 준다는 것이 우리나라 전통의 기본적인 귀신관이다.

(귀신에 관해서는 중용 제16장에서 자세히 언급된다.)

“素는 按漢書에 當作索이니 蓋字之誤也ㅣ라 索隱行怪는 言深求隱僻之理而過爲詭異之行也ㅣ라 然이나 以其足以欺世而盜名이라 故로 後世에 或有稱述之者하니 此는 知之過而不擇乎善이오 行之過而不用其中이니 不當强而强者也ㅣ라 聖人이 豈爲之哉시리오
素는 『한서』를 상고하건대 마땅히 ‘찾을 색’으로 지었으니 대개 글자가 잘못되었느니라(잘못 옮겨진 데서 비롯된 것이니라). ‘은벽한 것을 찾고 괴이한 짓을 행하는 것’은 은벽한(비과학적인) 이치를 깊이 구해서 지나치게 괴이한 행동함을 말함이라. 그러나 그 족히 써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적질하는 것이니라(혹세무민함이라). 그러므로 후세에 혹 칭술하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앎이 지나치고 선을 가리지 못함이오, 행동이 지나쳐 그 중을 쓰지 못함이니 마땅히 강해서는 아니 될 때에 강함이라. 성인이 어찌 이러한 짓을 하시리오

按 : 상고할 안 僻 : 후미질 벽 詭 : 속일 궤

君子ㅣ遵道而行하다가 半途而廢하나니 吾弗能已矣로라
군자가 도를 따라 가다가 중도에서 그만두나니 나는 능히 그만두지 못하노라.

遵 : 좇을 준

[본문 해설]
군자가 도를 따라가다가 그만두면 아니함만 못하다. 보통 사람들이 중도에 그만두는 이유는 제대로 도를 실천하지 않고 건성으로 닦아나가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나는 그만두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도를 늘 진실로 일상화하여 그만두려 해도 그만 두지 못함을 얘기한 것이다.

遵道而行은 則能擇乎善矣오 半塗而廢는 則力之不足也ㅣ니 此는 其知ㅣ 雖足以及之나 而行有不逮니 當强而不强者也ㅣ라 已는 止也ㅣ라 聖人이 於此에 非勉焉而不敢廢요 蓋至誠無息하야 自有所不能止也시니라
도를 따라서 가게 되면 곧 능히 선을 택하고 반쯤 가다 그만두면 즉 힘이 부족함이니 이는 그 아는 것이 비록 거기(도를 따르는 것)에 미치기는 하나 행실이 미치지 못함이 있으니 마땅히 강해야 할 때 강하지 못함이니라. 已는 그침이라. 성인이 이에 힘을 써서 감히 폐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대개 지극한 정성이 쉬지 아니하여 스스로 능히 그만두지 못하는 바가 있음이라.

[앞주 해설]
군자가 도를 따라 행한다는 것은 善을 가릴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은 되지만 이를 이끌어나갈 실천 능력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앞에서 강하지 말아야 할 때 강함(不當强而强)과는 상반되게 정작 강해야 할 때 강하지 못함(當强而不强)을 지적한 것이다. 반면 성인이 도를 행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벌을 받을까봐 억지로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타고난 성실함, 지극한 정성 그대로 나가다보니 이것이 몸에 배어 그만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君子는 依乎中庸하야 遯世不見知而不悔하나니 唯聖者ㅣ아 能之니라
군자는 중용에 의지해서 세상을 은둔해서 (남들이) 알아주는 것을 보지 못하더라도 후회하지 아니 하나니 오직 성인이라야 능하느니라.

遯 : 피할 돈(둔), 은둔할 돈(둔)(주역 괘명일 때는 ‘돈’, 세상을 피한다는 뜻의 遯世는 '돈세'로 읽는다.)

[본문 해설]'
'遯’은『주역』33번째 괘명이기도 하다. 천산돈(天山遯 : )괘를 보면 소인은 욕심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해 그쳐 있는 것이고, 군자는 욕심을 버리고 미련없이 그 자리를 떠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소인이 안에서 실권을 주고 더욱 득세해나가고 군자의 바른 행위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세상을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군자가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소인을 피해 물러나는 것이다. 아무 때나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기대를 걸고 버텨보면서 때를 보아 진정으로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는 것이다(遯而亨也ㅣ나 剛當位而應이라 與時行也ㅣ니라 小利貞은 浸而長也일새니 遯之時義ㅣ 大矣哉ㅣ라 : 물러나서 형통하나, 강한 것이 位에 마땅해서 응함이라. 때로 더불어 행함이라. 小利貞은 점차 길어지기 때문이니, 돈의 때와 뜻이 크도다). 때가 되어 기꺼이 물러났기에 후회가 있을 수가 없다. 또한 세상을 물러나 은둔해 있어도 ‘벼슬자리를 버리고 괜히 떠나왔나’, ‘왜 다시 나에게 벼슬 자리를 권하지 않나’하고 원망하거나 후회를 하지 않는 것은 군자는 중용의 도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遯世하였기에 민망함이 없다(遯世无悶)는 말은 두 번 나온다.『주역』건괘 문언전 제2절 초구 효사에 “子ㅣ曰 龍德而隱者也ㅣ니 不易乎世하며 不成乎名하야 遯世无悶하며 不見是而无悶하야 樂則行之하고 憂則違之하야 確乎其不可拔이 潛龍也ㅣ라(공자 이르길 용의 덕이되 숨어 있는 것이니 세상을 바꾸지 아니하며 이름을 이루지 아니하여서 세상을 피하여도 민망함이 없으며, 옳다함을 보지 못해도 민망함이 없어서 즐거우면 행하고 근심하면 어겨서 확고하여 가히 뽑을 수 없는 것이 잠룡이라)” 하였다. 용덕이 숨어 있다는 것은 군자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때가 아니기에 굳이 세상을 바꾸지도 않으며(不易乎世) 이름을 내려고도 하지 않아서(不成乎名) 세상을 떠나 은둔해 있어도 민망할 것이 없고(遯世无悶) 나를 옳다고 인정해주는 이가 없어도 속끓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不見是而无悶). 이렇게 해서 즐거우면 한번 나름대로 행하여 보고 세상이 근심되면 꾹 참고 어겨 등지고(樂則行之 憂則違之), 확고부동하게 잠겨 잡아 빼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잠룡이라(確乎其不可拔 潛龍也) 하였다.
『주역』 28번째 괘인 澤風大過( ) 대상전에도 “澤滅木이 大過ㅣ니 君子ㅣ 以하야 獨立不懼하며 遯世无悶하나리라(못이 나무를 멸하는 것이 대과니, 군자가 이로써 홀로 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멀리해도 민망하게 여기지 않느니라)”하여 遯世无悶을 얘기하고 있다.
『논어』 맨 첫머리 學而篇에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人不知而不慍이면 不亦君子乎아(공자 말씀하시기를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들이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서운해하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황석공(黃石公) 『素書(소서)』에도 ‘潛居抱道(잠거포도)’라 하였다. 참다운 군자라면 도를 안고 은거하고 있으니 无悶하고 樂天知命할 수 있는 것이다.

不爲索隱行怪면 則依乎中庸이 而已오 不能半塗而廢하니 是以로 遯世不見知而不悔也ㅣ라 此는 中庸之成德이오 知之盡이며 仁之至니 不賴勇而裕如者라 正吾夫子之事언마는 而猶不自居也시니라 故로 曰唯聖者라야 能之而已라 하시니라
색은행괴를 하지 아니하면 즉 중용에 의지한 것뿐이고 능히 중도에서 그만두지 아니하면 이것으로서 세상을 은둔해 앎을 보지 못해도 후회하지 않느니라. 이것은 중용의 이룬 덕이오, 知의 극진함이며, 仁의 지극함이니 용맹에 힘입지 않아도 여유로워짐과 같음이라. 바로 우리 공자의 일이언마는 오히려 스스로 거처하지 않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오직 성인이라야 능할 따름이라 하셨느니라.

[앞주 해설]
본문의 “君子는 依乎中庸하야 遯世不見知而不悔”란 말은 실은 공자 자신의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옛날의 다른 성인들로 돌리신 것은 그만큼 공자가 중용지덕을 갖춘 성인이기에 겸양하게 표현했다고 주자는 설명하고 있다.

右는 第十一章이라

子思所引夫子之言으로 以明首章之義者ㅣ 止此하니 蓋此篇大旨는 以知仁勇三達德으로 爲入道之門이라 故로 於篇首에 卽以大舜顔淵子路之事로 明之하시니 舜은 知也오 顔淵은 仁也오 子路는 勇也ㅣ라 三者에 廢其一이면 則無以造道而成德矣라 餘見第二十章하니라
자사가 부자의 말씀을 끌어 써 머리장의 뜻을 밝힌 것이 이에 그치니 대개 이 편의 큰 뜻은 앎(知) 어짊(仁) 용맹(勇) 세 가지 통한 덕(達德)으로 도에 들어가는 문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이 편 머리에 곧 순임금과 안연과 자로의 일로써 밝히시니 순임금은 지적이고 안연은 어짊이고 자로는 용맹이노라. 세 가지 중에 그 하나라도 버리면 도에 나아가서 덕을 이루지 못하느니라. 나머지는 제20장에 나타나느니라.

君子之道는 費而隱이니라
군자의 도는 소비하되 숨느니라

[본문 해설]
‘費’는 陽이고 ‘隱’은 陰이며, ‘費’가 바깥(外)이라면 ‘隱’은 안(內)이며, ‘費’가 用이라면 ‘隱’은 體가 되는 이치로 군자의 도, 곧 중용지도를 설명하고 있다. 『주역』계사상전 제6장에 “夫易이 廣矣大矣라 以言乎遠則不禦하고 以言乎邇則靜而正하고 以言乎天地之間則備矣라(무릇 역이 넓고 큼이라. 먼 곳을 말하면 막지 못하고, 가까운 곳을 말하면 고요해서 바르고, 천지의 사이를 말하면 갖춤이라)”하여 費而隱의 이치를 담아 두었다. 『중용』이란 글은 주역의 이치를 끌어당겨 중용의 도를 설명하고 있기에 예로부터 그 철학적 의미가 깊고 대단히 어려운 글이라고 알려져 왔다.

費는 用之廣也ㅣ오 隱은 體之微也ㅣ라
費는 用의 넓음이요 隱은 體의 미미함이라

[앞주 해설]
費는 조금 쓰이다 마는 것이 아니라 온 천하에 널리 쓰이는 것이고 隱은 숨어 있는 본체로 지극히 미미한 것이다. 큰 것으로 말하면 한없이 크고, 작은 것으로 말하면 한없이 작아 태극이나 무극, 유극의 의미로도 풀이할 수 있다.

夫婦之愚로도 可以與知焉이로대 及其至也하야난 雖聖人이라도 亦有所不知焉하며 夫婦之不肖로도 可以能行焉이로대 及其至也하야난 雖聖人이라도 亦有所不能焉하며 天地之大也애도 人猶有所憾이니 故로 君子ㅣ語大ㄴ댄 天下ㅣ莫能載焉이오 語小인댄 天下ㅣ 莫能破焉이니라
부부의 어리석음으로도 가히 써 참여하여 알되 그 지극한데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아지 못하는 바가 있으며 부부의 어질지 못함으로도 가히 써 능히 행하되 그 지극한데 미쳐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능치 못하는 바가 있으며 천지의 큼에도 사람이 오히려 한하는 바가 있으니 그러므로 군자는 큰 것을 말할진댄 천하가 능히 실을 수 없고(費), 작은 것을 말할진댄 천하가 능히 파하지 못하느라(隱)

與 : 참여할 여 肖 : 어질 초 憾 : 한할 감, 유감할 감 破 : 깨뜨릴 파

[본문 해설]
배우지 아니한 어리석은 부부라도 잠자리를 통해 쾌감을 알고 생명의 잉태함을 알며, 어질지 못하더라도 능히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성인이라 하더라도 그 지극한 바를 알지 못하고 능치 못하는 경우가 있다. 춘하추동에 따라 생장수장하는 천지의 큰 이치가 있지만 어느 곳은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나고 해일이 일어나며 어떤 사람에게는 병이 들어 고통을 안겨주어 사람들이 오히려 유감스러워 하는 바가 있다. 그러므로 군자가 큰 것을 말한다면 큰 것이 너무 커서 어디에도 실을 수 없고 작은 것을 말한다면 너무 작아 깨뜨려 없앨 수가 없다. ‘莫能載焉’은 밖으로 큰 ‘費’를 말하고, ‘莫能破焉’은 안으로 작은 ‘隱’을 말한다.

君子之道는 近自夫婦居室之間으로 遠而至於聖人天地之所不能盡하야 其大無外하고 其小無內하니 可謂費矣라 然이나 其理之所以然則隱而莫之見也ㅣ라 蓋可知可能者는 道中之一事ㅣ오 及其至而聖人도 不知不能則擧全體而言이니 聖人도 固有所不能盡也ㅣ니라 侯氏曰聖人所不知는 如孔子問禮問官之類요 所不能은 如孔子ㅣ 不得位와 堯舜이 病博施之類라 愚ㅣ 謂人所憾於天地는 如覆載生成之偏과 及寒暑灾祥之不得其正者ㅣ라
군자의 도는 가까이는 한 집에 거처하는 부부 사이로부터 멀리는 성인천지의 능히 다하지 못하는 바에까지 이르러 그 큰 것은 바깥이 없고, 그 작은 것은 안이 없으니 가히 ‘費’라 이르느니라. 그러나 그 이치의 연유한 바(所以然)는 숨어서 보이지 않음이라. 대개 가히 알고가히 능하다는 것은 도 가운데 한 가지 일이요 그 지극한데 미쳐서는 성인도 알지 못하고 능치 못한 것은 전체를 들어 말한 것이니 성인도 진실로 다하지 못하는 바가 있음이니라. 후씨 가로되 성인이 아지 못하는 바는 공자가 예를 묻고 벼슬을 물은 것과 같은 종류이고 능치 못한 바는 공자가 황제의 위를 얻지 못하고 요임금 순임금과 같은 분도 널리 베푸는데 병이 든 것과 같음이라. (주자의) 어리석은 내가 보기에 사람이 천지의 한이 있다고 한 바는 (하늘이) 덮고 (땅이) 싣고 (하늘이) 내고 (땅이) 이루어내는 데의 편벽됨과 추위와 더위, 재앙과 상서로움이 그 바름을 얻지 못함과 같음을 말함이라.

灾 : 재앙 재, 災와 동일

[앞주 해설]
군자의 도는 가까이는 한 집안에 거처하는 부부의 일로부터 멀리로는 성인과 천지도 능히 다하는 못하는 데까지 이르니 크다고 할 것 같으면 한없이 커서 어디가 밖인지 외적인 구별을 못하고, 작다고 할 것 같으면 한없이 작아 그 내적인 한계를 모르니 바로 이것이 ‘費’가 된다. 작다 크다 할 것 없이 부부의 거실지간도 쓰는 것이고 성인천지의 조화도 소비하는 것인데 작다고 하면 한없이 작고, 크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큰 이치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치의 연유한 바(所以然)는 숨어서 드러나지 않아 성인도 잘 모를 수 있고 능치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 법성게(法性偈)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 있으니 많은 것은 하나 가운데에 있고
一卽一切多卽一 하나는 곧 모든 것이니 많은 것은 곧 하나이고
一微塵中含十方 한 티끌 가운데 우주가 포함되어 있으니
一切塵中亦如是 모든 티끌 가운데에도 역시 이와 같고
無量遠劫卽一念 끝없이 먼 겁도 곧 일념이고
一念卽是無量劫 일념이 곧 바로 무량겁이라.

대개 가히 알고 능하다는 것은 도 가운데의 한 가지 일이고 도라는 것은 이치이며 진리이니 진리 속에 들어 있는 한 가지 일인데 그 지극한 데 미쳐서는 성인도 알지 못하고 능치 못하다고 한 것은 도의 전체를 들어서 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의 전체적인 것으로 보면 성인도 사람이요, 사람 가운데 훌륭한 사람일 뿐이니 성인도 진실로 다하지 못하는 바가 있다.
후씨(侯氏 : 侯仲良)는 성인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공자가 예를 물은 것과 관제(官制)를 물은 것을 예로 들고, 성인도 능치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공자가 지위를 얻지 못한 것과 요순이 널리 베풀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로 병을 예로 들었다.

‘孔子問禮’라 함은 사마천의 『史記』공자세가편에 나오는 내용으로, 공자가 이름을 얻어 제자들을 가르칠 때 제자인 남궁경숙과 함께 노자를 찾아가 예를 물은 것이고, ‘問官’은 관제에 대해 공자가 담자(郯子)에게 들은 내용으로 『春秋左氏傳』‘昭公 17년조 가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천자문의 “龍師火帝 鳥官人皇”의 내용에 해당하는 것으로 담자는 노나라 소공의 벼슬 이름의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옛날에 黃帝氏는 구름을 바탕으로 삼은(수호신으로 삼은) 고로 雲師가 되어 구름으로 이름하였고, 炎帝氏는 火師가 되어 불 이름으로 하였으며, 共工氏는 물을 바탕으로 하여 水師가 되어 물 이름으로 하였고, 태호씨(太皥氏, 복희씨)는 용을 바탕으로 삼아 龍師가 되어 용이름으로 하였으며, (담자의 조상인) 소호지(少昊摯)가 왕이 되었을 때 봉새(鳳鳥)가 나타나 새를 기원으로 하여 鳥師가 되어 새 이름으로 하였으며, 鳳鳥氏는 歷을 바로 잡았으며(曆을 관장했으며), 玄鳥氏는 춘분과 추분의 시기를 구분하는 일을 맡았고(司分), 伯趙氏는 하지와 동지를 구별하는 일을 맡았고(司至), 靑鳥氏는 양기가 만물의 힘을 열어주는 일을 맡았으며(司啓), 丹鳥氏는 음기가 만물의 힘을 정지케 하는 것을 관장했고(司閉), 축구씨(祝鳩氏)는 司徒가 되었으며, 저구씨(鴡鳩氏 : 물수리)는 司馬가 되었으며, 시구씨(鳲
鳩氏 : 뻐꾸기)는 司空이 되었으며, 상구씨(爽鳩氏)는 司寇가 되었으며, 골구씨(鶻鳩씨 : 송골매)는 農工을 맡았으며(司事), 다섯 구(五鳩)의 官은 백성들을 모아 영도했으며, 다섯 치(五雉)의 官은 다섯 분양의 工人들을 맡은 관장이 되어 도구를 편리하게 하고(利器用), 도량의 법을 바르게 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오(正度量하여 夷民者也라). 아홉 호(九扈)의 관은 아홉 가지 농정을 맡아 백성들을 안착시켜 게으르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전욱씨(顓頊氏) 이래로 우리 인간 사회에서 떨어져 있는 것을 수호자로 삼지 못하고 가까운 것을 바탕으로 삼아(不能紀遠 乃其於近) 백성임금은 백성만을 거느리는 존재가 되어 백성의 일을 가지고 관명으로 삼으니 이는 인간 밖의 것을 부릴 수가 없어서 그랬음이오((爲民師而命以民事하니 則不能故也라)”라 했다.

'所不能 如孔子 不得位’와 관련해서는『明心寶鑑』存心편에 “擊壤詩에 云富貴를 如將智力求인대 仲尼도 年少合封侯라 世人은 不解靑天意하고 空使身心半夜愁니라(격양시에 이르기를 부귀를 지혜의 힘으로 구할 수 있을진대 공자 같은 이는 젊은 시절에 제후에 합하여 봉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푸른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공연히 몸과 마음을 한밤중에 근심하게 한다)”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지혜로운 공자라도 능치 못함이 있는데 그것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이다. 또한 백성을 하나하나 잘 살폈다는 요순임금이라 하더라도 둥근 해가 떠올라 온 세상을 고루 비추지만 그늘진 곳이 있듯이 어느 한 구석에는 불구자가 있고 굶는 사람도 있고, 고통받는 사람도 있고, 아파 누워 있는 사람도 있어 요순 임금에게는 항상 근심걱정이 되는 바였다. 이것이 병이 되었으니 ‘病博施’라 한 표현이 이를 이름이다.

