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수행의 길
25. 마음챙김(sati)의 방법
지금까지 설명해온 방일과 불방일은 이론적인 면과 실제적인 면의 두 측면에서 살펴본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부터는 어떻게 이 불방일을 세워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해 또 어떻게 마음챙김(sati)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 또 어떻게 이 마음챙김을 향상시켜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생사윤회에서 위험을 본 사람이 어떻게 마음챙김을 항상 지닐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수행자(yogi)와 비구들은 반드시 자신의 몸에 대해 마음챙김(kaayagata-sati)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즉 항상 물질적인 현상(ruupa)에 대해 마음챙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 몸의 가고[行], 서고[住], 앉고[坐], 눕고[臥] 하는 모든 동작에 대해 마음을 챙기고 있어야 한다”라고.
이론적으로 보면 이 신체에는 네 가지 요소[四大]와 이 네 요소에서 파생된 물질적 현상(ruupa) 24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현상들의 대부분은 오직 이름으로만 알 수 있을 뿐, 실제적인 실천을 해나가는 데는 별 도움이 안됩니다. 오직 생겨나는, 나타나는 육체의 현상(kaaya)에 대해서만 마음을 챙기면 됩니다.
숨을 들이쉬면 복부가 불러옵니다. 이 배의 일어남은 바람의 요소 때문에 생긴 육체의 현상입니다. 이 일어남의 현상에는 매우 많은 바람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때의 바람의 요소(vayo-dhatu, wind element)를 육체(kaaya) 즉 물질적 육체(material body)라고 부릅니다. 또한 물질적 현상(ruupa)의 결합이라고도 합니다.
일어난 복부가 가라앉는 과정을 봅시다. 배의 사라짐이 진행되면 편안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 과정에도 많은 물질적 현상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원자(atom)와 같이 작은 물질적 현상이 많이 있지만 우리는 이 현상들을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이 작은 물질적 현상들을 보통의 돋보기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떻든 간에 배의 사라짐이라는 현상에는 매우 많은 물질적 현상이 수반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배가 일어나는 것도 하나의 육체적 현상이고 배가 사라지는 것도 하나의 육체적 현상으로 보면 됩니다. 그래서 숨을 들이쉴 때 배가 불러오면 ‘일어남’이라고 이름붙이면 되고, 숨을 내쉴 때 배가 꺼지면 ‘사라짐’하고 이름붙이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이 두 현상을 계속해서 알아차리면 되는 것입니다. 앉아 있는 현상도 다만 ‘앉음’하고 알아차리면 되고 접촉하고 있는 현상이나 팔을 뻗는 현상을 ‘닿음’,‘뻗음’하고 이름을 붙여가며 알아차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대상에 마음을 챙겨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하나의 육체적 현상이 나타나면 그저 그대로 마음을 챙겨 알아차리면 되는 것입니다. 배가 일어나면 ‘일어남’ ‘일어남’ 하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사라짐, 들음, 뻗음, 앉음, 먹음, 끄덕임 등등의 동작들에도 각각의 이름을 붙여가며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눈을 깜박이는 작은 동작까지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크건 작건 간에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 동작을 바로 그 동작이 행해지는 그 순간 알아차리면 됩니다.
일어남(rising), 사라짐(falling), 앉음(sitting), 닿음(touching), 들음(hearing) 등등을 자신의 모국어를 써가며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것을 명칭 또는 개념(pannaatti)이라고 합니다. 일상적인 언어에서의 명칭을 뜻합니다. 명칭이 가리키는 대상을 진리(paramattha)라고 합니다. 이 말은 실재로 있는 현상이라는 의미이고, 궁극적인 실재(ultimate reality)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진리란 바로 정신적 현상(n?ma)과 물질적 현상(ruupa)을 말합니다. 물질적 현상을 예로 들면 딱딱함, 열기, 흐름[流動], 뻗뻗함 등이고, 정신적 현상이란 이런 물질적 현상에 대한 알아차림(noting) 등입니다. 이것들이 실재로 있는 현상, 있는 그대로의 진리로서의 빠라마따(paramattha)입니다. 이 현상들을 끊임없이, 틈없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릴 때는 자신의 모국어를 쓰면 됩니다. 통증이 일어나면 ‘아픔’‘아픔’하면 됩니다. 딱딱함이 느껴지면‘딱딱함’‘딱딱함’하면 됩니다. 딱딱함이라는 현상은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원자처럼 아주 미세한 딱딱함들의 집합입니다. 하지만 이 원자처럼 미세한 딱딱함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느껴지는 딱딱함은 이 원자처럼 미세한 딱딱함들의 덩어리(group)이고, 이 덩어리로서의 딱딱함이 하나의 육체적인 현상(kaaya)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밀가루는 아주 작은 분말입니다. 이 밀가루에 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면 이 작은 분말가루들이 서로 엉켜서 하나의 덩어리가 됩니다. 물을 더 붓고 더 큰 밀가루 반죽을 만들어 불로 익히면 더욱 단단해집니다. 이때 우리는 덩어리진 밀가루를 만지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밀가루를 만져서 이것이 밀가루라고 느끼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딱딱함이라는 현상은 매우 미세한 딱딱함의 덩어리입니다. 미세한 딱딱함들이 결합되어 있을 때에만 딱딱함이라는 현상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딱딱함은 땅의 요소(地, pa?havi)입니다. 밀가루 덩어리를 망치로 치면 다시 작게 부수어지듯이, 딱딱함도 나누어 보면 미세한 딱딱함으로 쪼개집니다. 이것이 이 몸에서 발견되는 땅의 요소로서의 물질적 현상입니다. 열기(heat)나 긴장감(tension) 등도 미세한 것들이 결합되어 한 덩어리가 될 때 비로소 느껴지는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서 지혜를 얻으려면 실제로 있는 물질적 현상(paramattha-kaaya)을 알아야만 합니다. 명칭(pannaatti)이란 단지 이 진리를 가리키는 개념에 불과합니다.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진리’를 알아야만 한다면 몸에서 통증이 일어나고, 딱딱함이 느껴질 때, 왜 ‘아픔’, ‘딱딱함’이라는 명칭을 붙입니까? 그저 생겨난 이 통증이라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면 바로 진리를 안 것이 되며,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라고. 그러면 제가 다시 되묻겠습니다. 명칭붙이는 일(labeling)이 정말 필요한 일입니까?
