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라.
부처님 당시에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면서 그 제자들이 각지로 흩어져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간혹 비구들이 엉터리 법문을 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비록 비구가 설법한 내용이라도 여래가 설법한 것과 맞는지 검토한 이후에 받아들여라 라고 말합니다.
또한 부처님 교단이 확대 되면서 이교도들이 부처님께 귀의하겠다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아 졌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점점 이교도들이 부처님 승단에 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바로 승단에 들어오게 하지 않고 몇달 동안 유예기간을 두게됩니다. 왜냐하면 잘 융화하지 못할 경우 승단에 분란이 일어나거나 혹은 다른 종파와 갈등을 일으킬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존의 종교를 무작정 버리고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기 보다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부처님의 승단에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포교를 하는데 있어서 자율성을 부여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설법은 대기설법, 방편설법이기 때문에 사람들 마다 그 내용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에 따라서 처방을 달리 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예들들어 복통이 있는 환자에게 진통제를 처방해 주었는데 그것을 옆에서 본 다른 환자가 자기도 진통제를 복용하면 되겠구나 하고 복용하면 부작용이 발생할수 있습니다. 앞서 복통을 호소한 환자는 생리통을 호소한 여성환자이기 때문에 진통제가 맞지만, 나중에 온 복통환자는 위궤양 환자인데 진통제를 복용하면 부작용이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일이 실제로 부처님 당시에 있었습니다. 그당시에는 책이 귀했고 사람들이 복잡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한 수행법을 가르쳐줬습니다. 그당시 사람들은 경전을 구해서 읽어본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계층에서나 가능했고 일반인들은 평생 책을 구경도 못해고 글을 읽을줄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오직 말로 묻고 답하고 외워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부처님 승단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수행방법을 물었습니다. 대장장이에는 마음의 번뇌를 없애고 깨끗이 하는 명상법을 하라고 했고 빨래를 하는 사람에게는 수식관을 가르쳤고 염세주의자에게는 부정관을 일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장장이는 망치질을 하면서 깨끗이 씻어내는 명상을 하느라 명상에 집중도 못하고 일에도 집중을 못하게 되었으며 빨래를 하는 사람은 수식관의 숫자를 세느라 빨래가 잘 씻기는지 집중을 못하게 되었고 염세주의자는 부정관을 하느라 더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서 우울증에 걸려 삶의 희망마저 없어지는 부작용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승단에서 재빨리 그 사람들에게 찾아가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일러 줬습니다. 대장장이는 수식관을 하면서 망치로 쇠를 두드리며 일을 하면서도 명상을 할수 있었고 빨래하는 사람은 빨래가 깨끗하게 되는 과정에서 마음을 정화하는 명상을 동시에 할수 있게 되어 훨씬 수행이 잘되었습니다. 염세주의자에게는 부처님의 자비명상을 가르쳐 극락의 아름다운 세상을 상상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도 이해를 하고 받아들여야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번뇌를 없애기는 커녕 법에 대한 집착만 커져 오히려 번뇌를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초기불전을 연구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무아' 라는 말에 집착하여 '나'라는 것은 없으니 마음을 깨우칠 필요없이 수행만 하면 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심지어 '나' 라고 할것이 없으니 윤회하는 주체가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수행하는 자는 과연 누구란 말이며 해탈하는 자는 누구란 말입니까. 이렇게 스스로 모순을 지으면서도 그걸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대승경전에 나오는 공을 이해 하지 못하고 단지 실체가 없다는 것만 받아들여 업도 없고 죄도 없는 것이라며 막행막식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등장하고 있는게 현실입니다. 이래서 부처님 말씀이라도 무턱대고 받아들이지 말고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며 오직 스스로 깨우친 바가 중요하지 줏어들어서 아는 것은 별로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제자들에게 늘 모방하지 말라고 강조하였고 선사들을 모방하는 것은 손님으로 전락하는 것이라며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하라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