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 불설 ‧ 비불설(大乘佛說‧非佛說)>
관음보살
1.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이란
대승비불설이란 대승경전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불교역사에 나타난 대승불교교의에 대해 불설(佛說) ‧ 비불설(非佛說) 논쟁은 대승경전 성립과 더불어 이미 설왕설래했었다. 인도에서 아직 부파불교가 한창이던 시절, 부파불교에서의 교의해석방법에 대한 반항으로 BC 1세기경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AD1세기경 대승경전이 조성되기 시작하자 이에 대한 불설 ‧ 비불설 논의가 꾸준히 제기 됐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증거가 대승 경(經) ‧ 논(論)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대승경전이 출현할 당시 그것이 비불이라며 부파불교 상좌부계통에서는 대승불교 주장이 자기네의 경 ‧ 율 ‧ 론 3장 안에 들어오는 것을 당연히 막았다. 반면 대승교단은 자신들의 경전이나 논장을 통해 대승불교가 불설임을 주장했다. 즉, 용수(龍樹, 나가르주나, AD 2~3세기)의 시대를 지나 무착(無着, Asanga, AD 4세기 후반)의 시대에도 <섭대승론(攝大乘論)> ‧ <성유식론(成唯識論)> ‧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 <대승장엄론(大乘莊嚴論)> 등 논서들을 통해 대승불교가 불설임을 논증해야 했는가 하면, 4세기경에 성립된 <해심밀경(解心密經)>에서는 부처님이 초기경전에서 아뢰야식(제8식)에 대해 말하지 않은 이유는 아뢰야식은 깊고 미세해, 어리석은 범부들이 ‘아(我)’로 집착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하고 있다. 따라서 부처님이 초기경전을 설하고 나서 대중의 근기가 성숙됐었을 때 중관(中觀) ․ 유식(唯識) 등을 말씀하셨다는 것이 대승교단의 주장이었다. 이렇듯 대승경전이나 논서를 통해 대승불교 초기는 물론 유식학이 한창이던 시기까지에도 대승교설이 불설임을 주장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반증해 주고 있다.
한편 중국에는 처음부터 대승불교 중심으로 불교가 발전해서 실제적인 신앙은 대승뿐이었으므로 오히려 대승경전이 부처님의 진설(眞說)을 전한 것이요, 소승은 저열(低劣)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중국불교에서는 대 ․ 소승 논쟁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한국불교나 일본불교는 처음부터 대승경전을 부처님의 진설로 인정해 대승이 불설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중국 위진남북조시대(魏晋南北朝時代: 220-589)를 전후해서 물밀듯 쏟아져 들어온 불경과 중국 내에서 생산된 불전을 분류하는 과정에 중국에서 찬술한 위경(僞經)과 의경(疑經)을 분류하는 연구가 4세기경부터 진행됐다. 특히 6~7세기에는 소위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 해서 중국으로 수입된 불교경전들에 대해 비록 억지 주장이긴 했으나 자기들 종파 나름으로 기준을 세워 경전의 비중을 다루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인도에서 만들어진 경전은 일단 진경(眞經)이라는 관점 아래 중국에서 제작된 위경을 솎아내는 작업을 했다.
이렇게 해서 입증된 위경에는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우란분경(盂蘭盆經)>, <관음삼매경(觀音三昧經)>, <고왕관세음경(高王觀世音經)>,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천지팔양신주경(天地八陽神呪經)> 등 불자들이 즐겨 독송한 경전들이 대거 포함돼 있었다. 더구나 동아시아 불교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능엄경(楞嚴經)>, <원각경(圓覺經)>,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들마저 위경 또는 의경에 해당한다고 했다. 특히 이들 셋은 선종사상(禪宗思想)의 밑바탕을 형성하고 있는 문헌들이고, 이를 소의경전 삼아 신행활동을 한 불자들이 많은데, 이를 위경이라 함은 심대한 영향을 줄 일이지만, 경전 자체의 비중에는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 큰수레
이와 같이 중국 나름으로 위경과 의경을 분류하는 작업을 했으나 대승불설ㆍ비불설을 따지는 입장의 교상판석이 아니라 ‘대승불설’이라는 입장을 전제해서 행해진 것이고, 대승비불설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룰 여건도 능력도 당시 중국에는 없었다. 또한 그만큼 중국불교에서는 위경에 대한 거부감이 미약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 근세에 와서 나타난 대승비불설은 18세기 일본에서 도미나카 나카모토(富永仲基, 1715~1746)가 제기한 주장이 유명하다. 그는 대장경 전반에 걸친 검토를 마친 뒤, 불전을 문헌학적으로 비평해 대승비불설을 주장했다. <출정후어(出定後語)>라는 자신의 저술을 통해 대승경전은 <아함경(阿含經)>을 바탕으로 조금씩 첨가해 이루어진 가상설(加上說)이라 했다. 따라서 대승경전은 소승경전에서 첨가된 것으로서 불설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책명은 ‘정(定)에서 나온 후에 말한다.’는 뜻으로, 부처님이 좌선을 끝내고 설법을 시작했음을 뜻한다. 책 내용은 석가모니불 이전에 있었던 외도(外道)와 불교가 시작된 이후의 경전을 소개하고, 부처님의 여러 가르침과 설법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리하여 도미나카는 부처님이 직접 설법한 것은 <아함경(阿含經)> 중 일부라고 주장하고, 그것도 부처님이 입멸한 지 오랜 기간이 경과한 약 500년 뒤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구송(口誦)으로 전해진 것만이 가장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불교교리에 나타나는 여러 문제를 비판하고, 불교사상을 유교와 도교사상과도 비교 대조했다.
