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을 금하는 것에 대해
부처님 당시에는 비구들은 탁발에 의지하여 하루 한끼만 해결해야 했습니다. 음식을 보시하는 사람의 얼굴을 봐서도 안되며 보시하는 음식을 봐서도 안됩니다. 그냥 주는대로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고기를 받아 올수도 있었고 식은 밥을 받아 올때도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당시에는 탁발하는 방법과 음식 먹는 법에 관해서만 주로 이야기를 하고 음식 종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남방불교에서는 이러한 전통을 따릅니다. 그래서 고기를 얻어 오면 고기를 먹고 채소를 얻어오면 채소를 먹고 생선을 얻어오면 생선을 먹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생선을 좋아하지 않으면 생선을 안먹을수는 있었습니다. 음식을 받아 온다고 거지처럼 모든 걸 다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중에 부처님과 비구들을 공양하기위해 '사가'라는 이름을 가진 장군이 소를 직접 도살해서 공양을 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부처님은 먹어도 되는 고기를 따로 선별 하였는데 그것이 삼종정육, 오종정육 구종정육입니다. 술에 대해서도 '사분율'에 보면 부처님은 '여덟가지 술은 마셔도 좋다. 취하지 않은 사람은 마셔도 좋고 취했거든 마시지 말라. 오늘 받은 술은 내일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음식에 대해 엄격한 제한을 두지 않았는데, 이에 반기를 든 사람이 데바닷타 입니다. 그는 지금의 '자이나교' 승려들이 고행하는 것과 비슷하게 할것을 주장했습니다. '오분율'에 보면 데바닷타는 '소금을 먹지 않는다, 기름기 있는 것을 먹지 않는다. 생선과 고기를 먹지 않는다. 걸식한다. 8개월은 태양아래 있고 겨울 4개월은 초가집에 머문다'라는 오법을 주장했습니다. 부처님은 극단적인 고행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때문에 데바닷타와 논쟁은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종단이 분열되기에 이릅니다.
대승불교의 발달로 사찰 중심의 불교가 활발해지면서 사찰내에 부억이 생기게되고 신도들이 음식 조리하기 시작하게 되면서 새로운 규제가 생겨납니다. 대표적인 예가 오신채(파,마늘,부추,달래, 흥거)를 금지한 것입니다.
중국에 불교가 들어왔을때는 술과 고기를 먹었지만, 양무시대 이후 점차 바뀌어 갔으며 대다수 사원에서는 죽을 주식으로 삼았으며 부식은 스님들이 직접 재배한 채소나 두부 버섯등 이엇습니다.
즉, 초기에는 탁발에 의지해야 하다보니 주는 대로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탁발에 의지할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때문에 스님들은 사찰에서 생활해야 했고 그래서 먹거리를 직접 재배하거나 시장에서 사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살생을 금하는 계율때문에 스님들은 가축길러 그걸 잡아서 직접 고기요리를 해 먹을수 없었기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는 문화가 형성되었고 사찰에서 스님들이 직접 채소를 기르고 음식을 해먹게되면서 육식을 금하게 되었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스님들이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생명을 존중하는 자비심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고기를 먹어야 할 상황이라면 먹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먹을 것이 고기밖에 없다던가 고기가 약으로 사용되는 경우 고기를 먹게 됩니다. 무조건 스님들은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계율에 집착해서 꼭 먹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먹지 않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건 계율에 집착하는 병에 걸린 것이니 제대로 수행하는 수행자의 모습이 아닌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