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선시

Borealis 임박사 2014. 7. 25. 07:29

. 창,칼을 만나도 언제나 태연하고     

    독약을 마셔도 한가롭고 한가롭도다 

    종우봉도상탄탄    가독약야한한

    縱遇鋒刀常坦坦하고 假饒毒藥也閑閑이로다 

  도를 성취하면 칼과 창으로 목을 천번 만번 끊는다 해도  항상 태연하여 조금도 겁낼 것이 없어 대자유자재하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구마라습(九摩羅什) 스님의 제자에  승조(僧肇)법사라는  분이 있었는데, 구마라습스님의 뛰어난 제가가 열 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사철(四哲)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승조법사의 자격과 재질이 특이하고 뛰어났으므로 그당시 요진(姚秦) 나라 임금이

  "승조법사를 환속시켜 재상으로 삼으면 천하가 요순세계로  돌아가 태평시절이 될 것이다."  고 생각하고 구마라습스님에게도 청하고 승조법사에게도  간청을 하였습니다.

  "스님 머리를 기르고 재상이 되어 정치를 한다면 천하에 명 재상이 되어 백성들이 편안할 것이니 환속해서 부디 재상직을 맡아 주시오"  하니, 승조법사가 끝내 허락하지 않고서

  "재상이 다 무엇이냐! 일국의 재상이란 꿈 속의 꿈이고 어린애 잠꼬대같은 소리다. 나는 무상대도를 얻어 영원토록  자유자재하여 일체 중생을 위해 살 뿐이다."  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아무리 권해도 듣지  않으므로  마침내 옥에 가두어 버리고  "끝까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  고 위협하여도 막무가내였습니다. 나중에 정말 왕이  죽이려고 하니 승조법사께서   "나를 꼭 죽일려면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  하고는 그 동안에 [보장론(寶藏論)] 한 권을 지었습니다. 일명 [조론(肇論)]이라고도 하는데, 그 문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불법의 진리가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책입니다. 우리 팔만대장경에도 들어있는 책입니다. 일주일 뒤에 형틀에 올려놓고 죽이려 하니 게송을 읊었습니다.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음이요

   오음은 본래 비었음이라

   머리를 흰 칼날 아래 내미니

   마치 봄 바람을 베는 것 같도다.

   [四大元無主요 五陰本來空이라

    將頭臨白刀하니 猶似斬春風이로다]"

  자기로서는 사대가 주인이 없고 오음이 본래 비어  일체가  다 공함을 깨쳐서 불생불멸하고 쌍차쌍조한 대도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허공은 열번 쪼개고 부술 수 있어도 자기는 죽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몸뚱이는 죽는 것 같지만 실지로 자기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이며, 자성을 확철히 깨쳐서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칼로  천번 만번 내리쳐도 자기한테는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창과 칼을 만날지라도 항상 탄탄하다'는 것은 승조법사의  이러한 경계를 말한 것입니다.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는 뜻만이  아니라 자성을 깨치면 영원토록 손익이 없고 생멸이  없는  경계를 '항상 탄탄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내 목에 칼을 맞는 것이 봄 바람을 베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독약을 먹는 것은 어찌 되느냐? 

  달마스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달마스님 당시에 보리유지삼장(菩提流支三藏)과 광통율사(光統律師)는 승단 가운데 뛰어난 스님들로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달마대사와 토론을 벌려 시비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달마대사가 고준하게 법을 설하여 중생들에게 크게  덕화를 끼침을 보고 다투어 해치려는 마음을 내어 자주  독약을  음식에 넣었습니다. 어떨 때는 독약을 먹고나서 토하니 비위가 갈라지더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렇게 여섯 번이나 독약을 드셨는데  그 여섯번째에 이르러서는 세상에 교화할 인연도 다하였고 법을  전할 혜사스님도 만난 뒤였으므로 독약을 드시고 조용히 앉아서 돌아가셨습니다. 이때는 후위(後魏)의 여덟째 임금인  효문제(孝文帝) 태화(太和) 19년 (서기 495년)이었다고 합니다. 웅이산(熊耳山)의 오판(吳板)에서 장사 지내고 정림사에 탑을 세웠습니다. 