도미나카는 꽤 영민했던 모양이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그의 인생은 평탄하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해 여기저기 전전하다가 사찰에서 행사 중이던 대장경간행사업에 종사하게 된 계기에 이런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불교를 몰랐기 때문에 아무런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이 없어 이런 발견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품삯을 받고 일하는 입장이었지만, 불경에 깊이 빠져들었고, 소위 남방 소승불교로 전해진 초기경전과 대승경전 흐름이 다르고 사상적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도미나카에 의해 제기된 대승비불설은 당시 일본불교계를 발칵 뒤집어놓았고, 가히 폭탄선언이라 하기에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이 책이 발표되자 많은 승려들이 반박문을 발표하는 등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고, 그의 학설을 뒤집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대승비불설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로 인해 도미나카가 피살됐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배불론자(排佛論者)들에게는 매우 인기를 끌었으며, 유학자들과 국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어 불교를 비판하는 문헌이 속속 출간됐다. 저자의 전기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16세에 중국사상 발전에 대한 연구서 <설폐(說弊)>라는 책을 저술할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과거에는 정보통신의 한계 때문에 인도에서 찬술된 대승경전 내용을 모두 역사적 사실이라고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학문의 발달로 대승경전은 부처님 친설(親說)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한 것으로 규명됐다. 그리하여 현대학계에서 대승비불설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실 “부처님은 보살을 알면서도 대중의 근기 때문에 설하지 않으셨고, 대승경전 편찬자들은 삼매 속에서 보살들을 만나 설법을 들었다고 한다.”라고 하든지, “부처님께서 일체지자로서 3세의 모든 실상을 밝혔다고 하지만 그래도 시대상황이 달라 이후시대에 이르기까지 그에 해당하는 미처 다하지 못한 말씀이 있었다. 그래서 부파불교시대 그리고 대승불교에서 그런 시대에 맞게 부처님 말씀을 확장할 필요가 있어서 대승경전이 등장한 것이다.” 이렇게 다소 궁색한 변명 외에는 답이 없었다. 그렇다고 대승을 불교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승경전이 부처님 친설(親說)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철(性徹) 큰스님조차 “대승은 역사적으로는 비불설이지만, 사상적으로 진정한 불설”이라고 하셨다.
따라서 지금에 있어서는 대승비불설을 수긍하고,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며, 대승경전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고, 대승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엄정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문제를 전제로 해서 대승불교의 흥기와 대승경전의 성립, 그리고 이에 관련된 대승비불설 등에 대한 논의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특히 대승불교의 성립과 대승경전의 편찬은 대승비불설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므로 이에 대한 검토에 중점을 둬야 하겠다.
누구나 불교에 관심을 가진다면 한번은 거처가야 할 혼란스러운 과정이 대승비불설이다. 이로 인한 충격도 있지만 이로 말미암아 한발 나아가게 됨도 사실이라 하겠다. 그것은 개인에게나 불교 전반에 대해서나 마찬가지이다. 진통 없는 성장이 없는 법, 이러한 과정을 거침으로써 개인적인 신앙과 정신적 성숙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고, 대승불교를 보는 시각도 달라질 것이다.
문제는 불교를 신행하는 불자들이 즐겨 읽는 <금강경>, <반야심경>, <천수경> 등의 대승경전과 불교신자들이 광범위하게 믿고 의지하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과 같은 보살사상이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됐을 때 나타날지도 모를 정신적 충격과 공황상태이다. 대승이 모두 창작이고 조작이며 한 마디로 거짓이라면, 천 년이 넘는 역사 속에 대승의 진리로 이루어진 수많은 성취자와 수행자의 깨달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를 무시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많은 관심 있는 인사들이 대승비불설이 사실이라면 대승경전을 소의(所依)로 한 종파는 붕괴할 것이라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아시아, 적어도 우리나라에 있어서 그것은 큰 유견(謬見)이며, 반대로 대승비불설은 대승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 성숙을 발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오히려 이러함에 미온적인 대처나 고의적인 회피는 신행이나 교의발전에 지장을 줄 것이다. 다만 이러한 논의가 편협한 일방적인 주장이나 악의적인 비판들로 인해 본질이 왜곡될까 염려스러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2. 대승불교 흥기의 배경
(1) 부파불교(部派佛敎)
부파불교란 BC 5세기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100여년이 지난 그 이후 약 3~400년에 걸쳐 인도 불교교단에 분열이 일어나서 형성된 여러 부파들의 불교를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에는 부처님 가르침이 문자에 의한 체계적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전(口傳)에 의한 암송으로 전승됐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불멸 이후 불교교단은 부처님 교설을 일정한 형태로 정리 보존하고자 공식적인 합의를 거처야만 했다. 그것을 ‘불전결집(佛典結集)’이라고 하는데, 불멸 직후 마하가섭(摩訶迦葉) 존자를 비롯한 부처님 직제자들에 의해 제1차 불전결집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불멸 후 100여년이 지나면서 불교가 광범위하게 전파됨으로써 승가(僧伽)가 확대되고 비구의 수도 늘어났으며, 사회환경도 달라짐에 따라 사고방식에도 차이가 생겼기 때문에,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오던 기존교의와 율장만으로는 대처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율전(律典)과 교리해석문제로 교단에 의견대립이 일어났고, 그것이 확대돼 전통을 고집하는 보수파와 변화를 수용하자고 하는 진보파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특히 신도들로부터 금전(금화, 은화) 시주를 받아도 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야사(Yasa, 耶舍) 비구를 중심으로 한 서인도지역 장로들과 동인도지역 젊은 비구들이 동인도 베살리(Vēsalῑ, 毘舍利, 비사리, 웨사리)라는 도시에서 충돌한 결과 교단이 양분됐다. 이때 교단은 보수적인 장로집단인 상좌부(上座部, 팔리어 Theravada, 범어 Sthaviravdin)와 진보적인 젊은 비구집단인 대중부(大衆部, 팔리어 Mahasamghika, 범어 Mahāsangika)로 나뉘었다. 이와 같이 불멸후 100여년(BC 4세기)경에 불교공동체 내에 계율(戒律) 문제로 일어난 최초분열을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 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상좌부 장로비구들에 의해 베살리에서 제2차 불전결집이 이루어졌다. 제1차 불전결집에서 경(經)과 율(律)이 정립됐으나 율전(律典)에 문제가 생겨 제2차 불전결집에서는 주로 계율(戒律)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번 갈라진 교단은 불멸후 200년 무렵(BC 3세기)이 되자 먼저 대중부 내에서 교의해석에 대한 이견으로 다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좌부는 분파 후 한동안 화합하고 있었지만, 결국 상좌부에도 분열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상좌부와 대중부 내에 일어난 내부분열을 지말분열(枝末分裂)이라 한다.
