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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스크랩] 중용 해설(1~10장)

by Borealis 임박사 2011. 12. 28.

天命之謂性이오 率性之謂道ㅣ오 修道之謂敎ㅣ니라
하늘이 명한 것을 성품이라 이르고, 천명의 성품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도라 이르고, 그 성품을 따르는 길을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이르느니라

[본문 해설]
천명 = 성(性), 솔성 = 도(道), 수도 = 교(敎)는 대학의 첫머리에 나오는 삼강령인 명명덕(明明德)과 친민(親民)과 지어지선(止於至善)과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대학과 마찬가지로 중용도 天地人 삼재로 시작함을 알 수 있다.
하늘이 우리에게 명해준 것이 성품이므로 곧 天命之謂性이고, 하느님에게서 타고난 성품을 내가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길(道)이므로 곧 率性之謂道이고, 그 성품을 따르는 도를 잘 닦아 나가 마름질 해놓은 것이 가르침이므로 곧 修道之謂敎이다. 도를 잘 닦아 나가는 것, 즉 마름질하는 것이 바로 교육적인 가르침(敎)이 되는 것이다. 그 가르침을 받아 道를 따라가는 것이며, 그 도를 가다 보면 率性이 되고 결국 천명을 그대로 받드는 것이 된다. 성품을 이룬 것으로 볼 수 있다.
주역 계사상전 제8장에서 공자가 “이루어진 성품을 존하고 존함이 도의의 문이라(成性存存이 道義之門이라)” 하신 말씀과 통하는 글귀이다. 주역 계사상전 제5장에서는 “한 번은 陰을 하고 한 번은 陽을 하는 것이 道이고, 이를 이어나가는 것은 善이 되며, 이를 이룬 것은 性이라(一陰一陽之謂ㅣ 道ㅣ니 繼之者ㅣ 善也ㅣ오 成之者ㅣ 性也ㅣ라)”하였다. 사람은 원래 善하게 타고 난다. 그 선을 바탕으로 이어나가면서 이룬 것이 性이 된다. 繼之者善은 1년으로 말하면 元亨의 봄과 여름을 말하고, 成之者性은 利貞의 가을과 겨울에 해당한다. 하늘 그대로 이어받기는 받았지만 어떻게 여물지 모르는 상태가 繼之者善이고 가을이 되면 부여받은 성질대로 여무는 것이 成之者性이다. 그 成之者性이 계속 存存하는 成性存存만 된다면 道義의 문이 된다는 것이다. 도는 그 體이고 義는 그 用이다. 곧 도덕과 의리이다. 성성존존하게 된다면 이것은 곧 도덕과 의리를 행하는 문이 되어서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이나 우리 몸은 모두가 역의 이치로 만들어졌다. 자신의 몸을 자연과 더불어 순수하게 천명 그대로 이끌어나갈 때 率性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存存하는 것이다.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모습 그대로 천성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주역의 본체로 들어가서 역을 깨닫고 도를 통하게 되는데, 중용을 소주역이라 하는 이치를 맨 먼저 중용 머릿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으로 黃帝陰符經을 보면 “天性은 人也요 人心은 機也ㅣ니 立天之道하야 以定人也니라(하늘의 성품이 곧 사람의 것이고 사람의 마음은 움직이는 기틀인 것이니 하늘의 도를 잘 세움으로써 사람을 정립하느니라)”라 하였다. 또한 마음에서 물건이 나오고 물건에서 죽으니 그 기틀이 눈에 있다(心生於物하고 死於物하나니 機在於目이니라) 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보는 것에 따라 항상 흔들리므로 항상 하늘의 도를 잘 세워 용맹정진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논어의 가장 첫머리에서 ‘學而時習之(배우고 때로 익힌다)’를 내세워 항상 공부해야 함을 강조함도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을 다잡기 위한 방법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命은 猶令也ㅣ요 性은 卽理也ㅣ라 天以陰陽五行으로 化生萬物하야 氣以成形하고 而理亦賦焉하니 猶命令也ㅣ라 於是에 人物之生이 因各得其所賦之理하야 以爲健順五常之德하니 所謂性也ㅣ리라
명은 영(令)과 같고 성은 즉 이치이니라. 하늘이 음양과 오행으로써 화하여 만물을 내니 기운으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치를 부여해주니 (하늘이 사람에게) 명령함과 같음이라. 이에 사람과 모든 물건의 생함에는 각기 그 부여받은 바의 이치로 인하여 건순오상의 덕을 갖추고 나왔으니 성품이라 이르느니라.

[앞주 해설]
윗글은 주자가 달아놓은 앞주이다. 천명은 하늘의 命令이며, 性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이 사람에게 어떻게 살라고 부여해준 보이지 않는 이치를 말함이다. 하늘이 음양오행의 이치로 만물을 화생하여 그 기운으로써 형체를 이루고 그 속에 보이지 않는 이치를 준 것이다. 천명지위성의 이치를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하늘의 이치에는 건순오상의 덕이 있다. 주역 건괘 대상전에서 공자는 “하늘의 움직임은 굳건하여 군자가 이로써 스스로 굳세어 쉬지 않는다(天行이 健하니 君子ㅣ 以하야 自彊不息하나니라)”라고 하여 하늘은 순양으로써 굳셈을 나타내었고, 곤괘 문언전에서는 “곤의 도가 순한저! 하늘을 이어 때로 행하느니라(坤道ㅣ 其順乎인뎌. 承天而時行하나니라)”고 하여 땅은 순음으로써 유순함을 말하였다. 곧 사람의 하늘과 땅의 음양의 도에 따라 健順함을 부여받았으며, 음양이 사귀는 가운데 나온 오행에 따라 仁義禮智信이라는 다섯 가지의 떳떳한 덕인 五常의 덕을 부여받은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란 누구나가 健順五常이라는, 하늘이 명한 성품을 갖고 나왔다는 것이다.
중용을 ‘소주역’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머릿장에 천명을 언급하고 있으니 그것은 곧 주역의 음양 이치에 따른 글이기 때문이다.

率은 循也요 道는 猶路也ㅣ라 人物이 各循其性之自然이면 則其日用事物之間에 莫不各有當行之路하니 是則所謂道也ㅣ라

‘솔’은 ‘따를 순’과 같고, ‘도’는 ‘길 로’와 같음이라. 사람이나 모든 물건이 각각 그 성품의 자연함을 따르면, 날로 쓰는 사물의 사이에 각각 마땅히 행해야 할 길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곧 도이니라.

[앞주 해설]
道와 路를 합하여 道路가 된다. 道는 ‘머리 수(首)’와 ‘갈 지(之)’가 합한 글자로 머리가 가는 것이 으뜸이요 원칙이고, 路는 ‘발 족(足)에 ’각기 각(各)‘을 합하였으니 각각 나아가는 것으로 道는 나아가는 길의 體가 되고, 路는 用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야 할 길이 있는 한편으로,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각기 처한 바 위치에 따라서 마땅히 가야 할 길이 있음을 말한다.

修는 品節之也ㅣ라 性道는 雖同而氣稟이 或異니라 故로 不能無過不及之差할새 聖人이 因人物之所當行者而品節之하야 以爲法於天下則爲之敎ㅣ니 若禮樂刑政之屬이 是也ㅣ라

수는 품절(마름질하는 것)이라. 성과 도는 비록 같으나 기품이 혹 다르니라. 그러므로 과하거나 불급함의 차이가 없지 않기 때문에 성인이 사람과 물건의 마땅히 가야할 바를 인하여 잘 품절하여 써 천하의 법을 삼으니 이를 일러 교라고 하니 예를 들어 예절과 음악과 형벌과 정치 같은 등속이니라.

