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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남방불교(南方佛敎)>

by Borealis 임박사 2016. 8. 10.

                            <남방불교(南方佛敎)>

                          —남방 상좌부불교(上座部佛敎)—

 

 

1. 개요

 

   불교는 크게 남방불교(南方佛敎)와 북방불교(北方佛敎)의 두 흐름이 있다. 남방불교는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전해져, 그 곳을 근거로 해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로 퍼진 불교로서 남전불교(南傳佛敎)라고도 한다. 북방불교는 인도에서 서역(중앙아시아)을 거쳐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전파됐고, 다시 베트남과 한국에 전해졌으며,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해진 불교로서 북전불교(北傳佛敎)라고도 한다.

   남방불교와 북방불교의 주된 차이는 북방불교는 초기불교의 교의를 확대 해석한 대승불교(大乘佛敎, Mahāyāna buddhism) 중심인데 비해 남방불교에서는 초기불교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상좌부불교(上座部佛敎)가 전해졌기 때문에 테라와다(Theravāda)라 하며, 엄격한 계율과 참된 수행을 중시하고 있다. 그런데 대승불교인 북방불교권에서는 남방불교를 소승불교(小乘佛敎, Hinayana buddhism)라 폄하해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남방불교 국가는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일부이고, 북방불교 국가는 중국, 한국, 일본, 몽골, 티베트와 베트남 등으로 알려져 있다. 단 인도네시아는 원래 남방불교국가였으나 지금은 회교국가이며, 티베트는 중국을 거치지 않고 인도북부에서 대승불교가 직접 전해졌다.

   남방불교의 거점인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다양한 전설이 있지만 대체로 붓다 입멸 후 서서히 전해졌으리라 짐작되고, 본격적인 전도는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에 의해 불교가 전해지면서부터였다.

   그런데 고대 초기불교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인도문명을 탐구하려면, 제일 먼저 부딪히는 난점이 역사자료의 부족이다. 특히 기록유산이 드문 것은 고대 인도인들에게 희박했던 역사의식 때문이다. 지나간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를 중요시하는 민족성 때문에 인도인들은 과거기록을 남기는데 소홀했다. 거기에다가 문자 자체를 불경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으로 인해 성전(聖典)을 문자화하는 일을 기피해, 여러 성전을 암송(暗誦)으로 전승하는 것이 고대인도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이러하기 때문에 불교 전파 내력이나 불경성립 혹은 불교사를 탐구하는데 큰 곤란을 겪는다. 각종 불경의 성립배경이나 대승불교 흥기과정에 대해 논란이 많은 것도 바로 이러한 사료의 빈곤 때문에 확실한 근거를 찾기 어려움에서 야기되는 비극이다. 그러나 다행히 인도 남쪽의 섬나라 스리랑카엔 고대역사서가 전한다. 그것이 도사(島史)로 번역되는 <디파밤사(Dipavamsa)>와 대사(大史)로 번역되는 <마하밤사(Mahavamsa)이다.

<디파밤사(Dīpavaṁsa, 도사/島史)>는 빠알리어로 쓰인 스리랑카 최고의 편년체 역사서로서, 불교를 중심으로 해서 4세기 초에서 5세기 초에 걸쳐 작성됐으며, 전체 22장(章)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중 제1~8장에는 불교성립부터 아소카왕시대에 이르는 인도 정치사ㆍ불교사가 기록돼 있고, 제9장 이하에는 스리랑카 건국에서부터 마하세나왕(4세기 중반)시대까지 스리랑카 정치사ㆍ불교사가 언급돼 있다.

   그리고 <마하밤사(Mahavamsa, 대사/大史)>는 빠알

리어로 쓰인 불교를 중심으로 해서 작성된 스리랑카의 고대 역사서로서, 전체 37장(章)의 게송으로 돼 있다. 스리랑카 왕 다투세나(재위 460∼478)의 숙부인 비구승 마하나마(Mahanama)가 왕명에 따라 5세기 중엽에 역사서 <디파밤사(Dīpavaṁsa)>를 수정해서 편집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서의 도움을 받아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한 남방불교의 전모를 대충 파악할 수 있다.

   불멸 후 300여 년경인 BC 3세기 중엽에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마우리아 왕조(Maurya dynasty) 전성시대의 아소카왕(Ashoka, 阿育王, 재위 BC 270년~BC 230년)은 독실한 호불군주로서 그에 의해 불교가 인도 전역에 퍼져 불교교세가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이때 제3차 불전결집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당시 외도(外道)들이 의식(衣食)을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가짜 불교도가 돼 불교사회를 혼탁하게 하고 있었으므로 아소카왕은 이를 바로잡아 외도들로부터 불교를 보호하고, 국론통일을 기하기 위해 불교를 국교로 인정하는 한편 제3차 불전결집을 단행했다.

       ※제1차 불전결집(BC 5세기)---제1차 불전결집은 불멸 직후 마하가섭(摩訶迦葉)의 주도로 이루어진 결집을 말한다. 이때 주로 경장과 율장이 결집됐다.

       ※제2차 불전결집(BC 4세기)---불멸 후 100여년 경 계율의 해석문제를 놓고 보수파와 진보파 사이의 논쟁과 대립을 계기로 보수파 주도로 이루어진 결집을 말한다. 이때는 주로 율장이 결집됐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보수파인 상좌부와 진보파인 대중부로 분열(근본분열)돼 소위 부파불교가 시작됐다.

 

   그런데 아소카왕 때 제3차 불전결집(BC 3세기)을 위한 집회는 1,000여명의 대표들이 모여 무려 9개월간에 걸쳐 개최됐다. 아소카왕은 그의 종교적 스승인 목갈리풋타 팃사(Moggaliputta-tissa, 목건련제수/目健連帝須) 존자로 하여금 주관케 했고, 목갈리풋타 팃사는 아소카왕의 지지를 받아 불교계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상가를 숙정했다. 이때, ‘분별설(vibhajjavada)’을 기본으로 하고, 자기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만든 논서 <논사(論事, Kathavatthu)>를 제시하면서 정법을 복원했다.