이렇게 해서 불교교단은 불멸후 100년 무렵부터 시작해, 이후 3~400년 사이에 점차 20여개 부파로 분열됐다. 이러한 교단분열시대의 불교를 부파불교라 하는데, 부파불교는 이후 계속 성장발전해서 AD 4세기에 이르러 교의체계가 완성되고, 그런 후 AD 7세기 밀교(密敎)의 성장기까지 존속하다가 사라졌다. 이러한 교단분열 시기의 불교를 부파불교, 혹은 소승불교, 아비달마(Abhidharma)불교라고 한다.
(2) 부파불교(部派佛敎)의 특징
20여개 부파로 갈라져서 서로 경쟁하며 전개된 부파불교에는 나름대로 특징이 있었다. 이러한 부파불교의 특징이 대승불교흥기의 동기가 되기도 했으므로 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런데 부파불교 대중부계가 후년 대승불교흥기의 모체가 됐으므로 부파불교 특징이라 하면 당연히 부파의 주류를 이루었던 상좌부불교의 특징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그런데 남쪽으로 전파된 실론상좌부(분별설부)가 충실히 불교전통을 고수하고 있었으나, 인도본토에서는 상좌부의 맥이 끊어진 반면 상좌부 내의 한 분파인 설일체유부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비교적 일찍 상좌부에서 지말분열을 해 독립했으며, 서북부의 간다라와 카슈미르지방에서 부파불교를 대표할 만큼 세력이 컸다. 설일체유부는 여러 부파 가운데 가장 많은 아비달마 논서를 생산했고, 학문적으로 가장 강력한 부파였다. 따라서 각부파마다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나 대체로 각부파의 공통된 특징을 논의하며, 특히 설일체유부를 중심으로 해서 부파불교의 특징을 검토하고자 한다.
① 부파불교는 이론중심의 아미달마(Abhidharma)불교였다.
분열된 각 부파는 저마다 구전의 가르침[아가마(Agama)-아함(阿含)]을 불경으로 고정시킨 뒤, 이를 각 부파에서 이론적으로 해석함에 따라 교의를 조직화 내지 체계화했다. 이 정밀한 교의체계를 아비달마(阿毘達磨, 또는 阿毘曇, abhidharma)라고 한다. 즉, 교조 붓다의 법(dhamma)에 대한(abhi) 설명과 주석을 아비달마라 하는데, 이렇게 해서 생산된 논서의 집적을 논장(論藏, Abhidhamma-piṭaka)이라 했다. 그리하여 부파불교의 노력으로 드디어 경(經) ‧ 율(律) ‧ 논(論) 삼장(三藏)이 성립되기도 했다.
그런데 아비달마논서들은 지나치게 형식적이며, 너무 사소한 문제에 관한 논의가 많았다. 술어를 독특하게 해석, 정의하는가 하면, 여러 가지 개념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극단적일 정도의 자세한 분석적 고찰이나 개개의 문제에 대한 전문적 연구 등이 두드러지게 발달했다. 이와 같이 아비달마는 아가마(Agama)경전의 어구에 집착하거나, 분석적, 형식적인 해석에 치우친 보수적 성향 때문에 사상의 청신함과 새로움, 발랄함을 잃어버린 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설법(對機說法, 방편설법)에 의해 단편적, 비체계적으로 설해진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불교의 기초적인 관념을 추출하고, 이를 장대한 사상으로 조직화하고 체계화한 것은 확실히 아비달마논사(論師; 비바사사/毘婆沙師)들 공적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업적이 없었다면 이후 중관학파(中觀學派)와 유가유식학파(瑜伽唯識學派)와 같이 학문적으로 성숙한 대승불교철학의 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비달마는 단순히 <아함경(阿含經)>을 해석하거나 조직하는데 머물지 않고, 나아가 그러한 기초 위에서 장대한 교의체계를 구축했다. 아함경전 내용은 즉흥적, 우연적 요소가 많았던 부처님 교설을 불멸후 정리해 전승한 것이기 때문에 본래 짧고도 단편적인 경(經)의 집성이었다. 그러한 비체계적인 아함의 경설이 점차 정리되고 조직화돼 하나의 교의체계가 만들어졌다. 그 중 상당 부분은 불멸후 승단내부에서 점차로 발전한 아비달마적 연구에 의해 부가된 해석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렇게 부가된 부분[논(論)]이 점점 더 증대해 마침내 아함경전 속에 도저히 포함시킬 수 없을 만큼 확대됐을 때, 아함경전으로부터 분리 독립됐으며, 여기서 아비달마라고 하는 불교성전의 새로운 장르가 성립했다. 그리하여 아비달마는 당초 아함경전 속에서 발전되다가 순조롭게 발달해 마침내 아함경전의 연장적인 입장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나 서서히 새로운 형태의 논서(論書)를 만들어 내게 됐다. 그리하여 교설을 조직적으로 논술하는 웅장한 구성을 지닌 <구사론(俱舍論)>, <청정도론(淸淨道論)>과 같은 훌륭한 논서도 출현하게 됐다.