[앞주 해설]
닦는다는 것은 마름하는 것이다. 물품을 잘 손질하고 다듬어 절도있게 하는 것이다. 하늘의 명이 性이고 그 성품을 닦는 것이 道이므로 하늘이 부여하는 원리는 같으나 사람마다 타고 나는 기질적인 품성(稟性)은 각기 다르다. 타고난 성질이 급한 사람도 있고 느린 사람도 있으며, 타고난 기질이 강한 사람도 있고 유약한 사람도 있다. 사람마다 모두가 똑같이 중을 지켜나간다면 별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타고난 과불급의 차이가 있기에 성인이 사람마다 물건마다 마땅히 가야 할 바에 대해 잘 닦아나갈 수 있도록 마름질을 한다. 그것이 곧 ‘敎’, 가르침인데 이에는 예절과 음악, 형벌과 정치 등등의 여러 방법이 있다.

蓋人이 知己之有性호대 而不知其出於天하며 知事之有道호대 而不知其由於性하며 知聖人之有敎호대 而不知其因吾之所固有者하야 裁之也ㅣ라 故로 子思ㅣ 於此에 首發明之하시니 而蕫子所謂道之大原이 出於天이라 하니 亦此意也ㅣ라

대개 사람이 자기에게 성품이 있음을 알되 그것이 하늘에서 나옴을 알지 못하며, 사물이 가야 할 길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이 하늘이 부여해준 성품을 따라야 하는 연유는 알지 못하며, 성인의 가르침이 있는 것을 알면서 그 나의 진실로 둔 바를 인하여 마름하는 것은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자사가 이에 (중용의) 머릿장에 밝히시니 동자(董子 ; 동중서)란 이가 도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왔다 이르니 또한 이 뜻이니라.

道也者는 不可須臾離也ㅣ니 可離면 非道也ㅣ라 是故로 君子는 戒愼乎其所不睹하며 恐懼乎其所不聞이니라
도라 하는 것은 가히 잠깐이라도 떠나지 못할 것이며 가히 떠나면 도가 아니니라. 이런 고로 군자는 그 보지 못한 바에서 경계하고 삼가하며 그 듣지 못한 바에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느니라.

[본문 해설]
우리가 가야 할 길, 곧 도라는 것은 내 몸에서 잠깐이라도 떠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길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도를 실천하지 않아 벌어질 무서움이나 두려움을 보고 난 뒤에야 어거지로 하는 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보지 않고(不睹) 듣지 않더라도(不問) 이것이 사람이 가야 할 길이겠구나 하는 원리에 입각해 스스로 늘 조심조심 도를 따라가야 한다(戒愼恐懼)는 것이다.
불가(佛家)의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에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빛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니 영원히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니라)라고 한 말도 바로 不睹하고 不聞이라 하여 도를 닦지 않음을 경계한 말이다.

道者는 日用事物當行之理니 皆性之德而具於心하야 無物不有하고 無時不然하니 所以不可須臾離也ㅣ라 若其可離면 則豈率性之謂哉ㅣ요 是以로 君子之心이 常存敬畏하야 雖不見聞이나 亦不敢忽이니 所以存天理之本然이요 而不使離於須臾之頃也ㅣ라
도라 하는 것은 날로 쓰는 사물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이치이니 모두가 성품의 덕이요 그것이 마음에 다 갖추어져 물건마다 (도를) 두지 않음이 없고 때로 그렇지 않음이 없으니 써한 바가히 잠깐이라도 떠나지 않음이 없느니라. 만약 가히 떠나면 어찌 하늘이 정한 성품을 따른다고 할 수 있으리요. 이로써 군자의 마음이 항상 경외롭게 두어(곧 戒愼恐懼) 비록 보고 듣지 못하나 또한 감히 경솔히 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이 써한 바 천리의 본연(곧 性道)을 존하는 것이고 잠깐의 경각이라도 떠나지 못함이니라.

[앞주 해설]
윗 글의 常存敬畏는 대학 전문 제6장 제2절의 “小人이 閒居에 爲不善호대 無所不至하다가 見君子而后에 厭然掩其不善하고 而著其善하나니 人之視己ㅣ 如見其肺肝이니 然則何益矣리오 此謂誠於中이면 形於外니 故로 君子는 必愼其獨也ㅣ니라(소인이 한가하게 있을 때에 불선을 행함이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다가 군자를 보고 난 뒤에 슬며시 그 불선을 가리고 선을 드러내지만, 남들이 자기를 알아봄이 마치 나의 폐장과 간장을 보는 듯할 것이니 그렇다면 어찌 유익하겠는가. 이를 일컬어 ‘속마음에 성실하면 밖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니,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가니라).”는 내용과 같이 항상 .戒愼恐懼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莫見乎隱이며 莫顯乎微니 故로 君子는 愼其獨也ㅣ니라
숨은 것보다 나타나는 것이 없으며 미미한 것보다 드러나는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를 삼가느니라

[본문 해설]
천자문에 屬耳垣墻(속이원장), 寓目囊箱(우목낭상)이라는 말이 있다. 귀는 담장에 붙어 있고, 눈은 내가 늘 쓰는 상자 속이나 천장에 붙어 있으니 말조심 행동조심 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숨어있는 것이 절대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더 잘 나타나고, 미미한 것이라 하여 결코 드러나지 않으리라 여기지만 역시 다 드러나기 때문에 숨어 있을 때나 은미할 때나 남이 보지 않고 듣지 않을 때라도 다시 말해 홀로 있을 때라도 스스로를 삼가야 한다.
주역 풍화가인(風火家人)괘에서 언급한 ‘君子는 言有物而行有恒이라(말에는 실물이 있고 행동에는 항상함이 있다)’ 하여야 하고 앞서도 나왔듯이 必愼其獨해야 한다는 뜻이다.

隱은 暗處也ㅣ요 微는 細事也ㅣ라 獨者는 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地也ㅣ라 言幽暗之中 細微之事에 跡雖未形이나 而幾則已動하니 人雖不知나 而己獨知之하니 則是天下之事ㅣ 無有著見明懸而過於此者ㅣ라 是而로 君子ㅣ旣常戒懼하야 而於此에 尤加謹焉ㅣ니 所以遏人欲於將萌하야 而不使其潛滋暗長於隱微之中하야 以至離道之遠也ㅣ라

隱은 어두운 곳이요 微는 가느다란 일이라. 홀로란 것은 남이 알지 못하는 바이며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것이라. 그윽하고 어두운 가운데 세미한 일이 비록 자취라는 형체는 있지 아니하나 기미는 이미 움직이고 있어 남들이 비록 알지 못하나 나 홀로는 아는 것이 곧 천하의 일이니 나타나고 밝게 드러나 여기에 지남이 있지 않느니라. 이로써 군자가 항상 계신공구하야 이에 더욱 더 삼갈 것이니, 써한 바 사람의 욕심이 장차 싹 트는 것을 막아 은미한 가운데 푹 잠겨 차차 불어나고(潛滋) 어두운 속에서 점차 커져(暗長) 도를 떠나 멀리 이르지 않게 함이니라

[앞주 해설]
아무리 비밀스럽게 하는 일이라도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기에 형체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기미는 드러나 있는 것이니 곧 만천하에 다 알려진다. 주역 14번째 화천대유(火天大有)괘에 보면 "遏惡揚善(알악양선)하야 順天休命(순천휴명)하나니라(악한 것을 막고 선한 것을 드날려서 하늘의 아름다운 명을 따르느리라)”하였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모든 것이 많아지고 풍성해지다보니 이를 탐하고 욕심을 내어 죄짓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물질이 풍요롭고 빈부의 격차가 나면 없는 사람는 없기에 가지려고 죄짓고, 있는 사람은 더 가지려고 죄를 짓는다. 그래서 遏惡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맹자에도 ‘遏人欲存天理(사람의 욕심을 막아 하늘의 이치를 보존해야 한다)’라 하였다. 즉 하늘이 부여해주 性道를 지키기 위해서는 항상 戒愼恐懼해야 함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대목이다.