詩云 鳶飛戾天이어늘 魚躍于淵이라 하니 言其上下察也ㅣ니라시경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거늘 고기는 연못에서 뛰어논다 하니 그 위와 아래에 드러남을 말함이니라.

鳶 : 솔개 연 戾 : 이를 려

[본문 해설]
『詩經』의 大雅 旱麓(한록)편을 인용하여 군자지도의 費隱을 설명하고 있다. 생물이라는 것이 위에 나타나는 것도 있는가 하면 아래에 나타나는 것도 있는 것을, 하늘의 솔개와 물속의 고기에 비유해 상하의 나타남을 예로 들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費, 곧 用이 한없이 드러날 때는 위로 끝이 없듯이 하늘 위를 높이 훨훨 나는 솔개에 비유했고, 아래로 드러날 때는 저 물 속에서 펄펄 뛰어노는 물고기에 비유했다.

詩는 大雅旱麓之篇이라 鳶은 鴟類라 戾는 至也ㅣ라 察은 著也ㅣ라 子思ㅣ 引此詩하야 以明化育流行하야 上下昭著가 莫非此理之用이니 所謂費也라 然이나 其所以然者ㅣ 則非見聞所及이니 所謂隱也ㅣ라 故로 程子ㅣ 曰此一節은 子思ㅣ 喫緊爲人處요 活潑潑地라 하시니 讀者ㅣ 其致思焉이니라
詩는 대아 한록편이니라. 鳶은 솔개의 종류이라. 戾는 이름이라. 察은 나타남이라. 자사가 이 시를 이끌어서 화육이 유행해서 상하에 밝게 나타남이 이 이치의 용이 아님이 없으니 이른바 소비함이라. 그러나 그 까닭은 견문의 미치는 바가 아니니 이른바 은이라. 그러므로 정자가 ‘이 일절은 자사가 요긴하게 사람을 위한 것이고 활발발한(생동감 넘치는) 곳’이라 하였으니 읽는 자가 그 생각을 이루어야(다하여야) 하느니라.

旱 : 가물 한 麓 : 산기슭 록 鴟 : 솔개 치 喫 : 먹을 끽 緊 : 긴장할 긴, 요긴할 긴 潑 : 솟아날 발

[앞주 해설]
화육이라 함은 모든 생물이 천지조화에 의해서 꿈틀거리고 화해서 나와서 길러지는 것을 말하고 유행이라 함은 품물유형(品物流形)을 말한다. 건괘 단전에 보면 “彖曰 大哉라 乾元이여 萬物이 資始하나니 乃通天이로다 雲行雨施하야 品物이 流形하나니라”하였다. 그 뜻은 ‘단전에 이르기를 건(하늘)의 원이여(큼이여)! 만물이 이를 바탕하여(힘입어) 비롯하나니, 이에 하늘을 거느리로다. 구름이 행하고 비가 베풀어서 품물이 형체를 흘리나니라(제각기 흘러 모양을 갖추느니라)’이다. 하늘보다 큰 것이 없기에 문왕이 지으신 건괘에 공자가 ‘크도다’하고 보충설명을 붙인 것이다. 그 큰 하늘의 씨앗이 元이 되어 만물이 시작하여 나오는데 그것은 雲雨之情, 곧 천지 음양 작용으로 땅의 음기가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 하늘의 양기가 이를 받아들여 서로 엉김으로써 비를 내리는 것이고, 그 속에서 모든 물건(物)들이 하나하나씩 나름대로 형상을 갖추게 되는 것이 品物流形이다. 雲은 일어나는 것이고 雨는 사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녀가 교합하는 것을 雲雨之樂이라 하며, 서로 사랑을 나누는 것을 雲雨之情이라고 표현한다.
萬物은 모든 물건을 다 합쳐서 말한 것이고 品物은 천지인 삼재로 구분하여 물건을 각기 나눈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제각기 품성과 모습대로 흘러가게 된다는 流形을 설명하였으므로 만물로 표현하지 않고 품물이라고 한 것이다. 자식이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다 해도 어머니와 같을 수 없다. 모두가 자신의 모습 다르고 낳아준 어머니 모습이 다르다. 옛말에 ‘꼴값한다’는 말이 있듯이 모두가 자기 생긴 모습대로 살다가 죽는다. 제 모습이란 갓난애기 때부터 세월 따라 변한다. 歲月流水란 말처럼 세월 따라 흐르는 것이다.
‘以明化育流行’이란 바로 건괘 단전의 글귀를 끌어다 해설한 내용으로 천지의 음양조화로 만물을 화육하고 유행해서 천지 상하에 밝게 드러나는 것이 이치의 用이 아님이 없고 이것이 바로 費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천지 상하에 用이 나타나는 연유는 인간이 보고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것이 바로 隱인 것이다. 그래서 정자는 이 부분이 중용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요긴한 곳이며, 생동감이 흘러 넘치는 곳이라 하였다. ‘喫緊’이란 요긴함을 먹는다는 뜻이니 아주 중요함을 음미한다는 뜻이다.
황제음부경에도 “其盜機也를 天下ㅣ 莫能見 莫能之하나니 君子는 得之固窮이라(그 도적의 기틀을 천하가 능히 보지도 못하고 능히 알지도 못하니 군자는 이를 얻어 몸을 견고히 하니라)하였듯이 아주 깊이 생각하고 음미하여, ‘費而隱’의 참뜻을 여기서 알아내라는 말이다.

君子之道는 造端乎夫婦ㅣ니 及其至也하야난 察乎天地니라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끝(단서)을 지으니 그 지극한데 미쳐서는 천지에 나타나느니라

[본문 해설]
군자의 중용지도는 큰 것만 짓는 것이 아니라,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다 중용지도로 이루어야 한다. 그 예로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의 연을 이루는 잠자리에서부터 중용지도의 단서가 시작되어 그 지극함에는 천지상하 모두에 나타나는 것이다.
『周易』序卦 下傳에 "有天地然後에 有萬物하고 有萬物然後애 有男女하고 有男女然後애 有夫婦하고 有夫婦然後애 有父子하고 有父子然後애 有君臣하고 有君臣然後애 有上下하고 有上下然後애 禮義有所錯ㅣ니라(천지가 있은 연후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연후에 남녀가 있고 남녀가 있은 연후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연후에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은 연후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연후에 상하가 있고 상하가 있은 연후에 예의를 두는 바가 있느니라.)” 하였다. 주역 상경이 天道이고 하경은 人事인데 인사적인 하경의 첫머리에 음양의 사귐인 咸괘가 나오는 이유에 대해 공자가 설명하신 내용이다.
하늘과 땅이 있은 후에 만물이 나오는 것이고, 만물이 있은 연후에 사람이 있게 되는데 사람에게는 한 陽과 한 陰이 있게 된다. 太極에서 一生二法에 의해 음양이 나오는데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가 되는 이치이다. 남녀가 있으니 서로 혼인해서 부부가 되고 자식이 생기니 부자 관계가 이루어진다. 가정의 가족관계가 확대되다 보면 한 나라의 인군과 신하의 관계가 생겨나고 그러다보면 상하의 구별이 있게 된다. 상하가 있게 되니 사람 사회에서 불가불 예의가 생겨나는 이치이다. 이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사람 사회의 모든 이치의 출발은 부부 관계에서 시작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소주역이라 일컬어지는 중용을 쓴 자사가 ‘費而隱’을 설명함에 있어 그 단서의 예시를 부부관계에서 끌어온 이치를 알아볼 수 있다.

結上文이라
윗글을 맺음이라.

右는 第十二章이니라

子思之言이니 蓋以申明首章道不可離之意也ㅣ라 其下八章은 雜引孔子之言하야 以明之니라
자사의 말씀이니, 대개 써 머리장에 ‘도는 가히 떠날 수 없다’는 뜻을 거듭 밝힘이라. 그 아래 여덟 장은 공자의 말씀을 섞어 이끌어서 밝힘이라.

子ㅣ曰 道不遠人하니 人之爲道而遠人이면 不可以爲道ㅣ니라
공자 말씀하시길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하니 사람이 도를 하는데 사람을 멀리하면 가히 써 도라 할 수 없느니라

[본문 해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 이것이 곧 도이다. 사람은 도에서 나오고 도에서 살고 있으니, 도가 사람이고 사람이 곧 도이다. 도와 사람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明心寶鑑』에도 소강절(邵康節) 선생의 말을 인용하여 “天聽이 寂無音하니 蒼蒼何處尋고 非高亦非遠이라 都只在人心이니라(하늘이 들으심이 고요하여 소리가 없으니 푸르고 푸름에 어느 곳에 찾을꼬. 높지도 않고 또한 멀지도 않음이라. 도무지 다만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니라)” 하였듯이 하늘, 부처, 도 모두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

道者는 率性而已니 固衆人之所能知能行者也ㅣ라 故로 常不遠於人하나니 若爲道者ㅣ 厭其卑近하야 以爲不足爲라 하고 而反務爲高遠難行之事면 則非所以爲道矣니라
도라 하는 것은 성품을 따를 뿐이니 진실로 모든 사람들이 능히 알 수 있고 능히 행할 수 있는 바이라. 그러므로 항상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아니함이니 만약 도를 하는 자가 그 비근함을 싫어하여 써 족히 할 만한 것이 못한다고 도리어 고원난행(높고 멀고 행하기 어려운 일)이라면서 힘을 쓰면 곧 써 도를 하는 바가 아니니라.

固 : 진실로 고 反 : 도리어 반

[앞주 해설]
앞서 ‘天命之謂性이고 率性之謂道’라 하였듯이 도는 하늘이 준 성품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能知能行한 것, 곧 사람에게 있는 本之本能을 따르는 것이 도이다. 그런데 도를 하는 자가 당연히 가야 할 것들, 이를테면 부부관계나 일상적인 언어, 행동거지 등에 대해서는 비근하다고 하여 하찮게 여기고, 도가 마치 저 멀리 하늘이나 먼 산에 있는 어려운 일이라고 하면서 엉뚱한 데서 찾아 나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은 사람답지 않은 행동으로 일상생활에서 허물만 짓게 되니 이는 도를 하는 것이 아니다.



詩云 伐柯伐柯ㅣ여 其則不遠이라 하니 執柯以伐柯호대 睨而視之하고 猶以爲遠하나니 故로 君子는 以人治人하다가 改而止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도끼자루를 베고 도끼자루를 벰이여 그 법이 멀지 않다”하니 도끼자루를 잡고서 써 도끼자루를 베되 흘겨서 보고 오히려 써 멀다 하나니 고로 군자는 사람으로써 사람을 다스리다가 고치거든 그치느니라

伐 : 칠 벌 柯 : 도끼자루 가 睨 : 흘겨볼 예

[본문 해설]
위 시는 『시경』「국풍 빈풍 벌가(國風 豳風 伐柯)」의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를 인용한 것이다.

伐柯如何오 匪斧不克이니라 도끼자루 베려면 어찌 하오 도끼 아니면 아니 되지
取妻如何오 匪媒不得이니라 처를 얻으려면 어찌 하오 중매쟁이 아니면 아니 되지
伐柯伐柯여 其則不遠이로다 도끼자루를 베고 도끼자루를 벰이여 그 법이 멀지 않도다我覯之子하니 籩豆有踐이로다 내 그 님을 맞아 예를 갖춰 혼례하네

원래 이 시는 예를 갖춰 혼례함을 노래한 것이다. 도끼자루와 도끼는 남자와 여자의 혼례를 비유한 것으로 각자의 짝을 찾는데 그 기준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다. 앞서도 살을 맞대고 한 방을 쓰는 부부에게도 도가 있듯이 그 부부를 이루기 위한 성혼의 과정에도 도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 ‘道不遠人’의 예에 해당한다. 부부는 천생연분이니 서로를 배필이라고 하듯이 서로 닮은 구석이 많은데 그 이유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상대방을 찾는데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예를 시에서는 도끼와 도끼자루에 비유하고 있다.
도끼자루를 만들려면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베는데, 베려는 나무는 도끼자루이니 도끼자루를 만들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도끼자루처럼 만들면 된다. 곧 도끼자루를 만드는 법이 바로 자기 옆에 있기에 바로 보면 될텐데 이는 생각지 못하고 마치 그 방법이 멀리 있는 것처럼 비스듬히 보고 있음을 꼬집은 내용이다.
사람이 곧 도이고 도가 곧 사람이므로, 군자가 사람을 다스리려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를 미루어 남을 다스리면 된다. 남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남이 있기에 나를 미루어 다스리다가 그 사람이 허물을 고치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치는 것이다. 이는 『大學』 傳文 제10장 제1절에 나오는 絜矩之道(혈구지도)의 이치와 같다.
"所謂平天下ㅣ 在治其國者는 上이 老老而民이 興孝하며 上이 長長而民이 興弟하며 上이 恤孤而民이 不倍하나니 是以로 君子는 有絜矩之道也ㅣ니라(이른바 “천하를 平함이 그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다”는 것은, 위에서 늙은이를 늙은이로 섬기면 백성들이 孝에 일어나고, 위에서 어른을 어른으로 모시면 백성들이 弟에 일어나며, 위에서 외로운 이를 불쌍히 여기면 백성들이 배반하지 아니하니, 이 때문에 군자는 혈구의 도가 있느니라.)"

詩는 豳風伐柯之篇이라 柯는 斧柄이오 則은 法也ㅣ라 睨는 邪視也라 言人이 執柯伐木에 以爲柯者ㅣ 彼柯長短之法이 在此柯耳이라 然이나 猶有彼此之別이라 故로 伐者ㅣ 視之를 猶以爲遠也어니와 若以人治人은 則所以爲人之道ㅣ 各在當人之身하야 初無彼此之別이라 故로 君子之治人也에 卽以其人之道로 還治其人之身이라가 其人能改어든 卽止不治하나니 蓋責之以其所能知能行이오 非欲其遠人以爲道也ㅣ라 張子所謂以衆人望人則易從이 是也라
시는 빈풍장 벌가편에 있느니라. 가는 도끼자루요 칙은 법이라. 예는 흘겨봄이라. 사람이 도끼자루를 가지고 나무를 베어 도끼자루를 만드는 것은저 도끼자루의 길고 짧은 법이 이 도끼자루에 있는 것을 말함이라. 그러나 오히려 이것과 저것의 분별이 있느니라. 고로 베는 자가 보는 것을 오히려 써 멀다하거니와, 만약에 사람으로써(사람의 도리로써)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사람의 도리를 하는 바 각각 마땅히 사람의 몸에 있어서 애당초 피차의 분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군자가 사람을 다스리는데 곧 사람의 도리로써 도리어 그 사람의 몸을 다스리다가 그 사람이 능히 고치거든 곧 그쳐서 다스리지 아니하나니 대개 그 능히 알고 능히 행하는 바로써 꾸짖는(가르치는) 것이오. 그 사람을 멀리하여 써 도를 하고자 함이 아니니라. 장자(張載)가 이른바 ‘여러 사람으로써 사람을 바라보게 하면(촉망하게 하면) 쉽게 따름’이 이것이라.

豳 : 땅이름 빈 斧 : 도끼 부 柄 : 자루 병

[앞주 해설]
도끼자루를 새로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벨 때 길게 해야 할지 짧게 해야 할지를 가늠하는 것은 도끼자루를 베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현재 쓰고 있는 것이 조금 짧아 불편하다 하면 다소 길게 만들면 될 것이고 자루가 길어 불편하다 싶으면 조금 짧게 다듬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사람의 도리를 지키라고 다스리는 것이기에 그 도리는 마땅히 모든 사람의 몸 속에 들어 있는 것이고, 도끼자루처럼 짧고 긴 분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의 도리란 각각의 몸 속에 있기에 능히 알고 능히 행할 수 있기 때문에 깨우쳐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高遠難行한 것은 아니다.
장자도 말했듯이 사람의 개성은 각각 다르지만 사람의 도리(본성)는 거의 같기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게 하면 쉽게 따른다고 하였다. 즉 사람에게는 대중적 심리가 있어 누가 이렇게 해야 한다면 따르는 습성이 있기에 사람을 다스리는 군자가 항상 자기 몸에 있는 사람의 도리 곧 하늘로부터 부여받는 성품 그대로 나간다면 모두가 이를 따를 것이다.

[참고] 張子(1020~1077)에 관해
이름은 載. 북송 사람. 자는 子厚. 봉상미현(鳳翔郿縣 : 지금의 陝西省 眉縣) 횡거진(橫渠鎭)출신이라 橫渠선생이라 일컬어진다. 정호(程顥), 정이(程頤)의 외숙. 神宗에게 三代의 治의 부활을 진언했고 古禮를 설명하면서 井田制를 주장했으나 王安石과 뜻이 맞지 않아 고향에 돌아와 강학에 힘썼다. 陝西, 즉 관중(關中)에서 강학을 했기 때문에 이 학파를 관학(關學)이라고 했다. 장재는 특히 사상적으로 불교와의 대립, 환망설(幻妄說)의 배격을 의도하여 ‘太虛卽氣論’을 주장했다. 또한 불교의 心性說에 대항할 氣의 존재론과 心性論의 통일을 시도했다. 虛無와 空無를 부정하고, 기가 모이면 萬物이 생기고 기가 흩어지면 太虛가 된다는 생각과 인간의 인식 여하에 관계없이 만물의 변화는 기에 의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물질의 생성을 둘러싼 기와 음양의 관계, 기질이라는 개념의 제기는 천지의 性과 기질의 性이라는 性論 및 기질을 변화시킨다는 修養論과 함께 朱子學 형성에 크게 관여하게 된 결과를가져왔다. (동서문화, 한국세계대백과사전 23권에서)

忠恕ㅣ 違道不遠하니 施諸己而不願을 亦勿施於人이니라
충과 서가 도에게 어김(거리)이 멀지 아니하니 저 몸에 베풀어 보아 원치 않거든 또한 남에게 베풀지 말지니라.

諸 : 어조사 저

[본문 해설]
忠은 원이라는 도형으로 볼 때 中心과 求心力에 해당하고, 恕는 중심에서 둘레까지 이르는 반지름으로 밖으로 똑같이 작용하는 遠心力과 같은 것으로 如心이다. 다시 말하면 忠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진실함을 말하며 恕는 나 자신을 용서하듯이 남도 나 자신과 똑같이 대하는 마음을 말한다. 즉 나의 충서가 남의 충서요 남의 충서가 나의 충서요, 나의 도가 남의 도요, 남의 도가 나의 도요, 나의 마음이 남의 마음이요 남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니, 자신이 무슨 일을 해보고 나서 좋지 않다고 여기면 남 또한 좋지 않게 여길 터이니 그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말이다. 이는 『대학』10장에서 말하는 혈구지도와 같은 의미이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所惡於上으로 毋以使下하며 所惡於下로 毋以事上하며 所惡於前으로 毋以先後하며 所惡於後로 毋以從前하며 所惡於右로 毋以而交於左하며 所惡於左로 毋以而交於右ㅣ 此之謂絜矩之道니라(위에서 싫은 바로 아래를 부리지 말며, 아래에서 싫은 바로 위를 섬기지 말며, / 앞에서 싫은 바로 뒤를 앞서지 말며, 뒤에서 싫은 바로 앞을 따르지 말며, / 오른쪽에서 싫은 바로 왼쪽을 사귀지 말며, 왼쪽에서 실은 바로 오른쪽을 사귀지 아니하는 것, / 이것을 일컬어 ‘혈구의 도’라고 하니라).”
그러므로 군자는 자기에게 善이 있은 뒤에 남에게 그것을 요구하며, 자기에게 不善이 없은 뒤에 남에게 그르다고 하는 것이니, 자기 몸에 간직한 것이 恕가 아니고서 다른 사람을 때우칠 수 있는 사람은 있지 않다(是故로 君子는 有諸己而後에 求諸仁하며 無諸己而後에 非諸人하나니 所藏乎身이 不恕ㅣ오 而能喩諸人者ㅣ 未之有也ㅣ니라)고 하였다.