한 수행자의 답: ‘명칭붙이는 일’은 마음을 그 현상에 집중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 의문에 대해 좀더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몸에는 매우 다양하고 많은 물질적 현상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현상들에 다만 ‘물질적 현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이 현상들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이 다양한 물질적 현상들의 특성을 가려서 알려면 서로 다른 명칭을 붙여 주어야 합니다. 예컨데 한 무리의 사람이 있을 때, 개개인을 그저 ‘사람’이라고 이름하면 서로 서로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방법보다는 사람마다 번호를 붙여서‘1번’‘2번’하고 부르는 편이 더 낫고, 가장 좋은 방법은 각자의 고유한 이름을 붙여 주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국민학교에 처음 가면 한글의 자음과 모음부터 배웁니다.(요즘이야 유치원이나 학원에서 이미 글읽는 법을 다 배웠겠지만, 예전에는 학교에 가서야 배울 수 있었습니다.) ‘ㄱ’‘ㄴ’‘ㄷ’을 배우고‘아’‘야’‘어’‘여’를 배운 후‘가’‘갸’‘거’‘겨’를 배웁니다. 이렇게 문자를 배우고 난 후에야 각 문자에는 서로 다른 발음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조금 더 지나면 단어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를 따로 떼어서 읽은 후 ‘아버지’라는 단어를 읽힙니다. 이처럼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안 뒤라야 단어를 익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글자를 모르고 단어를 직접 보면 그 단어의 발음을 모를 것입니다. 눈으로 그저 볼 뿐이지 실제로 소리내어 읽을 줄은 모르는 것입니다.
부두에 가보면 선원들이 배에 물건을 싣기도 하고 내리기도 합니다. 이때 선원들은 패찰(tally stick)을 하나 하나 꽂아 가면서 짐을 싣고 내립니다. 짐의 숫자를 세기도 하고, 짐을 구분하려는 목적으로 이 패찰을 쓰는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처음부터 명칭을 붙이지 않고 알아차리면 혼동에 빠집니다. 명칭을 붙여 알아차릴 때 하나의 현상과 다른 현상을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배에 물건을 실을 때 패찰을 붙이는 이유는 물건들을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몸에 나타난 현상들에 명칭을 붙여 주는 것도 이 대상들을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명칭을 붙여 가면서 대상을 알아차릴 때 얻게 되는 이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대상이 하나 하나 일어날 때마다 그것들을 각각 구분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집으로 돌아가서 “왜 명칭을 붙여 가면서 알아차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바로 이같은 이익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면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이름을 붙여 가며 대상을 알아차리라고 하셨습니다. 경전의 주석과 이 주석에 대한 주석을 보면 명칭붙이는 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설명하겠습니다.
26. 명칭과 실재 ①
오늘은 명칭, 개념(pannaatti)과 또는 실재(paramattha)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이 두 말에는 매우 미묘하고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깊은 뜻을 이해해야만 실재에 명칭을 붙여가며 알아차리는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하는 것입니다.
실재(paramattha)는 다른 말로 하면 고유한 특성(sabhaava)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고유한 특성의 의미는 지금 실재로 있는 것(real existence), 실재로 현존하는 것(real present), 실재로 생겨난 것(real arising)을 뜻합니다. 현재 일어나 있는 현상이므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고유한 특성(sabhaava)은 법(dhamma)이라는 말과 함께 쓰여 고유한 특성으로서의 현상(sabhaava-dhamma)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이 고유한 특성을 두 가지 방법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책을 보거나, 스승의 말을 듣거나, 곰곰히 생각해 보고 아는 이론적인 앎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어진 앎입니다. 즉 스스로 경험하고 있는 고유한 특성입니다.