喜怒哀樂之未發을 謂之中이요 發而皆中節을 謂之和ㅣ니 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ㅣ오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ㅣ니라
희노애락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때를 中이라 이르고 나타났지만 節에 맞게 함을 和라 하니 中이라 하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和라는 것은 천하의 통한 道이니라(모두가 가야 할 길이니라)

[본문 해설]
여기서부터는 중용을 설명하고 있다. 앞에서는 도를 말하였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기뻐하거나 성내거나 슬퍼하거나 즐거워할 때가 있다. 이것이 아직 마음 속에 있을 때가 중이고, 그것을 잘 조절해 적절히 나타났을 때를 和, 곧 조화, 화합이라고 한다. 이것이 곧 中和이며, 中庸을 말한다. 中은 언제나 中이고, 和는 ‘떳떳함(庸)’, 正, 節로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中和라 하면 中庸이요, 中正이요 中節이요 中道로도 얘기할 수 있다.
中은 속에 있는 것이므로 뿌리가 되기에 大本으로 표현했고, 근본에서 나와 가지를 뻗어 나가는 것이 道이므로 누구나 다 가야할 길이기에 和를 達道로 표현했다. 곧 내적인 大本이 中, 外的인 達道가 和가 된다.


喜怒哀樂은 情也ㅣ니 其未發則性也ㅣ라 無所偏倚라 故로 謂之中이요 發皆中節은 情之正也ㅣ라 無所乖戾라 故로 謂之和라 大本者는 天命之性이니 天下之理ㅣ 皆由此出하니 道之體也ㅣ라 達道者는 循性之謂니 天下古今之所共由니 道之用也ㅣ라 此言은 性情之德이니 以明道不可離之意니라

희노애락은 (사람의) 감정(情)이니 그것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를 性이라 함이라. 치우치고 기울어지는 바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를 중이라 함이요 발하되 절도에 맞는 것을 감정의 바름이니라. 어긋나거나 거스리는 바가 없으므로 이를 和라 이르니라. 대본이라는 것은 천하의 성품이니 천하의 이치가 모두 이로 말미암아 나오니 도의 體이니라. 통한 도라고 하는 것은 성품을 따름을 이름이니 천하와 고금이 한가지로 말미암은 바이니 도의 用이라. 이것은 성정의 덕을 말함이니 써 밝은 도는 가히 떨어질 수 없다는 의미니라.

[앞주 해설]
大本은 곧 道之體가 되며 中이 되며, 바로 중용 맨첫머리에 언급한 天命之謂性을 말한다. 達道는 곧 道之用이 되며 和가 되고 率性之謂道에 해당하고 性情之德을 말한다.


致中和ㅣ면 天地ㅣ位焉하며 萬物이 育焉이니라
중화에 이르면 천지가 자리하며 만물이 길러지느니라

[본문 해설]
주역 계사상전 첫머리에 “易簡而天下之理ㅣ 得矣니 天下之理ㅣ 得而成位乎其中矣니라(쉽고 간단함에 천하의 이치를 얻으니, 천하의 이치를 얻음에 위를 그 가운데에 이루느니라)’고 하였으며, 천부경에도 ‘人中天地一’라 하여 가운데 자리하는 것을 매우 소중함을 밝히고 있다. 하늘이나 땅이나 중화라는 제 위치를 잃는다면 만물이 길러질 수 없음을 표현해 중화는 곧 천지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다.

致는 推而極之也ㅣ라 位者는 安其所也ㅣ오 育者는 遂其生也ㅣ라 自戒懼而約之하야 以至於至靜之中하야 無所偏倚而其守ㅣ 不失이면 則極其中而天地ㅣ 位矣요 自謹獨而精之하야 以至於應物之處에 無小差謬而無適不然이면 則極其和而萬物이 育矣ㅣ니라 蓋天地萬物은 本吾一體니 吾之心이 正이면 則天地之心이 亦正矣ㅣ요 吾之氣ㅣ 順이면 則天地之氣ㅣ 亦順矣이라 故로 其效驗이 至於如此하니 此는 學問之極功이요 聖人之能事라 初非有待於外나 而修道之敎로 亦在其中矣ㅣ라 是其一體一用이 雖有動靜之殊나 然이나 必其軆立而後에야 用이 有以行이면 則其實ㅣ 亦非有兩事也ㅣ라 故로 於此에 合而言之하야 以結上文之意ㅣ니라

치는 미루어 극함이라, 위라는 것은 그 곳에서 편안함이오, 육은 그 생함을 이룸이니라. 계신공구로부터 간략히 하여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이르러 치우치거나 미뤄지는 바가 없어 그 지키는 바를 잃지 않으면 그 중이 지극해져 천지가 위를 얻게 되고, 근독(홀로를 삼가함)으로부터 정미롭게 해서 써 물건을 응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서 어디를 가든지 그렇지 않음이 없으면(中이라는 體를 잘 잡는다면) 그 화함을 극하게 해서 만물이 길러지느니라. 대개 천지만물이라 함은 본래 내 한 몸이니 나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를 것이요 나의 기운이 순하면 천지의 기운도 또한 순하느니라. 그러므로 그 효험이 이와 같은데 이르니 이것은 (중용이라는) 학문의 지극한 공이며 성인의 능한 일이니라. 처음에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지 아니하나(내 성품 밖으로 나가지 않으나) 도를 마름하는 敎(修道之敎)가 또한 그 가운데 있느니라(도를 잘 마름하고 밖으로 나가 가르치니 효험이 커짐이 있음이라). 이 그 일체일용이 비록 동하고 정하는 다름이 있으나 반드시 그 체가 선 뒤에 용이 써 행함이 있으면 즉 그 실지(실상)가 두 가지 일이 있지 않음이니 고로 이에 합해서 말하니 윗글의 뜻을 여기에 말함이라

[앞주 해설]
천지인이 모두가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천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 속에 있음을 부연설명하고 체용의 이치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체를 바로 세우고 행해야 함을 덧붙이면서 一體一用은 곧 一原을 밝히고 있다.

