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좌를 할 때는 결가부좌와 반가부좌에 구애받지 말고 편리한 것을 취한다. 몸을 꼿꼿이 세우되 적당히 방임하고 사지를 느긋이 하며 뼈도 느긋이 하고 마땅히 관절이 상응하도록 하여 기대거나 구부리지 말고 옷과 허리띠도 느슨히 한다. 조금이라도 편안하지 않으면 서서히 움직여 편안하게 한 다음 적절히 조절하여야 한다.
처음으로 동(動)에서 정(靜)으로 들어갈 때는 몸 속의 기운이 고르지 않으므로 혀를 4∼5번 들어올리고 입으로 서서히 공기를 토해 내며 코로는 가늘게 공기를 들이마시되 많으면 3∼5번 정도, 적게는 1번 한다. 다만 기운이 적절하고 고르게 되면 혀를 윗잇몸에 붙이고 입술과 이를 서로 붙인다. 점차 똑바로 바라보면서 서서히 눈을 감아 가되 너무 급하게 눈빛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눈빛이 희미해질 정도가 되면 그 다음 숨을 고르되 너무 거칠거나 헐떡거리지 않게 하여 미세하고 끊임없이 이어지게 한다.
천태선문(天台禪門)의 구결(口訣)에 의하면 망념(妄念)을 끊고 숨을 조절하며 단전을 관조하여 호흡의 출입을 살피라고 하였다. 대개 단전에 근본을 두고 한마음으로 집중하여 관조하되 만약 밖으로 망념이 일어나면 그것을 거두어 되돌아가게 하며 긴밀하고 끊임이 없게 해야 한다. 이렇게 정진한 연후에 선정 중에 갖가지 기이한 현상이 생기는데 모두 식심(識心)이 깨지는 현상이다. 더욱더 정진 수도하면 처음으로 선정을 이룰 때 두 가지의 '마음이 머무르는 모습(住心相)'이 있다.
사람의 마음 경계가 담박해지면 망념이 흘러가더라도 마치 불이 환하게 밝아지는 이치와 같이 점차 망념이 끊어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수행해 나감에 따라 마음에서 점차 망념이 사라지고 다시는 명예나 원망·사랑 등의 일에 얽매이지 않게 되므로 이것을 '거친 마음의 머무름(粗心柱)'이라고 한다.
밖으로 비록 망념에 얽매이지 않더라도 이 마음이 미세하게 흐르고 있으므로 한순간도 망념에 머무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더욱더 선정을 세심하게 하여 안과 밖의 경계가 모두 없어지게 된 것을 '미세한 마음의 머무름(細心住)'이라고 한다.
이 이후에도 두 가지의 선정법이 있으니 '미세한 마음의 머무름'을 행할 때에는 반드시 지신법(持身法)을 일으켜야 한다. 이 법을 행할 때에는 몸과 마음을 자연스럽고 곧게 해야 좌선해도 피로하지 않다. 마치 물건이 몸을 지탱하듯이 자세를 바르게 하면 각심(覺心)은 저절로 밝고 맑아지며 선정과 상응하게 된다. 지신법으로 선정하게 되면 걸림이 없고 흔들림이 없어서 얕은 경지에서 깊은 경지로 들어가게 된다. 좌선하는 동안 마음이 분산되지 않으므로 이것을 욕계정(欲界定)이라고도 한다.
나중에 다시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비워 나가면 홀연 욕계의 몸을 잃어버리고 좌선중에 자신의 몸 및 가구들이 보이지 않고 마치 허공과 같이 되는데 이것을 미도지정(未到地釘)이라고 한다. 장차 선정에 들려고 하나 선정에 잠긴 것은 아니므로 미도지(未到地)라고 한다. 이로부터 능히 초선(初選)이 일어난다. '미도지정' 가운데에서 십육촉(十六觸)을 성취하는데 이것은 초선이 일어나는 모습이다.
무엇을 가리켜 십육촉이라고 하는가? ① 움직임(動), ② 가려움(病), ③ 서늘함(凉), ④ 따스함(煖), ⑤ 가벼움(輕), ⑥ 무거움(重), ⑦ 껄끄러움(澁), ⑧ 매끄러움(滑)과, 다시 또 팔촉으로 ① 흔들림(掉), ② 부드러움( ), ③ 차가움(冷), ④ 뜨거움(熱), ⑤ 기가 뜸(浮), ⑥ 가라앉음(沈), ⑦ 딱딱함(堅), ⑧ 연함(軟) 등이 있다. 이 팔촉과 앞의 팔촉은 비록 비슷하긴 하나 세밀히 분별해 보면 다르기 때문에 십육촉이라 한다.