분명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코끼리를 직접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시다. 이들은 코끼리 그림이나 사진 또는 코끼리에 대해 설명되어 있는 책 등을 보고 ‘코끼리란 이런 동물이구나’라고 알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 눈으로 직접 코끼리를 보고 ‘코끼리는 이렇구나’라고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사람은 사과를 직접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지만 책이나 그림, 또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사과에 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과를 직접 먹어본 사람은 사과는 이런 맛이 나는 과일이구나 하고 바로 알게 됩니다. 코끼리나 사과에 대한 앎을 얻는 데는 이렇게 간접적이고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직접적이고 경험적으로 아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바람의 요소의 특성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바람의 특성 또는 본질은 뻗뻗함(stiffness), 긴장감(tension), 그리고 움직임(movement)입니다. 이 바람의 특성을 책을 통해서나 스승의 말을 듣고서 알 수 있습니다. ‘바람에는 이러한 특성이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스스로 자신의 몸에 마음을 챙김(kaayagata-sati )으로써 이 바람의 특성을 알게 됩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직접 자기 몸에서 알아낸 바람의 특성이 진정한 실재(real paramattha)입니다. 바람의 특성을 책이나 스승의 말을 통해 알게 되면, 그것은 오직 개념(想, sanna, perception)으로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서 즉 자기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해서 이 특성을 알게 되면 그것은 진정한 실재를 알게 된 것입니다.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현상으로 돌아가 봅시다.
숨을 들이쉬면, 배 속에 공기가 들어가 위장이 불러오면서 배가 일어나게 되고, 숨을 내쉬면 이 공기가 빠져 나가면서 불러오른 배가 사라지게 됩니다. 이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현상을 아는 데에도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또 책을 보고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앎은 개념일 뿐입니다. 만일 진정으로 스스로 이 일어남, 사라짐 대해 알고 싶은 의욕이 있어서 얼마동안 이 현상에 대해 마음챙김을 닦으면, 거기에는 더 이상 위장은 발견할 수 없게 되고 단지 긴장감(또는 팽창감), 열기, 움직임 등만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현상들이 바로 진정한 실재입니다. 이 실재를 안 것은 개념이 아니라 지혜라고 합니다. 개념은 그림자에 대한 지식과 같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실재에 대한 앎은 바로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아는 꿰뚫어 보는 앎(insight knowledge)인 것입니다. 책이나 스승, 또는 다른 이로부터 보고 들어서 안 것은 관념(idea)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안 것만이 꿰뚫어 보는 앎입니다.
물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물을 화학적으로 H2O라고 합니다. 물이라는 말은 명칭입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두 개의 수소 원자와 한 개의 산소 원자가 결합해서 1개의 물 분자를 구성합니다. 물의 구성요소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기 수행 센터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정도의 이론적인 앎을 지니고서 실제적인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즉 여러분은 이론적인 앎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 수행을 통해 대상을 직접 알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을 분석해 보려면 실험실에서 적절한 기구들은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론적으로 H2O라고 알던 물이 실재로 수소 원자 둘과 산소 원자 하나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 실험실은 여러분 자신의 몸이고 실험기구는 바로 마음챙김입니다. 실험실에서 실험을 제대로 하려면 기구들의 명칭에 대하여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챙겨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명칭붙이기’라는 기구를 써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실재(paramattha)는 생겨난 바로 그 순간 명칭(pannaatti)이 붙여져서 알게 됩니다.
실제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모두 앉아 있습니다. 하체는 바닥과 접촉해 있고 그 닿아 있는 부분에는 열기가 있습니다. 이 열기가 바로 실재 또는 고유한 특성입니다. 이 열기는 영어로 ‘Heat’, 독일어로 ‘Hitz’, 한국어로 ‘열기’라고 부릅니다. 이런 명칭들이 어디에서 생겨났습니까? 이 명칭들은 실재의 뜨거움(Hotness)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뜨거움이라는 실재(paramattha)에서 ‘열기’라는 명칭이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이 명칭을 ‘생겨난 명칭’(tajja-pannaatti)라고 합니다. 즉 개념으로서의 ‘열기’는 진정한 실재, 진정한 특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실재인 뜨거움에 ‘열기’라는 명칭을 붙입니다. 이름, 명칭으로서의 ‘열기’는 뜨거움이라는 실재에서 나온 것입니다. 생겨난 명칭(tajja-pannaatti)과 이름으로서의 명칭(naama-pannaatti)은 같은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 명칭은 실재하는 현상이 아닙니다. 일종의 개념일 뿐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실재(paramattha)뿐입니다. 이 실재에서 명칭이 생겨나서 이 둘은 서로 짝이 되어 함께 쓰이는 것입니다.
따뜻함(warm)이라는 말을 봅시다. 한국어로 ‘따뜻함’, 영어로는 ‘warm’, 중국어로 ‘暖’이라고 합니다. ‘따뜻함’이라는 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따뜻함’이라는 말 자체는 실재하는 현상이 아닙니다. 따뜻한 현상만이 실재하는 것입니다. 이 몸에는 따뜻한 현상이 있습니다. 이 따뜻한 현상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따뜻함’이라는 말로 불러야 합니다. 말로 표현된 ‘따뜻함’은 명칭입니다. 명칭은 실재하는 현상이 아닙니다. 실재로 있는 것은 ‘따뜻한 현상’뿐입니다.
