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구경각에 대해 여쭙습니다. 에
큰스님께 삼배올립니다.()()()
아래의 글을 읽어 내려가던 중 뭔가 석연찮은 오도된 내용이 있는 듯 합니다만
공부가 미천하여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큰스님께 파사현정을 간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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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씨가 만난 ‘구경각(究竟覺)’의 세계
만배 백일기도’ 80일째 궁극의 경지를 만나다
절을 하며 신체가 바로잡히고 정신의 집중력이 좋아졌다고 했지만, 한씨의 경우는 그 정도가 아니다. 그는 두번째 만배 백일기도에서 ‘구경각(究竟覺)’을 만난다.
‘구경’은 불교에서 보살의 수행이 원만하여 궁극적이고 완전한 지혜를 얻는 경지를 말한다. ‘구경’에서 모든 1700공안(화두)과 법게송과 선문답이 나왔고, 붓다의 말인 팔만대장경도 이 자리를 설명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한 소식’인 것이다.
두번째 만배 백일기도의 80일째, 몸도 마음도 마지막 숨결만 남겨놓은 듯한 극한 상황에서 한씨는 감정의 변화도, 희망도, 절규도, 포기도,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무심한 상태가 된다.
무심코 창밖으로 시선을 보낸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듯한’ 놀라움에 사로잡힌다. ‘나’라는 것을 잃어버리고, 아주 영롱한 가운데, 주관도 객관도 없는 그런 경계속에 마음이 집중되어 ‘나’가 사라진….
―그 순간을 쉽게 설명해 주세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불립문자(不立文字)예요. 본지풍광(本地風光), 본래면목(本來面目), 견성성불(見性成佛), 구경각이 다 같은 얘기지만 구경각이 가장 한국적 표현인데, 그래서 흔히 ‘구경가자’라는 말속에 남아있죠.한씨의 설명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를 옮겨본다.
구경각이란, ‘나’를 잊어버린 상태에서, 모든 망상이 떨어진 상태에서, 실상(實相)에 들어가 시방(十方:불교에서 동·서·남·북의 사방과 서남·서북·동남·동북 등 네 모퉁이 및 상하를 아울러 이르는 말)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시각적으로 찰나의 모든 현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 주관과 객관이 모두 떨어진 상태에서, ‘나’조차 없는 상태, 이 순간 자신은 하나의 무생물(바위나 산)처럼 ‘동(動)’함이 없는 가운데, 시방과 일체되어 실상을 바로 보게 되는 순간이라고 개인적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상주법계(시방법계)라는 영원불멸한 무대에서 살고 있으며,변치않는 무대배경은 항상 그대로 있는데, 모든 생명들은 몸만 바꾸어서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할 뿐입니다. 여기에서 시방법계라는 영원한 무대를 알게되는 순간이 ‘구경각’입니다.”
―구경각을 접한 전후의 변화는 무엇인가요.
“구경각을 접한 사람은 부처님을 팔아먹고 살 수가 없어요. 불공(佛供)이란 것은 모든 생명체를 인격체로 대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불사(佛寺)를 짓는 등의 일과는 거리가 멉니다. 나는 생명체로서 나중에 지수화풍(자연)으로 돌아가지만, 내 마음만은 영원히 불성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는 “구경각을 한 번 여행갔다 왔다고 해서 영원히 내 것이 아니듯, 앞으로 영원히 거기에 머물기 위해 살아야 한다”며 “제 먹을거리를 해결하고 이웃과 어울려서 사는 것이 그 과정”이라고 했다.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건강하게 사람과 온갖 생명과 만나는 것, 건강하고 정확하게 만나는 그 과정이 바로 수행이라는 말로 이해됐다. 그는 성철스님과 약속한 ‘매일 1000배’를 평생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
사진설명:'구경각'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화가인 한경혜씨는 그 순간을 그림으로 그렸다.
기사 게재 일자 2004/08/11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
장군죽비:
도무지 구경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한이가 신심은 장하여
죽기 살기로 시키는대로 절만 하였다 할 것이며
이런 분들이 더 많아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로소이다.
이 한씨라는 불자의 체험을 요약하면
[만배 백일기도’ 80일째 궁극의 경지를 만났다 하며
한씨라는 불자의 경우는 그 정도가 아니라. 두번째 만배 백일기도에서 ‘구경각(究竟覺)’을 만났다 하였으며두번째 만배 백일기도의 80일째, 몸도 마음도 마지막 숨결만 남겨놓은 듯한 극한 상황에서 감정의 변화도, 희망도, 절규도, 포기도,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무심한 상태가 되어
무심코 창밖으로 시선을 보낸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듯한’ 놀라움에 사로잡힌다. ‘나’라는 것을 잃어버리고, 아주 영롱한 가운데, 주관도 객관도 없는 그런 경계속에 마음이 집중되어 ‘나’가 사라진….