   ‘분별설’이란 모든 것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단정(一向記)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진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싸움이 일어난다. 현실은 그러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섞여 있다. 이러한 인식에 입각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구별(분별)해서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분별설’의 입장이다. 그리하여 목갈리풋타 팃사에 의해 정비된 상좌부를 분별설부(分別說部, Vibhajjavāda)라 했다.

   이 집회가 수도 파탈리푸트라(Pātaliputra, 波陀利佛城, 華氏城 - 현재의 비하르주의 주도 파트나 부근)의 계원사(鷄園寺)에서 행해져서 이를 ‘아소카결집’, ‘파탈리푸트라결집’, ‘화씨성결집(華氏城結集)’, 혹은 ‘일천결집(一千結集)’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때 불경어를 빠알리어(Pāli)로 통일하고, 교의는 상좌부 분별설부(分別說部) 것으로 통일했다. 이렇게 해 산만했던 경(經) ‧ 율(律) ‧ 논(論) 삼장이 <빠알리어 삼장>이라는 최초의 성문경전 형식으로 조성됐다.

   그리고 제3차 불전결집은 매우 엄정해서 아소카왕은 상좌부 분별설부 이론을 반대하고, 공성(空性)을 주장하면서 부처님 법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대중부(大衆部) 승려들을 이단으로 규정해 모두 흰옷을 입혀 교단에서 추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제3차 불전결집 이전까지를 대개 초기불교(원시불교)라고 한다.

   그리하여 제3차 불전결집이 끝난 후 아소카왕은 자신의 통치이념인 불법에 의한 정복을 실현키 위해 주변국으로 전법사(傳法師, 포교사)를 파견했다. 이때 아소카왕의 후원을 받은 상좌부계통(분별설부) 불교가 남방 스리랑카에 전해졌다.

   아소카왕은 자신의 아들인 마힌다(Mahinda) 장로 일행을 스리랑카로 보냈다. 이에 당시 스리랑카 왕 데와낭삐야-티샤(Devanampiya-Tissa, BC 250~207년 재위)는 이들을 맞이해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마하 비하라(Mahavihara, 대사/大寺)를 지어 기증함으로써 대사(大寺)가 남방불교의 거점이 됐다. 이것이 스리랑카 불교의 기원이다. 이때 스리랑카 불교는 남방 상좌부라는 부파로 정착해 현재의 남방불교 기초를 이루었다.

   이렇게 해서 전해진 남방불교는 교학사상이나 수행의 전통 및 계율의 준수 등에 대해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초기경전인 <빠알리어 삼장>을 근거로 하고 있다. 북방불교권에서는 대승불교 우월적인 발상에서 이들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폄하하지만, 이는 잘못된 오해이다. 오히려 남방불교 여러 나라에서는 자신들이 정통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며 실제로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초기 교단적인 전통이 남방불교에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따라서 남방불교란 베트남을 제외한 동남아시아 각국의 불교로서, 이들은 오로지 석가모니 가르침만을 따르며 그 외에 아무것도 섬기지 않는다.

 

2. 남방불교의 전개과정

 

   1) 스리랑카로 불교전파

 

   스리랑카 불교는 역사가 매우 유구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기원전 3세기에 아소카왕(Ashoka, 阿育王, BC 273년~232재위)에 의해 불교가 전래됐기 때문이다. 불멸 후 200년경(BC 3세기경) 마우리아왕조(Maurya dynasty) 아소카왕의 주선으로 제3차 불전결집이 열려 상좌부 분별설부(分別說部) 교의로 통일을 했다.

   그 후 아소카왕은 자신의 아들인 마힌다(Mahinda) 장로와 딸인 상기밋다(Sanghamitta) 비구니를 스리랑카로 보냈다. 이에 스리랑카 국왕 데바낭삐아-티사(Devanampiya-Tissa, 재위 BC 250~207)는 이들을 맞이해 스스로 마힌다 장로에 귀의함으로써 불교신자가 됐다. 그리고 마힌다 장로 일행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전(口傳)으로 전수받기 위한 경전편찬회의가 열렸다. 이때 모인 인원은 16,000명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일단 <빠알리어 삼장>이 구전으로 스리랑카에 전해지고 정착된 것이다.

   또한 수도인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최초의 사원인 마하메가바나(大雲林) 사원을 세워 그들에게 기증했는데, 이 사원이 정비돼 마하 비하라(大寺, Mahavihara) 사원이 돼 남방불교의 거점이 됐다. 이것이 스리랑카 상좌부의 분별설부(分別說部, Vibhajjavadin) 기원이다(BC 3세기). 이처럼 스리랑카에는 불교가 별다른 저항 없이 처음부터 왕실의 지원으로 정착됐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순조롭게 불교가 발전하던 스리랑카에 BC 1세기 무렵 불법(佛法)의 단절이 우려될 만큼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됐다. 싱할라왕조가 세운 최초의 도읍지 아누라다푸라는 남인도 타밀족(Tamil族)의 거듭되는 침략으로 말미암아 큰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당시 국왕인 왓따가마니 아바야(Vattagamani Abhaya, 재위 BC 43~17)는 타밀의 침략을 받아 한때 아누라다푸라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와신상담 14년 만에 아누라다푸라를 되찾고 왕좌에 복귀했지만 백성들의 삶은 비참했다.

   그런데 왓따가마니 아바야왕은 자이나교 사원을 부수고 거기에 새로 아바야기리 비하라(Abhayagiri Vihara, 무외산사(無畏山寺)를 건립해 마하팃사(Mahatissa) 장로에게 기증했다. 이때 마하팃사는 동조자와 함께 아바야기리 비하라(無畏山寺)를 근거로 새로운 상가를 조직했다. 이리하여 스리랑카 불교는 전통과 계율을 중시하는 대사파(大寺派)와 자유주의적 색채가 강하고 계율을 덜 중시하는 무외산사파(無畏山寺派)로 나누어지게 됐다.