십육촉은 사대(四大 ; 만물 구성의 네 요소, 즉 地·水·火·風)로 말미암아 일어나는데 지(地)의 4가지는 가라앉음·무거움·딱딱함·껄끄러움 등이다. 수(水)의 4가지는 서늘함·차가움·연함·매끄러움 등이다. 화(火)의 4가지는 따뜻함·뜨거움·부드러움·가려움 등이다. 풍(風)의 4가지는 움직임·흔들림·가벼움·뜸 등이다. 수행자가 미도지정에서 점점 깊이 들어가면 몸과 마음이 텅 비어 안과 밖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데 하루 또는 일주일, 한달 또는 일년 계속하여 선정의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굳게 지켜 증장시킨다.
이때, 동촉(動觸)이 한번 일어나면 홀연 몸과 마음이 응결된 듯이 저절로 움직이며 움직일 때 점차로 몸의 존재를 느끼긴 하지만 마치 구름이나 그림자인 듯이 여긴다. '동촉'이 한번 일어나면 혹은 위에서 움직이기도 하고 혹은 아래에서 움직이기도 하며 혹은 허리에서 움직이다가 점점 온몸에 가득 차게 된다. 위에서 움직이면 많이 내려가고 아래에서 움직이면 많이 올라가는데 '동촉'이 일어나면 그 공덕이 무량하며 십종선법(十種善法)이 동(動)과 함께 일어난다 ① 선정(定), ② 공적함(空), ③ 밝고 깨끗함(明浮), ④ 기쁘고 즐거움(喜悅), ⑤ 즐거움(樂), ⑥ 착한 마음이 일어남(善生), ⑦ 지견이 밝아짐(知見明), ⑧ 무루해탈(無漏解脫), ⑨ 경계현전(境界現前), ⑩ 마음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조절됨(心調柔軟) 등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의 뛰어난 공덕이 '동촉'과 함께 일어나 동법(動法)을 장엄하는데 하루 또는 열흘, 한달 또는 일년으로 그 간격이 일정하지는 않다. 이런 현상을 거치고 나면 다시 나머지 다른 촉(觸)도 차례대로 일어나 십육촉이 전부 일어날 경우도 있고 3, 4촉이나 7, 8촉이 일어나기도 하며 모두 선법공덕(善法功德)을 가지게 됨은 동촉의 경우와 같다. 이것은 색계청정(色界淸淨)의 몸이며 욕계신(欲界身) 가운데에서 거침과 미세함이 서로 어긋나는 까닭에 모든 촉이 존재한다.
또 초선을 증득할 때 다섯 가지 경계가 있다. 이는 ① 깨달음(覺), ② 관조(觀), ③ 기쁨(喜), ④ 즐거움(樂), ⑤ 선정의 마음(定心) 등이다. 초발심의 마음으로 깨우치는 것을 깨달음이라 하고, 나중에 미세한 마음으로 분별함을 관조라 하며, 희열이 솟는 마음을 기쁨이라 하고, 고요하고 맑은 마음을 즐거움이라 하며, 공적하여 흩어지지 않는 마음을 선정의 마음이라 한다. 십육촉 가운데에 이 다섯 가지 경계가 모두 있다. 여섯 번째 경계를 묵연한 마음(默然心)이라 하는데 이것은 다섯 가지 경계로 말미암아 일어나면 모두 초선이 일어나는 모습니다.
깨달음(覺)이란 마치 자다가 깨어난 듯도 하고 가난하다가 보배를 얻은 듯도 해서 말세의 모든 현자들은 깨달음으로 궁극의 일을 삼으려 한다. 그러나 이선(二禪)으로 들어가고자 하면 깨달음(覺)과 깨우침(悟)의 존재가 모두 질병과 같다. 수행자들이 초선의 여섯 번째 묵연심에 도달하면 초선을 낮은 경지로 보고 각관(覺觀)을 싫어하여 떠난다. 만약 이법(二法 : 覺觀)이 어지러워지면 선정의 마음이 압박을 받고 각관으로부터 기쁨과 즐거움의 선정(喜樂定)이 일어나는 까닭에 거칠다고 한다.