그런데 이와 같이 아비달마불교가 성립함에 있어서 논사들은 다양한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선택해 각각의 의미에 대해 상세히 해설하고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렸으며, 이를 정리할 필요성에서 일정한 체계로 틀을 짰다. 이때 가장 두드러진 방식은 관계있는 교설을 숫자에 따라 정리하는 방법으로 일법(一法), 이법(二法), 삼법(三法)과 같은 순서로 배열하는 방법과 동일한 주제를 한 곳에 모아 정리, 배열하는 방법이었다. 즉 삼법인, 사제, 육근, 육경, 팔정도 12연기라는 분류들도 원 가르침에는 평범한 언어로 상황에 따라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밖에 없었으나 부파불교의 논사들에 의해 숫자적인 개념으로 알아보기 좋게 새로 정의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불교를 체계화하고 자신들의 언어로 열반, 무루, 무상, 무아, 중도, 공, 삼법인, 사성제, 육근, 육경, 팔정도, 12연기 등과 같은 개념과 이론들을 구축해나가면서 이러한 단편적인 정의들이 부처님의 전체적인 말씀과 모순되는 현상을 가져오기도 했던 것이다. 즉 부처님 살아계실 때는 모든 것이 하나의 삶의 이치로 조화를 이루었으나 중생들이 자신들의 생각으로 이론화하자 서로 모순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과연 참된 정법이 무엇인지, 이에 대한 논의가 새삼 문제가 돼 서로 자기네의 교의가 부처님 원음이라고 우기게 되고, 나아가서 대승비불설 운운도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나오게 된다.
한편 이러한 아비달마불교는 지나치게 이론중심이어서 그것은 학자승려들의 몫이었지 대중들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접근할 수도 없는 전문적인 영역이었다. 이러함이 대중들로 하여금 불교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로 연결돼 대승불교 흥기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② 부파불교는 제자의 불교, 배우는 입장의 불교였다.
불교교단의 정계(正系)는 초기교단을 계승한 부파교단이었다. 그런 부파불교는 남에게 가르치는 입장의 불교가 아닌 수동적인 불교였다. 비구들은 자기수행의 완성에만 몰두한 나머지 대승불교로부터 성문승(聲聞乘)이라 불렸다. ‘성문(聲聞)’이란 부처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 즉 제자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부파불교 비구들은 자기완성을 목표로 했고, 중생구제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기도 했으며, 대승교도로부터 소승(小乘)이라고 폄하되기도 했고, 또한 대승불교 흥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③ 부파교단은 출가주의불교였다.
부파불교의 특징은 출가주의라는 점이다. 출가해서 비구가 되고,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수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따라서 재가와 출가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출가를 전제로 해서 교리나 승가체제, 수행형태를 조직했다. 따라서 속인들은 스님들 생활을 돕는 역할을 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이러함 역시 승가와 대중들의 거리를 멀게 한 원인이 됐다.
④ 부파교단은 비교적 재정이 넉넉했다.
부파교단은 국왕이나 왕비 또는 대상인 등의 귀의와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카스트(caste)제도를 엄격히 지키는 바라문교는 타국의 이민족이나 다른 계급과 자유로이 교제해야만 했던 상인들에는 맞지 않았다. 이처럼 국왕이나 대상인들 원조에 의해 승단은 생활걱정 없이 출세간주의(出世間主義)를 관철해 연구와 수행에 주력할 수 있었으며, 이로써 분석적이고 치밀한 불교교리, 즉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불교가 성립될 수 있었다.
⑤ 부파불교는 은둔적인 승원(僧院, 寺院)불교였다.
부파불교는 은둔적인 승원 불교(사원 불교)였다. 그들은 승원(사원) 깊숙이 숨어서 금욕생활을 하고, 학문과 수행에 전념했다. 따라서 가두의 불교는 아니었다. 승가(僧伽)가 점차 조직화되고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갖춤에 따라 출가자들은 재가신자들을 찾아다니면서 교화하고 걸식하는 생활을 하지 않게 됐다. 그들은 사원에 안주하며, 명상과 열반의 적정(寂靜)만을 추구하는 생활을 하고, 학문과 수행에 전념했다. 즉, 타인의 구제보다는 먼저 학문연구에 몰두하거나 자기수행의 완성에 열중했다.
⑥ 부파불교는 아라한(阿羅漢)의 불교였다.
부파불교에서는 오직 석가모니 한 분만을 부처님으로 인정했고, 아라한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했다. 여기에는 붓다를 존숭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범부가 성불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는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부파불교는 아라한과를 이상으로 삼았으므로 출가자들은 번뇌를 끊는 자기완성에만 주력했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의 이상적 종교상을 비좁게 만든 결과를 낳았다. 왜냐하면 붓다는 자기완성을 향한 자리행(自利行)과 일체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는 이타행(利他行), 양면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타행에 소극적이었다는 바로 이점이 부파불교의 큰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불타관(佛陀觀)에 대해서도 보수파(상좌부)가 어디까지나 인간이 불타가 됐다고 하는데 비해, 진보파(대중부)는 불타를 초자연적 존재의 화신(化身)으로 보며, 상좌부가 인간은 석존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해도 아라한(阿羅漢)은 되지만 불타는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비해 대중부는 보살의 도는 만인에 열려 있으니, 인간은 조건에 따라 불타도 될 수 있다고 해 대립했다.
⑦ 부파불교는 계율을 강조하고, 법 중심 불교였다.
부파불교는 승원 중심, 출가자 중심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계율이 강조됐다. 그리고 부처님이 정한 것은 무엇이든 정한대로 받아들이는 보존적 형식주의적이었다. 따라서 계율에 대해서도 시대변화에 적응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처님에 대한 존경이나 경외심은 한결같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인 경(經)에 대한 주석에 치중했기 때문에 자연히 불(佛) ‧ 법(法) ‧ 승(僧) 삼보 가운데서 법이 중심이 됐다.
이상과 같은 부파불교 특징들을 살펴볼 때 여러 장단점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부파불교는 이론 중심, 교리 중심의 불교였고, 대중구제에 소홀했던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이러함에 대한 반발이 대승불교 흥기의 계기가 됐다.