右는 第一章이라

子思ㅣ 述所傳之意以立言하야 首明道之本原이 出於天而不可易하니 其實은 體備於己而不可離이요 此言 存養省察之要하야 終言聖神功化之極하니 蓋欲學者로 於此에 反求諸身而自得之ㅣ니 以去夫外誘之私而充其本然之善이니라 楊氏l 所謂一篇之體要요 是也ㅣ니라 其下十章은 蓋子思ㅣ 引夫子之言하야 以終此章之意ㅣ니라

자사가 전한 바의 뜻을 지어서 써 말을 세워서 먼저 도의 본원이 하늘에서 나와서 가히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밝혀 놓았으니 그 실지는 체가 몸에 갖추어져 가히 떠나지 못함을 (머릿장에) 밝힌 것이오, 이 말은 살피고 살핌의 중요함을 잘 존양하고(말해놓고 ) 마침내는 성신(성인의 신비로움)의 공되고 화하는 지극함을 말해 놓았으니, 대개 배우는 자가 이에 저 몸에 돌이켜 구해(反求諸身) 스스로 얻어써 밖으로 유혹되는 사사로움을 버리고 본연의 선함을 충족시키게 함이라 .양씨가 한편의 체요라고 말한 바가 이것이니라. 이하 십장은 대개 자사가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써 이 장의 뜻을 마무리했느니라.

仲尼ㅣ曰 君子는 中庸이오 小人은 反中庸이니라
중니(공자) 가라사대 군자는 중용이오 소인은 반중용이니라


中庸者는 不偏不倚無過不及而平常之理니 乃天命所當然이요 精微之極致也ㅣ라 唯君子라야 爲能體之요 小人은 反是니라

중용이라 하는 것은 치우치지도 아니하고 기울어지지도 아니하고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어서 늘 그대로의 이치이니 이에 천명의 당연한 것이고 정미롭고 은미한 극치니라 오직 군자라야 능히 그 중용을 체행을 하고 소인은 이와 반대되는 짓을 하느니라.

君子之中庸也는 君子而時中이오 小人之反中庸也는 小人而無忌憚也ㅣ니라
군자의 중용은 군자이면서 때로 중을 하고 소인의 반중용은 소인이면서 꺼림이 없느니라.

王肅本에 作小人之反中庸也라 하야늘 程子ㅣ 亦以爲然하시니 今從之하노라 君子之所以爲中庸者는 以其有君子之德하야 而又能隨時以處中也하고 小人之所以反中庸者는 以其有小人之心하야 而又無所忌憚也ㅣ라 蓋中無定體하야 隨時而在하니 是는 乃平常之理也ㅣ라 君子는 知其在我라 故로 能戒謹不覩하고 恐懼不聞하야 而無時不中이요 小人은 不知有此하니 則肆欲妄行하야 而無所忌憚矣리라
왕숙본에 소인이 중용에 반한다고 지었거늘 정자가 또한 써 그렇다고 하니 이제 따르노라 군자가 써 중용을 한다는 것은 그 군자의 덕이 있으면서 또한 능히 때를 따라 써 중에 처함이요 소인이 써 중용에 반한다는 것은 그 소인의 마음이 있어서 또한 기탄하는 바가 없느니라. 대개 중이라 하는 것은 정한 체가 없어서 때를 따라서 있으니 이것이 이에 늘 평상의 이치이라. 군자는 그 내게 있음을 아느니라. 그러므로 보지 않을 적에 경계하고 삼가며 듣지 않았을 적에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여 때로 중을 하지 않음이 없고, 소인은 이것이(중용이 내 마음에 있음을) 있음을 아지 못하니 방자한 욕심이 망령되이 움직여서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느니라.

[앞주 해설]
'中無定體’는 주역에 나오는 ‘神无方而易无體(신은 방소가 없고 역은 체가 없다)’의 이치와 같다. 때와 장소에 따라 신비로운 신의 작용이 나타나므로 방소가 없고 역 또한 때마다 다르게 점괘가 나오므로 일정한 체가 없듯이 중이라 하는 것도 정해진 체가 없어 때에 따라 나타남을 설명한 글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중용은 항상 삼가고 두려워하는 반면 소인의 반중용은 거리낌없이 망령되이 행동한다.

右는 第二章이라

此下十章은 皆論中庸하야 以釋首章之義며 文雖不屬이나 而意實相承也ㅣ라 變和言庸者는 游氏曰 以性情으로 言之면 曰中和요 以德行으로 言之면 則曰中庸이 是也ㅣ라 然이나 中庸之中은 實兼中和之義라
이 아래 열 장은 다 중용을 논해서 머리장의 뜻을 해석함이니 글이 비록 연결되지는 아니하나 뜻은 실로 서로 이어지니라. 和를 변하여 庸이라고 하는 것은, 유씨가 말하기를 성정으로 말하면 가로되 중화요, 덕행으로써 말하면 중용이 이것이라. 그러나 중용의 가운데에 실지로 중화의 뜻을 겸하느니라.

子ㅣ曰 中庸은 其至矣乎인뎌 民鮮能이 久矣니라
공자 가라사대“중용은 그 지극한져! 백성이 (중용에) 능함이 적은지 오래이니라.”

過則失中이오 不及則未至라 故로 惟中庸之德이 爲至라 然이나 亦人所同得하야 初無難事로대 但世敎ㅣ 衰하야 民不興行이라 故로 鮮能之今已久矣라 論語엔 無能字하니라
지나치면 중을 잃고 미치지 못하면 이르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오직 중용의 덕이 지극함이라. 그러나 또한 사람이 한가지로 (중용의 덕을) 얻어서 처음에는 어려운 일이 없으되 다만 세상 가르침이 쇠퇴해져서 백성이 (중용의 덕에) 일어나 행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능한 이가 적은지 이제 이미 오래되었느니라. 논어에는 ‘能’자가 없느니라.

[앞주 해설]
중용의 덕이 지극한지라 과하면 중을 잃게 되고 불급하면 미치지 못한다. 사람은 애초 하늘로부터 중용의 덕을 얻었기에 처음에는 이를 실천하는데 어렵지 않았으나 세상의 가르침이 쇠퇴해지면서 중용의 덕이 흥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래전부터 중용에 능한 자가 드물게 된 것이다. 공자의 말씀이 많이 담겨 있는 논어를 보면, 옹야편(雍也篇)에 “子ㅣ曰 中庸之爲德也라 其至乎인져 民鮮이 久矣니라”(중용은 덕이라 그 지극함이여 (중용의 덕을 행하는) 백성이 드문지 오래니라)고 하였듯이 이곳에는 ‘能’자가 빠져 있다. 즉 지극한 중용을 행하는 백성이 적다라고 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자사가 지은 중용에는 ‘지극한 중용의 덕을 능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적어진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能’자를 하나 더 붙여 피폐해진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右는 第三章이라

子ㅣ曰 道之不行也를 我知之矣로라 知者는 過之하고 愚者는 不及也ㅣ라니 道之不明也를 我知之矣로라 賢者는 過之하고 不肖者는 不及也ㅣ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도가 행하지 못할 것을 내가 아노라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함이라 도가 밝지 못할 것을 내가 아노라 어진 자는 지나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미치지 못하느니라.”

[본문 해설]
중용지도는 천리(天理)요 진리(眞理)이다. 주역에도 중정과 중부, 중절, 중용, 중화의 도를 강조하고 있다. 천지도 중용의 도가 아니면 만물을 낼 수 없듯이 중용의 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치와 실천하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중용지도로써 행해야 하는 사람은 흠결 하나 없듯이 정치도 중용지도로 행해 나가야 국가가 발전하고 사회가 발전하고 백성들이 잘 살게 된다. 그러나 대도(大道)인 중용지도를 행하고 밝힌다는 것은 쉽지 않음을 공자가 강조하고 있다.