이것이 각관법(覺觀法)인데 이선의 내정(內靜)에 장애가 된다. 수행자는 초선의 허물이 이선의 장애가 됨을 알았다면 지금 마땅히 멀리 벗어나서 세 가지 법에 의지해야 한다. 세 가지 법이란 첫째, 수용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떠나는 것(不受不著故得離)이며, 둘째, 가책하고 꾸짖는 까닭에 떠나는 것(詞責故得離)이며, 셋째, 관법을 잘 분석하는 까닭에 떠나는 것(觀析故得離) 등이다. 이 세 가지 법으로 말미암아 초선의 각관의 허물로부터 떠날 수 있으며 각관이 이미 멸했다면 다섯 가지 경계와 묵연심도 모두 없어진다.
이미 초선을 떠나고 아직 이선이 일어나지 않아 그 사이에 있으면 또 하나의 선정 경계가 나타나는데 속박되지도 않고 좋은 경계의 도움도 없는 선정법이다. 여러 스승들이 적멸한 마음(寂心)을 되돌리는 일에 대해 많이 말씀하였는데, 그것은 초선의 묵연심을 되돌릴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선정에 머무르게 되면 육행관(六行觀)에 의지하게 되어 아래로 첫째 괴로움(苦), 둘째 거칠음(粗), 셋째 장애(障)등 세 가지를 싫어하고, 위로는 첫째 뛰어남(勝), 둘째 신묘함(妙), 셋째 벗어남(出)등 세 가지를 기뻐하게 된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이것은 꾸짖는 것과 칭찬하는 것, 두 가지다.
대개 현문(玄門)의 삼년온양(三年溫養)과 구년면벽(九年面壁)의 정좌 수행을 실천하지 않으면 대지혜가 일어나지 않고 대신통이 나타나지 않으며 깊은 선정이 나타날 수 없다. 그 정좌의 단계마다 집착하여 문득 한 경계를 얻으면 기이하게 생각하고 애착을 가져서 버리지 않는다면 어찌 진전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간절하게 설명하고 일마다 밝게 지적한 것이다. 모름지기 탐착하지 말 것이며 아래를 싫어하고 진보를 즐거워하며 괴로움을 벗어나 뛰어남을 구해야 한다. 거칠음을 제거하면 곧 신묘해지고 장애를 벗어나면 자유로움을 얻게 된다. 이런 지위에 이르러야 비로소 법(法)에 정전(正傳)이 있음을 알게 되며 스승의 은혜가 갚기 어려움을 알게 된다.
예전에 진백사(陳白沙)가 정좌시(靜坐時)에서 "유랑이여 돌아갈 길을 기억하지 말라. 다만 유랑이 한번 가는 길만 허락하노라(劉郞莫歸時路 只許歸郞一度來)."라고 하였다. 진백사는 강문(江門)에서 20여년을 정좌하면서 밝은 스승의 가르침이 없음을 아쉬워했는데 정좌중에 일단의 상서로운 일이 나타나자 곧 그것을 즐거워하여 미련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이 경계마저 잃어 버렸다. 온 힘을 다해 추구했으나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시의 뜻은 수행자가 선정을 얻었더라도 모름지기 이 육행관을 잘 알아야 하며 만약 초선을 이루었을 때 육행관을 운용하지 않는다면 다생에 근심하고 후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근심과 후회가 마음에서 일어나게 되면 영원토록 이선이 나타나지 않으며, 혹은 고요함마저 잃게 되는 경우도 있고 다시 초선의 경지마저 잃기도 한다. 큰 산을 쌓아올리는 데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이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오랜 공을 들인 일도 작은 실수 하나로 허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스스로 삼가며 수행자가 마음으로 근심하거나 후회함 없이 한마음으로 공(功)을 기울여 오로지 마음을 쏟아 그침이 없으면 그 마음이 맑고 깨끗해져서 흩어지지 않는데 이를 미도지(未到地)라고 부른다. 이 미도지가 바로 이선 직전의 방편정(方便定)이다. 경전에서는 "그 자리를 물러나도 잃지 않는다면 그 마음이 탁 트이고 깨끗해지며 맑기 이를 데 없어 선정의 마음과 기쁨이 같이 일어난다. 이는 마치 사람이 어둠 속에서 벗어나 해와 달의 광명을 보는 듯하다."라고 하였다. 마음이 탁 트여 맑고 깨끗해지면 10가지의 공덕이 함께 일어나는데 초선이 일어나는 모습과 흡사한 듯하지만 내정정(內淨定:내부의 깨끗한 선정)에서 일어난다는 점이 다르다.