盡己之心이 爲忠이오 推己及人이 爲恕라 違는 去也ㅣ니 如春秋傳에 齊師ㅣ 違穀七里之違니 言自此至彼에 相去不遠이오 非背而去之之謂也ㅣ라 道卽其不遠人者ㅣ 是也ㅣ라 施諸己而不願을 亦勿施於人은 忠恕之事也ㅣ라 以己之心으로 度人之心하야 未嘗不同則道之不遠於人者를 可見이라 故로 己之所不欲을 則勿以施於人이니 亦不遠人以爲道之事라 張子所謂以愛己之心으로 愛人則盡仁이 是也ㅣ니라
자기 몸의 마음을 다하는 것이 (중심에서 우러나는) 忠이 되는 것이오, 몸을 미루어서 남에서 미치는 것이 恕가 되느니라. 違는 거리인 것이니 『춘추전』에 ‘제나라 군사가 곡이라는 땅에서 7리의 거리가 있다’는 違와 같으니, 이로부터 저기에 이르는 것이 서로의 떠난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이오 등져 간다는 것을 이름이 아니니라. 도라는 것은 곧 그 사람에게 멀지 않다는 것이 이것이라. 저 몸에 베풀어 보아서 원치 않거든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은 충서의 일이라. 자기의 마음으로써 남의 마음을 헤아려서 일찍이 같지 아니하지 않다면 곧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는 것을 가히 봄이라. 그러므로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곧 써 남에게 베풀지 말 것이니 또한 사람을 멀리해서 써 도를 하는 것이 아니니라. 장자가 이른바 ‘자기 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써 남을 사랑하는 것인즉 어짊(사랑, 仁)을 다한다’는 것이 이것이니라.

度 : 헤아릴 탁 背 : 등질 패, 거스릴 패

君子之道ㅣ 四에 丘未能一焉이로니 所求乎子로 以事父를 未能也하며 所求乎臣으로 以事君을 未能也하며 所求乎弟로 以事兄을 未能也하며 所求乎朋友로 先施之를 未能也ㅣ로니 庸德之行하며 庸言之謹하여 有所不足이어든 不敢不勉하며 有餘ㅣ어든 不敢盡하야 言顧行하며 行顧言이니 君子ㅣ 胡不慥慥爾리오
군자의 도가 네 가지에 나(모)는 하나도 능하지 못하노니 자식에게 바라는 바로써 아비 섬김을 능치 못하며, 신하에게서 바라는 바로써 인군 섬김을 능치 못하며, 아우에게서 바라는 바로써 형 섬김을 능치 못하며, 붕우에게 바라는 바로써 먼저 베풂에 능치 못하노니, 떳떳한(항시) 덕을 행하며 떳떳한(항시) 말도 삼가하여 족하지 못한 바가 있거든 감히 힘쓰지 아니하지 못하며 남음이 있거든 감히 다하지 못하여 말은 행실을 돌아보며 행실은 말을 돌아볼지니 군자가 어찌 독실하고 독실하지 아니하리오.

丘 : 언덕 구, 공자의 휘(諱) 胡 : 어찌 호 慥 : 독실할 조 爾 : 어조사 이

[본문 해설]
丘는 공자의 휘이다. 옛날에 선비들은 성인의 이름을 그대로 읽을 수 없다하여 ‘某(모)’라고 읽었다. 여기서는 공자가 스스로를 지칭하며 일상적인 일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고 겸손해 하며, 도라는 것은 일상 생활 속에서 항상 떳떳하게 행하고 떳떳하게 말을 삼가는데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해서 언행일치가 될 때 진정한 군자의 도를 이룰 수 있고, 군자가 세상에 나아가 덕을 베풀려면 말과 행동이 우선임을 말하고 있다.
『소학』외편에도 嘉言善行(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말하였다. 庸言과 庸行은 평상시에 하는 보통 말과 보통 행실을 말한다. 군자는 평범한 말에도 항시 믿도록 하며 평범한 행동에서도 항시 삼간다. 사람은 때로 간사한 마음이 생기지만 군자는 이런 정중한 덕이 있기 때문에 간사한 마음을 막고 그 정성을 늘 보존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더라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으며, 온 천하를 덕으로 교화한다. 이러한 군자의 덕에 대해 주역 건괘 九二괘의 문언전에 잘 나타나 있다. 중용 서문(중용에 들어가기에 앞서)에서도 밝혔지만 다음 인용문은 자사가 『중용』이란 책명을 따온 글귀이기도 하다.
“子ㅣ曰 龍德而正中者也ㅣ니 庸言之信하며 庸行之謹하야 閑邪存其誠하며 善世而不伐하며 德博而化ㅣ니 易曰 見龍在田利見大人이라 하니 君德也ㅣ라(공자 이르길 용덕이 바르게 가운데 한 것이니 떳떳이(항시) 말을 미덥게 하며, 떳떳이(항시) 행실을 삼가서 간사한 것을 막고 그 정성을 보존하며 세상을 착하게 하여도 자랑하지 않으며 덕을 넓게 하여 화하게 하니 역에 이르기를 ‘현룡재전이견대인’이라 하니 인군의 덕이라)”

求는 猶責也ㅣ라 道不遠人이니 凡己之所以責人者는 皆道之所當然也ㅣ라 故로 反之以自責而自脩焉이라 庸은 平常也ㅣ라 行者는 踐其實이오 謹者는 擇其可라 德不足而勉이면 則行益力이오 言有餘而訒이면 則謹益至니 謹之至則言顧行矣오 行之力則行顧言矣라 慥慥는 篤實貌라 言君子之言行이 如此하니 豈不慥慥乎아 하시니 贊美之也ㅣ라 凡此는 皆不遠人以爲道之事니 張子所謂以責人之心으로 責己則盡道ㅣ 是也ㅣ니라
구(求)는 질책하는 것과 같음이라.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은 것이니 무릇 자기가 남을 질책하는 것은 모두가 도의 당연한 바이니라. 그러므로 돌이켜 써 스스로 자기 몸을 꾸짖고 스스로 닦아야 하느니라. 용(庸)은 평상적이라, 행(行)은 그 실지를 밟는(실천하는) 것이오, 근(謹)은 그 옳음을 가리는 것이라. 덕이 부족한 것을 힘쓰면 행실이 더욱 더 힘쓸 것이오 말이 남음이 있는데 더듬적거리면 삼감이 더욱 지극함이니 삼감이 지극한즉 말이 행동을 돌아보는 것이오 행실을 힘쓰면 행동이 말을 돌아봄이라. 조조(慥慥)는 독실한 모양이라. ‘군자의 말과 행동이란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독실하고 독실하지 않으리오’라고 (공자가) 하셨으니 찬미하심이라. 무릇 이것은 모두가 사람을 멀리하지 않고 써 도를 행하는 일이니, 장자가 이른바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써 자신을 꾸짖는다면 도를 다하는 것’이 이것이니라.

訒 : 말더듬을 인

右는 第十三章이라

道不遠人者는 夫婦所能이오 丘未能一者는 聖人所不能이니 皆費也요 而其所以然者는 則至隱이 存焉이라 下章放此하니라
도가 사람에게 멀지 않다는 것은 부부의 능한 바이오, 공자가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는 것은 성인도 능치 못한 바이니, 모두가 (용적인) 소비요 그러한 바(所以然)는 즉 지극히 은미함이 있는 것이라. 아래 장도 이를 모방함이라.

放 : 모방할 방

[앞주 해설]
費而隱에 대한 결말 장으로 아래 글도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된다.

君子는 素其位而行이오 不願乎其外니라
군자는 현재 그 위치에서 행하고 그 바깥을 원하지 않느니라

素 : 본디 소, 현재 소

[본문 해설]
『주역』 52번째 重山艮卦 大象傳을 보면, “象曰 兼山이 艮이니 君子ㅣ 以하야 思不出其位하나니라(상전에 이르길, 겹쳐 있는 산이 간이니, 군자가 이로써 생각이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아니 하느니라)” 하였다. ‘생각 思’는 ‘밭 전(田)’에 ‘마음 심(心)’을 더한 형태로 마음의 밭이다. 형이상적으로는 井의 한가운데 즉 중앙 土의 마음, 심고 거두는(土爰稼穡, 토원가색) 마음이다. 따라서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그 밭이 기름진 옥토냐 아니면 거친 황무지냐에 달려 있다. 마음의 밭을 잘 쓰는 사람은 그곳이 옥토이므로 곡식이 잘 자라듯이, 군자는 자기 자리에서 분수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그밖의 일은 도모하지 말라는 뜻이다.
참고로 『논어』제16장 季氏편에서 공자는 군자가 항상 유념해야 할 아홉 가지의 생각(九思)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孔子曰 君子有九思하니 視思明하며 聽思聰하며 色思溫하며 貌思恭하며 言思忠하며 事思敬하며 疑思問하며 忿思亂하며 見得思義니라(공자 이르길, 군자는 생각함에 아홉 가지가 있으니, 봄에 밝음을 생각하고, 들음에 귀밝음을 생각하고, 낯빛 띰에 온화함을 생각하고, 몸 가짐에 공손함을 생각하고, 말함에 진실됨을 생각하고, 섬김에 공경을 생각하고, 의심되는 바에 물음을 생각하고, 분함에 환란을 생각하고, 얻음을 봄에 의로움을 생각하느니라)”

素는 猶見在也ㅣ라 言君子ㅣ 但因見在所居之位하야 而爲其所當爲오 無慕乎其外之心也ㅣ라
소는 현재와 같으니라. 군자가 다만 현재 거처하는 바의 위치대로 인하여 그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는 것이고 그 밖의 마음을 사모함이 없느니라.

見 : 나타날 현


素富貴하얀 行乎富貴하며 素貧賤하얀 行乎貧賤하며 素夷狄하얀 行乎夷狄하며 素患難하얀 行乎患難이니 君子는 無入而不自得焉이니라

부귀에 있어서는 부귀대로 행하며 빈천에 있어서는 빈천대로 행하며 오랑캐에 있어서는 오랑캐대로 행하고 환란에 있어서는 환란대로 행하니 군자는 들어가는 데마다 스스로 얻지 못함이 없느니라.

此는 言素其位而行也ㅣ라
이는 그 현재 위치대로 행함을 말함이라.

在上位하야 不陵下하며 在下位하야 不援上이오 正己而不求於人이면 則無怨이니 上不怨天하며 下不尤人이니라
윗자리에 있어서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않으며, 아랫자리에 있어서 윗사람을 잡아당기지 않으며 자기 몸을 바로 하여 남에게 구하지 않으면 즉 원망이 없음이니,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아래로는 사람을 탓하지 아니 하나니라

陵 : 능멸(陵蔑, 凌蔑)할 릉 援 : 당길 원 怨 :원망할 원 尤 : 허물 우

[본문 해설]
군자라면 어떤 자리에 처하더라도 그 때를 당하여 묵묵히 할 바를 다해가며 나아가기에 남을 원망하거나 탓할 일이 없다. 『주역』건괘 문언전에서 九三 효사인 “君子ㅣ 終日乾乾하야 夕惕若하면 厲하나 无咎이리라(군자가 날이 마치도록 굳세고 굳세어서 저녁에 두려워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으리라)”에 대하여 공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子ㅣ曰 君子ㅣ 進德修業하나니 忠信이 所以進德也ㅣ오 修辭立其誠이 所以居業也ㅣ라 知至至之라 可與幾也ㅣ며 知終終之라 可與存義也ㅣ니 是故로 居上位而不驕하며 在下位而不憂하나니 故로 乾乾하야 因其時而惕하면 雖危나 无咎矣리라(공자 이르길 군자가 덕에 나아가며 업을 닦나니 충성되고 미덥게 함이 덕에 나아가는 바요, 말을 닦고 그 정성을 세움이 업에 거하는 바라 이를 줄 알고 이르나니 더불어 기미할 수 있으며, 마칠 줄 알고 마치니 더불어 의리를 보존할 수 있으니 이런 까닭에 높은 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아니하며 낮은 자리에 있어도 근심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굳세고 굳세게 해서 그 때로 인하여 두려워하면 비록 위태하나 허물이 없으리라)"
九三은 六位를 삼태극 속의 음양으로 나누었을 때, 인체의 정신(九四는 사람의 육체)에 해당하는 인태극 자리이다. 내괘에 처하고 있는데다 양이 양자리에 있어 바른 자리이므로 군자이지만 내괘를 마치고 외괘로 넘어가기 직전이고 지나치게 강하여 위태로운 상태이다. 이때 군자는 진덕수업을 행하여 내적으로는 늘 덕을 행하고 외적으로는 늘 업을 닦는 것이다.
‘충성 忠’은 中心 즉 속마음 그대로 성실한 것을 말하고 ‘믿을 信’은 사람이 말한 그대로 행하여 미더운 것을 말한다. 이는 곧 中孚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렇게 충과 신에 바탕하여 내적인 덕을 행하는 것이고 밖으로는 늘 말 한마디마다 잘 닦아 헛되게 하지 않고 성실함이 있어서 그 정성을 바쳐서 업에 거처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덕수업을 했을 때 이를 데를 알아 이르므로 필연코 일의 기미를 알고 일을 시작하게 되며 또한 마칠 데를 알아 마치는 까닭에 필연코 결실(종결)을 알게 되니 그 결실과 의리를 보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九三은 初九와 九二보다 아랫자리에 있지만 그보다 못한 처지를 부러워하거나 근심하지 않는다.

此는 言不願乎其外也ㅣ라
이는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음을 말함이라.

故로 君子는 居易以俟命하고 小人은 行險以徼幸이니라
그러므로 군자는 쉬운 데(평지)에 거하면서 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험한 곳을 다니면서 요행을 구하느니라.

易 : 쉬울 이 徼 : 구할 요 幸 : 요행 행

[본문 해설]
군자는 욕심을 내지 않고 깨끗한 마음으로 늘 제 위치를 그대로 지키기에 이것을 평지에 거처하는 것으로 비유했고, 소인은 항상 바깥 것을 구하느라 정신이 없고, 감당 못할 일들을 벌여 늘 불안해 하고 화를 초래하기에 험한 곳에 거처하는 것으로 비유했다. 따라서 군자는 평지에 거하면서 하느님이 나의 운명을 어떻게 전개해 줄 지만을 기다릴 뿐이며, 소인은 감당 못할 험한 일만을 택하기에 요행을 바라게 된다.

易는 平地也ㅣ라 居易는 素位而行也ㅣ오 俟命은 不願乎外也ㅣ라 徼는 求也ㅣ라 幸은 謂所不當得而得者라
이는 평지라. 거이는 현재 위치대로 행하는 것이오. 사명은 바깥 것을 원하지 않음이라. 요는 구함이오, 행은 얻으면 마땅치 않은 바를 얻음을 말함이라.

子ㅣ曰 射ㅣ 有似乎君子하니 失諸正鵠이오 反求諸其身이니라
공자 이르길 활을 쏘니 군자와 같음이 있으니 정곡을 잃고 돌이켜 그 몸에서 구하느니라.

射 : 쏠 사 鵠 : 과녁 곡, 황새 곡

[본문 해설]
중용지도를 하는 군자는 활을 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활을 쏠 때는 자세를 반듯이 하고 맞히고자 하는 사물을 똑바로 보아야만 정곡을 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화살이 빗나간다면 맞히고자 하는 목표물이나 화살의 탓이 아니라 바로 내 몸의 자세가 바르지 못한데서 그 원인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나에게 있다는 뜻이다.

畫布曰正이오 棲皮曰鵠이니 皆侯之中 射之的也ㅣ라 子思ㅣ 引此孔子之言하야 以結上文之意하시니라
베에 그려 놓은 것을 정이라 하고 가죽을 매달아놓은 것을 곡이라 하니 모두 과녁의 중심이오 활의 표적이니라. 자사가 공자의 말씀의 이끌어서 윗글의 뜻을 맺으셨느니라.

棲 : 깃들일 서 侯 : 과녁 후 的 : 과녁 적

右는 第十四章이니라

子思之言也ㅣ니 凡章首에 無子曰字者는 放此하니라
자사의 말씀이니 무릇 장 머리에 ‘자왈’이란 글자가 없는 것은 이와 같음이라

君子之道는 辟如行遠必自邇하며 辟如登高必自卑니라
군자의 도는 비유컨대 먼 길을 가는데 반드시 가까운 데로부터 하는 것과 같으며, 비유컨대 높은 곳을 오르는데 반드시 낮은 데서부터 하는 것과 같으니라.

辟는 譬同이라
辟(임금 벽, 피할 피)는 ‘비유할 비(譬)와 같음이라.

詩曰 妻子好合이 如鼓瑟琴하며 兄弟旣翕하야 和樂且耽이라 宜爾室家하며 樂爾妻帑ㅣ라 하야늘
시경에 가로대 “처자가 좋아서 합하는 것이 비파와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으며, 형제가 이미 합해서 화락하고 또 즐기느니라. 너의 집안을 마땅하게 하며 너의 아내와 자식을 즐겁게 한다” 하야늘

翕 : 합할 흡 耽 : 즐길 탐 帑 : 자식 노

詩는 小雅常棣之篇이라 鼓瑟琴은 和也ㅣ라 翕은 亦合也ㅣ라 耽은 亦樂也ㅣ라 帑는 子孫也ㅣ라
시는 소아 상체편이다. 비파와 거문고를 탄다는 것은 화함이라. 흡은 또한 합함이라. 탐은 또한 즐거움이라. 노는 자손이라.

棣 : 산앵두나무(아가위) 체

子ㅣ曰 父母난 其順矣乎ㅣ신뎌
공자 말씀하시길 “부모께서는 그 순하실(편안하실) 것이다.

夫子ㅣ 誦此詩而贊之曰人能和於妻子하고 宜於兄弟ㅣ 如此면 則父母는 其安樂之矣시리라 子思ㅣ 引詩及此語하야 以明行遠自邇登高自卑之意하시니라
공자께서 이 시를 외우고 찬양하며 말씀하시길 “사람이 능히 처자에 화합하고 형제간에 마땅함이 이와 같다면 곧 부모는 그 안락하시리라.” 자사가 시와 이 말씀을 인용하여 써 먼길을 가는데 가까운 데로부터 하고 높은 곳을 오르는 데는 낮은 곳으로부터 한다는 뜻을 밝힘이라.

右는 第十五章이라

子ㅣ曰 鬼神之爲德이 其盛矣乎뎌
공자 말씀하시길 “귀신의 덕됨이 그 성대한져!”

程子曰 鬼神은 天地之功用이오 而造化之迹也ㅣ라 張子曰 鬼神者는 二氣之良能也ㅣ라 愚는 謂以二氣로 言則鬼者는 陰之靈也ㅣ오 神者는 陽之靈也ㅣ며 以一氣로 言則至而伸者爲神이오 反而歸者爲鬼니 其實은 一物而已니라 爲德은 猶言性情功效니라
정자 말씀하시길 “귀신은 천지의 공용(성공적인 쓰임)이오 조화의 자취니라.” 장자(장횡거)는 “귀신은 음양 두 기운의 잘 능함(곧 변화)이라” 하였다. 어리석은 나(주자)는 음양 두 기운로써 말하면 귀는 음의 영이오 신은 양의 영이며, 한 기운(태극)로써 말하면 이르러 펴면 신이오 돌이켜 돌아가는 것은 귀이니 그 실제는 하나의 물건일 뿐이니라. 덕됨은 성정 공효를 말함과 같으니라.