[참조]
주역은 過하거나 不及함이 없는 中을 가장 중시한다. 中은 節과 통하니 천지의 배합인 60간지에 상응하는 60번째의 괘가 곧 水澤節이다(節卦 彖傳에도 中正以通을 말함).역법(曆法)상으로 한 해의 中節에 해당하는 것은 周天常數 360일이다. 5歲에 두 달의 윤을 두는 방법(五歲再閏)에 기준하면 매년 日行은 6일이 과도하고 月行은 6일이 부족하다. 주역에서는 이를 大過와 小過로 설명하고 있는데, 대과는 큰 양(日陽)이 지나친 것이고 소과는 작은 음(月陰)이 지나친 것이다. 그러므로 日行의 과도한 도수가 대과가 되고 月行의 과도한 도수가 소과가 되는데, 이것은 일월운행에서 상대적으로 발생하는 氣盈(기영 : 대과)과 朔虛(삭허 : 소과)의 도수에 상응한다.

道者는 天理之當然이니 中而己矣라 知愚賢不肖之過不及은 則生禀之異而失其中也ㅣ라 知者는 知之過ㄹ새 旣以道로 爲不足行이오 愚者는 不及知하고 又不知所以行하니 此는 道之所以常不行也ㅣ라 賢者는 行之過ㄹ새 旣以道로 爲不足知하고 不肖者는 不及行하고 又不求所以知하니 此는 道之所以常不明也ㅣ라
도라 하는 것은 천리의 당연함이니 중일 뿐이니라. 알고 어리석고 어질고 어질지 못함의 과불급은 타고난 품부의 다름인즉 그 중을 잃음이라. 아는 자는 아는 것이 지나쳐 이미 도로써 족히 행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는 아는데 미치지 못하고 또한 행동하는 바를 아지 못하니, 이것은 도가 항상 행해지지 못하는 바이니라. 어진 자는 행실이 지나쳐 이미 도로써 알 것이 없다하고 어질지 못한 자는 행동이 미치지 못하고 또한 아는 바를 구하지 아니하니 이것은 도가 항상 밝지 못하는 바이니라.

人莫不飮食也ㅣ언마는 鮮能知味也ㅣ니라
사람이 마시고 먹고 하지 않음이 없건마는 능히 맛을 아는 이가 적으니라

道不可離어늘 人自不察하니 是以로 有過不及之弊하니라
도는 가히 떠나지 못하거늘 사람이 스스로 살피지 못하니 이로써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폐단이 있느니라.

右는 第四章이라

子ㅣ曰 道其不行矣夫인뎌
공자 말씀하시기를 “도가 행하지 못할진져”

由不明이라 故로 不行이라
밝지 못하므로 말미암음이라. 그러므로 행하지 못함이니라.

右는 第五章이라

此章은 承上章而擧其不行之端하야 以起下章之意라
이 장은 위 글을 이어서 그 행하지 못하는 단서를 들어서 써 아래 글의 뜻을 일으키니라.

[앞주 해설]
이 장은 간단하지만 앞 장에서 예시했듯이 결국은 知者나 愚者, 賢者나 不肖者의 과불급으로 인해 도가 행해지지 못함을 결론짓고 다음 장부터는 도가 행해진 예를 구체적으로 들고 있다.

子ㅣ曰 舜은 其大知也與ㅣ신뎌 舜이 好問而好察邇言하샤대 隱惡而揚善하시며 執其兩端하샤 用其中於民하시니 其斯以爲舜乎ㅣ신뎌
공자 말씀하시기를 순임금은 그 큰 지혜이시다. 순임금이 묻기를 좋아하시고 가까운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시되 악함을 숨기고 선을 드날리시며 그 두 끝을 잡으셔서 그 중을 백성에게 쓰시니 그 이로써 순임금이 되심이로다(과연 순임금이로시다).

[본문 해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묻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순임금은 상대가 비록 어리석건 그러하지 않던 간에 묻고 살펴 그 악은 숨겨두고 선은 높이 드날렸다. 그리고 늘 백성들로부터 항상 양단의 얘기들을 듣고 중으로써 정치를 하셨으니 순임금은 과연 성인다우셨음을 표현한 글이다.

舜之所以爲大知者는 以其不自用而取諸人也ㅣ라 邇言者는 淺近之言이어늘 猶必察焉하니 其無遺善을 可知라 然이나 於其言之未善者엔 則隱而不宣하시고 其善者엔 則播而不匿하사 其廣大光明이 又如此하시니 則人孰不樂 告以善哉리오 兩端은 謂衆論不同之極致라 蓋凡物이 皆有兩端하니 如小大厚薄之類라 於善之中에 又執其兩端而量度하야 以取中然後에 用之면 則其擇之審而行之至矣라 然이나 非在我之權度ㅣ 精切不差면 何以與此리오 此는 知之所以無過不及而道之所以行也ㅣ라
순임금이 써 대지가 되신 것은 그 스스로 쓰지 아니하고 저 사람에게 취함으로써 함이니라. 가까운 데 말은 천근한 말이어늘 오히려 반드시 살피니 (순임금이야말로) 그 선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가히 알 만하니라. 그러나 그 말이 선하지 못한 자에게는 숨겨서 선양하지 아니하시고 그 선한 자에게는 전파하여 숨기지 아니하셔서 그 광대하고 광명함이 또한 이와 같으시니 즉 사람이 누가 선으로써 말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리오. 양단이란 것은 여러 사람의 의논이 같지 아니한 극치를 말함이라. 대개 그 물건이란 것이 모두 양단이 있으니 작고 크고 후하고 박한 종류인 것과 같음이라. 선한 가운데에 또한 그 양단을 잡아 잘 헤아려 중을 취한 연후에 쓰면 (백성들이) 그 가림을 살피고 행함이 지극할 지니라. 그러나 내게 있는 권도(저울과 잣대)가 정절해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음이 아닐 것 같으면 어찌 써 이에 참여하리오. 이는 지(知)로써 과하거나 불급하지 않음이 없어 도가 써 행해지는 바라.

度 : 헤아릴 탁 權 : 저울 권 度 :자 도

右는 第六章이라

子ㅣ曰 人皆曰予知로대 驅而納諸罟擭陷阱之中而莫之知辟也하며 人皆曰予知로대 擇乎中庸而不能期月守也ㅣ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내가 안다 하되 몰아서 저 그물과 덫과 함정 속에 들이게 하면 피할 줄을 알지 못하며,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내가 안다 하되 중용을 가려내 지키라 하면 한달도 능치 못하느니라.”

驅 : 몰 구 罟 : 그물 고 擭 : 덫 확 陷 : 빠질 함 阱 : 함정 정 辟 : 피할 피

[본문 해설]
세상 사람들은 으스대며 중용을 안다하니 이들을 몰아 (중용지도가 아닌) 그물이나 함정에 빠뜨리면 피하지 못하고 중용을 택해서 지키라 하면 한달도 지키지 못함을 공자가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순임금은 간악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서제가 수차례에 걸쳐 그를 죽이려 했을 때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 이유는 순임금이 생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만약 순임금이 그들이 의도한 대로 죽었을 경우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부모와 동생을 손가락질하며 자식과 형을 죽인 사람들이라고 욕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곧 부모에 대한 불효요 형제간의 우애를 저버리는 일이기에 순임금이 지혜롭게 대처하신 것이다.