이선에는 네 가지의 경계가 있다. 첫째 내정(內淨), 둘째 기쁨(喜), 셋째 즐거움(樂), 넷째 선정의 마음(定心)등이다. 무엇을 '내정'이라고 하는가? 멀리 비유하면 외진(外塵:외부의 경계)에 상대하여 내정이라고 하고, 가까이 비유하면 '내부의 때(內垢)'에 상대하여 내정이라 한다. 초선 가운데에서 촉락(觸樂)을 얻게 될 때 '촉'은 신식(身識)의 상응이므로 외정(外淨)이라 하고 이선은 심식(心識)의 상응이므로 내정이라 한다. 초선심은 각관(覺觀)에 의해 움직이므로 '내부의 때'라고 하고 이선심(二禪心)은 '각관'의 때가 없어 '내정'이라고 한다. '각관'을 벗어나게 되면 내정심(內淨心)에 의해 선정이 나타나므로 맑고 깨끗하고 분명하여 때가 끼거나 더러움이 없다. 이것이 '내정'의 선정상이다.
기쁨(喜)이란 마음 속 깊이 스스로 희열이 솟는 것으로 내심에 희정(喜定) 등의 열 가지 공덕을 갖춘 희법(喜法)이 생기는 것이다. 이 때문에 즐거움(樂)이 한량없다. '즐거움'이란 '희법 중의 즐거움(喜中之樂)'을 받는 것으로 고요하게 우러나오는 기쁨이 끊임없이 이어져 상쾌하다. 초선의 기쁨과 즐거움은 '각관'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며 신식이 상응하는 것인데 제이선(第二禪)의 기쁨과 즐거움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 의식(意識)이 상응하는 것이므로 명칭은 같지만 그 실제 내용은 다르다. 선정의 마음(定心)이라는 것은 즐거움을 받더라도 마음으로 잊어버리고 선정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에 반연하지 않으며 외부에서 일어나는 망념·사상 등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까닭에 한결같이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이 네 가지 경계 이후에 또 묵연심(默然心)이 나타나지만 '초선'의 경우보다 더욱 깊으므로 성묵연정(聖默然定)이라고 한다. 다시 삼선(三禪)으로 나가려면 마땅히 이선의 허물을 꾸짖어야 하며, 이선정이 비록 내정에서 일어났지만 큰 기쁨이 용솟음쳐 선정이 튼튼하게 안정되지 못하므로 버려야 한다. 이를테면 삼법(三法)을 이용하여 이선을 버려야 한다. 삼법이란 첫째 받아들이지 않음(不受)이며, 둘째 꾸짖음(詞責)이며, 셋째 마음을 관찰하여 궁극까지 살핌(觀心窮檢)등이다. 이미 선정의 기쁨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 기쁨과 고요한 마음이 저절로 물러나게 된다.
삼선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나 한마음으로 정진할 수 있고 그 마음이 고요해져 억지로 힘들이지 않아도 마음이 저절로 맑아지는 것, 이것이 바로 삼선 미도지정이다. 나중에 그 마음이 없어질 정도의 선정에 들어가면 안과 밖에 의지하지 않고도 즐거움이 함께 일어나며, 즐거움이 일어날 때 역시 열 가지 공덕이 있음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다만 용솟음치는 기쁨이 다르며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일어난 끊임없는 즐거움이 미묘하여 비유할 수가 없다.
선정의 즐거움이 처음 일어나 몸 전체에 두루 퍼지기 전에 세 차례의 단계가 나타난다. 첫째는 즐거움(樂)과 선정이 얕아서 그 마음이 선정에 잠기는 일이 드물고 지혜의 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다. 둘째는 즐거움과 선정이 점점 적어지면서 마음의 지혜가 용솟음치므로 마음이 편하지 않는 단계이다. 셋째는 즐거움과 선정의 마음과 지혜 등이 미묘하여 오랫동안 탐착하여 그 마음이 도취된 것 같은 단계이다. 때문에 경전에서도 삼선의 즐거움은 오직 성인만이 버릴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삼선이 나타나고자 할 때 이 세 가지 허물이 나타나며 즐거움과 선정이 더 증장되지 않고 그 몸에 가득 차므로 수행자는 잘 조절하여야 한다. 역시 세 가지 법으로 다스리는데, 첫째는 마음이 만약 가라앉으면 마땅히 정진하려는 마음을 내고 격려하여 고무시킨다. 둘째는 만약 마음이 용솟음치면 마땅히 삼매의 선정법을 생각하여 다스린다. 셋째는 만약 마음이 미혹되게 도취되었다면 이 이후의 즐거움과 모든 수승한 법문을 생각하고 스스로 각성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집착하지 않게 한다. 이와 같이 하면 반드시 즐거움과 선정이 증장되어 온몸에 두루 차게 되고 온몸의 모든 구멍에서 법열을 느낀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삼선의 즐거움은 온몸으로 두루 받는다고 하였다.