   대사파는 상좌부계통 분별설부불교를 고수했는데 비해, 무외산파 마하팃사 장로는 계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등 기존의 상가 입장으로 봤을 때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대사파는 무외산사파를 견제하고 경원하게 됐다. 이렇게 돼 이후 아바야기리 비하라 승단(무외산사파)과 상좌부 전통을 고수하는 마하 비하라 승단(대사파) 사이는 대립 경쟁 관계를 형성하며 팽팽한 긴장감이 지속됐다. 이런 관계가 부정적인 면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부파의 발생과 오랜 갈등은 상좌부계를 더욱 단결시키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그런데 전술한 바와 같이 이 무렵 스리랑카는 이민족의 침략에다가 엎친대 덮친 격으로 심한 가뭄까지 들어 기근이 극에 달했고, 나라 전체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굶주린 백성들이 급기야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수천 명의 백성과 승려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감으로 해서 많은 사찰들이 버려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1세기 전후의 스리랑카는 외부의 침입과 기아로 발생한 시대적 불안감으로 불법의 단절이 우려될 만큼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2) 제4차 불전결집(알루비하라 결집)과 <빠알리어 삼장>의 편찬

 

     ① 제4차 불전결집(알루비하라 결집)

 

   이와 같은 시대 상황에다가 무외산사파의 저항까지 결합돼 대사파에서는 상좌부 법맥이 흔들리는 극한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상좌부불교를 지키기 위해 사상 최초이자 최대의 불전 편찬사업을 실행하게 됐다. 즉 정법이 왜곡되고, 불법이 잊히는 것을 방지하고자 암송에만 의존하던 불법의 전승을 문자로 남기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립과 어지러운 환경 속에 불교 최초의 경전 ‘패엽경(貝葉經)’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낳게 됐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2000여 년 전, BC1세기 당시 스리랑카에는 국내외의 혼란과 흉년에 의한 기근 등 엄청난 시련이 있었기에 자칫 부처님 가르침을 잃어버릴 것을 염려해 그런 시련 속에서도 경전편찬 작업에 착수 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 고려시대에 몽고침입으로 힘든 고통 속에서 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상황과 비슷하다 하겠다.

   그리고 이 사업의 전개를 위해 대사파에서는 먼저 제4차 불전결집을 단행했다. <마하밤사(Mahavamsa)>에 따르면, 마힌다(Mahinda) 장로 일행이 스리랑카에 불법을 전한 후 150여 년이 지난 BC 1세기 중반에 다시 경전편찬회의를 개최하게 됐는데, 남방권에서는 이를 ‘제4차 불전결집’으로 공식화하고 있다. 이 편찬사업이 당시 스리랑카의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서 남쪽으로 100여 킬로 떨어진 마탈레(Matale) 지역의 알루비하라(Alu Vihara, 알루위하라) 석굴사원에서 열렸기 때문에 이 경전 편찬회의를 ‘알루비하라(Alu Vihara) 결집’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편찬회의는 마하테라 라키타가 주재 하고, 상좌부계통 분별설부교의를 고수하는 500명의 학승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이들은 7년에 걸쳐 네 차례의 결집을 통해 그때까지 스리랑카에 전해오던 상좌부계통 분별설부의 모든 교의를 총망라한 경(經) ‧ 율(律) ‧ 론(論)의 <빠알리어 삼장(三藏), Tipiṭaka>을 완성하고,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빠알리어 삼장 일체를 종려나무 잎을 말려 거기에 문자로 기록했다. 이로써 불교사상 처음으로 완성된 <빠알리어 대장경>이 조성된 것이다.

               

                                알루비하라 사원

 

   이렇게 해서 스리랑카의 알루비하라(Aluvihara)에서 <빠알리어 삼장>이 문자화 되고 이를 종려나무 잎에 적은 것을 패엽경(貝葉經)이라 하는데, 알루비하라 사원에는 패엽경 제작을 위해 조성된 동굴이 14곳이 있었다고 한다. - 현재는 두 곳만이 온전하게 보전돼 있다. 그리고 제작된 패엽경은 알루비하라(Aluvihara)사원의 석굴에 보관했다.

       ※패엽경(貝葉經)---고대 스리랑카에서는 야자수나무(종려나무/多羅樹) 잎을 말려 그 잎을 종이 대신 사용했다. 외떡잎식물인 야자나무 잎은 바탕이 곱고 뻑뻑하며 길고, 잎맥이 나란하며 섬유질이 많아 편편하면서도 질기다. 또한 습기를 잘 빨아들이지 않으므로 자연 상태에서 거의 썩는 경우가 드물어 당시로는 종이 대신 최적의 재료였다.

글을 쓰려면 말려서 일정한 규격으로 자르는데, 너비 6.6cm, 길이 66cm 정도 크기로 잘랐다. 글자를 새길 수 있는 이 나무 잎을 산스크리트어로는 ‘파트라(pattra)’인데, 파트라를 중국 한자로 번역한 이름이 패다라(貝多羅)이다. 패다라에 송곳이나 칼끝으로 글자를 새긴 뒤 먹물을 먹인 다음 닦으면 글씨가 선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자른 패다라 잎 끝 두 군데에 구멍을 뚫어서 몇 십 장씩 꿰매어 묶어 책으로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패엽경은 각각 경전, 계율, 논장으로 나누어져서 3개의 광주리에 보관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서 ‘바구니’라고 하는 의미의 ‘장(藏, pitaka)’이라는 용어를 쓴 것에 유래해서 <대장경>이라 할 때 바구니 장(藏)이란 글자를 쓴다.

   원래 인도와 마찬가지로 스리랑카에서도 불법을 구전으로 전승됐다. 비구들이 모인 집회에서 편집 정리된 성전을 함께 합송(合誦)해 - 외워서 그것을 불설로 승인함으로써 경전(經典)이 성립되는 형식이었다. 그렇기에 패엽경(貝葉經)의 탄생은 파격적인 결단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아바야기리 비하라(무외산사파) 승단에 맞서기 위한 경쟁의 수단만은 아니었다. 당시 외적의 침입과 최악의 기근으로 인해 자칫 전승되던 불법이 산실될 우려마저 있어 붓다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대사파(大寺派)의 결단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무외산사파(無畏山寺派)AD 1세기에 대중부, 그리고 AD 3세기에는 대승불교를 각기 받아들여 대사파와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상좌부계통의 대사파 출가자들은 대승불교운동을 일종의 ‘불교타락’으로 봤다. 그리하여 <빠알리어 삼장>에 들어 있지 않은 내용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으로 간주해 배척했다. 그리고 그들의 상좌부불교가 대승불교로부터 오염될 것을 걱정해 <빠알리어 삼장[패엽경]>과 주석서 원본을 잘 보존하기 위해 빠알리어 경전을 일단 싱할리어로 번역해 가두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싱할리어 문자로 기록한 <빠알리어 삼장>과 그 주석서를 수정 없이 고스란히 전승했기 때문에 원본의 훼손이 없었다.