[참조]
귀신에 대한 주역의 설명은 중용 제11장 해설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視之而弗見하며 聽之而弗聞이로대 體物而不可遺ㅣ니라
보려 해도 보이지 아니하며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아니하되 물건에 체해서 가히 버리지 못하느니라

鬼神은 無形與聲이라 然이나 物之終始ㅣ 莫非陰陽合散之所爲니 是其爲物之體요 而物之所不能遺也ㅣ라 其言體物은 猶易所謂幹事ㅣ니라
귀신은 형체와 다못 소리가 없음이라. 그러나 물건의 종과 시가 음양의 합하고 흩어짐의 소위가 아님이 없으니 이는 그 물건의 체가 됨이요 물건이 능히 버릴 수 없는 바이이라. 그 체물이라는 것은 일을 주장함을 말함이라.

與 : 다못(또) 여 幹 : 주장할 간

[앞주 해설]
물건의 체가 된다는 것(체물)은 음양 귀신의 조화로 일을 주장한다(幹事)는 뜻으로 이는 『주역』의 중천건괘 문언전에서 나온 말이다.
文言曰 元者는 善之長也ㅣ오
亨者는 嘉之會也ㅣ오
利者는 義之和也ㅣ오
貞者는 事之幹也ㅣ니
君子ㅣ 體仁이 足以長人이며
嘉會ㅣ 足以合禮며
利物이 足以和義ㅣ며
貞固ㅣ 足以幹事ㅣ니
君子ㅣ 行此四德者ㅣ라
故로 曰乾元亨利貞이라

문언에 이르길 元은 착한 것의 어른이요
亨은 아름다움의 모임이요
利는 의리의 和함이요
貞은 일을 주장함이니(일의 줄기니)
군자가 仁을 체득함이 족히 사람의 어른이며(사람을 기르며)
모임을 아름답게 함이 족히 禮에 합하며
물건을 이롭게 함이 족히 의리에 화합하며
바르고 굳셈이 족히 일을 주장하니
군자가 이 네 가지 덕을 행하는지라
그러므로 이르길 ‘乾元亨利貞’이라

使天下之人으로 齊明盛服하야 以承祭祀하고 洋洋乎如在其上하며 如在其左右ㅣ니라(귀신은) 천하의 사람으로 하여금 (목욕)재계하고 (마음을)밝게 하고 옷을 성대하게 입고 써 제사를 받들고 양양히 그 위에 있는 듯하며 그 좌우에 있는 듯하느니라.

齊之爲言은 齊也ㅣ니 所以齊不齊而致其齊也ㅣ라 明은 猶潔也ㅣ라 洋洋은 流動充滿之意라 能使人으로 畏敬奉承而發見昭著ㅣ 如此하니 及其體物而不可遺之驗也ㅣ라 孔子 曰其氣ㅣ 發揚于上하야 爲昭明焄蒿悽愴하니 此는 百物之精也ㅣ오 神之著也ㅣ라 하시니 正謂此爾니라
재계한다는 말은 몸을 재계하는 것이니 깨끗지 못함을 깨끗이 하여 그 재계함을 이룸이라. 명은 청결함과 같음이라. 양양은 흐르고 움직여 충만한 뜻이라.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귀신을)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받들어 이어서 발현하고 훤히 밝게 나타남이 이와 같으니 이에 그 물건에 체해서(주장해서) 가히 버리지 못하는 증험이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그 기운이 위에 발양하여 밝게 밝아 쑥을 태워 처창(숙연해져 매우 감상적이니 되는 마음)하게 되니 이는 백가지 물건의 정이오 신의 나타남이라” 하시니 바로 이(流動充滿, 體物, 發揚)를 이름이라.

見 : 나타날 현 焄 : 연기에 그을릴 훈 蒿 : 쑥 호 悽 : 슬퍼할 처 愴 : 슬퍼할 창 爾 : 어조사 이

[참고] 조율시이(棗栗枾梨)에 대하여
옛 어른들은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대추, 밤, 감은 꼭 놓되 상에 가장 먼저 대추를 올리라고 한다. 그중 대추는 단단한 씨가 하나 들어 있어 있는데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으므로 열매인 자손으로서 제사지내는 주체를 상징하기에 젯상에 가장 먼저 올려 놓는다. 밤은 싹이 나면 썩지 않는데서 불후(不朽) 혹은 불멸(不滅)을 상징하며 뿌리인 조상을 나타내고, 감나무는 씨를 심은 후 접을 붙여야 감이 되므로 교역(交易)을 상징하고, 바로 제사를 통한 조상과 후손과의 교감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제상에 과일을 올릴 때 대추, 밤, 감의 순으로 놓는 것은 제사를 지내는 주체인 내(대추)가 조상님(밤)을 정성으로 받들며 조상귀신과의 대화를 나눈다(감)는 뜻이다. 여기에 배를 굳이 붙이는 이유는 색의 음양 짝을 맞추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젯상을 아무리 진수성찬으로 순서에 맞게 차린다한들 그 속에 정성이 빠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공이 주역 澤風大過괘 초육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藉用白茅ㅣ니 无咎ㅣ하니라(자리를 까는데 흰 띠를 쓰니 허물이 없느리라)"하셨다. 이에 공자는 "苟錯諸地라도 而可矣어늘 藉之用茅하니 何咎之有ㅣ리오 愼之至也ㅣ라 夫茅之爲物이 薄而用은 可重也ㅣ니 愼斯術也하야 以往이면 其无所失矣리라(진실로 저 땅에 두더라도 괜찮커늘
까는데 띠를 쓰니 무슨 허물이 있으리오 삼감의 지극함이라. 무릇 띠의 물건됨이 박하나 쓰는 것은 중히 여기는 것이니 이 방법을 삼가여 써가면 그 잃는 바가 없으리라)"고 덧붙이셨다.

詩曰 神之格思를 不可度思ㅣ온 矧可射思아
『시경』에 이르기를 신이 이르는 것을 가히 헤아리지 못하는데 하물며 가히 싫어하랴

思 : 어조사 사 度 : 헤아릴 탁 矧 : 하물며 신 射 : 싫어할 역, 쏠 사, 쏠 석

[본문해설]
사람은 눈 뜨고도 깊은 것을 보지 못하고, 귀로 사물의 소리는 들을지 몰라도 이치는 듣지 못한다. 제사를 지내는데 신이 오는 것을 가히 헤아리지도 못하면서 신이 있느니 없느니,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헛일이네, 귀신이 먹고 가겠느냐 하면서 신을 싫어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이다. 깊이 헤아려보라는 의미에서 '思'란 글자를 어조사로 하여 세 번 썼음을 알 수 있다. 위에 인용된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視爾友君子한대네 군자를 벗함을 보건대
輯柔爾顔하여네 얼굴을 화하게 하고 유순히 하여
不遐有愆가한다 어떤 잘못이 있지 않은가 하는구나
相在爾室한대네 거실에 있음을 보건대
尙不愧于屋漏니거의 옥루에 부끄럽지 않게 할지니
無曰不顯이라밝지 않은지라
莫予云覯하라나를 보는 이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神之格思를신의 이르름을
不可度思온헤아릴 수가 없거늘
矧可射思아하물며 신을 싫어할 수 있겠는가

輯 : 화목할 집 遐 : 무엇 하, 멀 하 愆 : 허물 건 覯 : 우연히 만날 구

詩는 大雅抑之篇이라 格은 來也오 矧은 況也ㅣ라 射은 厭也ㅣ니 言厭怠而不敬也ㅣ라 思는 語辭라
시는 대아 억편이라. 격은 옴이라 신은 ‘하물며’라는 뜻이라. 역은 싫어함이니 (신을) 싫어하고 (섬기는데) 게을리하면서 공경하지 아니함을 말함이라. 사는 어조사라.

抑 : 누를 억

夫微之顯이니 誠之不可揜이 如此夫뎌
대저 미미한 것이 나타나니 정성을 가히 가리지 못함이 이와 같은져!

揜 : 가릴 엄 夫 : 진저(어조사) 부

誠者는 眞實無妄之謂라 陰陽合散이 無非實者라 故로 其發見之不可揜이 如此니라
정성이라는 것은 진실무망을 말함이라. 음양 합산이 실제가 아님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그 발현되는 것을 가히 가리지 못하니 이와 같음이라.

右는 第十六章이라

不見不聞은 隱也ㅣ오 體物如在는 則亦費矣라 此前三章은 以其費之小者而言이오 此後三章은 以其費之大者而言이오 此一章은 兼費隱包大小而言이라
불견불문은 (비은장으로 말하면 숨어있다는) 은이오 체물여재는 곧 또한 소비함이라. 이 앞의 석 장은 비의 작은 것으로써 말함이오 이 뒤의 석 장은 비의 큰 것으로써 말함이오 이 한 장은 비은을 겸하고 크고 작은 것을 싸서 말함이라.

[앞주 해설]
“君子之道는 費而隱이니라”는 제12장의 내용과 관련해 앞의 세 장인 제13장, 제14장, 제15장은 ‘費’의 작은 것으로 말한 것이고, 뒤의 세 장, 곧 제17장, 제18장, 제19장은 ‘費’의 큰 것으로 말한 것이며, 이 제16장은 ‘費’와 ‘隱’을 겸하고 또한 큰 것과 작은 것을 포함하여 말한 것이다.

子ㅣ曰 舜은 其大孝也與ㅣ신뎌 德爲聖人이시고 尊爲天子ㅣ시고 富有四海之內하샤 宗廟饗之하시며 子孫保之하시니라
공자 가라사대 순임금은 그 큰 효도이신져 덕은 성인이 되시고 높이는 천자가 되시고 부는 사해 내를 소유하시고 종묘를 흠향하시고 자손을 보존하시니라.

饗 : 흠향할 향

[본문 해설]
요임금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순에 관해 공자가 말한 내용으로 ‘費’의 큰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순임금의 아버지는 소경이었고 어머니는 서모인데 매우 간악하였으며 서제도 간악하여 몇 차례에 걸쳐 순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순은 끝까지 효를 다하여 모두 순해지게 했다. 순임금은 백행지본(百行之本)의 효를 다했고, 덕으로는 성인이고 높이로는 천자의 위에 올랐으니 온 나라를 모두 소유하였으며 돌아가셔서는 종묘의 제사를 흠향하시고 영혼은 수호신이 되어 대대손손 자손을 보존하셨다.

子孫은 謂虞思陳胡公之屬이라
자손은 우사와 진호공의 등속이라.

故로 大德은 必得其位하며 必得其祿하며 必得其名하며 必得其壽ㅣ니라
그러므로 대덕은 반드시 그 위를 얻으며 반드시 그 녹을 얻으며 반드시 그 이름을 얻으며 반드시 그 수를 얻느니라.

舜은 年百有十歲라
순임금은 백십세였느니라.

故로 天之生物이 必因其材而篤焉하나니 故로 栽者를 培之하고 傾者를 覆之니라
그러므로 하늘이 물건을 내는데 반드시 그 재목을 인하여 돈독히 하나니 그러므로 심는 자를 북돋아주고 기울어진 자를 엎느니라.

[본문 해설]
하느님이 만물을 내는데 반드시 그 재목이 쓸만한 지를 보고, 싹수가 있고 희망적인 것은 북돋워주고, 기울어지거나 말라비틀어진 것, 망할 짓하는 것은 쓸모가 없으니 엎어버리는데 이것이 곧 하늘의 섭리이다.

材는 質也ㅣ오 篤은 厚也ㅣ오 栽는 植也ㅣ라 氣至而滋息이 爲培오 氣反而游散則覆이라
재는 바탕(재질)이오, 독은 후함이오, 재는 심음이라. 기운이 이르러 불어나는 것을 북돋는다라 하고, 기운이 돌아 떠서 흩어지면 엎어지는 것이라.

詩曰 嘉樂君子의 憲憲令德이 宜民宜人이라 受祿于天이어늘 保佑命之하시고 自天申之라 하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아름답고 즐거운 군자의 현명한 어진 덕이 백성에게도 마땅하고 사람에게도 마땅하니라. 녹을 하늘에서 받거늘 보우하여(돕고 도와서) 명을 내리시고 하늘로부터 거듭한다 하니라.

嘉 : 아름다울 가 憲 : 현명할 헌, 법 헌 令 : 착할 령, 어질 령

[본문 해설]
『시경』대아 가락편에 있는 시로 성인군자인 문왕 덕치를 기리는 내용이다.
人民이라 할 때 人은 벼슬하는 이들을 가리키고 民은 농사짓고 사는 백성들을 말한다.

詩는 大雅假樂之篇이라 假는 當依此作嘉오 憲은 當依詩作顯이라 申은 重也ㅣ라
시는 대아 가락편이라. (시경에 있는) 假는 마땅히 이(『중용』)에 의해서 아름다울 ‘嘉’ 로 짓는 것이 마땅하며, ‘憲’은 마땅히 시경에 의해서‘顯’으로 지어야 하느니라. 신은 거듭 ‘重’과 같음이라.

故로 大德者는 必受命이니라
그러므로 큰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명을 받느니라

受命者는 受天命爲天子也ㅣ라
명을 받는다는 것은 하늘의 명을 받아 천자가 됨이라.

右는 第十七章이라

此는 由庸行之常으로 推之하야 以極其至하니 見道之用이 廣也ㅣ니 而其所以然者는 則爲體ㅣ 微矣라 後二章도 亦此意니라이것은 용행지상(떳떳한 행실을 떳떳이 함)으로 말미암아 미루어 써 그 이름을 지극하게 함이니, 도의 씀이 넓음을 나타낸 것이니, 그 까닭(所以然)은 곧 체가 됨이 미미함이라. 뒤의 두 장도 또한 이러한 뜻이니라.

子ㅣ曰 無憂者는 其惟文王乎ㅣ신뎌 以王季爲父하시고 以武王爲子하시니 父ㅣ 作之어시늘 子ㅣ述之하시니라
공자 가라사대 “근심이 없는 이는 그 오직 문왕이신저!” 왕계로서 아버지가 되시고 무왕으로서 자식을 삼으시니 아버지가 일으키시어늘 자식이 지으시니라

[본문 해설]
공자가 대덕을 실현한 이로 문왕을 들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참으로 근심이 없는 이는 문왕이다. 왜냐하면 왕계(季歷)라는 훌륭한 아버지를 두었으며 무왕(發)이라는 훌륭한 자식을 두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왕계는 주나라를 일으켰고 아들인 무왕이 잘 다져 후세에 전하였으니 그 가운데한 문왕(西伯昌)은 근심이 없다는 말이다.

且는 言文王之事라 書에 言王季ㅣ 其勤王家라 하니 盖其所作이 亦積功累仁之事也ㅣ라
이는 문왕의 일을 말함이다. 『서경』에 말하기를 “왕계가 그 왕가를 근면하게 했다” 하니 대개 그 일으킨 바가 또 계속 공을 쌓고 인을 누적한 일이라.

[앞주 해설]
문왕의 아버지 왕계가 그 왕가를 일으킨 것은 어느 하루 아침에 이룬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공을 쌓고 어진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경』주서 무성편(周書 武成篇)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王若曰 嗚呼群后아 惟先王이 建邦啓土하여시늘 公劉克篤前烈이어시늘 至于大王하여 肇基王迹하여시늘 王季其勤王家어시늘 我文考文王이 克成厥勳하사 誕膺天命하샤 以撫方夏신대 大邦은 畏其力하고 小邦은 懷其德이 惟九年이러니 大統을 未集이어시늘 予小子其承厥志호라(왕이 말씀하시길 “아, 여러 제후여 선왕(后稷)이 나라를 세워 토지를 열어 놓으셨는데, 공유가 앞 사람의 공렬을 돈독히 하고 태왕에 이르러 처음으로 왕자의 자취를 터 닦았으며, 왕계가 왕가에 근로하셨거늘 우리 문고(文考)이신 문왕께서 능히 공을 이룩하시어 크게 천명에 응하여 사방의 중하를 어루만지시니, 큰 나라는 그 힘을 두려워하고 작은 나라는 그 덕을 그리워한 지가 9년이었는데, 대통을 이루지 못하고 별세하셨으므로 나 소자가 그 뜻을 이었노라.")

武王이 纘大王王季文王之緖하샤 壹戎衣而有天下하샤대 身不失天下之顯名하샤 尊爲天子ㅣ시고 富有四海之內하샤 宗廟饗之하시며 子孫保之하시니라
무왕이 태왕과 왕계와 문왕의 단서를 이으시어 한번 군복을 입고 천하를 두시되 몸이 천하에 나타난 이름을 잃지 아니하셔 높이는 천자가 되시고 부는 사해안에 두시고 종묘에 흠향하시며 자손을 보존하시니라.

大王 : 여기서는 태왕(太王)으로 읽는다.

纘 : 이을 찬 戎 : 군사 융

[본문 해설]
태왕은 무왕의 증조할아버지로 고공단보(古公亶父)를 말하고, 왕계는 할아버지인 계력(季歷)이며, 문왕은 아버지이다. 무왕이 조상들의 기업(基業)을 이어 주나라를 세움을 말하고 있다. 아버지 문왕이 은나라 말기 서백창으로 변방을 다스릴 때 주(紂)임금의 폭정으로 나라가 도탄에 빠졌다. 문왕의 인품이 널리 알려지고 많은 이들이 문왕을 따르자 폭군 주는 서백창을 유리옥에 가두기까지 하였다. 나중에 풀려나 강태공을 만나 시기를 엿보다가 돌아가시고 무왕이 그 대업을 완성하게 된다.
즉 무왕은 조상들이 닦아놓은 터에 힘입어 전쟁을 일으켜 폭군 주를 치고 周나라를 세웠지만 한 개인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이었고, 왕위에 올라서는 결코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으셨기에 사후에 종묘에 모셔지고 자손을 잘 보존하였다는 내용이다.

此는 言武王之事라 纘은 繼也ㅣ라 大王은 王季之父也ㅣ라 書에 云大王이 肇基王迹이라 하고 詩에 云至于大王하야 實始翦商이라 하니라 緖는 業也ㅣ라 戎衣는 甲冑之屬이라 壹戎衣는 武成文에 言壹著戎衣以伐紂也ㅣ라
이는 무왕의 일을 말함이라. 찬은 이음이라. 태왕은 왕계의 아버지니라. 『서경』에 이르기를 “태왕이 비로소 왕업의 자취의 터를 닦아놓았다” 하고 『시경』에 이르길 “태왕에 이르러 실제 처음으로 상나라를 쳤다”고 하니라. 서는 왕업이라. 융의는 갑옷과 투구의 등속이라. ‘일융의’는 『서경』 「무성」의 글에 “한번 융의를 입고 주왕을 정벌함”을 말함이라.

肇 : 비로소 조

[앞주 해설]
『서경』의 인용문은 앞서 인용한 「무성」편의 내용이고,『시경』의 인용문은 「魯頌 閟宮(노송 비궁)」편의 다음 내용이다.
后稷之孫이 實維大王이시니 / 후직의 손자가 실로 태왕이시니
居岐之陽하사 實始翦商이어시늘 / 기산의 남쪽에 거하여 진실로 비로소 상나라를 치거늘
至于文武하사 纘大王之緖하사....../ 문왕 무왕에 이르러 태왕의 전통을 이으사.....