생각건대 초선의 즐거움은 바깥으로부터 나타나 외부의 인식과 상응하고, 따라서 내심의 즐거움은 이선의 즐거움만큼 가득 차지 않는다. 비록 내부에서 일어나지만 기쁨으로부터 생겨나며 희근(喜根)과 상응하고, 낙근(樂根)과는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기쁨에 의지해 일어나는데 기쁨조차 몸에 가득하지 않으니 하물며 즐거움이 가득할 수 있겠는가?
삼선의 즐거움은 내부에서 일어나며 즐거움이 주체가 되어 온몸 안팎에 편안함과 쾌활함이 가득 차게 한다. 삼선에도 역시 다섯 가지 경계가 있는데 첫째 버리는 것(捨), 둘째 밝게 기억하는 것(念), 셋째 지혜(慧), 넷째 즐거움(樂), 다섯째 선정의 마음(定心) 등이다. 버리는 것이란 앞의 기쁜 마음(喜心)을 버리고 아울러 세 가지 단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밝게 기억하는 것이란 이미 삼선의 즐거움을 얻었다면 삼법(三法 ; 앞에서 언급했던 不受·詞責·觀心窮檢 등)을 수호할 생각을 내고 즐거움을 증장시키는 것이다. 지혜(智)란 삼법의 방편으로 세 가지 허물을 벗어나게 함이다. 즐거움이란 시원한 즐거움을 온몸에 두루 받아들임이요, 선정의 마음이란 즐거움을 받는 그 마음을 쉬게 하여 한결같이 고요해지는 선정(寂定)이다.
사선(四禪)을 증득하고자 하면 마땅히 삼선의 즐거움을 꾸짖고 배척해야 한다. 처음으로 선정의 즐거움을 얻으면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구하게 되는데 크게 애쓰는 괴로움이 있다. 이미 증득한 바를 지키고 애착하는 것도 괴로움이 된다. 이런 경계를 하루 아침에 잃어 버리게 되어도 다시 괴로움을 받는다. 삼선에서는 즐거움이 늘 계속되지 않고 흔들리는 까닭에 괴롭다. 또 이 낙법(樂法)은 전도된 생각으로 인해 청정해지지 않는다. 수행자가 이미 삼선의 즐거움을 깊이 느꼈다면 큰 괴로움이 나타나는 법이므로 한마음으로 삼선을 떠나 사선을 구하고 흔들림 없는 선정(不動定)을 심어야 한다. 이때 또 육행을 닦고 삼법(三法)을 제거해 버리면 곧 삼선이 없어진다.
사선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수행을 계속하면 미도지정을 얻게 되어 마음이 움직이거나 흩어지지 않으니 바로 사선 방편정(方便定)이다. 그 후에 마음이 활연히 피어나 선정의 마음이 안정되고 호흡의 출입이 끊어지는 선정(出入息斷定)이 나타나면 버리는 것이 함께 나타나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며 텅 비어 맑고 고요할 뿐 아니라 선법(善法)들이 서로 돕게 된다. 앞의 경계(三禪)와 비숫한 듯하나 기쁨·즐거움·흔들림·변화 등이 없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러한 때에 마음은 마치 맑은 거울과 같이 움직임이 없으며 깨끗한 물에 파문이 없듯이 모든 어지러운 상념이 끊어지고 올바른 상념만이 견고하여 허공과 같다. 수행자가 이러한 선정 가운데에 머물러 있으면 그 마음이 선에 의지하지도 않고 악에 의지하지도 않으며 의지할 바도 없고 형상도 없으며 아무런 실체가 없다. 여기에도 역시 네 가지 경계가 있는데, 첫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不苦不樂), 둘째 버리는 것(捨), 셋째 기억의 청정함(念淸淨), 넷째 선정의 마음(定心) 등이다.