그리고 부파불교 성립 그 이후에 있어서 불교교리의 정립과 전파는 직제자들 몫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배운 제자들, 그리고 제자의 제자들 몫이 됐다. 그들은 붓다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전하기 위해 각 부파별로 자신들이 보고 듣고 이해한 것을 기초로 교리를 만들어 나갔다. 이것이 아비달마((阿毘達磨)였다. 그러나 그들은 법안(法眼)이 열린 것이 아니라 불교를 이론적으로 배우고 연구한 학승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정리하고 사유한 불교교리에는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의 습(習)이 묻어있었다. 또한 그들은 인도에서 태어나 힌두적 관념과 논리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그들이 불교를 정립하면서 만들어낸 아비달마이론 속에는 자연스레 관념적인 힌두교 논리가 침투해 있었다.
즉,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부파불교교리는 붓다의 생생한 깨달음의 원음이 아니라 부파논사들이 철학적 사유로 정리보완하고 취사선택한 이론체계였다. 초기경전을 <아함경>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아함(Agama)이란 말은 ‘전승된’이라는 뜻으로, 그 말처럼 각부파가 조성한 경전은 구전으로 전해진 불설을 부파논사들이 정리하고 체계화시킨 것이지 붓다 친설(親說)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각 부파별로 자신들이 전승해온 경전과 논리를 기초로 경전을 만들었던 것이어서 각 부파마다 정립한 경전들이 부파별 특징에 따라 내용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함이 원인이 돼 부파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승불교 흥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가마를 조직함에 있어서 부처님 친설이 아닌 것을 채택한다든지, 부파별로 그들의 특징을 내용으로 하고, 이를 기초로 논리체계를 세우는 등 훗날 대승불교에 의해 전개되는 행태가 이미 부파불교에서 그 징조가 나타나고 있었다. 즉, 대승불교에 의해 전개되는 여러 행태가 상당 부분 부파불교가 형성되던 행태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당시 상좌부를 근간으로 한 기존 부파불교는 승원을 중심으로 고도의 복잡하고 난해한 법(法)논리를 전개하면서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알 수 있는 철학적인 종교가 돼갔고 왕실과 귀족들의 지원 아래 엘리트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 재가 신자들과 개혁적인 대중부 승려들은 중생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권력과 유착해 일신의 안락함을 누리면서 추상적인 논란만 일삼고 있는 기존 승단을 비판하면서 부처님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 중생들의 구원을 위한 불교가 되자고 대중부를 형성하고 대승불교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 승려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소승'으로 공격하고 스스로를 '대승'이라 이름 하면서 경전을 편찬하고 대중적인 신앙운동을 발전시켜 나가게 됐다. 그리하여 그들은 당시 인도의 정치적 격동기를 틈타 다시 종교로 정립된 힌두교에서 믿음의 신앙을 받아들여 부처를 믿기만 하면 법을 몰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아미타불신앙을 발전시켜 나가기도 했다.
3. 대승불교의 흥기
(1) 상좌부와 대중부의 갈등
초기부터 부처님 법을 전통적으로 계승해오던 상좌부계통 기존교단은 원칙적으로 모든 것은 실체가 있다는 설일체유부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부처님 법은 깨달음으로 삼세를 보는 법안(法眼)을 얻어 인류최초로 세상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밝힌 것이기 때문에 신(神)을 섬기는 다른 종교나 관념으로 만든 주장과 달리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는 사실적인 법이며, 영원불변의 진리로 확신했던 것이다. 이러한 설일체유부의 교리는 부처님 제자 마하가섭(摩訶迦葉)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온 정통성 있는 교단의 기본체계로서 (초기)불교 그 자체로 인식됐다.
이들은 모든 것이 실재한다는 기본원칙 아래 불변의 자성(自性)을 가진 일체현상 간의 인과관계를 논하는 방대한 교리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교리의 바탕에는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라는 기본개념이 있었다. 즉, 모든 법(法)은 우리 삶을 유지 보존하는 근거로서 과거 ․ 현재 ․ 미래의 3세에 걸쳐 존재하는데, 이러한 법들이 3세에 걸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현상에 고유한 성질인 자성(自性)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일체유부가 일체를 유(有)라고 말할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이 변치 않는 성질인 자성이 있어 서로 간에 영향력을 주고받는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초기불교교단을 이끌어오던 정통성 있는 상좌부에서 교리를 총정리 해 실유적(實有的) 교리체계를 완성하자, 대중부 논사들은 이러한 상좌부의 실유적 입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그 중 가장 핵심적인 주제가 일체법(一切法)의 실체성(實體性)에 관련된 문제였다.
대중부는 보수적이고 계율에 엄격했던 상좌부에 비해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을 가졌다. 이들은 불교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전통에 얽매기보다는 개인의 사유와 논리를 중시했으며, 부처님 가르침에 근거한 사실적이고 과학적인 인과법(因果法)보다는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사유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들은 실유성과 인과법을 중심으로 한 상좌부교리에 대해 고도의 철학적인 힌두적 관념과 논리를 활용해 비판을 가했는데 힌두교의 마야(māyā-幻)사상 영향을 받아 일체법의 존재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이 실제로는 텅 비어 있는데 사람들이 착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고 했다.
이와 같이 대중부는 당시 최고의 철학적 사유를 자랑하는 관념적인 힌두논리를 불교에 들여오는데 적극적이었다. 대중부의 기본흐름은 부처님이 사실을 중심으로 한 완전한 인과의 이치를 제시한 것을 차원이 낮은 하위법이라 경시하고, 모든 것이 실체가 없다는 철학적 관념인 공성(空性)을 도입한 것이다. 오늘날 대중부의 공사상(空思想)이 힌두교의 마야사상과 연결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기존 부처님 법은 부처님이 실상을 보는 눈으로 밝힌 것으로 모든 것이 사실적으로 존재하며, 한 치의 어김없는 인과관계로 이루어져 있어서 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 속에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길과 해탈(解脫)에 이르는 모든 길이 있음을 가르친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부논사들은 이러한 실체법은 부처님이 방편으로 가르친 낮은 가르침에 불과하고 진실로 전하고자 한 고차원적인 가르침은 모든 것이 없다고 하는 공(空)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상좌부의 유(有)에 대한 공(空)이었다.