한편 『서경』「주서 무성」편에는 무왕이 紂를 쳐서 상나라를 멸하는 상황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壹戎衣에 天下大定이어늘 乃反商政하여 政由舊하시고 釋箕子囚하시며 封比干墓하시며......而萬姓이 悅服하니라(한번 군복을 입으매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거늘 이에 상나라의 정사를 되돌려서 정사는 옛날을 따르고, 기자를 가둔 것을 풀어주고 비간의 묘를 봉분하고......만백성들이 기뻐하여 복종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武王이 末受命이어시늘 周公이 成文武之德하샤 追王大王王季하시고 上祀先公以天子之禮하시니 斯禮也ㅣ 達乎諸侯大夫及士庶人하니 父爲大夫ㅣ오 子爲士ㅣ어든 葬以大夫ㅣ오 祭以士하며 父爲士ㅣ오 子爲大夫ㅣ어든 葬以士ㅣ오 祭以大夫하며 期之喪은 達乎大夫하고 三年之喪은 達乎天子하니 父母之喪은 無貴賤一也ㅣ니라
무왕이 말년에 명을 받으시거늘 주공이 문왕 무왕의 덕을 이루시어 태왕과 왕계를 왕으로 추존하시고 위로 선공을 천자의 예로써 제사하시니 이 예가 제후와 대부 및 선비와 서인에게 통하니, 아비가 대부가 되고 자식이 선비가 되거든 장사는 대부로써 하고 제사는 선비로써 하며, 아비가 선비가 되고 자식이 대부가 되면 장사는 선비로써 하고 제사는 대부로써 하고, 일년(期)상은 대부까지 통하고 삼년상은 천자에까지 통하니 부모상은 귀천이 없이 한가지니라.

[본문 해설]
무왕이 늙어서 운명하신 뒤 아들인 어린 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삼촌인 주공이 섭정을 하였다. 주공은 이때 음악과 모든 예를 만들었다. 이후 제사의 예는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주공이 아버지 문왕과 형인 무왕의 덕을 기리고 할아버지인 왕계와 증조할아버지인 태왕(고공단보)을 왕으로 추존하시고 위 조상들의 제사는 무왕이 천자이기에 천자의 예로써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예를 바탕으로 제후와 대부, 선비, 서인들의 장사지내는 예법과 제사지내는 예법이 확립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부모의 상은 천자나 대부, 서인 등 계급과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삼년상을 지냈다. 왜냐하면 모두가 부모의 은덕을 타고난 것은 천지의 떳떳한 일이오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此는 言周公之事라 末은 猶老也ㅣ라 追王은 蓋推文武之意하야 以及乎王迹之所起也ㅣ라 先公은 組紺以上至后稷也ㅣ라 上祀先公以天子之禮하고 又推大王王季之意하야 以及於無窮也ㅣ라 制爲禮法하야 以及天下하야 使藏用死者之爵하며 祭用生者之祿이라 喪服은 自期以下는 諸侯는 絶하고 大夫는 降하며 而父母之喪은 上下同之하니 推己以及人也ㅣ라
이는 주공의 일을 말함이라. 末은 늙음과 같으니라. 왕으로 추존한다는 것은 대개 문왕과 무왕의 뜻을 미루어서 써 왕의 자취의 일어난 바에까지 미침이라. 선대의 공은 조감으로써 위로 후직에까지 이름이라. 위로는 선공을 제사지내는데 천자의 예로써 하시고 또 태왕과 왕계의 뜻을 미루어서 써 무궁한데까지 미침이라. 예법을 만들어서 써 천하에 미쳐 장사지내는데는 죽은 자의 벼슬을 써서하고 제사는 산 자의 녹(등급, 벼슬자리)을 써서 하느니라. 상복은 기년복으로부터 써 제후는 끊고, 대부는 내려가며 그러나 부모의 상은 위와 아래가 똑같으니 자기 몸을 미루어서 써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침이라.

[참고]
옛날에는 상복의 재질과 봉제 방법에 따라 다섯 가지 服을 입었고 입는 기간에 따라서는 아홉 가지 복으로 나뉘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삼년상은 부모상으로 신분귀천을 막론하고 자식이 나서 어렸을 때 부모 품 안에서 3년 동안 있었으니 최소한 그 기간은 돌아가신 부모를 받든다는 뜻으로 복중에는 가장 오래 입는 상복이다. 조선시대 때 예송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기년(朞年)의 달 수 계산을 살펴보면, 햇수로 3년을 달로 치면 만 24개월인데 반으로 줄여 12개월로 하니 1년이 된다. 즉 춘하추동 4계절인 것이다. 한 계절이 3개월이기 때문에 초수 원근에 따라 한 계절(3개월)씩 줄여 복을 입는다. 대공은 기년복(1년 즉 12개월)에서 석 달을 줄인 9개월이고, 시복(緦服)은 3개월이니 유복지친(有服之親 : 복을 입는 가까운 친척)이라고 했을 때 최소한 한 계절인 석 달은 입어주어야 한다. 간략하게 복제(服制)를 살펴보자.

① 참최복(斬衰服) : 아버지상이나 손자가 아버지를 대신한 할아버지 승중상(承重喪)에 입는다. 가슴을 베는 듯한 슬픔이란 뜻으로(三年喪如斬), 거친 삼베를 잘라 깃을 여미지도 않고 만드는데 앞가슴에 최(衰)를 달고 뒷등에 부판(負板)을 달아서 입으며, 대나무로 만든 상장(喪杖)을 짚고 3년 동안 근신하는 것이다. 남편상이나 시아버지상도 마찬가지다.
② 재최복(齋衰服, 齊衰服) : 어머니상, 할머니 승중상, 시어머니상에 입는다. 참최복과 달리 고운 베로 깃을 여미며 앞가슴에 최를 달고 뒷등에 부판을 단 후 오동나무로 네모나게 만든 상장을 짚고 3년간 근신한다.
③ 장기(杖朞) : 아버지 생존시 어머니상이나 아내상을 당했을 때 재최복을 입고 상장을 짚고 1년간 근신한다.
④ 부장기(不杖朞) : 백숙부(伯叔父) ∙ 형제(兄弟) ∙ 차자(次子) ∙ 장손(長孫)의 상을 당했을 때 재최복을 입고 상장없이 일년간 근신한다. 큰며느리 ∙ 조카 ∙ 친정부모 ∙ 조부모도 같다.
⑤ 대공복(大功服) : 종형제(從兄弟) ∙ 지차며느리 ∙ 시조부모 ∙ 친정백숙부 ∙ 질부(姪婦) ∙ 고모(姑母) ∙ 출가한 자매(姉妹)의 상에는 곱게 다듬어 만든 상복을 입고 상장없이 9개월간 근신한다.
⑥ 소공복(小功服) : 종조부모(從祖父母) ∙ 대고모(大姑母) ∙ 종손(從孫) ∙ 당고모(堂姑母) ∙ 당숙모(堂叔母)의 상일 때는 상장없이 5개월간 근신한다. 상복은 대공과 같다.
⑦ 시마복(緦麻服) : 증조부모(曾祖父母) ∙ 재종조부모(再從祖父母) ∙ 장인(丈人) ∙ 장모(丈母)의 상에 3개월간 입는다. 종수(從嫂) ∙ 종손부(從孫婦) ∙ 재종숙모(再從叔母) ∙ 재종손(再從孫) ∙ 외손(外孫) ∙ 시종조부모(媤從祖父母) ∙ 시사촌(媤四寸) ∙ 시당숙모(媤堂叔母)도 이에 속한다. 상복은 소공과 같다.


右는 第十八章이라

子ㅣ曰 武王周公은 其達孝矣乎ㅣ신뎌
공자 말씀하시기를 “무왕과 주왕은 통한 효이신저!”

達은 通也ㅣ라 承上章而言武王周公之孝는 乃天下之人이 通謂之孝니 猶孟子之言達尊也ㅣ라
달은 통함이라. 윗글을 이어서 말하되 무왕과 주공의 효는 이에 천하의 사람이 공통적으로(이구동성으로) 효라고 하니 맹자의‘달존’이라는 말과 같으니라.

[앞주 해설]
무왕과 주공 두 형제분은 지극한 효자로서 세상사람 모두가 칭찬하는 바로 『맹자』「公孫丑章句下」에 나오는 다음의 ‘三達尊’과 같은 뜻이다.
曰豈謂是與ㅣ리오 曾子ㅣ曰 晉楚之富는 不可及也ㅣ나 彼以其富ㅣ어든 我以吾仁이오 彼以其爵이어든 我以吾義니 吾何慊乎哉리오 하시니 夫豈不義를 而曾子ㅣ 言之시리오 是或一道也ㅣ니라 天下에 有達尊이 三이니 爵一 齒一 德一이니 朝廷엔 莫如爵이오 鄕黨엔 莫如齒오 輔世長民에 莫如德이니 惡得有其一하야 以慢其二哉리오(맹자께서) 말씀하시길 “어찌 이것을 말한 것이리오? 증자께서 말씀하시길 ‘진나라와 초나라의 부함은 가히 따를 수 없으나 저들이 그 부로써 하면 나는 내 인으로써 하며 저들이 그 관작으로써 하면 나는 내 의로써 하니 내 어찌 부족할 것이 있겠는가’ 하셨으니, 이 어찌 불의를 증자께서 말씀하셨으리오. 이것도 혹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니라. 천하에 달존이 세 가지가 있으니, 관작이 하나요, 연륜이 하나요, 덕이 하나이니, 조정엔 관작만한 것이 없고, 향당에는 연륜만한 것이 없고, 세상을 돕고 백성을 자라게 하는 데는 덕만한 것이 없으니, 어찌 그 한 가지를 갖고 그 둘을 가진 것을 업신여기리오?”(慊 : 찐덥지 않을 겸 惡 : 어찌 오)

夫孝者는 善繼人之志하며 善述人之事者也ㅣ니라
무릇 효도라는 것은 사람(부모)의 뜻을 잘 이으며 사람의 일을 잘 전술하느니라

[본문 해설]
효도라는 것은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고 잘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뒤에는 살아생전에 하셨던 일들을 엮어 문집을 만들거나 기록하여 후세에 영구히 잘 전하는 것을 말한다.

上章은 言武王이 纘大王王季文王之緖하야 以有天下하고 而周公이 成文武之德하야 以追崇其先祖하니 此는 繼志述事之大者也ㅣ라 下文에 又以其所制祭祀之禮로 通于上下者言之니라
윗장(제18장)은 무왕이 태왕과 왕계, 문왕의 실마리(왕통이 이어지는 단서)를 이으시어 써 천하를 두시고, 주공이 문왕과 무왕의 덕을 이루어 선조를 높히셨으니 이는 뜻을 계승하고 일을 기술한 큰 것이니라. 아랫글에 또 그 마름한 바 제사의 예로써 위 아래를 통해서 말함이니라.

春秋에 修其祖廟하며 陳其宗器하며 設其裳衣하며 薦其時食이니라
봄과 가을에 그 할아버지(선조) 사당을 닦으며 제기를 진열하며 그 옷을 설치해 놓으며 그 때때로의 음식을 올리느니라.

[본문 해설]
봄 가을로 사당을 수리하며 선대로부터 소장해온 귀중한 기물을 진열하고, 선대에 입었던 의상을 설치하고 그때그때 제철에 나오는 음식을 조상께 올리며 제사지내는 것을 말한다.

宗器 : 종손이 제사를 지내기에 제사지내는 그릇을 종기라 한다.

祖廟는 天子는 七이오 諸侯는 五오 大夫는 三이오 適士는 二오 官師는 一이라 宗器는 先世所藏之重器니 若周之赤刀大訓天球河圖之屬也ㅣ라 裳衣는 先祖之遺衣服이니 祭則設之하야 以授尸也ㅣ라 時食은 四時之食이 各有其物이니 如春行羔豚膳膏香之類가 是也ㅣ라
할아버지 사당은 천자는 7이고 제후는 5이고 대부는 3이고 적사는 2이고, 관사는 1이라. 종묘에서 지내는 제기는 선대에서 간직해놓았던 소중한 그릇이니, 주나라의 적도와 대훈과 천구와 하도 등속이니라. 상의는 선조가 남기신 의복이니 제사할 때에는 이를 펼쳐 놓아 써 시동에게 줌이라. 때때로 먹는 음식은 사시의 음식이 각각 그 음식물이 있으니 봄에는 양소와 돼지를 쇠기름과 향으로 요리하는 것과 같은 유가 이것이니라.

尸 : 시동 시, 주장할 시 膏 : 기름 고

[앞주 해설]
천자가 사당 일곱을 지었다는 것은 7묘제로 이를 달리 표현하면 소목제(昭穆制)로 3소3목(三昭三穆)을 두었다는 뜻이다. 곧 가운데에 제1세(先祖, 혹은 不祧之典)를 모시고 왼쪽 줄을 소(昭), 오른쪽 줄을 목(穆)이라 한다. 이에 따라 천자는 소에 2세 4세 6세의 신위를 두고, 목에 3세 5세 7세의 신위를 모신다. 제후는 2소2목의 오묘, 대부는 1소1목의 삼묘를 두고, 적사의 사당은 태조는 모시지 않고 2위만 모시고, 관사는 사당 하나만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종기를 보면 음식을 담는 그릇만이 아니라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중요한 물건들까지를 포함한다. 적도는 은나라를 망친 주를 벤 붉은 칼을 말하며, 대훈은 문왕 무왕이 백성을 가르친 바를 기록한 책이며, 천구는 주나라에서 보배로 여기는 구슬이고, 하도는 복희씨 때 황하에서 나온 용마의 등에 그려진 그림으로 팔괘의 시원이자 『주역』의 원천이 되는 그림이다.
상의는 선조 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의복으로 제사지낼 때 시동에게 입힌다. 지금은 지방을 써놓고 제사를 지내지만, 전에는 신주를 모셨고, 신주가 있기 전에는 시동을 모셨다. 일곱 살 먹은 순수한 어린 아이에게 조상의 의복을 입혀 그 앞에 제물을 놓고 제사를 지내면 신이 내려온다고 하였다.
제사의 음식은 때에 맞는 음식들로 여기에서 예를 든 것은 봄철 제사 때 드리는 음식의 한 종류로 『周禮』에 전해지는 내용이다.

宗廟之禮는 所以序昭穆也ㅣ오 序爵은 所以辨貴賤也ㅣ오 序事는 所以辨賢也ㅣ오 旅酬에 下ㅣ 爲上은 所以逮賤也ㅣ오 燕毛는 所以序齒也ㅣ니라
종묘에서 제사를 지내는 예는 써 소목을 차례로 하는 바이오, 벼슬을 차례로 하는 것은 써 귀천을 분별하는 바이오, 일을 차례로 하는 것은 써 어진 이를 분별하는 바이오, 여럿이 술을 마시는데 아래 사람이 윗 사람을 위해주는 것은 천한 사람에게까지 미치는 바이오 잔치하는데 터럭을 따지는 것은 연치(나이)를 차례로 하는 바이니라.

旅 ; 여러 려 酬 : 술 권할 수

[본문 해설]
종묘의 예, 벼슬의 순서, 일의 순서, 주도(酒道) 등등의 예는 모두 중용지도로 만들었음을 설명하는 구절이다. 소목의 순서는 앞 구절의 ‘앞주 해설’과 같다. 종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좌소우목의 순서에 따라 했으며, 서작 즉 벼슬의 높낮이는 귀천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고, 서사 즉 일의 순서는 어진 이를 분별하기 위한 것이고, 어질다는 것은 각자 맡은 일을 잘하는 것을 말한다. 제사를 지내고 여럿이 음복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데 이때 아랫 사람이 윗사람에게 먼저 술을 올리는 것은 즉, 직책은 비록 나보다 낮으나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먼저 술을 올리는 것은 천한 사람에게까지 미치는 것을 말한다. 잔치를 베풀고 머리털을 본다는 것은 나이를 분별해 나이 순에 따라 하기 위한 것이다.

宗廟之次는 左爲昭오 右爲穆而子孫이 亦以爲序하야 有事於太廟則子姓兄弟群昭群穆이 咸在而不失其倫焉이라 爵은 公侯卿大夫也ㅣ오 事는 宗祝有事之職事也ㅣ라 旅는 衆也ㅣ오 酬는 導飮也ㅣ니 旅酬之禮에 賓弟子兄弟之子ㅣ 各擧觶於其長而衆相酬하니 蓋宗廟之中에 以有事爲榮이라 故로 逮及賤者하야 使亦得以申其敬也ㅣ라 燕毛는 祭畢而燕이면 則以毛髮之色으로 別長幼하야 爲坐次也ㅣ라 齒는 年數也ㅣ라
종묘에서 제사지내는 차례는 좌측에는 소이요 우측은 목이 되고, 자손들 또한 순서가 있어 일이 태묘에 있게 되면(제사를 지내게 되면) 아들 조카 형제들이 여러 소와 여러 목이 다 있어 그 질서를 잃지 않느니라. 작은 공과 후와 경대부이오, 사는 종묘제사의 축관과 유사(집사)의 직책의 일이라. 여는 무리이오, 수는 마심을 인도함(권함)이니, 여럿이 술을 마시는 예에 빈제자(손님으로 온 아우나 자식)와 형제의 자식들이 각각 술잔을 그 어른에게 먼저 들어 올리고 여럿이 서로 수작을 하니, 대개 종묘 제사를 지내는 중에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써 영화를 삼느니라. 그러므로 천한 자에게까지 미처 하여금 또한 써 그 공경을 거듭함이라. 연모는 제를 다 지내고 잔치를 베풀게 되면 모발의 색으로써 어른과 어린이를 분별해서 앉는 차례를 정하는 것이라. 치는 나이 수이라.

觶 : 술잔 치(향음주(鄕飮酒)의 의식에 쓰이는 뿔잔)

踐其位하야 行其禮하며 奏其樂하며 敬其所尊하며 愛其所親하며 事死如事生하며 事亡如事存이 孝之至也ㅣ니라
그 (선왕의) 자리(지위)를 밟아서 그 예를 행하며 그 음악을 연주하며 그 높이신 바를 존경하며 그 친하셨던 바를 사랑하며,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있는 이 섬기듯이 하고, 없는 이 섬기기를 있는 이 섬기듯이 하는 것이 효의 지극함이니라.

踐은 猶履也ㅣ오 其는 指先王也ㅣ라 所尊所親은 先王之祖考 子孫 臣庶也ㅣ라 始死를 謂之死오 旣葬則曰反而亡焉이니 皆指先王也ㅣ라 此는 結上文兩絶이니 皆繼志述事之意也ㅣ라
천은 밟음과 같음이라. 기는 선왕을 가리킴이라. 높인 바 친한 바는 선왕의 조상 자손 신하와 백성을 말한 것이라. 비로소 죽는 것을 ‘사’라 이르고 이미 장사를 지내면 돌아가서 없어지는 것이니 다 선왕을 가리킴이라. 이것은 윗글의 두 마디를 맺은 것이니 모두 뜻을 잇고 일을 따르는 뜻이다.

郊社之禮는 所以事上帝也ㅣ오 宗廟之禮는 所以祀乎其先也ㅣ니 明乎郊社之禮와 禘嘗之義면 治國은 其如示諸掌乎인뎌
교제(郊祭)와 사제(社祭)는 상제를 섬기는 바이오 종묘의 예는 그 선조를 제사지내는 것이니 교제와 사제의 예와 체제(禘祭)와 상제(嘗祭)의 뜻에 밝으면 나라 다스림은 그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을진저.

