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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스크랩] 기준점에 대한 고찰

by Borealis 임박사 2011. 7. 3.
아고 저 때문에 잡념만생기게해서 수행하시는데 방해가 많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말슴드린다면 저의 말의 본뜻은 ..우리가 옳고 그름을따질대에..어떤사람의 행동이나 글을 설명할대 지금에 말이나 행동이 과거의 한말이나 행동에 이치에 맞을때는옳다하고 틀리면 틀리다라고 말합니다 이럴게말하는건 맞습니다 맞구요

위에 도올선생님이 말하신것이 과거의 행적에 맞으면 옳은것이고 옳은일이나 사건을가지고 틀리게 말했다면 틀린얘기입니다 내가 말하고자하는듯은 그런것이아니구요..마음법이라고 하는법에는 그런 행적이나 사실이나 등등 옳고 그르다라고 판단할 기준점이 없다는것이죠.일상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준점을 잡아서

여기에 부합하면 옳고 아니면 틀리다해야하는데 마음법에 그런 기준점을 잡을 려고 하니 도무지 어디에 그런 판단의 기준점을 잡아야 하는가 이겁니다. 법계허공계에는 도무지 어디에도 기준점이 없고 한데 어떻게 옳고 그름의 기준점을 어디에 붙어서 설명을 해야하는가 라는 관점에서 이런 글을 올린것입니다 .

님들께서는 가이없는 법계 허공계에서 어디에 기준점을 두고 옳다 그르다 설명해야 하시는지 아시는분 답변부탁드립니다 .제가 한수 배워보겟습니다.알면 가르쳐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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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열님께서 말씀하신 마음법과 법계 허공계의 옳고 그름의 기준에 대해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문제는 마음법이라는 단어와 허공계라는 단어의 명확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말로 표현하는 순간 마음이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마음은 형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공하다고 합니다. 공한 모습에는 당연히 '옮음' 이라고 할것 '그름' 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옮음'이라는 자성이 따로 존재하고 '그름'이라는 자성이 존재하면 마음이 공하다는 것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마음을 표현할수 없기 때문에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또한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마음이 없다면 '마음'이라는 단어 또한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거북이 털' '토끼 뿔' 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단어조차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준점' 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공'한 성품에 어긋나게 됩니다. 기준점이 있다면 그것은 변하지 않는 '不常'의 모습을 갖게 됨으로 제행무상의 삼법인에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 자체에는 어떤 '기준점'이라는 별개의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마음 자체에 대한 설명이지 마음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말로 설명할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말로 설명되어진 것은 마음이 아니므로 그 설명은 틀린 것이다, 라고 말하면 이또한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마음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정확하다면 옳은 것이지만, 그 표현이 틀리다면 그른 것이 됩니다. 마치 입으로 '불'에 대해 설명한다고 해서 입에 불이 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입이 불에 타지 않는다고 해서 그사람의 설명이 무조건 틀렸다고 할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형상이 없다고 해서 완전히 그 작용이나 움직임도 없다고 할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생각하고 의식하는 것또한 없어야 할것입니다. 분명이 그 작용과 움직임을 명백히 나타남으로 마음의 존재를 알수 있습니다. 그러한 나타남들을 총칭해서 마음법이라고 합니다. 만약 마음이 없음으로 작용도 없다고 한다면 '고집멸도' 사성제가 없게 되고 '사성제'가 없으면 '불법승' 삼보가 없다는 비방을 하는 것이됩니다. 또한 옳고 그름또한 없다고 한다면 일체법을 파괴하는 것으로서, 나쁜 업을 지어도 선한 과보를 받고 선한 업을 지어도 나쁜 과보를 받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 인과법을 무시하는 것임으로 불법이 아닌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나 복을 짓지 않았는데도 선악의 과보를 받는 즉 모든 것이 우연이라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법이라고 말할때는 이미 나타난 현상임으로 마음을 의지해서 생겨난 것임을 부인할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체 모든 법은 마음을 의지함으로 속세의 모든 법은 불법의 진실한 뜻 즉 진제(승의제, 제1의제)를 떠나서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속제의 현상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진제(불법)을 이해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모든 설법은 세속의 법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의 법이 공한 모습을 갖고 있다고 해서 또다시 공한 것에 대한 상을 내게 되면 이것은 또다시 '있다' '없다'는 변견에 치우쳐 중도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만약 공한 것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것에 상대적인 것인 공하지 않음 (不空)이 있어야 합니다.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변하지 않음으로 인연법에 또한 위배되게 됩니다.

따라서 표현되는 것(相)은 공함으로 취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 거부할 것이 아니며 없다고 생각하는 것또한 변견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물과 파도가 분리될수 없는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마음법의 옳고 그름을 어디다 정해야 하는 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마음이 경계를 만나 나타나게 되면 여러가지 모습을 띄는데 불성이 그대로 들어난 것을 옳은 것이라고 하고 불성 그대로의 모습에 의지하지 않고 번뇌 망상에 의지하여 나타난 것을 옳지 못한 것이라고 가정하겠습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전자를 '本覺(본각)' 후자를 '不覺(불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번뇌망상에 끄달리기 때문에 번뇌가 소멸된 깨달음을 추구하게 되는데 그것을 '始覺(시각)'이라고 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불성이 없다면 '깨닫지 못함'이라는 단어도 있을 수 없고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것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본각가 불각이 있으므로 시각이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렇다면 옳고 그름의 기준을 '본각'에 두게 되면 번뇌를 일으키는 것들은 그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됩니다. 예를 들면 윤회의 고리에 빠져들게 하는 번뇌들 (탐욕, 성냄, 어리석음, 거만, 의심, 악한견해) 그리고 이러한 번뇌들을 더욱 강화시키는 이차적 번뇌들 (분노, 원한, 위장, 고뇌, 질투, 인색, 속임, 아첨, 해로움, 방자함, 비양심, 부끄러움이 없음, 들뜸, 미련함, 불신, 게으름, 부주의, 망각, 산란함, 부정확한 지식)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번뇌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중생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고 윤회의 고리를 끈을 수 있으니 이러한 행동을 옳은 것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선과 악에 대한 법문을 옳고 그른것에 대한 법문보다 더 많이 하신것을 볼수 있습니다. 조사들의 말씀 중에는 옳고 그름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하는 마음을 끄게 하는 것이지 옳고 그름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제가 토끼를 보고 거북이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분명히 그말은 틀린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 자체는 공한 것이며 자성이 없음으로 옳다 그르다라는 자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두 모습을 모두 이해해야만 불법의 깊은 의미를 파악할수 있는 것입니다. 한쪽만 알아서는 결코 불성을 바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이라는 요소를 이해할때도 좋다 나쁘다라고 이해하지 마시고 이익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로 해석하여 그 기준을 '나'에게 두지 말고 '남'에게 두셔야 합니다. 즉 남에게 이익이 되면 선한 것이고 '나'에게 이익이 되면 악한 것이라고 판단하시면 부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이상으로 옳고 그름의 기준점에 대한 고찰을 마칩니다.
출처 : 청봉스님의 장군죽비
글쓴이 : 미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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