罟는 網也오 擭은 機檻也오 陷阱은 坑坎也ㅣ니 皆所以掩取禽獸者也ㅣ라 擇乎中庸은 辨別衆理하야 以求所謂中庸이니 卽上章好問用中之事也ㅣ라 期月은 匝一月也ㅣ라 言知禍而不知辟온 以況能擇而不能守랴 皆不得爲知也ㅣ니라
고는 그물(網)이오 확은 덫(機檻)이요 함정은 구덩이에 빠짐이니 모두가 눈을 가려 금수를 취하는 바이니라, 중용을 가려낸다는 것은 많은 논리를 분별해 나누어서 써 이른바 중용을 구함이니 즉 윗글에 (순임금이) 묻기를 좋아하고 중용을 쓴 일이니라. 기월은 한달을 두른 것이니라(한달이 된 것이니라). 화를 알고도 피할 줄을 알지 못하거든 써 하물며 능히 (중용을) 가려서 능히 지키지 못함이랴. (이것은) 모두가 知가 되지 못함이라(조금 배우고 지혜롭다고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檻 : 우리 함 匝 : 돌 잡

右는 第七章이라

承上章大知而言하고 又擧不明之端하야 以起下章也ㅣ니라
위 글의 대지를 이어서 말하고 또 밝지 못한 단서를 들어서 써 아래 장을 일으킴이니라.

子ㅣ曰 回之爲人也ㅣ 擇乎中庸하야 得一善則拳拳服膺而弗失之矣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회(안자)의 사람됨이 중용을 가려서 하나의 선함을 얻으면 받들어 가슴에 붙여서 잃지 아니 하느니라”

拳 : 주먹 권, 拳拳 : 주먹을 말아쥐듯이 정성스럽게 받드는 모양을 나타냄. 膺 : 가슴 응

[본문 해설]
안회(안자)가 32살에 돌아가셨을 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망쳤다(噫라 天喪予삿다 天喪予삿다 : 논어, 先進편)고 통곡할 만큼 탁월한 제자였다. 안회는 누추한 거리에 살면서 대나무로 엮은 밥그릇에 밥을 담아 쪽박의 물을 먹으면서도(一簞食와 一瓢飮에 在陋巷이라) 조금도 배우는 즐거움이 변치 않으니 공자는 안회야말로 참으로 어질다(賢哉아 回也여)고 거듭거듭 칭찬했다(논어, 雍也편). 노나라의 애공이 공자에게 제자 중 누가 배우기를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안회를 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으나 불행히도 단명으로 죽어 지금은 없다. 그후로는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들은 바가 없다(不遷怒하며 不貳過하더니 不幸短命死矣라 今也則亡하니 未聞好學者也ㅣ라 : 雍也편)”고 하였을 정도이다.

回는 孔子弟子顔淵의 名이라 拳拳은 奉持之貌라 服은 猶著也ㅣ라 膺은 胷也ㅣ라 奉持而著之心胸之間은 言能守也ㅣ라 顔子는 蓋眞知之라 故로 能擇能守如此하니 此는 行之所以無過不及而道之所以明也ㅣ라
회는 공자 제자 안연의 이름이니라. 권권은 받들어 갖는 모양이라. 복은 붙이는 것과 같음이라. 응은 가슴이라. 받들어 가져서 가슴 한 가운데에 붙이는 것은 능히 지킴을 말함이라. 안자는 대개 참으로 아느니라. 그러므로 능히 가려내고 능히 지킴이 이와 같으니 이는 (중용을) 행하는데 써 과불급이 없어 도가 써 밝은 바이라

著 : 붙일 착 胷 : 가슴 흉, 胸과 같음

右는 第八章이라

子ㅣ曰 天下國家도 可均也ㅣ며 爵祿도 可辭也ㅣ며 白刃도 可蹈也ㅣ도대 中庸은 不可能也ㅣ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천하국가도 가히 고르게 하며 벼슬과 녹도 가히 사양할 수 있으며 날이 선 칼날도 가히 밟을 수 있으되 중용은 가히 능치 못하느니라.”

爵 : 벼슬 작 祿 : 복 록 辭 : 사양할 사 蹈 : 밟을 도

均은 平治也ㅣ라 三者는 亦知仁勇之事니 天下之至難也ㅣ라 然이나 皆倚於一偏이라 故로 資之近而力能勉者는 皆足以能之어니와 至於中庸하야는 雖若易能이나 然이나 非義精仁熟而無一毫人欲之私者면 不能及也ㅣ라 三者는 難而易하고 中庸은 易而難하니 此民之所以鮮能也ㅣ라
균은 평치함이라. 세 가지는 知 仁 勇의 일이니 천하의 지극한 어려움이라. 그러나 모두가 한쪽에 기울어졌느니라. 고로 가까운 데부터 힘으로 능히 힘쓰는 자는 다 족히 써 능하거니와 중용에 이르러서는 비록 쉽게 능할 것 같으나 그러나 의로움(義)과 정미로움(精), 어짊이 성숙해져 터럭만큼의 사람 욕심의 사사로움이 없는 자가 아니면 능히 (중용지도에) 미치지 못하느니라. 세 가지는 어려울 것 같지만 쉽고 중용은 쉬울 것 같으나 어려우니, 이는 백성이 써 능한 이가 드문 바이니라.

[앞주 해설]
천하국가를 고르게 하려면 알아야 하고(知), 벼슬과 녹도 사양할 수 있으려면 어질어야 하고(仁), 칼날을 밟으려면 용기가 있어야(勇) 하는데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가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중용의 도에 이르려면 의롭고 정미롭고 어짊이 성숙해져 조금도 사사로운 욕심이 없어야 한다. 가균(可均)하려면 충분히 지혜롭기만 하면 되고, 가사(可辭)하려면 충분히 어질면 되고, 가도(可蹈)하려면 용감하기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얼핏 보기에는 매우 어려운 것 같지만 한쪽으로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기에 오히려 쉽다. 하지만 중용의 도를 실천하려면 의롭고 정미롭고 어짊이 모두 충분히 성숙되어야 하므로 얼핏 보기에는 쉬울 것 같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다. 공자도 말씀하셨듯이 중용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右는 第九章이라

亦承上章하야 以起下章이라
한 위 글을 이어 써 아래 글을 일으킴이니라.