  그 뒤로 삼년 만에 위(魏)나라의 송운(宋雲)이라는 이가  서역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돌아 오는 길에 총령(蔥嶺)에서  달마대사를 만났는데 손에 짚신 한 짝을 들고 훌훌히 혼자  지나가시므로 송운이 물었습니다.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서천으로 돌아가오. 그대의 나라 천자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오."  송운이 이 말을 듣고 돌아와 보니 과연 문제(文帝)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송운이 이 사실을 자세히 보고 하므로 황제가 광(壙)을 열어 보게 하니 빈 관속에는 정말 짚신  한짝만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달마스님이 모르고서 여섯번이나 독약을 드셨느냐 하는 것인데 모르고서 드셨다고 하면 달마스님이 아닙니다. 알고도 드신 것입니다. 여섯번째 가서는 세연(世緣)이 다했음을 아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보통 볼 때는 독약에 돌아가신 것으로  보겠지만 세연이 다해서 자신이 독약을 드시고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그 뒤에 신짝 하나를 들고 총령을 넘어갔으니  그것을  죽었다고 해야될 것입니까, 살았다고 해야 될 것입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러한 대자유한 경계를 체득한 사람, 바로 깨친 사람, 다녀도  참선이요 앉아도 참선이요 어묵동정에 본체가 편안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칼날도 소용없는데 무엇을 겁내고 무엇을 무서워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무서운 칼날에도 항상  태연하고  독약에도 한가로워 독약을 꿀같이 보고 칼날도 꽃같이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확철히 깨쳐서 자유자재한 사람의 행리처(行履處)요 생활인 것입니다. 
 

42. 우리 스승께서 연등불을 뵈옵고

    다겁토록 인욕선인 되셨도다. 

    아사득견연등불  다겁   증인욕선

    我師得見燃燈佛하고 多劫 曾爲忍辱僊이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과거 도를 위해  공부하시던  전생담입니다. 그 인행(因行)시에 연등불이 마침 진흙 위를 지나가시게  됨을 보고 자기의 머리를 풀어서 그 진흙 위에 깔아서  발에  흙이 묻지 않고 지나가시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머리  푼  공양의 공덕으로 연등불께서 수기를 주셨는데,

  "네가 미래세에 부처가 되어 이름을 석가모니라 하리라"  하셨습니다. 위 귀절은 그 전생담을 인용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느냐 하면 공부를  하려면  하심(下心)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철저하게 하심하는 신심과 발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머리를 풀어 부처니이 밟고  지나가도록 한 것은 참으로 아상(我相)이란 하나도 없고  오직  구도심,신심 하나만 가지고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의 머리를 풀어서 밟고 지니가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내가 대자유자재한 공부를 성취한 것도 이런 하심을 했기 때문이라는 영가스님의 말씀입니다.

  선(僊)은 곧 선(仙), 신선이란 말이니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신선이 아니고 성불한 것을 신선이라고 하니 부처님을 대금선(大金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사해탈하여 자유자재한  것을  선(仙)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연등불을  위해 진흙땅에 머리를 풀어 공양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다겁동안 인욕의 선인이 되어 공부를 했기 때문에 성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리왕 때의 일입니다.

  산중 토굴에서 공부를 하고 있자니 그 때 가리왕(哥利王)이 신하들과 궁녀들을 많이 거느리고 사냥을 나왔다가 인욕선인의  토굴있는 데로 오게 되었습니다. 가리왕이 사냥을 하고 있는  동안에 궁녀들이 산책하다 보니 스님 한 분이 토굴 속에서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앉아 있는데 그 모습이 하도 거룩해서 숭배심이  일어나 그 앞에 가서 모두 예배를 드리고 또 드리며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가리왕이 사냥에서 돌아와 보니 자기가 총애하는 궁녀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으므로  "이것들이 다 어디로 갔나?"  하면서 찾아보니, 남루한 옷을 입고 토굴에 앉아 있는 스님을 보고 에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가리왕은,