얼음을 손에 쥐었다고 해봅시다. 어떤 고유한 특성(sabhaava)이 나타납니까? 그것은 차가운 현상입니다. 이 차가움은 손에서 실재로 느껴지는 현상입니다. 이 차가운 현상에 우리는 ‘차가움’이라고 이름붙여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명칭이란 실재하는 현상에 붙여지는 개념입니다.
진정한 본질(sabhaava, true nature)로부터 명칭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명칭이 ‘생겨난 명칭’(tajja-pannaatti)입니다. 좌선을 하려고 앉아 있으면 바닥과 닿은 하체에서 딱딱함을 느낍니다. 이때 느낀 딱딱함은 실재하는 현상 즉 실재(paramattha)입니다. 이 딱딱한 느낌이 생기면 ‘딱딱함’ ‘딱딱함’하고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립니다. 즉 개념을 써서 실재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하체에서 벨벳같은 부드러운 천과 접촉하고 있는 것같은 부드러움을 느낍니다. 이 부드러움은 실재하는 현상이고 이 느낌에 ‘부드러움’이라는 명칭을 붙여 알아차리면 됩니다. 어떤 때는 코나 입 속에서 또는 몸에서 침이나 땀과 같은 물기가 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이 흐르는 현상은 실재하는 진정한 특성입니다. 이 현상이 나타났을 때에는 ‘흐름’ ‘흐름’하고 이름붙여 알아차리면 됩니다. 일반적으로 대상에 대해 명칭을 붙이는 것을 보통의 ‘명칭’이라고 하며, 특정한 대상이 나타날 때 특정의 명칭을 붙이는 것을 ‘생겨난 명칭’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수행 도중에 고유한 특성이 나타날 때 명칭을 붙여 가며 알아차리고 있지 않습니까?
생겨난 명칭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진리[世俗諦, sammuti-sacca, commonly accepted truth]라고도 합니다. 몸에서 나타난 현상에 명칭을 붙일 때 우리는 바로 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진리를 씁니다. 이 관습적인 진리(conventional truth)를 쓰는 이유는 이것을 쓰지 않으면 의미전달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 관습적 진리인 언어를 쓰는 일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감각대상이 몸에서 생겨날 때마다, 이 대상 각각에 대해 모두 똑같은 이름을 붙인다면 대상과 대상은 혼동되어 구분이 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각각의 대상에 대하여 각각 특정의 개념을 쓰면 대상들끼리 구분이 지어지고, 서로 의미전달도 가능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이 개념(pannaatti)을 사용하시면서 사람들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좌선할 때 우선 일차적인 대상(primary object)인 배의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이라는 명칭을 써서 알아차리다가, 딱딱한 현상이 생기면 바로 ‘딱딱함’ 하고 알아차리고, 부드러운 현상이 생기면 ‘부드러움’ 하고 알아차리고, 열기가 생기면 ‘열기’라고 하면서 각각의 현상에 대한 적절한 명칭인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진리를 써가며 알아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일어난 대상 그 자체는 고유한 특성(sabhaava) 또는 실재(paramattha)이고, 여기에 이름을 붙인 것은 명칭(pannaatti)입니다. 다음 법문 시간에 좀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27. 명칭과 실재 ②
지난 법문시간에 명칭(pannaatti)과 실재(paramattha)의 차이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제대로 이해하겠습니까? 간단히 말하면 몸에서 일어난 감각(sensation)은 실재(paramatha)이고 이 감각에 이름을 붙이는 일(labeling)은 명칭(pannaatti)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에 대하여 실재를 알아차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명칭을 알아차리고 있습니까? 다시 말해 여러분은 실재와 명칭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면서 알아차리고 있습니까? 몸에서 일어난 현상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위에서 제시한 문제에 대한 답은 실재(paramattha)입니다. 명칭은 물질적 형태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모두 실재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실재 즉 실제로 있는 현상을 알아차릴 때는 반드시 명칭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즉 명칭을 사용해서 실재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몸에서 열기가 발생하면 이 열기는 분명한 현상이고 진리입니다. 이 열기에 대해서 ‘열기’라는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명칭을 붙이지 않고 일어난 현상을 알아차릴 수는 없습니다. 실재에 대해 마음챙겨 알아차릴 때, 여러분은 진리를 알게 됩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즉 알아차릴 때 명칭이 수반되어 있으면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다시 말해 명칭으로 실재를 알아차리면 혼동되지 않겠냐고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진리 즉 실재를 알아차릴 때, 명칭이 별로 필요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 수행자의 답)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는 실재를 알아차리는 데 명칭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수행이 어느 정도 향상되면 명칭은 필요없습니다.” 이 말은 옳습니다. 경전의 주석에 대한 복주(復註, subcommentary)을 쓴 저자는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명칭과 실재 사이에서 생긴 문제에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을 해나갈 때, 고유한 특성 즉 실재만을 아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그래서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려야 한다. 하지만 이 명칭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수적인 것(extra)이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 진정 명칭붙이는 일이 필요한가?