子路ㅣ 問强한대
자로가 강을 묻자오니

[본문 해설]
자로(BC543~BC481)는 공자의 제자로, 성은 중(仲), 이름은 유(由)이다. 子路는 자(字)이며, 계로(季路)라고도 한다. 노(魯)나라 변(卞, 지금의 산동성) 출신으로, 공자의 훌륭한 10명의 제자인 공문십철(孔門十哲) 가운데 하나이다. 무용(武勇)에 뛰어났으며 인품이 호방하고 성실하였다. 무술로써 항상 공자를 수행하였는데 공자는 가끔 그의 만용과 과단한 성격에 대해 꾸지람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의 솔직한 성격으로 공자와 가장 마음이 통했던 제자로 꼽혀지기도 한다. 공자와 자로의 이러한 관계는 논어에 자주 언급된다.
공야장(公冶長)편에 보면, 공자가 “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갈까 하는데 나를 따를 자는 유일 것이다(道不行이라 乘桴
하야 浮于海하리니 從我者는 其由與인저)” 하자 자로가 기뻐했다. 그러자 공자는 다시 “유는 용맹하기를 좋아하는데 나보다 더하니 재량 분별할 줄을 모른다(由也는 好勇過我하나 無所取材니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공자가 난세에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한탄하며 차라리 세상을 피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한 얘기인데 정작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다닐 때의 위험은 생각지 않고 그저 스승이 자신을 택해 함께 한다는 사실에만 기뻐할 뿐 깊이 사려하지 못하는 자로를 깨우치고자 하신 말씀이다.
또 한 예를 선진(先進)편에서 들어보자. 하루는 공자의 네 명의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내가 약간 나이가 많다고 해서 어려워하지 말라. 그대들은 노상 ‘나를 몰라준다’고 말하지만 만약 그대들을 알아서 써 준다면 어찌 하겠느냐?(以吾一日長乎爾나 毋吾以也하라 居則曰 不吾知也라 하나니 如或知爾면 則何以哉오)”고 하시자 자로가 불쑥 나서서 대답하기를 “병차 천승을 낼 수 있는 나라가 큰 나라 사이에 끼여 곤란을 당하고 더욱 또한 전란과 기근으로 허덕인다 하더라도 제가 나서서 다스리면 삼년 안으로 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또 백성들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주겠습니다.”라 하였다. 공자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모두의 얘기를 듣고 세 사람의 제자가 나간 뒤 증자의 아버지인 증석(曾晳)이 남아 웃은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나라는 예로써 다스려야 하는데, 그는 말하는 데도 겸양할 줄을 모르니 웃었노라(爲國以禮어늘 其言不讓이라 是故로 哂之호라)” 하였다.
자로는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였으나 위나라 괴외(蕢聵)
의 내란 때 전사했다. 이때 그의 시체가 소금에 절여진 것을 안 공자는 매우 슬퍼했다고 했다.

[참조]
공문십철(孔門十哲)에 관하여
춘추시대 때 공자의 문하생 중 뛰어난 제자 열 명을 말한다. 논어 선진편(先進篇)에 “덕행에는 안연(顔淵),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언어에는 재아(宰我), 자공(子貢), 정사(政事)에는 염유(冉有), 계로(季路), 문학에는 자유(子游), 자하(子夏)라 하여 72 제자 중 중심을 이룬 제자 10명을 그 장점에 따라 4분류하고 있다. 이것을 후세에 사과십철(四科十哲)이라 하였다. 덕행이란 모든 행위가 바른 것, 언어란 제후간의 응대 수사(修辭)에 뛰어난 것, 정사란 치국에 재능이 있는 것, 문학이란 고전에 정통한 것이다. 이것을 四科라 한 것은 후한 때의 『논형(論衡)』문공편(問孔篇)과 『後漢書』정현전(鄭玄傳)에서부터이고, 十哲이란 명칭을 부여한 것은 당나라 때 『史通』암혹편(暗惑篇)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子路는 孔子弟子仲由也ㅣ라 子路는 好勇이라 故로 問强이라
자로는 공자 제자로 (이름은) 중유이라. 자로는 용맹을 좋아하여 ‘강’에 대해 여쭘이라.

子ㅣ曰 南方之强與아 北方之强與아 抑而强與아
공자 가라사대 “남방의 강인가? 북방의 강인가? 아니, 너의 강인가”

抑은 語辭ㅣ오 而는 汝也ㅣ라
억은 어조사요, 이는 너라

寬柔以敎ㅣ오 不報無道는 南方之强也ㅣ니 君子ㅣ居之니라
너그러우며 부드러움으로 써 가르치고 무도한 이를 보복하지 않는 것은 남방의 강이니 군자가 거하느니라.

[본문 해설]
주역 설괘전 제5장에 “離也者는 明也ㅣ니 萬物이 皆相見할새니 南方之卦也ㅣ니 聖人이 南面而聽天下하야 嚮明而治하니 蓋取諸此也ㅣ라(‘離’라는 것은 밝음이니, 만물이 다 서로 봄이니, 남방의 괘이니 성인이 남쪽을 향해 천하를 들어서(천하의 의견을 들어서) 밝은 데를 향하여 다스리니, 다 여기(離卦 : )에서 취함이라)”이라 하였다.
離虛中( ) 불괘는 불이고 해가 되니까 밝다. 사람에게는 눈이기도 하다. 만물은 모두 이괘에서 보기 때문에 남방에 속한 괘가 이괘이다. 모두 만나고 모이고 부딪치는 때이며 가장 밝은 때이므로 모두 다 보인다. 성인이 밝은 남쪽을 향해 앉아서 천하의 소리를 듣고 밝게 정치를 한 것이 대개 이 이괘에서 취한 것이다. 성인이 남쪽을 향해서 천하를 듣는다는 것은 귀를 크게 열어서 백성의 소리를 잘 듣는 것이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고도 한다. 정치는 눈으로만 보고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이 부당한 경우를 당했다든지 요구사항이나 불만스러운 게 있으면 다 들어서 충족시켜 주고, 잘못된 것은 잘 생각해서 올바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공자가 용맹을 좋아한 자로의 물음에 먼저 남방지강에 대해 말한 것은, 자로와 같은 용맹한 군자가 취해야 할 ‘寬柔以敎’와 ‘不報無道’의 자세가 중요함을 역설코자 한 뜻도 있을 것이고 북방의 過한 강에 대해 不及한 강을 비유코자 한 뜻도 있을 것이다.

寬柔以敎는 謂含容巽順하야 以誨人之不及也ㅣ오 不報無道는 謂橫逆之來에 直受之而不報也ㅣ라 南方은 風氣柔弱이라 故로 以含忍之力으로 勝人爲强이니 君子之道也ㅣ라
'관유이교’는 이르되 관용을 베풀고 손순해서 남의 불급함을 가르침이오, ‘불보무도’는 비끼고 거스려 오는 것에 그대로 받아주고 보복하지 않는 것이니라. 남방은 바람 기운이 부드럽고 약함이라. 그러므로 함인(포용하고 인내)의 힘으로써 남을 이겨 강으로 삼으니 군자의 도이라

誨 : 가르칠 회 橫 :비낄 횡

衽金革하야 死而不厭은 北方之强也ㅣ니 而强者ㅣ居之니라
병기와 갑옷을 깔고서 죽어도 싫지 아니함은 북방의 강이니 강한 자가 이에 거하느니라.

衽 : 깔 임

[본문 해설]
여기서 북방은 주역으로 볼 때 서북건방(西北乾方)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주역 설괘전 제5장에 “戰乎乾”이라 하였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사이에 음기운이 극성해져 戰乎乾으로 싸움이 붙는다. 乾은 방위상으로 戌亥方으로 서북쪽이다. 서북쪽은 험준한 데다 일기도 좋지 않아서 늘 음양의 기운이 싸우는(陰陽相薄) 곳이다. 하루 온종일 강했던 양이 저녁이 되면서 음이 극성해지니까 서로 싸움이 붙는다는 뜻이다. 결국은 음이 이기고 어두워지는데 늦저녁의 양은 늙어서(乾三連 老陽: ) 쇠한 때이고 음은 한창 파릇파릇한 때인데, 한낮의 양에 한밤의 음이 오느라 음양이 싸우는 것이다. 그렇게 싸우다 죽을지언정 싸우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니 그것은 (서)북방의 강함이고 강한 자가 이에 거하는 것이다. 남방의 강에 비해 過한 강의 예를 든 것이다.