   그리고 그 후 AD 4세기경 마하세나왕(Mahasena, 재위 334~362년) 집권 시에는 대사파를 탄압했기 때문에 무외산사파에 의한 대승불교의 황금시대가 오래 지속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사파는 이에 굴하지 않고 청정한 상좌부(분별설부)의 교학과 계율을 잘 유지했고, 결국은 대사파(大寺派)의 상좌부불교가 압도하게 됐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사라지고 스리랑카엔 초기불교가 고스란히 살아남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불경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싱할리어로 가두어둔 것이 수백 년간 그대로 지속되다가 스리랑카 내에 대승불교의 기세가 꺾이고 상좌부불교가 승리하면서 이를 다시 빠알리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전개했다. 즉 AD 5세기에 이르러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 4세기 후반~5세기 생존) 승려가 등장해 싱할리어로 된 삼장인 패엽경을 도로 빠알리어(Pali)로 번역하고 주석서를 썼다. 그리고 그의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도 바로 이때 집필했다. 이리하여 스리랑카의 상좌부불교는 AD 5세기에 미얀마로 전래 됐고, 미얀마에 의해 다시 태국 등 동남아 일대에 전파됐다. 이렇게 해서 남방 상좌부불교가 오늘날까지 번성하게 된 것이다.

   붓다고사는 인도에서 태어나 출가한 후 마하나왕(재위 409-431) 때 스리랑카로 건너왔다. 처음에는 그 당시 번창하던 무외산사(無畏山寺)에 머물렀으나 대사(大寺)파 쪽에 순수한 법통이 있음을 알고 그곳으로 옮겨와서, 싱할리어로 된 삼장을 도로 빠알리어로 번역하는 한편,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싱할라어의 서적들을 수집해 삼장에 대한 완전한 주석서인 <청정도론(淸淨道論)>을 빠알리어로 편찬했다. 이것은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고 기억이 용이하면서 시적인 정서를 느끼도록 노력한 하나의 작품으로서 그의 업적은 대승불교에서의 나가르주나(龍樹)에 버금간다는 칭송을 받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지금 보는 <빠알리어 삼장>은 원본 훼손 없이 부처님 당시의 원음을 그대로 보전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 후 AD 7세기말경 남인도에서 성립된 밀교의 한 흐름이 스리랑카에서 전해져서 스리랑카가 한때 밀교의 중심지로까지 발전해 전통적인 상좌부불교가 몰락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밀교의 신비주의는 결국 종교계를 혼돈의 상태에 빠뜨리기까지 했다. 이에 밀교는 무지한 이들이 믿는 가르침이라 해 거센 비판에 부딪치게 됐다. 이리하여 국왕 비자야바후 1세(재위 1059~1113)가 미얀마의 상좌부 장로를 초청해서 어지럽던 스리랑카 불교를 다시 상좌부 법통으로 잇게 했다.

   결국 12세기에 이르러 스리랑카는 마힌다 장로로부터 전래된 정통 상좌부계통의 대사파(大寺派)로의 회귀를 택했고, 1200여 년간 대립 긴장 관계에 있던 아바야기리 비하라 승단(무외산사파)도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이와 같이 스리랑카와 미얀마 등은 서로 자국 불교가 쇠퇴하면 이웃나라 장로를 초청해 법통을 잇는 관계였다. 이것은 같은 상좌부 불교로 원형에 가깝게 하고자 노력하는 부파를 고수하는 나라이므로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만큼 불교 법통을 존중했기 때문에 붓다고사(Buddhaghosa) 같은 승려가 등장할 수도 있었다.

 

3. 남방불교의 특징

 

    ① 소의경전---상좌부계통의 팔리어 경(經)ㆍ율(律)ㆍ론(論)의 삼장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어서, 반야경, 화엄경, 법화경 등 북방의 대승경전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② 신앙대상---남방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은 오로지 고타마 붓다(석가모니)만이다. 따라서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혹은 관음보살, 문수보살과 같은 여래나 보살은 남방불교에는 없다.

    ③ 지계(持戒)---계율을 엄수하는 초기불교 이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출가자 중심의 교단조직을 형성하고 있다. 지계(持戒)가 엄격한 비구는 사회적으로 큰 존경을 받고 있으며, 특히 태국에는 남자는 일생에 한 번은 출가수행승이 돼야 한다.

    ⑤ 비구니 교단---비구니 교단은 11세기경에 그 맥이 끊긴 채로 단절됐으므로 남방불교권에서는 여승이 없다.

    ⑥ 테라와다불교---소승불교라는 말은 부파불교시대 인도에서 대승불교운동이 흥기할 때 처음 등장했다. 당시 대승불교도들은 그 이전의 불교, 즉 부파불교의 실천법을 경멸해 소승불교란 이름을 붙인 잘못된 것이다. 현대의 남방불교 국가들은 북방불교권에서 저들을 소승불교라 호칭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남방불교권에서는 스스로를 '테라와딘(Theravadin)'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테라와다(상좌부)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들 테라와딘, 즉 남방불교도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초기 근본불교의 정통성을 순수하게 지켜왔다는 자부심이 강해서, 오히려 대승불교를 변질된 불교로 생각하고 있다.

    ⑦ 출가자 중심---남방불교는 고대로부터 타 종파의 불교를 훌륭하게 막아냈고, 재가불자들이 현실 신앙생활 문제를 잘 해결해주었으며, 현재도 재가자들이 해결해주고 있기 때문에 승려들은 경제적 어려움이나, 자신들의 생활에 대한 걱정 없이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다. 반면 민중은 스님을 존경하고 믿고 따르며, 기복적 행위 같은 비불교적 행위가 적다. 오랜 세월동안 초기불교의 순수성을 잘 지켜왔기 때문에 남방불교의 동남아 국가들은 비록 경제발전에는 뒤쳐져 있지만 종교적으로는 재가불자들이 바치는 정성으로 불교의 사회적 위상이 매우 안정적이다.