이 선정이 처음 나타나면 버리고 받아들임이 같이 나타나지만, 버리고 받아들이는 마음은 고락과 상응하지 않는다.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고 하는 것이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을 증득하면 선정으로 수승한 즐거움을 버릴 수 있어 싫어하거나 후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때문에 버리고 선정이 분명하면 지혜가 저절로 비친다고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기억이 청정해지면 선정의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므로 선정의 마음(定心)이라 하는 것이다. 이 이후에 묵연심이 나타나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다. 또 사선은 마음이 항상 청정하므로 '흔들림 없는 선정(不動定)' 또는 '흔들림 없는 지혜(不動智慧)'라고도 한다.
이 선정 가운데에서 일체의 일을 배워 모두 성취할 수 있으므로, 신통을 배우면 신통을 증득하고 변화를 배우면 변화를 증득하게 된다. 때문에 부처님은 사선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외도는 복식법(服食法)이나 연단법(煉丹法)을 수련하여 수명을 늘이고자 하므로 몸만 수고로울 뿐 애쓰는 것마다 실패한다. 그간에 혹 성취하는 자가 있어도 깊은 도리와 등지게 되어 업(業)을 지을 뿐이다.
힘써서 선(禪)을 구하면 일체 변화가 일어나지 않음이 없어 거친 몸이 신묘한 바탕으로 바뀌며 짧은 수명이 긴 수명으로 바뀐다. 특히 그 미세한 곳에 있어 이러한 선정 이후에도 네 가지의 선정이 또 있는데 첫째 공처정(空處定), 둘째 식처정(識處定). 셋째 무유처정(無有處定), 넷째 비유상비무상처정(非有想非無想處定) 등이다. 수행자가 사선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 대상을 관찰하는 힘이 미묘해져서 조그마한 수행을 얻어도 만족하여 더 진보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심식이 생멸하는 것임을 깨달아 만물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 열반적정의 즐거움을 구한 것이라 여기니 밝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사물을 관찰 분석하거나 사물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이 방편임을 알지 못하고 억지로 그 마음의 모든 사려를 끊어 버리고 마음에 한 상념도 없는 것이 열반을 증득한 것이라고 여긴다. 물질에 대한 집착을 끊어 속박되지 않더라도 임종할 때에 곧바로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날 것이니 이것은 큰 잘못이다. 따라서 모름지기 공처정(空處定)을 구하려면 색법(色法)의 허물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만약 색신(色身)이 있다면 안으로는 목마름, 질병, 대소변, 냄새나고 더러운 온갖 나쁜 것의 괴로움이 있으며 밖으로는 추위, 더위, 칼이나 몽둥이 또는 형벌이나 비방, 모함 등의 괴로움을 받게 된다. 전생의 인연들이 화합하여 그 과보로 이 육신을 얻었다. 그러므로 이 육신은 곧 갖가지 모든 괴로움의 근본이므로 아끼고 위할 필요가 없다. 다시 일체의 색법을 생각해 보면 마음을 속박할 뿐이고 자유로움을 얻을 수 없으므로 마음의 감옥이며, 마음이 번뇌를 가지게 하므로 탐착할 것이 없다. 이로 말미암아 멸색(滅色)의 방법을 구하게 되는데 모름지기 세 가지의 색을 소멸해야 한다. 첫째 볼 수도 있고 장애가 되는 색을 멸함(滅可見有對色), 둘째 볼 수는 없으나 장애가 되는 색을 멸함(滅不可見有對色), 셋째 볼 수도 없고 장애가 되지 않는 색을 멸함(滅不可見無對色) 등이다.
부처님은 일체의 물질적 형상을 벗어나면 장애가 되는 형상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갖가지 형상을 생각하지 않고 일체의 물질적 형상을 벗어나면 볼 수 있으면 장애가 되는 물질이 없어진다. 장애가 되는 형상을 없애 버리면 볼 수 없고 장애가 되는 물질도 없어진다. 갖가지의 형상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볼 수 없으며 장애가 되는 물질이 없는 것마저 다 없어진다. 수행자가 사선(四禪) 가운데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몸을 관찰해 보면 일체의 모공 및 아홉 구멍(즉 신체의 외부기관)과 몸 속의 내부기관 등이 모두 실상은 비어 있어 마치 소라 껍질 같으며 안팎이 서로 연결되어 파초와 같이 겹겹이 얽혀 있지만 그 실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관조하여 바로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면 더욱 세심하게 관조해 보라. 관찰되는 몸이 마치 대바구니나 시루 또는 거미줄 같이 점점 가늘어지면서 잘게 나누어져 모두 없어진 것같이 되어 몸과 다섯 가지 인식 기관 등이 보이지 않고 내부의 몸과 외부의 몸이 모두 없어진 듯 느껴진다. 이와 같이 관할 때 눈이 물질의 근원을 보는 것이므로 물질을 벗어났다고 하며 소리·냄새·맛·촉감·의식 등도 다른 두 가지 물질과 무수히 많은 물질에 대해서 그러하므로 장애가 되는 형상이라고 한다.