郊 : 들 교 禘 : 큰 제사 체(천자가 정월에 南郊에서 하늘에 지내는 제사) 嘗 : 가을제사 상

[본문 해설]
제사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천자문에도 “嫡後嗣續하고 祭祀蒸嘗이라(적자로 뒤를 잇고 증제와 상제를 지냄이라” 하였듯이 봄의 제사는 사제(祠祭), 여름의 제사는 약제(禴祭), 가을의 제사는 상제(嘗祭), 겨울의 제사는 증제(蒸祭)라 한다. 또한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교제(郊祭), 토지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사제(社祭)라 하여 상제를 섬기고, 종묘의 제사는 왕가의 선조를 제사지내는 것이다.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낼 때 동지(冬至)에는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하지(夏至)에는 북교(北郊)에서 땅에 제사를 지낸다. 체제(禘祭)는 천자가 시조(始祖)를 하늘에 배향하여 지내는 제를 말하고, 천자가 하늘과 땅에 제사지내는 것을 봉선(封禪)이라 한다. 천자문에도 봉선의식에 대해 “嶽宗恒垈요 禪主云亭하니라”고 나와 있다.
이렇게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고 철마다 제사를 지내는 뜻에 밝으면, 결국 천지신명과 사시변화에 중용을 지키는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손바닥을 보듯이 쉬울 것이다. 즉 나무의 뿌리인 근본이 튼튼하면 나무 가지가 잘 벋고 꽃과 이파리가 무성하여 열매가 잘 맺듯이, 만물의 근본에 해당하는 천지신명과 사시변화를 잘 살펴 예를 갖춘다면 당연히 나라도 잘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이다.

郊는 祭天이오 社는 祭地니 不言后土者는 省文也ㅣ라 禘는 天子宗廟之大祭니 追祭太祖之所自出於太廟하고 而太祖로 配之也ㅣ라 嘗은 秋祭也ㅣ니 四時皆祭로대 擧其一耳라 禮必有義하니 對擧之는 互文也ㅣ라 示는 與視로 同하니 視諸掌은 言易見也ㅣ라 此는 與論語文意로 大同小異하니 記有詳略이라
교는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오, 사는 땅에 제사하는 것이니 후토라고 말한 것은 글을 덜음이라. 체는 천자가 종묘에 지내는 큰 제사이니 태조가 나온 바 태묘에 추제하고 태조를 배향함이라. 상은 가을 제사이니 사시에 모두 제사하는데 그 하나를 들었을 뿐이라. 예에는 반드시 뜻이 있으니 상대하여 든 것은 호문이다. 시는 시와 같으니 손바닥을 본다는 것은 쉽게 봄을 말한다.l 이는 논어의 글 뜻과 대동소이하니, 기록함에 상세함과 간략함이 있을 따름이라.

右는 第十九章이라

哀公이 問政한대
애공이 정사를 묻자

[본문 해설]
노나라의 인군인 애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질문한 것이다.
애공은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왕(BC494~BC468)으로 성은 희(姬) 이름은 장(蔣, 將)이다. 당시 노나라에는 삼환씨(三桓氏)라 불리는 공족(公族)의 힘이 강했으며, 대외적으로 오(吳)와 제(齊)나라의 공격을 받아 노나라는 정국이 불안하였다. 위(衛)나라에서 귀국한 공자도 BC479년 불우한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 뒤 애공은 월(越)나라의 힘을 빌려 삼환씨를 제거하려 했으나, 도리어 삼환씨의 공격을 받아 재위 27년만에 죽었다.-[한국세계대백과사전 제18권, 동서문화]

哀公은 魯君이니 名은 蔣이라
애공은 노나라 임금이 이름은 장이라

蔣 : 수풀 장, 성 장

子ㅣ曰 文武之政이 布在方策하니 其人이 存則其政이 擧하고 其人이 亡則其政이 息이니라
공자 말씀하시길 문왕과 무왕의 정치가 펼쳐진 것이 방책(목판과 책)에 있으니 그 사람이 있으면 그 정치가 일어나고 그 사람이 없으면 그 정치가 마비되느니라.

策 : 대쪽 책(죽간(簡)을 말아놓은 두루마리 책을 말한다.)

[본문 해설]
애공의 물음에 공자는 정치를 잘한 문왕과 무왕의 정치에 방책에 모두 있으니 그것을 잘 알고 그대로 따르면 정치를 잘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정치를 잘못할 것이라고 답하는 내용이다.

方은 版也ㅣ오 策은 簡也ㅣ라 息은 有滅也ㅣ라 有是君有是臣則有是政矣라
방은 판자요 책은 죽간이라. 식은 멸(없어짐)과 같음이라 이와같은 군과 이와같은 신이 있으면 곧 이 정사가 있으니라.

道는 敏政하고 地道는 敏樹하니 夫政也者는 蒲盧也ㅣ니라
사람의 도는 정치에 민첩하고 땅의 도는 심는데 민첩하니 대저 정치라는 것은 부들과 갈대와 같으니라.

蒲 : 부들 포 盧 : 갈대 로

敏은 速也ㅣ라 蒲盧는 沈括以爲蒲葦是也ㅣ라 以人立政이 猶以地種樹니 其成이 速矣요 而蒲葦는 又易生之物이니 其成이 尤速也ㅣ라 言人存政擧ㅣ 其易如此라
민은 빠름이오, 포로는 심괄((1031~1095, 北宋 때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왕안석의 정치개혁 때 수리와 관개를 맡았다. 天地를 모시는 의식 절차를 南郊식으로 정리했다. 여기에서 심괄을 사람이름으로 보지 않고 ‘침괄’이라 읽고 ‘잠겨 모여’란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이 써 포위(부들과 갈대)라 하니 이것이라. 사람으로써 정치를 세우는 것이 땅에 나무를 심는 것과 같으니 그 이룸이 빠르며, 포위는 또한 쉽게 나오는 물건이니 그 이룸이 또한 빠름이라. 사람이 있어서 정사가 거행되는 것이 그 쉬움이 이와같음을 말함이라.

括 : 모일 괄 葦 : 갈대 위

故로 爲政이 在人하니 取人以身이오 脩身以道ㅣ오 脩道以仁이니라
그러므로 정치를 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으니 사람을 취하는 것은 몸으로써 함이오 몸을 닦는 것은 도로써 함이오 도를 닦은 것은 인으로써 함이라.

此는 承上文人道敏政而言也ㅣ라 爲政在人은 家語에 作爲政이 在於得人이니 語意尤備라 人은 謂賢臣이오 身은 指君身이라 道者는 天下之達道요 仁者는 天地生物之心而人得以生者니 所謂元者는 善之長也라 言人君爲政이 在於得人이니 而取人之則은 又在修身이니 能仁其身이면 則有君有臣而政無不擧矣라
이것은 윗글을 이어 사람의 도는 정치에 민감함을 말함이라. 정치가 사람에 있다는 것은 『공자가어』에 ‘정치를 하는 것이 사람을 얻는 것에 있다’고 지어져 있으니 『논어』에 말뜻이 더 잘 갖추어져 있음이라. 인은 어진 신하를 말함이오 신은 인군의 몸을 가리킴이라. 도는 천하의 통한 도요 인은 천지생물의 마음이요 사람이 얻어서 써 나옴이니 원은 선의 어른이라. 인군이 정사를 함이 사람을 얻음에 있고 사람을 취하는 법은 또 몸을 닦는데 있으니 능히 그 몸을 어질게 하면 곧 인군이 있고 신하가 있어 정사가 일어나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 것이라. ‘元者는 善之長也’란 글귀는 주역에 있는 말로 중용 제16장 제2절의 앞주 해설을 참고하기 바란다.

仁者는 人也ㅣ니 親親이 爲大하고 義者는 宜也ㅣ니 尊賢이 爲大하니 親親之殺와 尊賢之等이 禮所生也ㅣ니라
어질다는 것은 사람이니 어버이를 친함이 큼이 되고 의라는 것은 마땅함이니 어진 이를 높이는 것이 큼이 되니 어버이를 친하면서 줄이는 것과 어진 이를 높이는 차등이 예가 생하는 바이니라

殺 : 덜 쇄

[본문 해설]
애공이 정사에 관해 묻자, 처음에 공자는 정치는 사람에게 있고 사람을 얻는 것은 자신이 도로 몸을 닦아야 하고, 인으로 도를 닦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인이라는 것은 바로 사람이라고 했다. 仁은 글자 자체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人)끼리 서로(二) 사랑을 베푸는 뜻이 담겨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고 애완동물이나 다른 것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진정 사랑이 아니다. 그러면 인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무엇이 가장 중요하겠는가. 그것은 내가 나온 근원 즉 어버이라는 것이다. 仁은 봄이고 義는 가을에 해당하는 것으로 仁이 내적인 것이라면 義는 외적인 것이다. 仁을 體로 한다면 義는 用이 된다. 그러므로 내적인 가정에서 어버이를 친히 하는 것은 體가 되는 인을 실현하는 것이고, 외적으로 나아가 세상의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은 用인 의가 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내적인 체가 되는 인은 가장 근본이 되는 어버이를 친히 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바깥으로 점점 줄여나가야 하는데 즉 어버이는 나의 망극한 은인이시니 최고의 사랑을 베풀어야 하고 다음으로 형제간, 숙질간 등으로 줄여나가는 것이다. 喪을 당했을 때 3년복, 1년복, 9개월복, 5개월복, 3개월복 등이 이러한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어진 이를 높이는 데에도 차등이 있어야 하는데 가령 벼슬하는 이에게는 등급이 있고, 현인에게도 대현, 성현, 군자 등의 차등이 있고, 연장자에게 절을 해야 하듯이 바로 여기에서 절도가 있는 예가 나오는 것이다.

人은 指人身而言이라 具此生理하야 自然便有惻怛慈愛之意하니 深體味之면 可見이라 宜者는 分別事理하야 各有所宜也ㅣ라 禮則節文斯二者而已라
인은 사람의 몸을 가리키는 말이라. 이 생리(생하는 이치)를 갖추고 있어 자연히 문득 슬퍼하고(惻怛) 자애로운 뜻이 있으니 깊이 체득하여 맛들이면 가히 볼 수 있느니라. 宜는 사리를 분별하여 각각 마땅한 바를 두는 것이라. 예는 이 두 가지(仁과 義)를 절도있게 조절하여 무늬나게 할 뿐이라.

便 : 문득 변 惻 : 슬플 측 怛 : 슬플 달

[앞주 해설]
사람은 아무리 악한 이일지라도 슬퍼하고 자애로운 마음이 있어 어린 아이가 기어가다 물에 빠지려고 하면 달려가 구해준다. 이렇듯 누구에게나 타고난 이치를 갖추고 있어 깊이 몸에 체득하여 맛들이면 가히 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다. 生理와 관련해서 맹자는 四端으로써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惻隱之心은 仁之端也ㅣ오 羞惡之心은 義之端也ㅣ오 辭讓之心은 禮之端也ㅣ오 是非之心은 知之端也ㅣ니라 人之有是四端也ㅣ 猶其有四體也ㅣ니 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는 自賊者也ㅣ오 謂其君不能者는 賊其君者也ㅣ니라 凡有四端於我者를 知皆擴而充之矣면 若火之始然하며 泉之始達이니 苟能充之면 足以保四海오 苟不充之면 不足以事父母ㅣ니라 - 『맹자』 公孫丑章句上에서(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요 수오지심은 의의 단서요 사양지심은 예의 단서요, 시비지심은 지의 단서이니라. 사람이 이 사단을 가지고 있음은 그 사체를 있음과 같으니 이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를 해치는 자요. 그 군주가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 군주를 해치는 자이니라. 무릇 사단이 나에게 있는 것을 다 넓혀서 채울 줄 알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며 샘물이 처음 나오는 것과 같을 것이니 진실로 능히 이것을 채운다면 족히 사해를 보호할 수 있고, 진실로 채우지 못한다면 부모도 족히 섬기지 못하느니라.)

在下位하야 不獲乎上이면 民不可得而治矣리라
아래 자리에 있어서 위에서 얻지 못하면 백성을 가히 얻어 다스리지 못하리니라.

[본문 해설]
낮은 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인 자기 상관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그런 사람이 어찌 자기 부하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鄭氏曰 此句在下하니 誤重在此라
정씨(鄭玄)이 말하기를, “이 글귀는 아래에 있는데, 잘못으로 거듭하여 여기에 있느니라.”

故로 君子ㅣ 不可以不脩身이니 思脩身인댄 不可以不事親이오 思事親인댄 不可以不知人이오 思知人인댄 不可以不知天이니라
그러므로 군자가 가히 써 몸을 닦지 않음이 없으니 몸을 닦음을 생각할진댄 가히 써 어버이섬김을 아니치 못하고 어버이 섬김을 생각할진댄 가히 써 사람을 알지 아니치 못하고 사람 앎을 생각할진댄 가히 써 하늘을 알지 아니치 못하느니라.

[본문 해설]
군자가 인을 행하려면 수신을 해야 한다. 이렇게 몸을 닦을 것을 생각하면 먼저 백행의 근본인 효도를 생각지 않을 수 없으니 먼저 어버이를 섬겨야 할 것이고, 어버이를 섬기려고 생각하면 어떻게 섬겨야 할지 먼저 사람을 알아야 하고, 사람을 알려면 먼저 하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정치를 하려면 철학이 있어야 하는데 그 철학이 바로 하늘, 곧 자연의 이치에서 나왔음을 깊이 새기게 해주는 말이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고대부터 형성된 동양정치철학이다. 동양정치철학의 근간이 되었던 홍범구주가 바로 정치를 하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으로 자연의 이치인 오행을 첫째로 들고 있으며 인군이 되는 왕은 바로 가운데(中) 자리에서 不偏不倚하고 無偏無陂하며 無黨無偏의 자세로 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爲政在人하고 取人以身이라 故로 不可以不修身이오 修身以道하고 修道以仁이라 故로 思修身댄 不可以不事親이오 欲盡親親之仁댄 必由尊賢之義라 故로 又當知人이오 親親之殺와 尊賢之等이 皆天理也ㅣ라 故로 又當知天이라
정치를 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고 사람을 취하는 것이 몸으로써 함이라. 그러므로 가히 써 몸을 닦지 않음이 없고 몸을 닦는 것은 도로써 하고 도를 닦는 것은 인으로써 함이라. 그러므로 몸을 닦음을 생각할진댄 가히 써 어버이를 친하지 아니함이 없고, 어버이 친하는 그 사랑을 다하고자 할진대 반드시 어진 이를 높이는 의리로써 말미암음이라. 그러므로 또 마땅히 사람을 알아야 하고 어버이를 친하면서부터 덜어지는 것과 어진 이를 높이는 데서부터 차등을 두는 것은 모두가 하늘의 이치이라. 그러므로 또 마땅히 하늘을 알아야 하느니라.

殺 : 덜 쇄

天下之達道ㅣ 五에 所以行之者는 三이니 曰君臣也父子也夫婦也昆弟也朋友之交也五者는 天下之達道也ㅣ오 知仁勇三者는 天下之達德也ㅣ니 所以行之者는 一也ㅣ니라
천하의 통한(공통된) 도가 다섯에 써 행하는 바는 삼이니 가로되 군신과 부자와 부부와 형제와 벗의 사귐, 다섯 가지는 천하의 통한 도이고, 지 인 용 셋은 천하의 통한 덕이니 써 행하는 바는 하나이니라.

[본문 해설]
達道는 체가 되고 達德은 용이니 윗글은 5체3용(五體三用)을 말하고 있다. 道는 가는 길이고, 德은 길을 가면서 베푸는 것이기에 達道는 체가 되고 達德은 용이 된다. 그렇지만 달도를 행하나 달덕을 행하나 행하는 것은 한 가지일 뿐이다. 공자의 “吾道는 一以貫之니라”와 통하는 내용이다.

達道者는 天下古今所共由之路니 卽書所謂五典이오 孟子所謂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이 是也ㅣ라 知는 所以知此也ㅣ오 仁은 所以體此也ㅣ오 勇은 所以强此也ㅣ니라 謂之達德者는 天下古今所同得之理也ㅣ라 一은 則誠而已矣라 達道는 雖人所共由나 然이나 無是三德이면 則無以行之오 達德은 雖人所同得이나 然이나 一有不誠이면 則人欲이 間之하야 而德非其德矣니라 程子ㅣ曰所謂誠者는 止是誠實此三者니 三者之外에 更別無誠이니라
달도라는 것은 천하 고금에 한 가지 말미암은 바의 길이니 즉 『서경』에 이른바 五典이오, 『맹자』에 이른바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이 이것이라. 지는 써 이것(달도)을 아는 바이오 인은 써한 바 이것을 체득하는 것이고 용은 써한 바 이것을 강제로 이끌어가는 것이니라. 달덕이라 하는 것은 천하 고금에 한 가지 얻은 바의 이치이라. 일은 즉 정성일 뿐이라. 달도는 비록 사람이 한 가지 말미암은 바이나 그러나 이 삼덕이 없으면 즉 써 행하지 못함이오 달덕은 비록 사람이 한가지로 얻어진 바이나 그러나 하나라도 성실함이 없으면 즉 사람 욕심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덕이 그 덕이 아니니라. 정자 말씀하시길 “이른바 정성이라는 것은 다만 이 세 가지를 성실히 하는 것이니 세 가지 외에는 다시 별도로 성실이 없느니라.”

[앞주 해설]
공통된 도라는 것은 천하에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모두 행해야 할 길이다. 五體인 달도를 『서경』우서 순전(虞書 舜典)에서는 五典(다섯 가지 전법)이라 했으며, 『맹자』에서는 오륜(五倫)으로 설명(滕文公章句上편)하고 있다. 이 五體를 아는 것이 知이고, 五體를 체득하여 그대로 베풀고 행하는 것이 仁이며, 알고 행하는 것을 힘써 나가는 것이 勇이다. 『주역』중천건괘 대상전에 “하늘의 운행이 굳건하니, 군자가 이로써 스스로 굳세어 쉬지 않느니라(象曰 天行이 健하니 君子ㅣ 以하야 自彊不息하나니라)”고 했듯이 강하게 이끌고 나가는 것을 말한다.
달덕이라는 것은 천하에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그 길을 가면서 한 가지로 얻은 이치이다. ‘德은 得也라’ 하였듯이 덕은 얻는 것인데 그것은 오직 정성으로만 얻어지는 것이다. 『중용』을 ‘정성 誠’ 한 글자로 압축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실한 정성이 아니면 달덕이나 달도는 모두가 한갓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다. 정자의 인용구절도 知仁勇 세 가지에 성실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글이다.

或生而知之하며 或學而知之하며 或困而知之하나니 及其知之하야난 一也ㅣ니라 或安而行之하며 或利而行之하며 或勉强而行之하나니 及其成功하야난 一也ㅣ니라
혹 날 때부터 알며 혹 배워서 알며 혹 곤해서 아느니 그 앎에 이르러서는 한 가지이니라. 혹 편안하면서 행해지며 혹 이롭게 하여 행하며 혹 힘써서 행하나니 그 성공에 이르러서는 한 가지이니라.

[본문 해설]
앎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공자나 노자 같은 성인처럼 날 때부터 저절로 그 이치를 아는 사람이 있는 반면(生而知之), 현인은 성인처럼 저절로 알지는 못하나 열심히 공부하여 알고(學而知之), 또 현인처럼 재주가 훌륭하지 못하나 투철한 사람은 열심히 애쓰고 갖은 고초를 감내하며 이치를 알아가는(困而知之) 방법이 있는데 결국에 가서 아는 것은 모두가 한 가지로 같을 뿐이다.
『주역』계사상전 제12장에 “神而明之는 存乎其人하고 黙而成之하며 不言而信은 存乎德行하니라(신비스러워 밝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고, 묵묵해서 이루며 말을 아니 해도 믿음은 덕행에 있느니라)”고 하였다. 알면 그대로 실행해야 하는데 나면서부터 저절로 안 사람은 곧 묵묵히 이루며 말을 하지 않아도 덕행을 행하듯이 편안하게 행하고, 열심히 배워서 안 사람은 이롭게 하는 가운데 행하고, 어려움을 감내하며 안 사람은 힘써서 행하니 곧, 安而行之(用)는 生而知之(體)와 같고 利而行之(用)는 學而知之(體)와 같으며, 勉强而行之(用)는 困而知之(體)와 같다.
윗글 역시 體用의 이치로 설명하였는데, 지적인 것은 체가 되고, 공을 이루는 것은 용으로 하였으나 모두가 한 가지임을 밝혔다.