    ⑧ 스리랑카 불교 3대 보물---스리랑카의 3대 보물을 아는 게 남방불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 패엽경---알루비하라 사원에는 패엽경 제작을 위해 조성된 동굴이 14곳이나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두 곳만이 온전하게 보전돼 있다. 오늘날 알루비하라는 도서관과 학교 등을 갖춘 비교적 규모 있는 사찰이다. 알루비하라의 도서관에는 패엽경의 자료들과 제작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돼 있다.

그러나 2000년 전에 제작된 최초의 패엽경과 5세기 경 이곳에 머물며 주석서를 집필한 붓다고사(Buddhagosa) 스님의 저술 등의 원본은 1848년 영국과의 전투 도중 영국군들이 절을 파괴하면서 소각됐다고 한다.

       • 보리수---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아소카왕의 아들 마힌다 장로의 여동생 상기밋다(Sanghamitta) 비구니가 스리랑카로 올 때 부다가야의 보리수나무 남쪽 가지를 꺾어 와서 심은 것이 현재 남아 있는 세계 최고령 보리수나무인 스리마하보디트리(성보리수나무)이다. 이 보리수나무는 스리랑카 불교인들에게 살아 있는 부처님 분신으로 칭송되고 있으며, 불상, 법당, 탑과 더불어 중요한 신앙대상이 되고 있다.

       • 불치제(佛齒祭)--스리랑카 국민이 목숨처럼 아끼는 보물이 부처님의 왼쪽 송곳니이다. 이것을 왕궁의 담마차카라는 곳에 안치하고 일 년에 한번 무외산사로 옮겨 성대한 <불치제>라는 행사를 베푸는데, 불치보호장관(佛齒保護長官)이 있을 정도로 관리에 힘을 쏟고 있으며, 몇 개의 모조품을 만들어 과거 외국의 침입과 약탈 속에서도 진품만은 지켜올 수 있었다고 한다.

    ⑨ 남방불교의 수행체계---남방불교에는 부처님 당시에 계발된 수행체계가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남방불교는 북전불교처럼 교의의 확장 없이 초기불교교의를 고수하고 있어서 수행체계 역시 변형이나 확장 없이 초기불교 당시의 수행체계 그대로이다.

불교수행에서 명상은 결코 추상적인 과제가 아니라 붓다에 의해 그 완전성이 드러난 고(苦)의 해결 방법이다. 이것이 남방불교의 핵심이자 불법의 근원적인 정수이다. 남방 상좌부불교는 수행에서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를 잘 구별해 발전시켰다. 그리고 사마디(samadhi)와 쟈나(jhana, 禪那, 禪)의 수행체계도 특징적으로 발전시켰다. 따라서 오늘날엔 불방불교권에서도 남방불교의 수행에 관심을 기울여 배우고 있다.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큰 차이는 자기를 돌아보는 수행법이 얼마나 발전해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 같은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선(禪)수행이다. 불교의 선(禪)수행 중 남방 상좌부불교에서 전통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수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위빠사나(vipassana- 觀)이고, 다른 하나는 사마타(samatha- 止)이다.

       • 위빠사나(vipassana-觀) - 스스로를 돌아보는 수행에 있어서, 불교의 선(禪) 수행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이 선 수행 중 위빠사나는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 남방 상좌부 불교국가들에서 전통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수행법으로, 빠알리어 경전인 <디가 니까야(Digha Nikaya- 장아함(長部阿含)>의 <마하 사티파타나숫타>,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aya - 중부아함(中部阿含)의 <사티파타나숫타-염처경(念處經)> 등에 자세히 소개돼 있는 방법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실 때 직접 수행했던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위빠사나는 바른 관찰을 통해 자신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하며, 이 인식을 통해 집착할 것과 집착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방법으로, 이 깨달음은 스스로를 최고의 평온상태로 이끈다. 이 경에는 “존재의 정화를 위해,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올바른 도를 얻기 위해, 그리고 열반의 깨달음을 위한 길이 있다. 그것을 사념처(四念處)라 한다.”고 돼 있다.

염처 즉 사티(sati)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의미하며, 몸, 느낌, 마음, 법의 염처 네 가지가 있다. 사념처를 포함한 모든 수행의 단계를 37조도품(助道品)이라 해 37가지로 나타낸다. 이에는 사념처 ‧ 사정근(正勤) ‧ 사여의족(四如意足) ‧ 오근(五根) ‧ 오력(五力) ‧ 칠각지(七覺支) ‧ 팔정도(八正道)가 있다. 이 수행을 하는 스님들은 마을의 사찰이 아닌 숲속의 사찰에서 별도로 수행을 하는데, 웬만한 사원은 대부분 위빠사나를 수행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대개 하루 한 끼만 공양하는 일종식을 철저히 지킨다. 더욱 특기할 만한 것은 신도들이 준비한 공양을 가지고 스님들의 수행처까지 오는 것이 아니라 일주문 옆의 공양소가 따로 있다.

       • 사마타(奢摩他, 산스크리트어 빠알리어 śamatha) - 집중명상을 말한다. 어떤 대상에 고도로 몰입돼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집중명상은 주로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고착시키는 것이다. 집중이 깊어지면 사마디(Samadhi, 三昧)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사마디는 집중의 대상과 완전히 하나가 돼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없어지고 심지어는 대상이나 대상을 인지하는 의식마저도 알지 못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의역해 지(止), 적정(寂靜) 등으로 번역한다. 사마타란 모든 분별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허망함을 깨달아서 그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마음이 적정(寂靜)한 상태가 돼, 사념망상(邪念妄想)이 일어남을 막고 마음을 한곳에 집중해 산란을 멈추고 평온하게 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삼매에 들어 온갖 번뇌와 망상을 그치므로 '지(止)'라고 번역한다. 이에 유사어가 적정(寂靜)이다. 위빠사나 수행법 이전부터 있었던 인도의 정신집중수행법으로 위빠사나가 관수행법(觀修行法)이라면 사마타는 지수행법(止修行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합쳐 지관(止觀)이라 하며,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sana)은 흔히 병칭되고, 또 동일하게 보기도 하지만 초기불교에서부터 양자는 구별됐다. 남방 상좌부불교에서는 사마타(止)의 계발과 위빠사나(觀)의 구별이 잘 돼 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즉 지(止)와 관(觀), 선정과 지혜는 떨어질 수 없다. 집중과 관찰은 불도수행에 있어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사마타는 정(定)에 해당되고, 위빠사나는 혜(慧)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지관불이(止觀不二)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지관쌍운(止觀雙運), 정혜균등(定慧均等)이라고도 한다. 마음이 지(止) 상태에 이르면 오락가락 흔들리는 마음의 동요가 사라지고 고요해진다. 그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관하는 지혜가 나온다.