이런 문답을 제기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몸에서는 열기, 긴장감, 딱딱함, 뻗뻗함, 저림 등과 같은 현상들이 일어나는데, 이 현상들이 일어날 때 단지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 것(watching)으로는 이 현상들을 구분지어 알아차리는 데 있어서 충분치 않다. 그래서 명칭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명칭이 반드시 필요치는 않다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반론은 합리적인 문제제기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반론은 합리적인 문제제기입니다. 따라서 저자는 스스로 제시한 이 반론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고는 명칭을 사용해서 실재를 알아차려야 하지만 여기에는 한계(limitation)를 설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명칭을 붙여 가며 실재를 알아차려야 한다는 말이 언제 합당하겠습니까?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는 이 말은 옳습니다. 하지만 뒤로 가면 이 말은 옳지 않습니다. 즉 수행이 향상되었을 때는 명칭을 붙여 가며 실재를 알아차려야 한다는 말은 합당치 않습니다. 이처럼 한계를 지워 놓고서 이 주장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행의 초기에 명칭을 붙이는 것은 옳습니다. 이처럼 명칭을 붙여가며 계속적으로 마음을 챙겨 대상을 알아차려 나가면 마음은 청정해지고, 마음집중의 힘은 커집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지혜가 생겨납니다. 수행의 향상된 상태(bhaavanaa)입니다. 이때가 되면 명칭이라는 먼지를 떨어내야 합니다. 지혜를 얻은 상태가 되면 더 이상 생겨난 명칭(tajja-pannaatti)을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집중(定, samaadhi)과 지혜(慧, pannaa)가 향상되었을 때라는 시간의 측면이 분명히 제시될 때, 명칭(pannaatti)은 더 이상 필요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향상의 단계에 오르면 알아차리는 마음은 오직 고유한 특성들에 집중해 있습니다. 명칭붙이는 것도, 대상의 모양(shape)이나 대상이 있는 방식(manner)도 더 이상 필요없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오직 고유한 특성만을 바로 나타난 순간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 상태에서 만일 몸에 열기가 생기면 마음은 바로 이 열기에 가라앉아, 있는 그대로의 열기를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피곤함이나 긴장감이 나타나면 알아차리는 마음은 바로 이 느낌들에 집중해 있습니다. 틈없이, 쉼없이 마음은 바로 대상이 일어나는 그 순간 그 대상에 집중해서 알아차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말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니 주의해서 듣기 바랍니다. 마음챙겨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은 매우 빠르게 끊임없이 생겨났다가는 사라짐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현상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분명하게 꿰뚫어 보는 단계가 생겨남과 소멸함을 꿰뚫어보아 아는 단계(udayabbaya-anupassana-~naana)입니다. 이 단계가 되면 명칭을 붙이는 일 자체가 장애가 됩니다. 이 단계의 꿰뚫어 보는 앎이 갖추어지면 스스로 ‘명칭을 붙여가며 알아차리는 일이 장애가 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어 명칭을 떼어버리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대상을 바로 그 순간 순간에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명칭을 붙이지 않아도, 고유한 특성들은 제대로 알아차리게 되기 때문에 이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명칭이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생겨남과 소멸함을 꿰뚫어 보는 앎’의 다음 단계인 ‘소멸을 꿰뚫어 보는 앎’(bhanga-anupassana-~naana)을 얻게 되면, 우리는 오직 대상들의 끝 또는 소멸하는 것만을 보게 됩니다. 이때에는 대상이 생겨나는 것은 보지 못하고 오직 끊임없이 소멸해서 사라져가는 것만을 볼 뿐입니다. 이 단계가 되면 지혜는 매우 예리해져 있어서 마음챙겨 알아차리려고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알아지고 분명한 앎도 마찬가지로 자동적으로 생겨나게 됩니다. 감각대상은 자동적으로 알아차리는 마음 안에 들어와서 대상과 마음이 짝을 이루며 함께 진행되어 갑니다. 이 단계에서는 나타난 대상의 형태(form)나 방식(manner)은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알아차린 대상의 소멸만을 볼 뿐입니다. 형태와 방식의 면에서 보면 우리는 사람, 동물, 남자, 여자 등을 구분해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과 동물, 남자와 여자는 모양과 그렇게 존재하는 방식에 의해 구분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꿰뚫어 보는 앎이 ‘소멸을 꿰뚫어 보는 앎’의 단계(bhanga stage)로 향상되면 형태도 방식도 없어집니다. 즉 이 단계가 되면 저것은 사람이고 이것은 동물이라든가, 저 사람은 남자고 이 사람은 여자라고 하는 구별짓는 생각이 없어집니다. 이런 분별이 없어져 버리고 실재로 있는 것은 고유한 특성(sabhaava)뿐임을 알게 됩니다. 이때 고유한 특성에는 감각대상뿐만 아니라, 알아차리는 마음과 분명히 아는 마음(noting and knowing mind)도 포함됩니다. 우리가 고유한 특성만을 보기 전에는 ‘내가 알아차리고 있다’ ‘그가 알고 있다’ ‘그녀가 알아차리고 있다’ ‘내가 알고 있다’ ‘그가 알고 있다’ ‘그녀가 알고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멸을 보는 단계’에서는 더 이상 이러한 구분이 없어집니다. 이 단계에서는 알아차리는 마음(sati, noting mind)과 아는 마음(sampajanna, knowing mind)도 실재(paramattha)임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감각대상과 알아차리는 마음은 짝을 이루며 함께 일어났다 사라지며, 이 둘은 모두 진정한 실재(real paramattha)입니다.
