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무아설과 아뢰야식 설

Borealis 임박사 2013. 3. 6. 07:25

무아설을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만법에는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즉, 책상이 책상이 되게하는 근본적인 씨앗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연화합에 의해 생겨났듯이 만법은 '자아'를 결정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뢰야식이란 제8식이라고 하며 함장식 또는 무몰식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식 중에서 가장 깊숙히 자리한 의식으로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저장하는 곳입니다. 이것이 장소가 있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꽉 차 있으며 법성의 작용 중에 하나 일뿐입니다. 이 아뢰야식이 인연을 만나게 되면 종자에서 싹이 나듯 업의 과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일으킨 곳에 떨어지는 도리입니다. 이러한 아뢰야식도 불성의 작용중에 하나일뿐 이것이 무슨 영혼이나 귀신처럼 떠 돌아다니다가 인간의 몸을 만나서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는 우주의 저장소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자신이 신구의 삼업을 저장해 놓고 나중에 그 결과를 받는 것입니다.

결국 불성이라는 바탕위에 나타는 그림자 같은 것이 윤회라는 것입니다. 마치 물에서 파도가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그 파도가 본래 있었던 것도 아니며 물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해서 물을 떠나서 딴 곳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물의 관점에서 보면 파도의 생멸이 따로 없듯이 법성의 관점에서 보면 만법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 불생불멸이라고 한것입니다.

윤회라는 것도 영혼이 있어서 그것이 몸을 바꿔가는 것이 아니라 불성의 바탕위에서 업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요즘 초기불교를 연구한다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바로 무아와 연기를 들어 대승불교와 선불교를 비방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들은 참나 라고 하는 것 본래면목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적이 없는 것으로 흰두교의 아트만 사상과 같은 것이라고 떠들고 다니죠. 그럼 반대로 무아라면 업을 받는자도 없고 윤회도 없다는 말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댓구도 못합니다. 사실 이문제는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능가경에 보면 '무아라면 윤회도 없는 것인가?' 라고 부처님께 질문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무명의 반대말은 밝음이며 깨달음이니 바로 부처님의 지혜이며 부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의 어리석은 마음과 부처님의 청정한 지혜의 마음이 서로 둘이 아니기때문에 어리석은 중생심을 깨쳐 본래 청정한 부처님의 마음이 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바로 이 부처님의 마음, 청정한 마음이 본 마음 이라고 하는 것이요 참 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불성이라고도 하며 본성이라고도 합니다. 중생의 마음과 부처님의 마음이 동 떨어져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수행해도 깨우칠수 없겠지요. 하지만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서 마음 한번 깨우치면 바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마음을 선禪 이라하며 부처님의 말씀을 교敎라고 하고 부처님의 행동을 계戒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참선하신 것도 결국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자리를 본것이니 그것은 본래 이름도 없고 형체도 없지만 이름하여 불성이라고 하고 본래 마음이라고 하며 또는 참 나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힌두교나 자이나교에서는 아트만은 아주 작고 순수한 알갱이 같은 것인데 거기에 더러운 것들이 점점 쌓여 순수한 자아를 흐르기때문에 윤회를 하고 업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트만에 쌓인 더러운 업, 습관, 욕심, 번뇌 등을 닦아내어 순수한 아트만을 찾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수행의 목적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트만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우시셨죠....불교용어 중에 오온이라고 있습니다. 다른말로 오적취라고 해서 다섯가지(색수상행식)의 쌓임이라는 뜻이죠. 그렇다면 무아인데 왜 쌓인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그것은 이전에 있던 아트만 사상에 영향을 받은 표현이라서 중생들에게 쉽게 설명하다보니 그렇게 됬다고 볼수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본래 '나'라고 할 실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기때문에 닦아내어 버릴 것또한 없다는 것입니다. 닦아 내어 버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번뇌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니, 제법무아에 위배되는 것이며, 만법이 공하다는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번뇌 닦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번뇌도 공한 것으로 마음을 따라 생겨났다가 마음을 따라 없어진는 그림자 같은 것이죠. 이것을 깨우치는 것이 바로 실상반야實相般若라고 합니다. 만법의 실제 모습은 텅비어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지요. 텅비어 있으니 안과 밖이 없고 우주에 상즉하여 있으니 더럽힐수도 없고 물들것도 없는 것,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근본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무아'라고 말씀하셨을때 정말로 '나'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단멸론'에 빠지게 되는 것이니 이것도 외도요, '나'라고 하는 실체가 있다고 하면 '유신견'에 빠지는 것이니 이것도 외도인 것입니다.

'나'를 움직이게 하고 생각하게하고 수행하게 하는 '그 것'이 없다면, 업도 없는 것이요 윤회도 없는 것요, 닦아 수행할 필요도 없고 업을 받을 놈도 없게 되니 참으로 편리한 생각이겠지만 이것은 부처님의 진리를 비방하는 꼴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공空하다는 말로 실체가 없는 것을 묘사하셨으니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함부로 진리를 해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진공묘유라는 말이 있는데, 그 있다고 한 것이 무엇인줄 알아야 하는데, 공과 무의 차이도 모르면서 불성에 대해 논하는 것이야 말로 기초도 안되있으면서 떠드는 소리입니다.

비록 무아이므로 더렵혀 물들일 것은 없으나, 분명 닦아 증득할 것이 있으니, 부처님께서 팔정도를 이야기하고, 위파사나, 사마타 와 같은 수행을 이야기 하신것입니다. 수행하는 그 주체가 분명이 있다면 수행으로 증득할 법신이 분명이 있을진데, 화신과 보신만 알고 진리 그 자체인 법신을 무시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치 몸이 있다면 움직임이라는 것이 있듯이 수행하여 증득할 것이 있다면 분명 수행하는 자와 증득할 법신이 둘 아님을 깨쳐야 할것입니다.

결론은 '진아' 와 '무아'는 서로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무아라는 것에 고집하여 오직 현상만 있다고 말한다면 본체는 없이 움직임만 있다고 하는 꼴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동차는 없지만 굴러감은 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만약 어떤 작용이 있다면 분명히 작용을 일으키게하는 본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체와 작용은 둘이 아닙니다. 마치 파도와 물과 같은 것이죠. 그렇다고 본체라는 것이 실체가 있어서 존재한다고 하면 그것은 생로병사 성주괴공을 격게되니 말이 안됩니다. 그래서 본체는 텅비어 있어 실체가 없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중력이라는 것이 우주에 꽉 차 있지만 그 작용이 있기전에는 그 존재를 알수 없는 것입니다.

중력을 표현할때 중력의 법칙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중력의 법칙 자체가 중력은 아닌것입니다. 하지만 중력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중력을 분리해 낼수는 없지만 중력의 법칙을 통해 중력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죠.

진아와 연기법도 마찬가지 입니다. 연기법이 우주의 진리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따로 존재하여 우리를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본체 즉 근본 바탕위에서 만물의 현상을 설명하는 법칙인 것입니다.

초기불교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오직 흐름만 있고 실체가 없다고 하면서도 진리를 깨우쳐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깨우치는 놈이 있을 것이니 그것을 깨우치지 않고 흐름만 있다고 한다면 그림자가 스스로 그림자인줄 깨우친다는 소리니 참으로 우스운 꼴이됩니다..

무아라고 해서 없다는 것에 집착해서는 안될 것이면, 진아 라고 해서 그것이 실체가 존재하는 줄로 알아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무아라고 할때 무아 인줄 아는 놈이 반드시 있으며, 진아가 작용하는 그 바탕이 텅 비어있슴도 깨달아야 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