   이처럼 사마타를 통해 모든 것이 변화와 관계 속에 있음을 알게 되는데, 중생은 변화와 관계를 거부한 채 끊임없이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관계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자기 자신을 봄으로써 근본관계를 볼 수 있다.

 

4. 남방 상좌부(南方上座部)의 교학(敎學)

 

   불멸 이후 교단 내에 교의 해석에 이견을 보이면서 갈등을 빚어오다가 BC 4세기 보수파와 진보파로 근본분열이 일어났고, 이후 BC 3세기에는 지말분열로 교단이 20여개 파로 분립됐다. 이 시대의 불교를 부파불교라 하는데, 부파불교시대의 특징은 각부파가 경쟁적으로 교의연구에 치중한 나머지 아비달마(Abhidharma)불교를 발전시킨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남방 상좌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남방 상좌부불교는 부분적으로 나름대로의 특유한 이론을 개발하며 아비달마와 수행체계를 발전시켰다.

   1) 색법(色法)의 경우, 남방 상좌부에서는 색법(물질적 존재)을 사대종(四大種) 및 대종소조(大種所造)로 정의하고 있다. 사대종이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네 가지 원소를 의미하고, 대종소조란 이러한 네 가지 원소에 의해 합성된 제물질을 의미한다. 남전불교의 아비달마는 대종소조의 색(色)으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색(色), 성(聲), 향(香), 미(味), 남근(男根), 여근(女根), 명근(命根), 심사(心事), 단식(段食), 신표(身表), 어표(語表), 허공계(虛空界), 색(色)의 가벼움, 색의 부드러움, 색의 적응성, 색의 적집, 색의 지속, 색의 노성(老性), 색의 무상성 등 24가지를 들고 있다.

   처음 다섯 가지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은 시각기관, 청각기관, 후각기관, 미각기관, 촉각기관의 오관(五官)이며, 색(色), 성(聲), 향(香), 미(味)는 오관 중 앞 네 가지 안(眼), 이(耳), 비(鼻), 설(舌)의 대상을 말한다.

   명근(命根)은 생명적 기능의 근본이 되는 것, 심사(心事)는 마음의 자리로 생각되는 심장이다. 단식(段食)이란 입으로 섭취하는 음식물을 영양분으로 삼아 육체를 지탱, 유지하는 작용을 말하며, 신표(身表)와 어표(語表)는 내심(內心)의 업(業)이 신체의 동작과 말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허공계(虛空界)란 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 가지 ‘색(色)의 가벼움, 색의 부드러움, 색의 적응성’은 색법이 공통적으로 갖는 변응성(變應性)을 말한다. 마지막 네 가지 ‘색의 적집, 색의 지속, 색의 노성, 색의 무상성’은 유위(有爲)이고, 무상(無常)인 색법이 공통적으로 갖는 성질(有爲四相이라고 함)로서, 생기, 지속, 변화, 소멸의 성질이다. 이것들은 말하자면 색법의 속성이지만 그 자체를 바로 색법이라고 생각했다.

   2) 마음(心)과 심작용(心作用)은 89가지로 분류했는데, 이것은 완전히 남방 상좌부의 독자적인 교설방법이다. 먼저 마음을 선(善), 불선(不善-惡), 무기(無記)로 나누어 보면, 선심 21, 불선심 12, 무기심 56가지 해서 도합 89가지이다.

   여기서 선심 21가지는 욕계선심 8, 색계선심 5, 무색계선심 4, 무루(無漏) 선심 4가지 해서 도합 21가지이다. 불선심 12가지는 탐심(貪心) 8, 진심(瞋心) 2, 치심(癡心) 2가지로 나눈다. 무기심 56가지는 이숙(異熟)과 오직 작용일 뿐인 유작(唯作) 등 크게 두 가지로 나누는데, 이숙은 모두 36가지이고, 유작은 모두 20 가지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위 내용을 이보다 더 세밀하게 나누는데, 이렇게 세밀하고 번쇄한 논의는 상식적인 내용이 아니고 전문적인 연구 없이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번쇄한 내용이다. 따라서 이러한 분석과 서로간의 관계에 대한 논구(論究)는 사람들로 하여금 쓸데없는 번삽함만 느끼게 했다. 무슨 필요에서 이런 세밀한 탐구를 했으며, 과연 과학적으로 합리적인 설명인지도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이것이 일반적인 아비달마 논서의 본래 형태이며, 아비달마를 왜 번쇄하다고 하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3) 24사연(二十四緣) - 인(因) ‧ 과(果)의 분류로서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에서는 6인(六因), 4연(四緣), 5과(五果)를 주장하지만 남방 상좌부에서는 <발취론(發趣論, 팟타나(Patthana)>이래 24연(二十四緣)을 주장하고 있다. 그 명칭도 남방 상좌부 특유의 것이 많은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번역어로 표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인연(因緣), ②소연연(所緣緣), ③증상연(增上緣), ④무간연(無間緣), ⑤등무간연(等無間緣), ⑥구생연(俱生緣), ⑦상호연(相互緣), ⑧의지연(依止緣), ⑨친의지연(親依止緣), ⑩전생연(前生緣), ⑪후생연(後生緣), ⑫수습연(修習緣), ⑬업연(業緣), ⑭이숙연(異熟緣), ⑮식연(食緣), ⑯근연(根緣), ⑰정려연(靜慮緣), ⑱도연(道緣), ⑲상응연(相應緣), ⑳불상응연(不相應緣), (21)유연(有緣), (22)무유연(無有緣), (23)거연(去緣), (24)불거연(不去緣).