수행의 측면에서 실제적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이전에 열기를 알아차릴 때는 ‘나는 열기를 알아차린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소멸을 보는 단계에서는 더 이상 ‘나’니, ‘너’니, ‘그녀’니 하는 구분이 없어지고 오직 알아차리는 마음과 감각대상만이 실재(paramattha)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남자니 여자니 하는 문제는 더 이상 생기지 않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오직 고유한 특성(sabhaava)들의 집합이라는 점에서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성해방 이라는 문제도 없어집니다. ‘여자’라고 할 것은 없고, 있는 것은 고유한 특성뿐이기 때문입니다.
잠깐 여성해방이라는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왜 여성이 해방되어야 합니까. 남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남성이니 여성이니 하는 구분과 차별이 생겨났습니까.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남녀를 구분짓지 않으셨습니다. 즉 수행에 있어서 남녀는 동등한 기회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형태와 방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남자니 여자니 하는 구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구분은 오직 자연적인 현상일 뿐, 누구도 인위적으로 구분짓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자연적 현상으로서 남녀가 있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지난 생에 우리는 남성과 여성의 존재방식을 좋아하며 업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 업 때문에 남녀의 구분이 생긴 것입니다. 남자의 업을 지었기 때문에, 또 여자의 업을 지었기 때문에 이 업에 따라서 자연적으로 남녀의 몸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남성은 여성과 접촉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여성을 좋아합니다.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녀의 문제는 이 정도 해두고 다시 근본적인 수행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소멸을 보는 단계’에서는 특히 감각대상과 알아차리는 마음은 짝을 이루며 함께 사라집니다. 하지만 아는 마음은 남아 있습니다. 소멸을 아는 마음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감각대상과 알아차리는 마음의 소멸을 아는 것이 위빠사나(vipassan?) 즉 꿰뚫어봄입니다. 특히 감각대상과 알아차리는 마음을 ‘비추어 보는 위빠사나’(pativipassanaa, reflective insight)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여기 세 사람이 있는데 그 중 두 사람이 함께 물 속으로 뛰어들어 없어져 버렸고, 한 사람은 뒤에서 이것을 지켜 보고 있다고 합시다. 여기서 제3의 사람 즉 뒤에서 지켜 보고 있는 사람이 비추어 보는 마음 또는 ‘아는 마음’(pativipassanaa, knowing mind)이고 앞에 함께 사라진 두 사람은 감각대상과 알아차리는 마음에 해당합니다.
여러분들은 아직 이 단계를 이해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열심히 정진해서 이 ‘소멸을 보는 단계’에 이르면 지금 설명한 내용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명칭(pannaatti)을 써가며 알아차리는 것은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는 필요하지만 수행이 향상되면 필요없다고 했습니다. 또 언제까지 명칭을 붙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얘기했습니다. 다시 간단히 정리하면 실재(paramattha)를 알게 될 때까지는 명칭(pannaatti)을 사용하고, 실재를 알게 되면 명칭을 버려야 합니다. 명칭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실재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지고, 실재가 분명히 드러나면 명칭은 사라집니다. 수행을 하지 않는 세상사람들은 명칭에 빠져서 실재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28. 위빠사나 수행의 비결
지난 법문 시간에 명칭(pannaatti)의 사용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수행의 처음 단계에서는 대상들에 대해 명칭을 붙여 알아차리지만 수행이 향상된 단계 즉 알아차리는 마음과 대상이 짝을 이루어 사라지는 단계에서는 명칭이 필요없어진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수행이 향상된 단계에서는 명칭이 필요없어진다는 부분에 대해 좀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이 수행의 비결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이란 자신의 몸에 감각대상이 나타날 때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진(apparent) 대상을 쉼없이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때의 대상에는 몸의 동작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순간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감각대상이나 몸의 동작에 마음이 딱 붙어서 알아차리는 것, 이러한 알아차림을 ‘바로 붙어서 보는 것’(隨觀, anupassana)이라고 합니다. 아누(anu)란 뒤에 있다는 뜻, 즉 알아차리는 마음이 대상의 바로 뒤에 붙어 있다는 뜻입니다.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릴 때는, 대상이 나타나면 바로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리는 것을 뜻합니다. 감각대상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행동까지도 마음을 챙겨야 하고(contemplate), 관찰해야(observe) 합니다. 알아차리는 마음은 항상 나타난 대상 바로 뒤에서 대상을 알아차리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 아누빳사나(anupassana)의 의미입니다.