갖가지 분별을 여의므로 '갖가지 형상을 생각하지 않음(不念動動相)'이라고 한다. 일체의 색법이 이미 다 없어졌다 하지만 한마음으로 공(空)을 반연하여 공에 대한 상념을 버리지 못한다. 곧 색에 대한 선정이 사라지고 공에 대한 선정이 아직 얼어나지 않았을 때 역시 그 중간의 선정이 있다. 이러한 때에 삼가 근심하거나 후회하지 말고 더욱더 정진하면서 한결같이 공을 생각하면 색(色)을 추구하는 마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르며 그 후 마음이 탁 트여 공과 더불어 상응하게 된다. 그 마음이 밝고 맑으며 괴로울 것도 없고 즐거울 것도 없는 경지가 더욱 증장되어 깊은 선정에서 오직 허공만이 보이고 모든 물질적 형상이 없어지며 비록 가없는 허공을 반연하지만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물질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 심식(心識)이 맑아져 막힘없이 자재하며 마치 새가 조롱을 벗어나 자유롭게 나는 듯하므로 이런 경지를 가리켜 공처정(空處定)을 증득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더욱 정진하면 공처정을 버리고 식처정을 수행하게 되는데 수행자는 마땅히 허공을 명상하는 선정이 외법(外法)의 선정이고 외부에서 온 것이므로 안정되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식처정(識處定)은 내법(內法)이며 내부에서 반연하여 선정에 들어가므로 대단히 고요하고 편안하다. '식처정'의 경지에서 공을 반연하는 수상행식(受想行識 : 감각기관의 네 가지 인식작용)을 관조해 보면 질병이나 부스럼 또는 창이나 무기에 의해 생긴 상처처럼 느껴지며 무상·고·공·무아 등의 화합이 거짓이어서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된다(이것이 곧 八聖種觀이다).
한마음으로 식(識)을 반연하여 생각생각마다 벗어나지 않으며 과거나 미래에도 역시 이와 같이 항상 '식'을 관찰하고 명상한다. '식'과 더불어 상응함을 증득하고자 하면 더욱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보름이나 한 달의 시간이 지나가는 것마저 잊어버리면 곧 집착이 없어지고 자유롭게 되어 식연(識緣)에 머무르게 된다. 이 때문에 나중에 홀연히 깨달으면 '식'과 더불어 상응하게 되어 마음의 선정이 흔들이지 않고 선정 가운데에서 다른 일들이 보이지 않으며 오직 현재의 심식(心識)만을 본다. 생각생각마다 머물러 집착하는 바가 없고 선정의 마음이 분명하여 식려(識慮)가 넓어지며 무량무변해진다. 선정 가운데에서 과거에 이미 없어진 식을 관찰해 보면 무량무변하다. 또 미래에 응당 일어나야 할 '식'을 관찰해 보면 역시 무량무변하다. 모든 현재의 선정 중에서 식법(識法)으로 마음을 유지하면 뜻이 흩어지는 일이 없고 그 선정이 안정되어 청정해지며 심식(心識)이 밝아져서 식처정(識處定)을 증득하게 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전의 공을 반연하는 선정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외정(外定)이 된다. 지금 식을 반연하는 선정은 곧 내정(內定)이 되는데 내부에 의지하든 외부에 의지하든 모든 적정(寂靜 ; 적멸한 고요함)이 아니다. 만약 내심(內心)에 의지하면 마음이 마음에 반연하여 선정에 드는데, 이러한 선정은 이미 삼세에 의지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까닭에 진실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식처정에도 무심하여 마음이 의지하는 바가 없어야 비로소 안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식'을 반연하는 수상행식을 질병이나 종기 또는 창이나 화살에 맞은 상처처럼 관조하고 무상·고·공·무아가 화합하여 존재하기는 하지만 실은 거짓스럽고 실체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에 곧 식처정을 버리면 마음이 무소유처(無所有處)를 반연하게 되어 내부가 고요해지며 휴식을 얻어 일체의 심식법(心識法)과 다르다. 무소유법을 알게 되면 공도 아니고 식도 아닌 무위(無爲)의 법진(法塵)이므로 분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알면 마음이 고요하게 쉬고 오직 무소유법만 생각하게 되는데 이때에 곧 식처정이 없어진다.