그러자 수백 년간 전통을 이어오며 부처님 법을 지켜오던 기존상좌부에서는 개방적인 젊은 논사들이 힌두교의 관념적인 견해를 담은 이론들을 부처님 정법이라고 말하며, 기존교리가 잘못됐다고 하니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상좌부에서는 대중부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부처님의 사실적인 가르침을 힌두교의 염세적 관념으로 변질시켜 정법을 훼손하려는 말법(末法)의 음모라고 이들을 배척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이들 아비달마가 구전으로 맥을 이어오다가 BC 3세기 아소카왕(Ashoka, 阿育王) 때 제3차 불전결집 이후 각부파별로 결집이 이루어진 논장들이 역사 속에 처음 등장했을 때, 그때는 이미 교리의 진화가 상당히 진행돼 있어서 두개의 정반대 교리가 불교계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하나는 부처님 이후 가섭 존자로부터 전통적으로 교리를 이어 내려온 고승들이 즐비한 상좌부 견해로 부처님이 깨달음의 눈을 얻어 세상의 실상과 사실 간의 인과의 이치를 밝혔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힌두교 영향을 받아 관념적인 철학성을 강조하는 진보적 개혁파인 대중부 주장으로, 그런 사실적인 가르침은 어리석은 중생들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고 진정한 가르침은 비의(秘義)로 전해진 고차원적이고 철학적인 공성(空性)이라 주장한 것이다. 문제는 이 두 부파의 주장이 부처님 법의 근본을 파괴할 만큼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며, 이는 그동안 부처님이 설한 법에 엄청난 변질이 있었으며, 부파 간에 치열한 교리투쟁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이 아소카왕 때의 제3차 불전결집을 계기로 매우 심각한 현상으로 나타났다. 최초로 인도를 통일해 마우리아왕조(Maurya dynasty)를 세운 아소카왕은 국론통일을 위해 당시 최고의 진리로 인정받던 불교를 국교로 정한 후, 제3차 불전결집을 후원하고, 최초로 조직 정리된 <니까야>로 교리의 통일을 기했다. 그리하여 기존상좌부의 사실적인 설일체유부 이론을 존중하고, 이에 반대하는 대중부승려들을 이단으로 규정해 모두 흰옷을 입혀 교단에서 쫒아냈다고 한다.
이들 쫓겨난 대중부계 비구들은 불교를 떠나지 않고 자신들을 받아 주지 않는 주류불교에 대항해 그들끼리 교단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대중부의 본격적인 출현이다. 이들은 비주류이기 때문에, 그리고 왕실의 탄압 때문에 기성교단과 달리 음성적인 활동을 많이 했는데, 이들의 영향으로 대승불교가 생겨나고 각종 대승경전들이 저자 없이 만들어진 이유가 여기에도 있었다.
불교는 모든 중생을 위한 종교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인간중심 종교이며, 인간을 구제하기 위한 종교이다. 그러므로 교리내용도 인간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인간의 선성(善性)과 악성(惡性) 그리고 진여성(眞如性) 등 깊은 성품까지도 설명함으로써 인간성의 내용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인 교리를 보다 조직적으로 확대 설명하는 데는 소승교리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해 또 다른 철학과 인간의 심성론이 대두하게 됐다. 이것이 AD 2세기 후반에 나타난 중관학(中觀學)과 AD 4세기경에 나타난 유식학(唯識學)이다. 중관학은 용수(龍樹) 보살에 의해 성립됐고, 유식학은 무착(無着) 보살에 의해 성립됐다. 다만 유식학의 시작은 AD 3세기경 미륵(彌勒, 마이트레야/Maitreya, 270~350)에 의해서 출발했다.
(2) 대승불교운동
BC 1세기 경, 초창기 대승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상공업이 발달한 도시, 특히 베살리(Vēsalῑ, 毘舍利)와 같이 경제력이 풍부한 도시를 토대로 한 대중부계통의 인사들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대승불교운동은 대체로 두 세력에 의해 일어났다. 하나는 재가자들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들 재가자들 세력에 대한 협조세력으로 부파불교에 불만을 가진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부파불교 내 일부 승가집단, 특히 대중부(Mahāsāṃghika)계통 승려들이었다.
그런데 당시 각 부파들은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경전인 <아함경>을 결집해 가지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로 그와 달리 부처님 참뜻을 나타낼 새로운 표현이 필요하게 됐을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승불교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설하려 했던 것인가, 그리고 <아함경>만으로는 이러한 대승이 지향하는 바를 다 표현할 수 없었다는 점, 이와 관련해 대승불교는 어떻게 흥기했는가 하는 문제에 결부된다.
아비달마불교가 지나치게 교리를 미세하게 다루다가 보니 일부부파에서는 부처님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예컨대 부파불교를 대표하는 설일체유부의 경우, 법체론(法體論)을 내세워 법체는 과거 ‧ 현재 ‧ 미래 3세에 항유(恒有)한다고 주장해 부처님의 무상 ‧ 무아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교의를 주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부파불교에 반발해서 대두된 대승불교는 공(空)사상을 바탕으로 부처님 당시 근본불교 정신의 회복을 지향하고 있었고, 대승경전(大乘經典)은 그 근간이 근본교설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므로 부처님 교설이 아니라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북방 불교권에서는 대승경전을 부처님 가르침, 내지 그 근본취지를 더욱 선양해 발전 확장시킨 것으로 파악하고 있어 이를 높이 숭앙했다.