나타난 대상을 쉼없이 바로 밀착해서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부처님께서 몇 가지 정신적인 힘(mental strength)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지니고 있어야 하는 정신적 힘의 하나는 열정(attapa, ardent)입니다. 감각대상은 아주 빨리 생겨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잠시라도 마음챙겨 알아차리는 일을 쉬면 놓쳐버립니다. 그래서 아주 열정적으로, 부지런하게, 마음챙겨서 나타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열정(attapa)이라는 말에는 활발함(active), 민첩함(alert)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항시 활발하고 민첩하게 작용해야만 빠르게 생겨났다가는 사라지는 현상들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이 말에는 열망(eagerness)이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애써 노력하려는 열의라는 의미입니다. 대상이 나타나는 바로 그 순간 순간에 이처럼 노력, 활발함, 기민함, 열의와 힘을 지니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의 작용이 활발하지도 않고, 기민하지도 않으며, 급한 마음(urgency)도 없고, 열의도 없다면 바로 방일에 빠질 것입니다. 이 방일을 잘 생각해 보면 ‘열정’(attapa)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열정을 지니고 대상을 알아차려 나갈 때 근심(anxiety)이나, 불안(restlessness)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근심이나 불안은 수행의 큰 장애이지 수행을 도와 주는 정신적 힘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장애가 일어나면 바로 알아차려 없애야 합니다. 놓치는 일없이 나타난 대상을 제대로 알아차리려면 자신의 마음을 강하게 밀어부쳐야 합니다. 이를 분투하는 태도(atapi)라고 합니다. 미얀마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경구가 있습니다. “대상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력을 가해야 하고, 자신의 마음에 힘을 불어 넣어야 한다.”
배의 일어남, 사라짐 마음챙기는 일로 돌아가 봅시다. 일어남의 처음과 중간과 끝 단계를 제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알아차리는 마음에 힘을 불어 넣어야 합니다. 사라짐의 모든 단계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아차리는 마음은 차갑게 식어서는 안됩니다. 항상 따뜻하게 덥혀져 있어야 합니다. 즉 느슨하게 풀어지면 안되고, 팽팽하게 힘이 가해져서, 기민하게 활동해야만 합니다. 만일 노력을 가하지 않는다면 알아차리는 마음은 식어 버려서 바로 번뇌가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마음이 느슨해져서 민첩하지 않고, 활발하지 않으면 번뇌는 아주 쉽게 마음 속으로 들어옵니다. 하지만 노력을 가하면 알아차리는 마음은 따뜻하고, 기민하고, 활발해져서 번뇌는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스스로에게 이로운 일입니다.
1초 동안 이와 같이 노력을 가하면, 1초 동안 번뇌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1분이면 60회, 1시간이면 3600회 동안 번뇌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번뇌가 일어나면 마음은 피곤하고 더러워집니다. 번뇌가 없으면 마음은 깨끗해지고 분명해집니다. 간단히 말해서, 노력이 있으면 마음이 번뇌에 의해 오염되지 않게 됩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지방에서는 몸의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 두꺼운 옷과 난방기구가 필요합니다. 어떤 때에는 아주 심하게 추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온이 내려가 춥더라도 추위를 피할 장소와 두툼한 옷이 있으면 몸 속의 혈액의 순환은 자연스럽게 돌아갑니다. 만일 효과적으로 추위를 막아내지 못하게 되면 심한 감기에 걸리게 되고 오랫동안 추운 날씨에 몸이 노출되어 있으면 혈액순환이 둔화되어 결국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알아차리는 마음의 상태와 아주 유사합니다. 기온이 낮아졌는데 효과적으로 추위를 막지 못하면 감기에 걸리듯이, 알아차리는 마음이 식어 버리면 번뇌라는 감기에 걸립니다. 감기를 막기 위해서는 보온이 필요하듯이, 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도 열이 필요합니다. 즉 알아차리는 마음은 항상 따뜻하게 유지되어 활발하고 기민하게 대상을 알아차려야 하지 절대로 식어서는 안됩니다. 추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추위를 극복합니까. 난방기구나 따뜻한 옷도 필요하지만 항상 몸을 활발하게 움직여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리는 마음도 항상 활동적이어야(active)만 식지 않고 따뜻함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몸을 항상 따뜻하게 유지해 주면 감기에 걸리지 않습니다. 따뜻한 옷은 밖으로부터의 추위를 막아 주는 일과 몸에서 발생한 체온을 유지시켜 주는 두 가지 역할을 해줍니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리는 마음을 따뜻하게 유지시켜 주면 한편으로는 밖의 대상에 대해서 불필요한 번뇌가 생겨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청정해지는 두 가지의 이익을 얻게 됩니다. 경전을 보면, 노력(정진)은 좋지 않은 행위[不善業]를 허용하지 않으며, 좋은 행위[善業]가 생겨나도록 도와준다고 했습니다.