知之者之所知와 行之者之所行은 謂達道也ㅣ라 以其分而言하면 則所以知者는 知也ㅣ오 所以行者는 仁也ㅣ오 所以至於知之成功而一者는 勇也ㅣ니라 以其等而言하면 則生知安行者는 知也오 學知利行者는 仁也오 困知勉行者는 勇也ㅣ라 蓋人性이 雖無不善이나 而氣禀이 有不同者라 故로 聞道에 有蚤莫하며 行道에 有難易나 然이나 能自强不息이면 則其至는 一也ㅣ니라 呂氏曰 所入之塗雖異나 而所至之域則同하니 此는 所以爲中庸이어니와 若乃企生知安行之資하야 爲不可幾及이라 하고 輕困知勉行하야 謂不能有成이라 하면 此는 道之所以不明不行也ㅣ니라
아는 자의 아는 바와 행하는 자의 행하는 바는 달도라 이르니라. 써 그것을 나누어서 말한다면 써한 바 아는 자는 아는 것이요 써한 바 행하는 자는 어진 것이요 써한 바 알아서 성공에 이르러서 하나라는 것은 용맹이니라. 써 그것을 등급으로 말하면 나면서부터 알고 편안히 행하는 것은 지(순임금의 大知)이고, 배워서 알고 이롭게 행하는 것은 어짊(안자의 克己復禮, 克己爲仁)이오, 곤해서 알고 힘써서 행하는 것은 용맹(자로의 용맹)이라. 대개 사람의 사람의 성품이 비록 선하지 않음이 없으되 기품이 같지 않음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도를 들음에 빠름과 늦음이 있으며, 도를 행함에 어렵고 쉬움이 있느니라. 그러나 능히 스스로 강하여 쉬지 않는다면 즉 그 이르는 것은 하나이니라. 여씨가 말하기를 들어가는 바의 길이 비록 다르나 이르는 바의 경계는 같으니 이것이 써 중용을 하는 바이어니와 만약에 (성인이 행하는) 生知와 安行의 바탕을 바래서 가히 거의 미치지 못한다 여기고, 困知와 勉行을 가벼이 여겨 이르되 능히 이룸이 있지 못하다고 이르면, 이는 도가 밝아지지 못하고 행해지지 못하는 바이니라

蚤 : 일찍 조 莫 : 저물 모 企 : 바랄 기

(子ㅣ曰) 好學은 近乎知하고 力行은 近乎仁하고 知耻는 近乎勇이니라
공자 말씀하시길 배움을 좋아함은 지에 가깝고 힘써 행함은 어짊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앎은 용맹에 가까우니라

子曰 二字는 衍文이라 此는 言未及乎達德而求以入德之事라 通上文三知爲知요 三行爲仁이니 則此三近者는 勇之次也ㅣ라 呂氏曰 愚者는 自是而不求요 自私者는 徇人欲而忘返이요 懦者는 甘爲人下而不辭라 故로 好學이 非知나 然이나 足以破愚요 力行이 非仁이나 然이나 足以忘私요 知耻가 非勇이나 然이나 足以起懦니라
'子’와 ‘曰’ 두 자는 연문(혹처럼 붙음)이라. 이것(好學 ․ 力行 ․ 知恥)은 달덕에 아직 미치지는 못하고 써 덕에 들어가는 일을 구함을 말함이라. 윗글을 통해서 三知(生而知之 ․ 學而知之 ․ 困而知之)는 지요, 三行(安而行 ․ 利而行 ․ 勉强行)은 인이 되는 것이니 즉 이 세 가지 가까움은 勇의 다음이라. 여씨 말하기를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옳다고는 하면서 구하지 못하고 스스로 삿된 자는 사람의 욕심을 따라서 (옳은 생각, 본성에) 돌아올 줄을 잊어버리고 게으른 자는 남의 아래가 됨을 좋아하고 사양하지 않음이라. 그러므로 배움을 좋아하는 것이 知는 아니나 족히 써 우매함을 깨는 것이요, 힘써 행하는 것이 仁은 아니나 족히 써 사사로움을 잊어버리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勇은 아니나 족히 써 게으름에서 일어남이니라.

徇 : 좇을 순 返 : 돌아올 반 懦 : 게으를 나 耻 : 恥(부끄러울 치)의 俗字

[앞주 해설]
연문이라 함은 굳이 있을 필요가 없는 말이다(제20장은 애공의 물음에 공자가 계속 답변하는 내용으로 이미 앞에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知斯三者則知所以脩身이오 知所以脩身則知所以治人이오 知所以治人則知所以治天下國家矣리라
이 세 가지를 알면 수신을 알고, 수신을 알면 사람 다스림을 알고, 사람 다스림을 알면 천하국가 다스림을 앎이라.

[본문 해설]
대학의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를 이룰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몸 닦을 줄을 알면 明德을 알고 新民할 수 있어 나라와 천하를 다스릴 수 있음을 밝힌 글이다.

斯三者는 指三近而言이라 人者는 對己之稱이라 天下國家는 則盡乎人矣라 言此하야 以結上文修身之意하고 起下文九經之端也ㅣ라
이 세 가지는 삼근을 가르쳐서 말함이라. 남이라는 것은 자기와 상대해서 일컬음이라. 천하국가는 곧 사람에게 다함이라. 이것을 말하여 써 윗글의 수신의 뜻을 맺고, 아랫글의 九經의 실마리를 일으킴이라.

凡爲天下國家ㅣ 有九經하니 曰修身也와 尊賢也와 親親也와 敬大臣也와 體群臣也와 子庶民也와 來百工也와 柔遠人也와 懷諸侯也ㅣ니라
무릇 천하국가를 함(다스림)이 구경이 있으니 가로대 몸을 닦음과 어짊을 높임과 어버이를 친함과 대신을 공경함과 여러 신하를 몸소 체득함과 여러 백성을 내 자식처럼 여김과 백공들을 오게 함과 먼 곳의 사람들을 회유함과 제후들을 포용함이라.

子 : 아들같이 여길 자, 사랑할 자

[본문 해설]
여기서 九經은 『書經』 「洪範九疇」에서 연원했다. 홍범구주는 치수법이자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가장 근본적인 통치철학이 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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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은 常也ㅣ라 體는 謂設以身處其地而察其心也ㅣ라 子는 如父母之愛其子也ㅣ라 柔遠人은 所謂無忘賓旅者也ㅣ라 此는 列九經之目也ㅣ니라 呂氏曰 天下國家之本이 在身이라 故로 脩身이 爲九經之本이라 然이나 必親師取友然後에 脩身之道ㅣ 進이라 故로 尊賢이 次之하고 道之所進이 莫先其家라 故로 親親이 次之하고 由家以及朝廷이라 故로 敬大臣體群臣이 次之하고 由朝廷以及其國이라 故로 子庶民來百工이 次之하고 由其國以及天下라 故로 柔遠人懷諸侯가 次之하니 此는 九經之序也ㅣ라 視群臣을 猶吾四體하고 視百姓을 猶吾子하니 此는 視臣視民之別也ㅣ니라
경은 떳떳함이라. 체는 몸으로 베풀어 그 곳에 거처해 그 마음을 살피는 것을 이름이라. 자는 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음이라. 유원인은 (외국에서 오는) 손님과 나그네를 잊음이 없음이라. 이것은 구경의 조목을 벌려 놓음이라. 여씨가 말하기를 천하국가의 근본은 (인군) 몸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수신이 구경의 근본이 됨이라. 그러나 반드시 스승을 친하고 벗을 취한 후에 수신의 도가 나아감이라. 그러므로 尊賢이 그 다음이고, 도가 나아가는 바가 그 집보다 먼저 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親親이 그 다음하고, 가정으로 말미암아 써 조정에 미치느니라. 그러므로 敬大臣體群臣이 그 다음하고, 조정으로 말미암아 써 그 나라에 미침이라 그러므로 子庶民來百工이 그 다음하고, 그 나라로 말미암아 써 천하에 미침이라 그러므로 柔遠人懷諸侯가 그 다음이니 이것은 구경의 순서이라. 여러 신하 보기를 나의 팔다리와 같이 하고 백성 보기를 나의 자식처럼 하니, 이는 신하를 봄과 백성을 봄의 다름이라.

修身則道立하고 尊賢則不惑하고 親親則諸父昆弟ㅣ 不怨하고 敬大臣則不眩하고 體群臣則士之報禮ㅣ 重하고 子庶民則百姓이 勸하고 來百工則財用이 足하고 柔遠人則四方이 歸之하고 懷諸侯則天下畏之니라
몸을 닦으면 도가 성립되고, 어짊을 높이면 미혹되지 아니하고, 친척을 친하면 제부(諸父 : 아버지의 형제들)와 형제들이 원망하지 아니하고, 대신을 공경하면 어지럽지(혼란하지) 아니하고, 여러 신하를 직접 체감(체험)하면 선비들이 보답하는 예가 후중하고, 백성을 자식처럼 여기면 백성이 서로 권면(勸勉)하고, 기술 있는 이들을 모두 오게 하면 재물 씀(나라 경제)이 풍족해지고, 먼 데의 사람들을 유화하면(잘해주면) 사방(각처)에서 돌아오고, 제후들을 모두 품으면 천하가 두려워하니라.

[본문 해설]
옛날에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먼저 자기 몸을 닦는 것, 곧 수신을 가장 근본으로 하여야 함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여기서는 수신의 효력에 대해 열거하고 있는데, 가까운 내 주변부터 점차 나아가 먼 곳의 사람은 물론 신분이 하찮은 이들까지 모두 잘 대해 주어야 하는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면 집안이 화목해지고 신하들 사이에 질서가 잡히고 백성들이 서로 힘써 일함은 물론 기술가진 이들이 나라를 위해 더욱 그 기술을 개발하여 경제가 풍족해지고 덕분에 그 나라를 보기 위해 세계 각국의 많은 관광객들까지 몰려옴을 얘기하였다. 임금은 不惑하고 不眩함이 없이 나라를 다스리되 백성을 풍족하게 하려면 경제를 일으켜야 한다.
주역에서 이러한 교역의 이치를 계사하전 제2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日中爲市하야 致天下之民하며 聚天下之貨하야 交易而退하야 各得其所케 하니 蓋取諸噬嗑하니라(한낮에 저자를 만들어 천하의 백성을 이르게 하며 천하의 재물을 모아서 교역하고 물러나 각각 그 바를 얻게 하니 대개 저 서합괘에서 취하니라)”
참고로 관광(觀光)이라 함은 본래 ‘觀國之光’으로 ‘나라의 빛을 본다’는 뜻이다. 여기서 빛은 정치를 말하는 것으로 나라의 정치가 잘되어 빛이 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 잘사는 나라를 보기 위해 많은 나라 사람들이 구경을 간다는 데서 ‘觀光’의 뜻으로 사용된다. 주역 20번째괘인 風地觀괘 六四효에 나오는 말이다.

此는 言九經之效也ㅣ라 道立은 謂道成於己而可爲民表니 所謂皇建其有極이 是也ㅣ라 不惑은 謂不疑於理라 不眩은 謂不迷於事라 敬大臣이면 則信任專而小臣이 不得以間之라 故로 臨事而不眩야오 來百工이면 則通功易事하야 農末이 相資라 故로 財用이 足하고 柔遠人이면 則天下之旅ㅣ 皆悅而願出於其途라 故로 四方이 歸하고 懷諸侯면 則德之所施者ㅣ 博而威之所制者ㅣ 廣矣라 故로 曰天下ㅣ畏之라 하니라
이것은 구경의 효력을 말함이라. 도립은 도가 자기 몸에서 이루어져 백성의 표본이 되니 이른바 (『서경』 「홍범구주」에서 말하는) 황건기유극(황이 그 유극을 세움)이 이것이라. 불혹은 이치에 의심치 않음을 말함이라. 불현은 일에 아득하지 않음을 이름이라. 대신을 공경하면 신임이 전일(專一)해서 낮은 신하(小臣)들이 얻어 써 이간질을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일에 임해서 현혹됨이 없음이오, 모든 기술자들을 오게 하면 공(기술)을 통하고 일을 바꿔 하여(교역) 농업과 말업(상공업 등 기타 업종)이 서로 바탕함이라. 그러므로 재물 씀이 족하고, 먼 곳의 사람을 부드럽게 해서 오게 하면 모두가 기뻐서 천하의 나그네가 그(천자의 나라) 길에 나다니기(관광)를 원함이라. 그러므로 사방에서 돌아오고, 제후를 포용하면 덕을 베푸는 바가 넓어져 위엄을 짓는 바가 넓어지느니라. 그러므로 ‘천하가 두려워함이라’고 한 것이라.

齊明盛服하야 非禮不動은 所以修身也ㅣ오 去讒遠色하며 賤貨而貴德은 所以勸賢也ㅣ오 尊其位하며 重其祿하며 同其好惡는 所以勸親親也ㅣ오 官盛任使난 所以勸大臣也ㅣ오 忠信重祿은 所以勸士也ㅣ오 時使薄斂은 所以勸百姓也ㅣ오 日省月試하야 旣禀稱事난 所以勸百工也ㅣ오 送往迎來하며 嘉善而矜不能은 所以柔遠人也ㅣ오 繼絶世하며 擧廢國하며 治亂持危하며 朝聘以時하며 厚往而薄來난 所以懷諸侯也ㅣ니라
재계(齋戒)하고 밝게(깨끗이) 하고 옷을 성대하게 해서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음은 몸을 닦는 바이오, 참소하는 이를 버리고 여색을 멀리하며 재물을 천하게 여기고 덕 있는 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어진 이를 권면하는 바이오, 그 벼슬자리를 높여주며 그 봉록을 후하게 주며 그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한가지로 하는 것은 친척 친하는 것을 권면하는 바이오, 벼슬을 성대하게 하고 부림을 맡기는 것은 대신을 권면하는 바이오, 충성으로 대하고 녹을 후하게 주는 것은 선비를 권면하는 바이오, 때로 부리고 세금을 박하게 하는 것은 백성을 권면하는 바이오, 날로 살피고 달로 시험을 하여 봉록(희름, 旣稟)을 일에 맞추는 것은 백공을 권면하는 바이오, 가는 이를 전송하고 오는 이를 맞이하며 선한 이를 아름다이 여기고 능치 못한 이를 가긍히 여기는 것은 먼 사람을 부드럽게 하는 바이오, 끊어진 세대를 이어주며 폐지된 나라를 일으켜 주며 난을 다스리고 위태로운 곳을 붙들어 주고 조회(朝會)와 빙례(聘禮)를 때로 써 하며 가는 이를 후하게 해주고 오는 이를 박하게 하는 것은 제후를 포용하는 바이니라.

讒 : 참소할 참 薄 : 엷을 박 斂 : 거둘 렴 旣 : 곳집 희(饎) 禀 : 곳집 름(廩) 稱 : 맞을 칭 嘉 : 아름다울 가 矜 : 불쌍히 여길 긍 聘 : 찾아갈 빙

[본문 해설]
앞 절에서는 몸을 닦는 효력을 말했고, 여기서는 몸을 닦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데 그 기본이 예를 갖추는 것으로 들고 있다. 『주역』 뇌천대장(雷天大壯)괘에 ‘예가 아니면 밟지 않는다’(象曰 雷在天上이 大壯이니 君子ㅣ 以하야 非禮不履하나니라)’고 하였다. 『논어』에서도 공자는 안연(顔淵)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을 묻자 “非禮勿視하며 非禮勿聽하며 非禮勿言하며 非禮勿動이니라”고 답하였다. 앞서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克己復禮爲仁)이며 하루라도 극기복례를 한다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一日克己復禮면 天下歸仁焉하나니)”라 하였듯이 수신의 제1단계는 먼저 자기 몸을 깨끗이 하는 齊明盛服을 들고 있다.
옷을 깨끗이 입는 것을 재계라 하고, 두루마기 등 예를 갖춰 옷을 입는 것을 성복이라 한다. 따라서 齊明盛服은 옷을 성대하고도 화려하게 입는 것이 아니라 갖출 것을 갖춰 깨끗하고 단정히 입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어진 이를 권면(勸勉)한다는 것은 아첨하고 참소하는 이를 제거하고 여색을 멀리하며 축재에 눈돌리지 말고 덕 있는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어진 이들이 임금을 보필하기 위해 모여든다는 의미이다. 또한 친척을 친하게 권면한다는 것은 친척이라도 능력있는 이가 있으면 높은 벼슬도 주고 녹도 후하게 주어 집안에서 원망이 없도록 好惡를 똑같이 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신을 권면하는 것은 벼슬을 성대히 하고 부림을 책임지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官盛’이라 함은 오늘날 각 부처의 장관 밑에 차관, 국장, 과장 등을 두어 서로 맡은 바 업무를 분담토록 하고 장관은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결재권을 갖도록 하듯이 대신이 나라의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여러 부서를 두어 일을 나누도록 한 것이며 ‘任使’란 아래 벼슬자리의 사람들에게 각자 해야 할 일들을 맡겨 부린다는 뜻이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고 대신 혼자서 모든 일을 떠맡게 된다면 아무 일도 되지 않기에 대신을 권면하기 위해 ‘관성임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선비를 권면함은 충성되고 미덥게 하며 녹을 후하게 주는 것인데, 이것은 필요할 때만 부리다 버리는 ‘토사구팽(ꟙ死狗烹’)이 아니라 일을 의욕적으로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백성들을 권면하는 것은 아무 때나 데려다 부역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농번기는 피하고 농한기에 시켜야 하며 세금은 조금만 거둬들여 백성들을 살맛나게 하는 것이다.
백공을 권면하는 것은 물건을 제대로 만드는지 늘 살피고 매달 시험을 하여 더욱 잘 만들게 하고 일한 만큼 그 일의 성과에 맞춰 봉록(봉급)을 잘 주는 것이다. 그래야만 기술자가 더욱 기술 발휘에 노력하여 나라가 부강해질 것이다.
외국 사람들이 내 나라를 방문하고 돌아갈 때는 전송을 잘해주고, 오는 이는 환영하며, 잘한 일이 있으면 선양해주고 능치 못한 이는 가긍히(불쌍히) 여겨 많은 이들이 내 나라를 방문하고 싶도록 해야 한다.
끝으로 제후가 다스리는 나라의 대가 끊기면 이어지도록 도와주고 기울어지거나 폐지된 나라는 다시 일으켜주며, 난이 일어나면 다스려주고, 위태로운 곳은 잘 붙들어주며(예 :『천자문』의 桓公匡合하여 濟弱扶傾이라) 일정한 때에 맞춰 제후들의 조회를 소집하고, 가끔씩은 일정 때마다 공물을 올리도록 하는 빙례를 하고, 갈 때는 후히 선물 등을 주어 잘 보내고 올 때는 처음부터 지나치게 후의를 베풀지 말고 조금씩 천천히 잘 대해주는 것이 제후를 품는 것이다.