  "저 놈이 내 계집들을 다 빼앗아 가려고 한다."  고 생각하고는 그만 분한 마음을 내어서 그 인욕선인을 잡아가 사지를 마디마디 잘라 고통을 주며 죽여버렸습니다. 그 때 인욕선인이 만약 아상(我相)이나 인상(人相)이 조금이라도 붙어 있었더라면 참으로 원한심을 품었을 것이고 그것이 원결이  되어서 세세생생으로 호랑이가 되든지 칼이 되든지 해서 가리왕을  뜯어 먹거나 찌르든지 하여서 원수를 갚으려고 자꾸 달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직대도를 위하고 법을 위해 몸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거기에 무슨 원수라든가 한이 맺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어도 조금도 원한이 없이 인욕선인  노릇을  하며 많은 겁을 닦아 내려왔기 때문에 오늘 내가 확철히 깨쳐서  부처도 되고 조사도 되고 하는 것이지, 공연히 일조일석에  조그마한 생각을 가지고 공부한다며서 쓸 데 없이 이 길 저  길을  오가며 산이나 보고 물이나 구경하고 다녀서는 절대로 공부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스승을 찾아 도를 묻기 위해 위법망구(爲法忘軀)하는 철두철미한 신심으로써만 공부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성취하면 다녀도 선 앉아도 선이며, 칼을 만나도  꽃잎과 같고 독을 마셔도 꿀을 먹는 것 같이 대자유자재한  경계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43. 몇 번을 태어나도 몇 번이나 죽었던가

    생사가 아득하여 그침이 없었도다 

    기회생기회사  생사유유무정지

    幾廻生幾廻死 生死悠悠無定止로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법을 위해 몸을 잊어 버려야  하고,  마디 마디를 토막내는 그런 욕을 참아가면서 공부를 해야 되며,  도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람쥐 체바퀴 돌듯이  도는 우리들의 생사윤회의 세계는 억천만겁토록  사생육도를  이리 돌고 저리 돌아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말할 수 없는 고(苦)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수억겁의 생사를 해탈하려면  반딧불 같은 조그마한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인욕선이 되어 가리왕의 고(苦)도 받고, 어떤 때는  연등불에게 하듯이 하심(下心) 공양도 하고, 어떤  때는  혜가스님처럼 눈 속에 서서 팔뚝을 자르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운문스님처럼 다리도 부러뜨리는 식으로 법을 위해 몸을 바치는 그러한 노력과 공부가 있어야만 참으로 억천만겁의 생사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노력한 수행의 결과는 무엇인가? 
 

44. 단박에 깨쳐 남이 없음을 요달하고 부터는

    모든 영욕에 어찌 근심하고 기뻐하랴. 

    자종돈오료무생    어제영욕하우희

    自從頓悟了無生으로 於諸榮辱何憂꜀ 

  확철히 깨쳐서 남이 없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요달하여 일체경계에 대무심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돈오(頓悟)라 하면 흔히 이치는 알았으나 객진번뇌는 전과 다름이 없이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생멸이지 돈오가 아니며 무생이 아닙니다. 돈오(頓悟)란 제팔 아뢰야 무기무심을 완전히 끊은 대원경지의  무생(無生)을 말합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돈호하여 무생법인을 증득하면  어떻게  되느냐?

  영광스러움과 욕됨에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기뻐하겠습니까? 영화로운 일이든지 욕된 일이든지 근심하거나  기뻐한다는  것은 전부다 생멸 변견에서 하는 일이며, 돈오해서  무생을  증득하면 변견을 여의고 중도를 정등각한 것이므로 그때에 있어서는  영화로움과 욕됨과 근심과 기쁨이 완전히 떨어진다는 것이니, 곧  양변이 다 떨어져다는 말입니다. 여기 와서는 혹은 앉고 혹은 서더라도 절대로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야만  자유가 있는 것이지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면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오하여 무생(無生)을 밝혔다는 것은 구경각을 말한 것이며, 구경각을 성취하면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팔풍(八風)에 움직이지 아니하며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열반로에서 놀며 절대로 생사의 길은 밟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사없는 열반로에서 어떻게 사느냐? 
 

45. 깊은 산에 들어가 고요한 곡에 머무니

    높은 산 그윽하여 낙락장송 아래로다. 

    입심산주란야    잠음     유수장송하

    入深山住蘭若하니 岑[山+金]幽邃長松下로다    

  깊은 산중에 들어가 토굴 생활을 하니 산은 첩첩하고 물은  깊으며 낙낙장송 우거진 심산유곡에서 새소리 물소리 들으며  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