   이처럼 번삽하게 나열하고 있으며, 명칭은 다르지만 뜻이 같은 것도 있고, 정연한 조직성이 결여돼 있다.

 

4. 남방 상좌부(南方上座部)의 논서(論書)

 

   북방불교에는 부파불교의 대표적인 논서로 대표적인 것으로 7론이 있는데, 남방 상좌부에도 7론이 조성돼 전하고 있다. 즉, ①법집론(法集論), ②분별론(分別論), ③논사(論事), ④인시설론(人施設論), ⑤계론(界論), ⑥쌍론(雙論), ⑦발취론(發趣論)이다.

   이들 7론은 BC 250년 무렵부터 BC 50년 사이 200여년에 걸쳐 성립됐는데, 북방과 달리 남방 상좌부에서는 7론을 단순한 논서가 아니라 성전으로 꼽는다. 그리고 7론을 거쳐 붓다고사의 <청정도론(淸淨道論)>에 이르러 하나의 완성된 사상체계를 실현했다. 이 이후 나타난 논서는 대개 난해하고 복잡한 <청정도론>에 대한 해석서들이다. 그런데 사실은, 팔리어 칠론(七論)의 성립연대가 확실치 않으며, 그 성립순서조차 분명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그리고 칠론 외에 <지도론(指道論)>, <장석론(藏釋論)>, <밀린다팡하(Milindapanha)> 등 세 가지 논서가 더 있다. 이것들은 아비달마 논서라고 할 수 없지만 내용상 아비달마적 경향을 띠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로서 특히 중요시 되고 있다.

 

    ① 법집론(法集論, Dhammasangani)---초기 팔리어 논서이고, 내용은 불교의 여러 주제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으므로 초기불교의 복잡한 사상을 공부하는데 꼭 필요한 설계도 역할을 제공해준다.

   제1장에서는 마음과 마음작용(心. 心所)을 다양하게 분석적으로 고찰했다. 이른바 89심(八十九心)이 여기서 설명되며, 마음작용으로서 40가지 정도가 언급되고 있다.

   제2장에서는 물질적 존재(色)를 한 가지 종류에서 11가지 종류로 분류해, 그것 역시 각각 다양하게 분석했다.

   제3장에서는 일체존재를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방법 22가지와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방법 100가지, 나아가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또 다른 방법 42가지, 도합 164문(門)으로 나누어 설했다.

   제4장에서는 앞장의 그것과 약간 다른 관점에서 다시 아비달마 논모 122문(門)으로 나누기를 시도하고 있다. 경의 논모(論母)라고 하는 이유는 <니까야>인 <장부경전>의 <상기티숫탄타, Sangitisuttanta>에서 언급되고 있는 술어 가운데 일부분을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점에서 볼 때 북전 논서의 <족이문족론(集異門足論)>과 비슷한 관계이다.

       ※논모(論母, 마띠까/mātṛkā)---불타법문의 취지나 요의를 추구하면서 다양한 경설을 널리 분별 해석(廣釋)하기도 하고 종합 정리하기도 했는데, 이를 논모(論母, mātṛka) 혹은 논의(論議, upadeśa)라고 한다. 또한 논점이나 주제를 기억하기 쉬운 방식으로 정리해 둔 목록과 열거되는 연구제목을 논모라 하기도 하며, 더러 논장(論藏)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② 분별론(分別論, 비방가/Vibhanga)---<법집론>을 보충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논서이다. 북전 <법온족론(法蘊足論)>과 비슷한데, 아함 가운데 주요한 교설을 뽑아 그것을 종횡으로 분석 고찰했다.

    ③ 논사(論事, Kathavatthu)---아소카왕 치하에서 단행된 제3차 불전결집에서 장로 목라리풋타 팃사(Moggaliputtatissa)가 논사를 설했다고 한다. 전체는 시종 문답형식으로 일관되며 주석서를 보지 않고서는 문답의 주객이 누구며, 이론(異論)을 주장하는 자가 어떤 부파 소속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상좌부의 정통설을 세워 다른 부파의 이설(異說)을 깨뜨린다고 하는 독특한 내용을 갖고 있다.

    ④ 인시설론(人施設論, Puggala pannatti)---이 논서는 불교경전 가운데 '사람'에 관해 언급된 부분을 추리고 정리해서 열 개 항목으로 분류해 설명하고 있다. '인시설(人施設)'이라는 뜻은 편의상 사람의 존재를 가정한다는 것이다. 불교교리는 무아설(無我說)을 표방하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인간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무아이고 오온가화합(五蘊假和合)의 존재이지만 우선 사람이라고 명칭하고 편의상 독립자존의 존재로 가정한다는 뜻에서 '시설(施設)'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 중에 언급되는 인(人)에 관한 용례의 집성을 '인시설(人施設)이라고 부르고 있다.

    ⑤ 계론(界論, 界說論, 다뚜까타/Dhatukatha)---‘요소(dhātu)들에 관한 가르침(kathā)’으로 번역되는 <계론>은 <법집론>을 보충한 논서이다. 여러 가지 법들이 무더기(蘊), 장소(處), 요소(界)의 세 가지 범주에 포함 되는가 되지 않는가, 관련이 있는가 없는가를 교리문답 형식을 빌려서 설명하고 있다.

    ⑥ 쌍론(雙論, 야마까/Yamaka)---논장의 모호한 심리현상에 관한 전문술어 중에 애매하고 잘못된 사용을 해결하기 위해서 결집된 논서이며, 문제 제기를 항상 쌍(yamaka)으로 하기 때문에 쌍론이라 했다. 즉, 전물술어나 문제, 개념들을 상반되는 두 가지 방식으로 대비해 논의함으로써 주요한 교설 가운데 나타난 용어의 의미. 내용을 여러 각도에서 대비하고 검토했다.