무소유의 선정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중간 단계에서도 역시 증득한 모습이 존재한다. 수행자가 마음으로 근심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오로지 노력하여 나태하지 않으며 한마음으로 내심을 깨끗이 하면 텅 비어 의지할 곳이 없어지며 모든 법을 보지 않으므로 마음에 동요가 없으니 이것을 가리켜 모수유처정(無所有處定)을 증득한 것이라고 한다. 이 선정에 들면 즐거움으로 공적함마저 끊어지고 모든 상념이 일어나지 않아 오히려 마음의 형상마저 볼 수 없다. 하물며 다른 법이 있겠는가? 이로부터 더욱더 정진하여 다시 진보를 구하고자 하면 무소유정을 가책하여야 한다. 마치 미치거나 취한 것과 같고 무명(無明)으로 뒤덮여 있으니 깨달을 바가 없고 사랑하고 즐거워할 것이 없으며, 식처정을 마치 칼에 찔린 상처나 화살에 맞은 상처와 같다고 관하고, 무소유처정을 술에 취하거나 미친 것과 같으니 모두 마음의 질병이며 진실한 적정이 아니라고 관해야 한다. 앞에서의 수행 방법과 마찬가지로 이 선정을 벗어나게 되면 곧 그것을 버리고 다시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을 구해야 한다.
앞의 식처정은 상념이 있음이요 무소유처정은 상념이 없음이므로 이제 이 두 가지 선정을 다 버리게 되면 상념이 있는 것도 아니고(非有), 상념이 없는 것도 아니다(非無). 무엇을 '비유(非有)'라고 하는가. 마음이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어떠한 까닭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과거·현재·미래를 구하여 보아도 도무지 얻을 수 없고, 따라서 마음은 존재하는 형상이 없으면 역시 존재하는 곳도 없으므로 이것이 비유임을 안다. 어떠한 것을 '비무(非無)'라고 하는가. '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마음이 바로 '무'인가, 마음을 떠난 것이 '무'인가.
만약 마음이 무(無)라고 하면 곧 지각하는 곳도 없고 반연하는 것도 없어서 마음이라고 부를 것이 없다. 만약 마음이 무가 아니라면 달리 '무'라고 할 것이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무'는 스스로 무라고 할 수 없고 유가 없는 것이 무이며, '무'가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무'라는 상태마저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비유비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관조할 때는 유무(有無)를 볼 수가 없고 마음의 반연 가운데에서 다른 일이 전혀 떠오르지 않으며 이런 연후에야 홀연히 진실한 선정이 나타나서 유무의 형상을 보지 않고 적멸한 것조차 없어지게 되어 마음의 동요가 없어지며 즐겁고 청정하게 되어 열반의 모습과 흡사하다. 이 선정은 매우 미묘하여 삼계에서 증득한 사람이 없으니 중도(中道)의 선정상(定相)이라고 한다.
열반의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얻어 이 법에 애착하고 더 수행을 하지 않으면 마치 벌레가 나무껍질에 다다라서 더 나가지 않고 나무 이외에 더 높은 곳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불쌍한 일이다. 비록 이 선정에 거친 번뇌는 없지만 역시 10가지의 미세한 번뇌가 남아 있다. 범부는 이를 알지 못하는 탓에 그릇되게 진실한 선정이라고 하며, 세간의 외도들은 이 선정 중에도 깨달음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지 못하고 '비유비무'의 마음만을 알 뿐이어서 진아(眞我)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만약 눈밝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면 이 육신은 사음(四陰 : 受想行識)의 화합으로 존재할 뿐이요 그 자성(自性)은 거짓되어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부터 외부의 인식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므로 곧바로 무명을 깨뜨리고 멸수상정(滅受想定)에 들어가게 되어 아라한과를 증득하므로 이것을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고 한다.
대개 초선을 벗어나 욕계에서 색계의 이선·삼선·사선에 들어가는 것이 모두 색계이며 네 가지의 선정을 포함하고 있다. 색계를 벗어나 무색계로 들어가 '멸수상정'을 얻게 되면 삼계를 벗어나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되므로 극락에 태어나고 서방정토에 가는 최고의 지름길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