衽은 席也ㅣ오 金은 戈兵之屬이오 革은 甲胄之屬이라 北方은 風氣剛勁이라 故로 以果敢之力으로 勝人爲强이니 强者之事也ㅣ라
임은 자리요 금은 창과 병기에 속한 것이오 혁은 갑옷과 투구에 속한 것이라. 북방은 풍기가 강하고 굳셈이라 그러므로 과감의 힘으로 남을 이겨 강으로 삼으니 강자의 일이라.

故로 君子는 和而不流하나니 强哉矯여 中立而不倚하나니 强哉矯여 國有道애 不變塞焉하나니 强哉矯여 國無道애 至死不變하나니 强哉矯여
그러므로 군자는 화하되 흐르지 아니하나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중립하여 치우치지 아니 하나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나라의 도가 있음에 막혔을 때 (의지를) 변하지 아니하나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없음에 죽음에 이르러도 변하지 아니하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矯 : 굳셀 교 塞 : 막힐 색

[본문 해설]
남방은 풍기가 유약하여 중으로 말하면 불급한 점이 있고, 북방은 풍기가 강하여 지나친 점이 있다. 그런데 군자라는 것은 모든 사람과 잘 화합하되 어느 한쪽으로 흐르지 않아야 한다(和而不流). 주역 38번째 괘인 화택규(火澤睽)괘 대상전에 “象曰 上火下澤이 睽ㅣ니 君子ㅣ 以하야 同而異하나니라(상전에 이르길 위에는 불 아래에는 못이 규니, 군자가 이로써 같되 다르게 하나니라)” 하였다. 위에는 火動而上의 불(上火)이고, 아래에는 澤動而下의 못(下澤)으로 어긋났다는 것이다. 군자가 이 규괘를 보고 본받아 먼저 어긋난 걸 같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긋난 것을 그냥 보고만 있으면 안 되고, 같이 하나 되도록 하고(同) 그러면서도 달리한다(而異)는 것이 和而不流이다. 사람을 和하게 대해서 이 사람도 좋고 저 사람도 좋고 이 사람 의견도 받아들이고 저 사람 의견도 받아들이되(和而), 나쁜 일을 하자고 하거나 도둑질하자고 하는 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즉 화하되 의리가 아니고 예가 아닌 곳에는 절대로 흐르지 말아야 하니 참으로 강한 것이다.
늘 중도에 서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니, 이 또한 참으로 강하고 꿋꿋한 것이다. 또한 나라에 도가 있어 평화로운 세상이라 하더라도 방심하지 않고 예전에 도가 없어 곤궁했을 적에도 흔들리지 않던 내 의지를 그대로 지키고 있으니, 이 또한 강하고 꿋꿋한 것이다. 나라에 도가 없어 무도하고 포악하며, 혼란한 세상이 되었다 해도 또한 평소에 지키던 지조를 변하지 않으니, 이것 역시 참으로 강하고 꿋꿋한 것이다.

此四者는 汝之所當强也ㅣ라 矯는 强貌니 詩에 曰矯矯虎臣이 是也ㅣ라 倚는 偏著也ㅣ오 塞은 未達也ㅣ라 國有道에 不變未達之所守하고 國無道에 不變平生之所守也ㅣ라 此는 則所謂中庸之不可能者ㅣ니 非有以自勝其人欲之私면 不能擇而守也ㅣ라 君子之强이 孰大於是리오 夫子ㅣ 以是로 告子路者는 所以抑其氣血之强하고 而進之以德義之勇也ㅣ라
이 네 가지는 너의 마땅히 강해야 할 바이니라. 교는 굳센 모양이니 시경에 이르기를 ‘교교호신(굳세고 굳센 범 같은 신하)’이 이것이라. 의는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붙는 것이고, 색은 통하지 못함이라. 나라에 도가 있음에 통하지 못했을 때 지켰던 바를 변하지 아니하고, 나라에 도가 없음에 평소에 지킨 바(지조)를 변하지 아니함이라. 이것은 이른바 중용의 가히 능치 못하는 것이니 써 스스로 그 인욕의 사사로움을 이기는 이가 아니면 능히 가려내서 지키지 못하느니라. 군자의 강함이 무엇이 이보다 크리오. 공자께서 이 네 가지로써 자로에게 고한 것은 기혈의 강함을 누르고 덕의의 용맹으로써 나아가게 하심이라.

[앞주 해설]
군자가 마땅히 강해야 할 바인 네 가지는 和而不流, 中立而不倚, 國有道 不變塞焉, 國無道 至死不變을 말함이다. ‘矯’는 굳센 모양으로 詩經의 노송(魯頌) 반수편(泮水篇)에 나오는 말이다.

明明魯侯여 克明其德이샷다
旣作泮宮하니 淮夷攸服이로다
矯矯虎臣이 在泮獻馘하며
淑問如皐陶이 在泮獻囚로다


밝고 밝으신 노나라 제후여 능히 그 덕을 밝히셨도다
이미 반궁(주나라 제후들의 學宮)을 지으니 회이가 복종하는 바로다
굳세고 굳센 범 같은 신하들이 반궁에서 (죄수의) 머리를 바치며
고요와 같이 신문을 잘하는 자가 반궁에서 죄수를 바치리로다.

공자에게는 삼천 제자가 있었는데 각기 제자들의 성질이나 행동 등을 파악해 각각에 해당하는 것을 가르쳤다. 공자가 성격이 급하고 과단한 자로에게 이 네 가지로 가르치는데 인욕의 사사로움을 이겨야만 능히 중용을 가려서 지킬 수 있다는 뜻이다. 즉 기혈의 강함을 억제하고 덕과 의리의 용맹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孟子』 양혜왕장구하(梁惠王章句下편)에 제나라 선왕(宣王)과 맹자의 문답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王曰 大哉라 言矣여 寡人有疾하니 寡人은 好勇하노이다 對曰 王請無好小勇하소서 夫撫劍疾視曰 彼惡敢當我哉리오 하나니 此는 匹夫之勇이라 敵一人者也니 王請大之하소서(왕이 말하길 ”훌륭합니다. 말씀이여! 과인이 병통이 있으니 과인은 용맹을 좋아합니다. (맹자께서) 가로대 “왕은 청컨대 자근 용맹을 좋아하지 마소서. 칼을 어루만지고 상대방을 노려보며 말하길, ‘네가 어찌 감히 나를 당하겠는가’하나니 이것은 필부의 용맹이라. 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이니, 왕은 청컨대 용맹을 크게 하소서)”
용맹함에는 작은 용맹(小勇)과 큰 용맹(大勇)이 있는데, 血氣의 용맹은 小勇이고, 義理의 용맹은 大勇이다. 군자가 취하여야 할 용맹은 血氣之勇이 아니라 대용인 義理之勇, 浩然之氣여야 한다.
무릇 뜻(志)은 기운의 장수요(夫志는 氣之帥요), 기운은 뜻의 다음(氣는 志之次也라)이다. 즉 뜻이 기운을 이끌고 나가서 기운을 조정할 수 있어야지, 뜻은 없고 기운만 앞서면 중용을 잃고 온갖 폐단만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氣血의 강을 누르고 덕과 의리의 용맹으로써 공부를 해나가도록 한 것이다.

右는 第十章이라

출처 : 복지누리
글쓴이 : 라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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