    ⑦ 발취론(發趣論, Patthana)---칠론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의 논서이다. 그 내용은 연기법의 가르침을 자세히 치밀하게 정리해 놓았다. 즉, 24연(二十四緣)에 대한 설명과 해석이다. 여러 가지 연(緣)은 아함경전 이래 여러 곳에서 설명되고 있지만 그것을 24연으로 정리해 설한 것은 이 논서가 처음이다. 현재 미얀마에선 가장 중요한 논서로 취급되고 있다.

   이 외에 특수한 세 가지 논전(論典)이 있다. 연대적으로는 대개 칠론 다음의 것(혹은 칠론 중 그 성립 연대가 늦은 것보다는 조금 앞선 것인지도 모른다)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 지도론(指導論, 넷티파카라나/Nettippakarana)---AD 1세기 전후 인물이라고 하는 캇차야나(Kaccayana)의 저서로, 경전 이해에 대한 입문서라고 할 만한 것이다.

     • 장석론(藏釋論, 페타코파데사/Petakopadesa)---이것은 지도론의 보유(補遺)라고 볼 수 있다.

     • 미란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 밀린다팡하/Milindapanha)---BC 150년경 서인도를 지배하던 그리이스인 왕 메난드로스(Menandros, 인도 이름은 밀린다/Milinda)와 불교의 나가세나(Nagasena) 장로 사이에 이루어진 불교교의에 관한 대론(對論) 기록으로, 다른 논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한역 대장경 안에도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이란 이름으로 전하고 있으며, 빠알리어 논전보다 오히려 더 오래된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그 원형은 기원전후 무렵에 성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경(經)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닌 일종의 교의학습서이지만 칠론처럼 번쇄하거나 형식적인 논의가 많지 않으며 실제적인 문제에 따른 풍부한 문답으로 매우 흥미 있는 문헌이다.

 

   이상의 세 가지 논서는 경장이나 논장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위치에 있지만 전통적으로 남방 상좌부에서 상당히 중요시하는 것이다. 미얀마의 상좌부 교단에서는 이 세 가지 논서를 모두 경장 중의 '소부(小部)'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 칠론(七論)에 대한 붓다고사의 주석은 현재 3부가 남아 있다.

     • 의정월론(義貞越論)---법집론(法集論)에 대한 주석서.

     • 제치론(除痴論)---분별론(分別論)에 대한 주석서.

     • 오론주해(五論注解)---오론(五論)에 대한 주석서.

이들 논서 모두 상당히 많은 분량으로서, 논서를 축어적(逐語的)으로 해석하면서 칠론 이후 발달한 학설까지 담고 있다.

     • 청정도론(淸淨道論, 비숫디맛가/Visuddhimagga)---붓다고사(Buddhagosa, 불음/佛音)가 AD 440년 경 저술한 <청정도론>은 칠론 이래 전개돼 온 남방 상좌부의 모든 교리를 하나로 정리해 조직적으로 설한, 바로 이 부파를 대표하는 가장 체계적인 논서이다. 붓다고사보다 200~300년 앞선 인물인 우파팃사(Upatissa)는 <해탈도론(解脫道論, Vimuttimagga)>이라는 저술을 남겼는데, 붓다고사는 그것을 기초로 증보해 이 논을 지었다. <해탈도론>의 원문은 알려지지 않지만, 다만 다소 변화를 받은 텍스트의 역본이 한역 대장경 가운데 전하고 있다.

   <청정도론>은 모두 23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계(戒), 정(定), 혜(慧) 삼학의 순서에 따라 붓다 교법을 실천의 도(道)로서 상세히 해설하고 있다. 즉 먼저 스스로 경계해 출가자로서의 생활을 올바르게 가다듬고(戒의 淸淨), 나아가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고요히 한곳에 집중하는 삼매 수련을 거듭함(定의 淸淨)에 따라 깨달음으로 향하는 깨끗하고 밝은 지혜를 획득한다(慧의 淸淨)고 하는 도(道)를 설하는 것이 이 논서의 요강이다. 그러면서 남방 상좌부 특유의 존재론이나 심리론, 인식론을 내포해 다채로운 아비달마적 논의를 전개시키고 있다. 또한 경 ‧ 율 ‧ 논 삼장에서 많이 인용한 것도 이 논서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런데 <청정도론>이 대저이기도 하거니와 대단히 복잡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그 후 남방 상좌부에서는 이를 간명하게 정리한 강요서(綱要書)들이 나타났다.

     • 입아비달마론(入阿毘達磨論)---이는 89심(八十九心), 52심소(五十二心所), 물질적 존재 4대종(四大種) 및 24소조색(二十四所造色)에 대해 운문으로 해설한 것이다.

     • 색비색별론(色非色別論)---이는 초보적인 입문서로서 산문으로 써진 소론이고, 이의 작자는 붓다닷타(Buddhadatta)라고 한다.

     • 체요략론(諦要略論)---이는 운문만으로 이루어진 <입아비달마론>과 마찬가지로 색(色), 심(心), 심소(心所), 열반(涅槃)에 대해 개설했고, 담마팔라(Dhammapala)의 저작이다. 이 작자는 주석가로서 초기경전에 대한 주석서을 지은 유명한 담마팔라와는 동명이인으로 그보다는 후대 인물일 것으로 추측된다.

     • 섭아비달마의론(攝阿毘達磨義論)---이의 저자 아누룻다(Anuruddha)는 9세기 이후 인물로 추측된다. 이는 후세까지 오랫동안 이 부파의 아비달마 학습 교과서가 됐던 것으로 그 명성이 대단히 높다. 산문으로 서술하고 운문으로 정리하는 방법에 따라 89심(八十九心), 52심소(五十二心所), 마음이 작용하는 14과정, 28색(二十八色), 여러 가지 실천항목, 12연기(十二緣起), 24연(二十四緣) 등 남방 상좌부 아비달마의 주요학설 전반에 걸쳐 간결하고도 정연하게 해설하고 있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

※ 이 글을 작성함에 있어서 마성 스님, 무비 스님, 무여 스님, 일야 스님, 권오민 교수, 이태승 교수를 비롯한 많은 분의 글을 일고 인용했으며, 위키백과, 시공불교사전을 비롯한 많은 자료들의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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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amisan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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