초창기 대승불교운동에 있어서 승려집단은 수적으로 열세여서 대다수를 이루는 재가신자들을 지도해주거나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주는 형식으로 그들을 도우는 입장의 숨은 세력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이들이 전면에 나서서 활동을 하게 되고, 특히 용수(龍樹, Nagarjuna, 150?-250), 세친(世親, Vasubandhu, 320~400)과 같은 명석한 천재들이 앞장을 서면서 대승운동은 더욱 힘을 얻게 됐다. 따라서 승려집단의 주도적인 협조가 없었다면 화려한 그들의 교의나 대승경전을 확보해 당당하게 대승불교라는 거창한 현상을 일궈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인도내의 소수 개혁파인 대승론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학적으로 전개해 완벽한 이론체계와 관념체계를 갖추어가며 남몰래 경을 만들어 세를 확산해 나갔다. 그 결과 AD 1세기경에 반야계통의 대승경전이 나타났으며 AD 2세기경에 화엄경이, AD 4세기경에 법화경이 지어졌다. 그리고 3세기경에는 용수(龍樹)에 의해 공에 관한 철학적 논리가 부여되면서 대승불교가 완전히 틀을 갖추게 됐다.
그리고 재가자들은 우선 아비달마불교가 지나치게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점, 승원(사원) 깊숙이 숨어서 금욕생활을 하며, 학문과 수행을 통한 자기완성에만 전념했지 중생구제를 소홀히 한 점, 그리고 출가자 중심이어서 재가자들을 도외시한 데에 불만이 있었다. 이러한 불교가 되면서 점차 대중과 거리가 멀어졌고, 이러한 데에 대한 불만으로 BC 1세기경 대중을 중심으로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난 것이 대승불교였다.
따라서 이들은 불탑(佛塔)을 중심으로 모여서 불탑공양을 통해 부처님을 찬양하고 숭배하며 새로운 신앙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즉, 이 운동은 재래의 여러 부파불교들이 승원을 배경으로 한 출가자 중심 불교였으며, 각부파가 경쟁적으로 생산한 아비달마논서들은 너무 번쇄하고 어려워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이론불교였고, 지나친 법 중심 불교로서 실천성이 결여된 불교를 발달시키고 있었음에 대한 비판적 태도에서 출발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불타의 절대성과 자비성이 무한하다는 것으로서 이는 불멸 후 나타난 불타신격화의 결과였다. 즉 불전(佛傳)과 본생담(本生譚) 등을 통해 점차로 발달했던 부처님에 대한 고찰 결과, 부처님은 과거에 무량한 수행을 한 과보로서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았다고 했으며, 한편 부처님은 인행(因行)으로서 이타행(利他行)을 주로 하는 육바라밀행(六波羅蜜行)을 설했는데, 그러한 부처님 체험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결심했던 곳에 새로운 운동의 출발점이 있었다.
그리고 부파불교의 출가수행자들은 부처님과 자신들과의 거리감 때문에 스스로가 아라한임(阿羅漢)에 머무르고자 했음에 대해, 새로운 불교운동을 펼치는 세력에서는 중생의 성불이야말로 불타 본원(本願)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되도록 많은 중생이 성불하는 길을 지향했기 때문에 이 새로운 운동은 소승(小乘)에 대한 대승(大乘)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이 운동을 지도하는 출가자들을 법사(法師, dharma-bhanaka)라 불렀고, 그 법사의 기원은 어쩌면 출가수행자 중에서 재가신자를 위해 부처님을 찬탄하는 문학인 부처님 전기문학(佛傳文學) 전문가였던 찬불승(讚佛僧)이었을 것 같은데, 부파기록을 통해서는 그 기원을 알 수 없다. 그리고 대승불교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확실한 것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3) 대승불교 운동의 사상적 배경
• 부처님 근본불교 복구운동
대승경전이 성립되기 전에 소승논장들이 많이 성립됐는데, 부파불교에서는 부처님 중도사상(中道思想)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순전히 유(有)와 무(無), 곧 양변의 유 ‧ 무사상을 가지고 싸움을 일삼았다. 어떤 부파는 유(有)를 가지고 부처님 근본사상이라고 하고, 어떤 부파는 무(無)를 가지고 부처님 근본사상이라고 주장하니 부처님 근본사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각 부파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편집할 때, 자기들 주장대로 경전을 편집했고, 이것이 소승불교의 근본이 됨으로써 부처님 중도사상이 오히려 왜곡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대승경전보다 앞서 성립된 팔리어로 쓰인 소승경전들은 유 ‧ 무에 입각해서 성립됐기 때문에 부처님 근본사상을 온전히 전하지 못했다. 그 뒤에 성립된 대승경전은 전체가 중도사상에 입각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있어서도 대승불교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소승불교에서 발달한 사상, 혹은 부처님이 설한 근본사상이 아니라고 한다. 즉, 대승은 비불(非佛)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근본사상은 중도대승(中道大乘), 중도일승(中道一乘)에 있으므로 대승불교 사상은 부처님 사상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그리고 대승불교가 근본불교 복구운동임을 밝히는 데에 가장 앞장섰던 선구자가 용수(龍樹)였다. 용수는 <중론(中論)>과 <대지도론(大智度論)> 등 많은 저술을 통해 부파불교를 비판하고 대승불교를 확립했다.