구경각인 흔히 ‘구경가자’라는 말속에 남아있다 한것이며
이것을 구경각이란, ‘나’를 잊어버린 상태에서, 모든 망상이 떨어진 상태에서, 실상(實相)에 들어가 시방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시각적으로 찰나의 모든 현상이 눈에 들어온다하며
주관과 객관이 모두 떨어져 ‘나’조차 없는 상태에서, 시방과 일체되어 실상을 바로 보게 되는 순간이라고 말하며
여기에서 시방법계라는 영원한 무대를 알게되는 순간이 ‘구경각’이라 하였으며
구경각을 접한 전후의 변화를
“구경각을 접한 사람은 부처님을 팔아먹고 살 수가 없으며. 나는 생명체로서 나중에 지수화풍(자연)으로 돌아가지만, 내 마음만은 영원히 불성으로 남아있습니다.”하며
“구경각을 한 번 여행갔다 왔다고 해서 영원히 내 것이 아니듯, 앞으로 영원히 거기에 머물기 위해 살아야 한다”며 “제 먹을거리를 해결하고 이웃과 어울려서 사는 것이 그 과정”이라고 했으며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건강하게 사람과 온갖 생명과 만나는 것, 건강하고 정확하게 만나는 그 과정이 바로 수행이라 한다며 ‘매일 1000배’를 평생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 하니
구경각을 궁극의 경지를 만났다 하는 표현조차 우선 구경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음이라 할 것이며,
절 뿐 아니라 무엇이든 오직 일행삼매가 되어 몰입하다 보면
흔히 겪는 현상을 이분도 극한 상태에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무심한 상태가 되어
창밖으로 시선을 보낸 순간 ‘심장이 나’라는 것을 잃어버리고, 아주 영롱한 가운데,
주관도 객관도 없는 그런 경계속에 마음이 집중되어 ‘나’가 사라졌다" 하는 것은
구경각의 경계가 아니며 실은 자신을 잊었다고 생각하는 7식경계인 것이라 할 것이며
구경각을 ‘구경가자’라는 말을 쓰는것 또한 마치 구경의 자리가 따로 있는 것처럼 아는 잘못된 상식에서 나온 용어라 할 것이며
또한 구경각을 '나를 잊어버린 상태에서, 모든 망상이 떨어진 상태에서, 실상(實相)에 들어가 시방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시각적으로 찰나의 모든 현상이 눈에 들어온다'하니, 구경의 경계에서는 눈으로 보는 현상이 아닌 것이올시다.
다시 '주관과 객관이 모두 떨어져 ‘나’조차 없는 상태에서,
시방과 일체되어 실상을 바로 보게 되는 순간이라'고 말 한다니
실상은 무엇이며 그것을 바로보는 것은 무엇이라는 것이리까?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둘이 되지 않소이까?
여기에서 "시방법계라는 영원한 무대를 알게되는 순간이 구경각"이라 하니
구경각은 알게되는 것이거나 접하는 것도 또한 아니로소이다.
또 '구경각을 접한 사람은 부처님을 팔아먹고 살 수가 없다' 하였는데
구경각을 성취한 이는 곧 부처님인 覺人인즉 달리 부처님이 어디에 있기에 '팔아 먹는다' 는 표현을 가히 구경각을 체득한 이가 할것이며
나라는 나를 이 육신으로 표현하여 '나는 생명체로서 나중에 지수화풍(자연)으로 돌아가지만' 이라 표현한 것도
구경각을 體認한 이의 표현이 아니라 할 것이며
또 '내 마음만은 영원히 불성으로 남아있다'한 말도 참으로 구경을 體得한 이의 말이 아닌것이니 이어서
'구경각을 한 번 여행갔다 왔다고 해서 영원히 내 것이 아니듯,
앞으로 영원히 거기에 머물기 위해 살아야 한다'한 말이 이를 증명 한다 할 것인즉
구경각을 증득한 것은 여행 한번 한 것처럼 한번 보고 돌아오는 그러한 것은 절대로 아닌 것이며 따라서.
구경을 體達하게되면 거기라는 말도 합당하지 못함을 깨닫게 되는 것인즉
거기라는 거기와 내가 둘 아닌것이올시다.
또한 구경각을 성취한 이가 “제 먹을거리를 해결하고 이웃과 어울려서 사는 것이 그 과정”이라고 했다면 웃지 못 할 소견인 것이며
어디를 갔다 왔기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건강하게 사람과 온갖 생명과 만나는 것'이며, '건강하고 정확하게 만나는 그 과정이 바로 수행이라 한다' 할 것이리오?
그 구경이 곧 붓다인 부처라 구경각을 성취한 이를 각인이라 하며
그 부처를 깨친 분이기에 부처님이라 하는 것인즉
구경각을 성취한 각인이 어찌 남이 시킨대로 ‘매일 1000배’를 평생 이어 절이나 할 것이리오?
참으로 어리석고 어리석으며 참으로 잘못된 지도라 할 것이로소이다.
석가 세존께서는 오직 자성을 깨쳐 부처님이 되라 가르치셨을 뿐
'절을 많이 하라'고 가르친바가 없거늘
신심을 북돋기 위한 방편수행으로 한 두번쯤 절로써 용맹정진하여
몸과 마음을 다스려 봄직은 하다 하겠으나
어찌 깨달음은 멀리하고 육체적인 혹사로써 구경을 삼게 하리오.
지나친 절은 오히려 관절을 망가뜨려 불구 아닌 불구가 되어
남은 여생을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는 것임을 어찌 알지 못하는 것인가?
불법을 닦는 이라면 하심하여 겸허함을 익혀가야 할 것이건만 절을 많이한 것을 자랑삼아
아만심을 키워온 보살들을 접하게 될 때마다 혀를 찰수 밖에 없었소이다.
절이란 자신의 아만을 스스로 조복받고 상대를 공경하는 것이거늘
어찌 그 숫자에 있으며 절로써 만사를 해결한다 할 수 있으리오?
한번의 절을 할지라도 지극하고 여법하고 겸허하게 하여야 참으로 절이라 할 것이나
나는 몇일간 몇번을 했다는아상과 아만만 키우는 절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그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방석을 포게놓고 하는 식이라면 더더욱 가관이라 할 것이올시다.
진정 구경각을 성취하라는 것이 세존의 뜻일 뿐 다른 것은 없음을 아셔야 할 것이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