此는 言九經之事也ㅣ라 官盛任使는 謂官屬衆盛하야 足任使令也ㅣ니 蓋大臣이 不當親細事라 故로 所以優之者ㅣ 如此라 忠信重祿은 謂待之誠而養之厚니 蓋以身體之하야 而知其所賴乎上者ㅣ 如此也ㅣ라 旣는 讀曰餼니 餼稟은 稍食也ㅣ라 稱事는 如周禮 槀人職에 曰考其弓弩하야 以上下其食이 是也ㅣ라 往則爲之授節以送之하고 來則豐其委積以迎之라 朝는 謂諸侯ㅣ見於天子오 聘은 謂諸侯使大夫로 來獻이라 王制에 比年에 一少聘이오 三年에 一大聘이오 五年에 一朝라 厚往薄來는 謂燕賜厚而納貢薄이라
이것은 구경의 일을 말함이라.‘관성임사’는 관직에 속한 것을 여럿으로 성하게 해서 족히 사령(부려서 시키는 것)을 맡김이니, 대개 대신이 마땅히 세세한 일을 친히 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를 우대하는 바가 이와 같음이라.‘충신중록’은 이르되 대접하는 것을 성실히 하고(忠信) 기르는 것을 후하게 함(重祿)이니, 대개 몸으로써 체감하여 그 위에 의뢰하는(힘입는) 바가 이와 같음을 아는 것이라. '旣(이미 기)’는‘희’로 읽음이니, 희름은 초식(稍食, 祿俸)이라. ‘칭사’는『주례』「고인직」에 가로되 ‘그 궁노를 상고하여 써 그 食(봉록)을 올리고 내리는 것’이 이것이라. 가는 이는 부절(符節, 신임장)을 주어서 써 보내고, 오는 이는 위자(생활필수품)를 풍부히 해서 써 맞이함이라. 朝는 제후가 천자께 알현하는 것을 이름이오, 聘은 제후가 대부로 하여금 천자국에 와서 공물을 받치는 것을 이름이라. 「왕제」에 보면 해마다(比年) 한번 작은 빙례를 올리고, 3년에 한번 큰 빙례를 올리고, 5년에 한번 조회함이라. 후왕박래는 (송별)잔치 베푸는 것은 후하게 하고 공물을 들이는 것은 박하게 함을 말함이라.

餼 : 녹봉 희 稍 : 나아갈 초, 점점 초 弩 : 쇠뇌 노 委 : 쌓을 위 積 : 쌓을 적, 저축할 자

凡爲天下國家ㅣ 有九經하니 凡以行之者는 一也ㅣ니라
무릇 천하국가를 함에(다스림에) 아홉 가지 법이 있으니 무릇 써 행하는 것은 한 가지이니라.

一者는 誠也ㅣ니 一有不誠이면 則是九經이 皆爲虛文矣라 此는 九經之實也ㅣ라
한 가지는 정성이니 하나라도 성실하지 않으면 이 구경이라는 것은 다 헛된 글이 되느니라. 이는 구경의 실제이니라.

凡事ㅣ 豫則立하고 不豫則廢하나니 言前定則不跲하고 事前定則不困하고 行前定則不疚하고 道前定則不窮이니라
무릇(모든) 일이 미리하면 성립되고 미리하지 아니하면 무너지나니, 말을 앞에(미리) 예정하면 미끄러지지 아니하고, 일을 앞에 예정하면 곤하지 아니하고, 행하는데 앞에 예정하면 병들지 아니하고, 길을 가는데 앞을 예정하면 궁하지 않느니라.

跲 : 미끄러질 겁, 넘어질 겁 疚 : 오랜 병 구

凡事는 指達道達德九經之屬이라 豫는 素定也ㅣ라 跲은 躓也ㅣ라 疚는 病也ㅣ라 此는 承上文하야 言凡事ㅣ 皆欲先立乎誠이니 如下文所推ㅣ 是也ㅣ라
무릇 일은 달도와 달덕과 구경에 속한 것을 가르침이라. 예는 본디 정함이라. 겁은 미끄러짐이라. 구는 병듦이라. 이것은 윗글을 이어서 말하기를 모든 일이 다 먼저 성실함에 세우고자 하는 것이니 아랫글에 미룬 바와 같은 것이 이것이라.

躓 : 미끄러질 지, 넘어질 지

在下位하야 不獲乎上이면 民不可得而治矣리라 獲乎上이 有道하니 不信乎朋友ㅣ면 不獲乎上矣리라 信乎朋友ㅣ有道하니 不順乎親이면 不信乎朋友矣리라 順乎親이 有道하니 反諸身不誠이면 不順乎親矣리라 誠身이 有道하니 不明乎善이면 不誠乎身矣리라
아래 지위에 있으면서 윗사람에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가히 얻어 다스리지 못하리라. 윗사람에게 얻음이 도가 있으니 벗에게 믿음이 없으면 윗사람에게 얻지 못하리라. 벗에게 믿음을 얻음에 도가 있으니 어버이에게 순하지 못하면 벗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리라. 어버이에게 순함이 도가 있으니 저 몸을 돌이켜 성실하지 못하면 어버이에게 순하지 못하리라. 몸을 성실히 함에 도가 있으니 선에 밝지 못하면 몸에(자신에게) 성실하지 못하리라.

此는 又以在下位者로 抽言素定之意라 反諸身不誠은 謂反求諸身하야 而所存所發이 未能眞實而無妄也ㅣ라 不明乎善은 謂不能察於人心天命之本然하야 而眞知至善之所在也ㅣ라
이것은 또 아래 지위에 있는 자로써 본디 정해야 하는 뜻을 미루어 말함이라. 저 몸에 돌아가 성실하지 못하다는 것은 저 몸에 반성하여 구해 존하는 바와 발하는 바가 능히 진실해서 망령됨이 없지 못함을 이르니라. 선에 밝지 못하다는 것은 능히 인심과 천명의 본연을 살펴 참으로 지극히 선한 것이 있는 바를 알지 못함을 이르니라.

誠者는 天之道也ㅣ오 誠之者는 人之道也ㅣ니 誠者는 不勉而中하며 不思而得하야 從容中道하나니 聖人也ㅣ오 誠之者는 擇善而固執之者也ㅣ니라
誠이란 것은 하늘의 도요, 誠을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니, 성실이란 것은 힘쓰지 않아도 맞으며 생각하지 않아도 얻어져 종용히 도에 맞으니 성인이요, 성실하게 하는 것은 선을 가려서 그것을 고집하는 것이니라.

[본문 해설]
정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하늘의 도인 體가 되는 것이고, 정성스럽게 행하는 것은 사람의 도로 用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정성이라는 것은 굳이 노력해 힘쓰지 않아도 그 일에 맞으며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다.『주역』19번째 지택림(地澤臨)괘 九二爻 象傳에 “象曰 咸臨吉无不利는 未順命也ㅣ라(상전에 이르길 ‘함림길무불리’는 명에 순하려 함이 아님이라)” 하여 命을 순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命이 순해진다 하였고, 25번째 망령됨이 없다는 천뢰무망(天雷无妄)괘 六二爻에서는 “六二는 不耕하야 穫하며 不菑하야 畬ㅣ니 則利有攸往하니라(육이는 밭 갈지 아니해서 거두며 묵히지 않았던 탈밭이 옥토가 되니 곧 나아가는 바를 둠이 이로우니라 / 穫 : 거둘 확, 菑 : 일년 묵은 탈밭 치, 畬 : 삼년 묵은 탈밭 여)” 하였다. 또한 繫辭上傳 제10장에는 “唯神也 故로 不疾而速하며 不行而至하나니(오직 신인 까닭에 빨리 아니해도 빠르며 행하지 아니해도 이르나니)”라 하였다. 바로 이것이 不勉而中하고 不思而得이고, 소리없이 도에 맞으니 生而知之하고 安而行之하는 성인인 것이며, 하늘의 도이다. 그리하여 乾卦 文言傳 마지막 6절에서는 “知進退存亡而不失其正者ㅣ 其唯聖人乎뎌(나아가고 물러남과 존하고 망함을 알아서 그 바름을 잃지 않는 자, 그 오직 성인이실 뿐인저!)라고 하였다.
그리고, 선을 선택할 줄 알고 그것을 고집해 나갈 줄 아는 것은 어진 사람의 일이며 군자의 일이다. 그것이 성실해지는 것, 정성을 행하는 것이다. 정성을 행하려 하니 택선할 줄 알아야 하고, 고집해서 잘 붙잡고 나가야 한다. 위에서는 성인만을 언급했지만 이것은 學而知之하고 利而行之하는 현인에 해당하는 것이고 바로 사람의 도이다.

此는 承上文誠身而言이라 誠者는 眞實無妄之謂니 天理之本然也ㅣ오 誠之者는 未能眞實無妄而欲其眞實無妄之謂니 人事之當然也ㅣ라 聖人之德은 渾然天理하야 眞實無妄하야 不待思勉而從容中道하니 則亦天之道也ㅣ오 未至於聖이면 則不能無人欲之私하야 而其爲德이 不能皆實이라 故로 未能不思而得하야 則必擇善然後에 可以明善이오 未能不勉而中하야 則必固執而後에 可以誠身이니 此則所謂人之道也ㅣ라 不思而得은 生知也ㅣ오 不勉而中은 安行也ㅣ오 擇善은 學知以下之事오 固執은 利行以下之事也ㅣ니라
이것은 윗글의 성신을 이어서 말함이라. 정성이라는 것은 진실해서 망령됨이 없음을 말함이니 천리의 본연이오, 성실하게 한다는 것은 능히 진실무망하지 못하여 그 진실무망하고자 함을 이름이니 인사의 당연함이라. 성인의 덕은 천리에 혼연해서 진실무망하여 사면(힘써야 할 것을 생각함)을 기다리지 않고 종용히 도에 맞으니 곧 또한 하늘의 도요, 성인에 이르지 못하면 능히 인욕의 사사로움이 없지 못하여 그 덕됨이 능히 다 진실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능히 생각하지 않아도 얻을 수 없으면 반드시 선을 택한 후에야 가히 선을 밝게 할 수 있음이오, 능히 힘쓰지 않아도 맞지 못하면 반드시 고집한 후에 가히 써 몸을 성실히 하니 이것은 곧 사람의 도라고 하는 바이라. 생각지 않고도 얻음은 태어나면서 아는 것이오, 힘쓰지 않아도 맞으면 편안히 행하는 것이오. 택선은 배워서 아는 것 이하의 일이요 고집은 이롭게 여겨 행하는 것 이하의 일이니라.

博學之하며 審問之하며 愼思之하며 明辨之하며 篤行之니라
널리 배우며 살펴서 물으며 삼가서 생각하며 밝게 분별하며 돈독히 행하느니라

審 : 살필 심

[본문 해설]
이 글은 학문하는 중용지도를 설명하고 있다. 학문은 널리 배워야 하며, 묻는 것은 쓸데없이 되나 안되나 묻는 것이 아니라 요점만 살펴서 물어야 하며, 생각은 삼가서 해야 하며, 분별은 밝게 해야 하며, 행실은 후중하고 돈독히 해야 한다. 『주역』 건괘 문언전 제6절에서 “君子ㅣ 學以聚之하고 問以辨之하며 寬以居之하고 仁以行之하나니 易曰 見龍在田利見大人이라 하니 君德也ㅣ라(군자가 배워서 모으고 물어서 분별하며 너그러움으로써 거처하고 어짊으로써 행하나니 역에 이르길 ‘현룡재전이견대인’이라 하니 인군의 덕이라)”라 하였다. 여기에서 ‘學問’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學聚問辨은 내적인 체가 되고 寬居仁行는 외적인 용에 해당한다.

此는 誠之之目也ㅣ라 學問思辨은 所以擇善而爲知니 學而知也ㅣ오 篤行은 所以固執而爲仁이니 利而行也ㅣ라 程子ㅣ曰 五者에 廢其一이라도 非學也ㅣ니라
이것은 정성을 들이는 조목이니라. 학문사변은 써한 바 선을 가려서 知로 삼음이니, 배워서 아는 것이오. 독행은 써한 바 고집해서 仁으로 삼음이니 이롭게 여겨 행함이라. 정자 말씀하시길 “이 다섯 가지에 하나라도 폐하면 배움이 아니니라.”

有弗學이언정 學之ㄴ댄 不能을 弗措也하며 有弗問이언정 問之ㄴ댄 弗知를 弗措也하며 有弗思ㅣ언정 思之댄 弗得을 弗措也하며 有不辨이언정 辨之s댄 弗明을 弗措也하며 有弗行이언정 行之ㄴ댄 弗篤을 弗措也하야 人一能之어든 己百之하며 人十能之어든 己千之니라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울진댄 능치 않음을 두지 말며,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을진댄 알지 못함을 두지 말며, 생각지 않을지언정 생각을 할진댄 얻지 못함을 두지 말며, 분별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별할진댄 밝지 못함을 두지 말며,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할진댄 돈독하지 않음을 두지 말아서, 다른 사람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에 능하며, 다른 사람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에 능할지니라.

[본문 해설]
윗 글은 천하의 공통된 덕(達德)인 ‘知仁勇’ 가운데서 ‘勇’을 말하고 있다. 즉 남이 한번에 능하면 나는 백 번이라도 해서 능하고, 남이 열 번에 능하면 나는 천 번이라도 해서 능하게 한다는 ‘困而知之’와 ‘勉强行之’를 말하고 있다.

君子之學은 不爲則已어니와 爲則必要其誠이라 故로 常百倍其功하나니 此는 困而知勉而行者也ㅣ니 勇之事也ㅣ라
군자의 학문은 하지 않으면 그만이어니와, 하면 반드시 그 이룸을 요하느니라. 그러므로 항상 그 공을 백배로 하나니 이는 곤해서 알고 힘써서 행함이니 용감해서 하는 일이라.

果能此道矣면 雖愚ㅣ나 必明하며 雖柔ㅣ나 必强이니라
과연 이 도를 능히 하면 비록 어리석으나 반드시 밝으며 비록 유약하나 반드시 강해지느니라.

明者는 擇善之功이오 强者는 固執之效라 呂氏 曰君子所以學者는 爲能變化氣質而已니 德勝氣質則愚者ㅣ 可進於明이오 柔者ㅣ 可進於强이어니와 不能勝之則雖有志於學이라도 亦愚不能明하며 柔不能立而已矣라 蓋均善而無惡者는 性也ㅣ니 人所同也오 昏明强弱之稟이 不齊者는 才也ㅣ니 人所異也ㅣ라 誠之者는 所以反其同而變其異也ㅣ라 夫以不美之質로 求變而美라도 非百倍其功이면 不足以致之어늘 今以鹵莾滅裂之學으로 或作或輟하야 以變其不美之質이라가 及不能變하야는 則曰天質ㅣ 不美하야 非學所能變이라 하니 是는 果於自棄니 其爲不仁이 甚矣라
明은 선을 가리는 공이오, 强은 고집의 효력이라. 여씨 말하기를 군자가 써 배우려는 바는 능히 기질을 변화할 뿐이니 덕이 기질을 이기면 어리석은 자가 가히 밝은데 나아가고 유약한 자가 가히 강한데 나아가거니와, 능히 이기지 못하면 비록 뜻을 배움에 둔다 하더라도 또한 어리석은 이가 능히 밝지 못하며 유약한 이가 능히 서지 못할 뿐이니라. 대개 선을 고르게 하고 악함이 없는 자는 (하늘이 그대로 준) 성품이니 사람마다 같은 바요, 어둡고 밝고 강하고 유약한 품성이 가지런하지 못한 것은 재질이니 사람마다 다른 바라. 성실히 하는 것은 그 같은 것을 돌이키고 그 다름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대저 아름답지 못한 재질로서 변함을 구해서 아름답게 하더라도 그 공을 백배로 하지 않는다면 족히 써 이루지 못하거늘 이제 노모멸렬(아무렇게나 대충하는 것)한 배움으로써 혹 짓기도 하고 혹 그만두기도 하여 그 불미한 재질을 변하려고 하다가 능히 변치 못함에 미쳐서는 곧 ‘타고난 하늘의 기질이 불미하여 배워서 능히 변할 바가 아니라’ 하니, 이는 스스로 포기함에 과감하니 그 어질지 못하게 됨이 심하니라.

鹵 : 황폐할 로 莾 : 거칠 모(망), 莽과 같이 쓰임 輟 : 그칠 철

[앞주 해설]
『대학』에서도 “지극한 선에 그쳐야 한다(止於至善)”고 했다. 이러한 선을 가리는 공은 밝음이며, 그 가린 선을 굳게 잡고 가는 효력은 강함이다. 따라서 明은 體가 되고, 强은 用이 되므로 ‘擇善之功’은 體가 되고 ‘固執之效’는 用이 된다. ‘明者 擇善之功’은 내적으로 알기 위한 모든 방법으로 體가 되고, ‘强者 固執之效’는 굳게 지켜 외적으로 나아가 성공하기 위한 효력이니 用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는 성품이 선한데 기질이 달라 악한 사람도 있고 유약한 사람도 있다. 군자가 학문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 서로가 다른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덕이 그 기질을 이기면 어리석은 자는 밝아지고 유약한 사람은 강해질 수가 있다. 그런데 학문에 뜻을 두고도 사적인 기질을 확고히 이기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는 밝아지지 못하고 유약한 자가 강해질 수가 없다는 것이 여씨의 설명이다.

右는 第二十章이라

此는 引孔子之言하야 以繼大舜文武周公之緖하야 明其所傳之一致하니 擧而措之라도 亦猶是爾라 蓋包費隱兼小大하야 以終十二章之意라 章內에 語誠이 始詳하니 而所謂誠者는 實此篇之樞紐ㅣ라 又按孔子家語에 亦載此章而其文이 尤詳하야 成功一也之下에 有公曰子之言이 美矣至矣로대 寡人이 實固不足以成之也ㅣ라 故로 其下에 復以子曰로 起答辭어늘 今無此問辭而猶有子曰二字하니 蓋子思ㅣ 刪其繁文하야 以附于篇而所刪이 有不盡者ㅣ니 今當爲衍文也ㅣ라 博學之以下는 家語에 無之하니 意彼有闕文이어나 抑此或子思所補也歟인저
이는 공자의 말씀을 이끌어서 대순과 문왕 무왕 주공의 실마리를 이어서 그 전한 바가 일치하니 들어다가 두더라도 또한 이와 같을 뿐임을 밝힌 것이라. 대개 비은을 포함하고 작고 큰 것을 겸해서 써 12장의 뜻을 마친 것이라. 이 문장 안에 정성을 말함이 비로소 자세하니, 이른바 정성이라는 것은 실지로 이 책의 추뉴(돌쩌귀와 단추, 지도리와 매듭)이니라. 또한 『공자가어』를 상고하건데 또한 이 문장이 실려 있는데 그 글이 더욱 자세하여 성공은 하나라고 한 아래에 “애공이 말하길 ‘선생의 말씀이 아름답고 지극하되 과인이 실은 족히 써 이루지 못함이라.”라는 내용이 있음이라. 그러므로 그 아래에 다시 ’子曰‘로써 답한 말씀을 일으킨 것인데 지금은 물은 말이 없는데도 오히려 ‘자왈’이란 두 글자가 있으니, 대개 자사가 그 번거로운 글을 깎아서 써 편에 붙이면서 깎은 바가 다하지 못함이 있으니 이제 마땅히 연문이 됨이라. ‘博學之’ 이하는 『가어』에 없으니 아마도 저 (『예기』의 가어편에) 빠진 글이거나 아니 이 혹 자사가 보충하신 듯함이라.

措 : 둘 조 爾 : 뿐 이 樞 : 지도리 추 紐 : 맬 뉴 按 : 살필 안 闕 : 빠질 궐 抑 : 아니 억, 누를 억 歟 : 누를 여

출처 : 복지누리
글쓴이 : 라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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