알아차리는 마음이 식어 버리면 마음챙김도 없어집니다. 마음챙김이 없으면 집의 문을 열어 놓아 비바람이 들어오게 내버려두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챙김이 굳게 자리잡고 있으면 문단속이 잘 되어 번뇌라는 비바람은 들어올 수가 없게 됩니다. 마음챙김이 갖추어지면 마음집중이 향상되어 번뇌의 침입을 더욱 강하게 막아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챙김의 힘이 충분히 강해지면 번뇌는 마음 속으로 뚫고 들어올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데 앞에 바람을 막아 주는 유리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딪쳐 오는 바람 때문에 운전에 큰 지장을 받게 되어 사고가 날 것입니다. 마음챙김은 자동차의 유리와 같이 번뇌라는 바람을 막아 줍니다. 즉, 번뇌가 마음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시켜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도록 해줍니다.
지속적이며, 안정되고, 강한 마음챙김을 지니기 위해서는 바른 노력은 필수불가결의 조건으로 갖추어져야만 합니다. 감각기관에 나타난 대상들을 쉼없이, 끊어짐없이 알아차려 나가면, 든든하고 강한 마음챙김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마음챙김을 ‘충분히 주의깊은 마음챙김’(satima)이라고 합니다. 이 마음챙김을 1초 동안 지니면 1초 동안 주의깊은 마음을 지니는 것이고, 1시간 동안 지니게 되면 3600회의 주의깊은 마음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적절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알아차리는 마음은 마치 돌덩이가 물 속으로 가라앉듯이, 대상에 가라앉아 고정될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대상을 알아차리는 일을 잊거나 놓쳐버리지 않게 되어 알아차리는 마음과 대상은 일 대 일의 짝을 이루어 항상 붙어 있게 됩니다. 그러면 번뇌는 일어나지 않게 되어 번뇌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상태가 이어집니다. 이처럼 바른 노력은 번뇌를 몰아내 버리고, 바른 마음챙김은 새로운 번뇌의 발생을 막아 버립니다. 따라서 노력과 마음챙김을 지니고 있는 한 여러분은 탐 치 등의 번뇌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있습니다. 번뇌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면 안정과 마음의 평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번뇌에 물들어 더러워지게 되면 이 번뇌를 없애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번뇌가 생겨난 후에 그것을 없애려고 하는 것보다는 애초에 번뇌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병에 걸린 후, 이 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병에 걸리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더 나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나쁜 일을 저지른 뒤에 그 행위에 대한 처벌을 하는 것보다는 나쁜 일을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더 좋은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법(法, Dhamma)은 분명하면서도 단순합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법을 통해서 행복을 얻으려면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번뇌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일(protection), 마음의 안정(safety), 그리고 평온(peace)입니다. 이 조건들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방패이고, 스스로 갖추어야 하는 안정이며 평온입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든든한 마음챙김(stable mindfulness)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든든한 마음챙김이란 보통의 마음챙김이 아니라 강하고도 지속적인 특별한 마음챙김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마음챙김을 지니지 못하면 번뇌가 생겨납니다.
번뇌가 탐진치의 형태로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어나는 즉시 바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탐심은 욕구에서 일어납니다. 마음에 무엇을 얻고자 하는 욕구가 생겼을 때, 바로 그 순간 ‘욕구가 생겼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마음에 어떤 번뇌라도 나타나는 즉시 알아차리는 일은 바로 차의 유리에 떨어진 눈이나 비를 와이퍼로 닦아내는 일과 같습니다.
만일 운전하고 있을 때, 차의 유리에 내린 눈이나 비를 와이퍼로 닦아내지 않는다면 시야가 가려져 사고가 날 것입니다. 마음에 번뇌가 생겼을 때, 마음챙김이라는 와이퍼로 그 즉시 닦아내지 않는다면 바로 사고가 발생합니다. 어떤 수행자들은 수행에 진전이 없다고 자신에 대해 화를 냅니다. 이는 마음 속에 ‘수행이 안된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해 진심(瞋心)이 생겨나는 것을 막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비나 눈이 내릴 때 와이퍼로 닦아내는 것은 이미 병에 걸린 후 그 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리에 눈이나 비가 붙은 후에 제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자동차에 달려 있는 와이퍼보다 눈이나 비를 닦아내는 데 있어서 더 좋은 장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큰 배에 달려 있는 회전식 순환 와이퍼(circular rotary wiper)입니다. 이 장치는 스위치를 켜면 1초에 여러번 회전하기 때문에 배의 유리창에 부딪치는 비나 눈을 조금도 남아 있게 하지 않습니다. 이 장치는 마치 ‘강한 마음챙김’(atapi-sati)과 흡사합니다. 끊임없이 부지런하게 강한 마음챙김을 지니고 있으면 번뇌는 결코 마음에 달라붙어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저는 큰 배에 이 회전식 순환 와이퍼가 달려 있음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기 때문에 예를 들어 설명드리는 것입니다. 비행기 조종석의 유리창에는 와이퍼는 없지만, 유리에 열이 가해져 있어서 비나 눈이 닿자마자 증발해 버린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강한 마음챙김’이라는 정신적인 회전식 순환 와이퍼를 작동시켜 본다면 마음에 생겨난 번뇌가 얼마나 빨리 사라지게 되는가를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부지런히 노력하여 스스로 확인해 보기 바랍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길 (우 빤디따 스님의 가르침, 천안 호두마을 위빠사나 수행처, 2002) 180-203쪽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