용수는 부처님 중도사상을 바로 세우고 널리 펼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대승불교에서 부처님 근본사상을 복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성립한 사상이 지금까지 동아시아 북전불교(北傳佛敎)를 지배해오고 있다. 이러함으로 인해 오늘날에 있어서 대승불교가 근본불교인 부처님 사상을 복구 확장한 것이지 결코 변질시킨 것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 대승불교의 핵심사상 - 중도(中道) ‧ 진여(眞如) ‧ 법계(法界) ‧ 연기(緣起)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논이 분분했던 것이 부처님이 초전법륜(初傳法輪)에서 중도(中道)만을 말씀하셨지 진여(眞如) ‧ 연기(緣起) ‧ 법계(法界)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전법륜에서 중도를 말씀하시고 난 뒤에 <잡아함경>과 같은 조그만 경전이 편집되면서 중도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면서 그곳에서 중도가 바로 진여라고 했다. 그리고 진여가 곧 절대이다. 변동이 없다는 말이다. 진여는 양변을 여읜 절대의 세계이다. 동시에 진여는 법계이다. 따라서 중도(中道) ‧ 진여(眞如) ‧ 법계(法界) ‧ 연기(緣起)는 불교 근본사상이다. 즉,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에서 다섯 비구들에게 말씀하실 때는 간단하게 중도라고 해서 양변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지만, 뒤에 부연해서 중도를 다양하게 설하셨다. 중도를 설명할 때에는 반드시 연기가 따라오고, 법계가 따라오고, 진여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비록 부처님이 직접 설하지 않았더라도 부처님의 근본사상인 중도 ‧ 진여 ‧ 법계 ‧ 연기 ‧ 공 ‧ 사성제 등이 담겨져 있는 경전이라면 그것은 불법(佛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헌데 중도(中道)에 대해서도, 이것이 부처님께서 최초로 말씀한 것인지 아니면 외도들이 이미 설하고 있었던 것인지, 이에 대해 지난날 학자들 중에 더러 부처님의 독창적인 깨달음이 아니라는 사람도 있었다. 중도사상은 시대적 연관 위에서 성립된 것이지 부처님 독창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도사상은 부처님의 독창적인 발견이었다.
고대 인도에 있어서 사상 흐름은 크게 두 가지였다. 유심(唯心)사상과 유물(唯物)사상이었다. 유심사상은 전변설(傳變說)이고, 유물사상은 적집설(積集說)이다. 전변설은 수정주의(修定主義)로 나아가고 적집설은 고행주의(苦行主義)로 나아가는데, 유심과 유물, 전변설과 적집설, 수정주의와 고행주의가 부처님 이전 인도사상의 개요였다. 그러데 부처님은 유심도 버리고 유물도 버리고, 수정주의와 고행주의도 버렸다. 부처님은 유심과 유물 양변을 버릴 때 중도(中道)를 정등각(正等覺)할 수 있었다고 했다.
(4) 대승불교 성립요인
대승경전은 일시에 제작된 것이 아니고 여러 역사적 발전단계를 거쳐 현존하는 대승경전의 형태로 편찬됐다. 그리고 대승불교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이 대승경전을 찬술한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면 대승경전 성립에 관한 의문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다. 대승불교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발생했는가. 이른바 대승불교의 원류 혹은 기원에 관한 탐구의 역사는 오래됐다. 지금까지 대승불교 성립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됐다. 하나는 대승불교 성립 조건을 외부적 요인에서 찾고자 시도한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대승불교 성립 조건을 불교의 내부적 요인에서 찾고자 시도한 작업이다.
• 대승불교 성립의 외부요인
대승불교 성립요인을 외부적 환경에서 찾고자 시도한 경우는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하나는 대승불교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회환경을 들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대승불교성립이 외부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첫째 대승불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사회적 배경으로서 사회적 혼란을 들고 있다. 기원전 180년 마우리아왕조(Maurya dynasty)가 멸망하고, 슝가(Sunga)왕조, 그리고 쿠샨(Kushan)왕조를 차례로 거치면서 북인도는 극심한 사회적 혼란에 빠졌고 전통적인 사회제도와 관습 등은 거의 해체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기에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나게 됐다는 것이다. 혼란의 시대는 실로 새로운 종교운동의 시작을 위한 비옥한 토양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불탑(佛塔)숭배와 관련이 있다고 믿어지는 대승불교가 일어나고, 인도의 비쉬누(Visnu) 신앙, 시바(Siva) 신앙 등 새로운 종교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둘째 대승불교흥기가 외부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인데, 일부학자는 대승불교가 힌두교의 우파니샤드(Upanishad)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또 대승은 힌두교 고전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īt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바가바드 기타>와 <법화경>을 대조함으로써 <바가바드 기타>의 박티(Bhakti)신앙이 대승경전 불타신앙 성립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밝히고, 대승불교의 범신론적 불타관(汎神論的佛陀觀)은 힌두교의 신관(神觀)과 우파니샤드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했다. 이에 반해서, 일부 학자는 힌두교의 사상 ㆍ 종교 ㆍ 문화가 대승불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명확한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또 일부학자는 아미타불과 보살 등 대승불교사상이 이란의 종교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특히 대승불교의 특징인 보살사상 형성은 이란의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영향을 깊이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하여 보살사상이 여러 측면에 걸쳐 이란종교의 영향이 인정될 뿐 아니라 보살사상 자체도 그 출발점은 부분적으로 이란종교와의 접촉을 통해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 대승불교 성립의 내부적 요인
대승불교가 어디서부터 형성됐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러나 대승불교 기원을 불교 내부에서 찾고자 한 경우, 여기에는 재가불탑기원설과 불전문학(佛傳文學)의 발전이 대승불교흥기의 요인이었다는 설과 부파불교, 특히 대중부기원설이라는 두개의 가설이 가장 유력하다.
첫째 재가불탑기원설의 경우, 전술한 바와 같은 극심한 사회혼란 속에 일어난 불탑숭배의 그 중심에 재가신자의 활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재가신자들에게 있어서 불멸 후 숭배하고 예배할 대상이 없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데에서 불사리 분골(分骨)과 조탑공양(造塔供養)이 이뤄졌다. 당시 불상(佛像)을 만든다는 것은 금기였다. 경전을 문자로 옮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타의 위대함은 유한한 상(像)이나 그림으로 나타낼 수 없다고 봤었다. 그래서 불상이 출현한 것은 AD 1세기 내지는 2세기 초의 일로 상당히 늦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불교도들의 예배대상은 부처님 사리를 모신 탑이었다. 원래는 분묘(墳墓)를 말하는 것이었다. 불사리를 넣은 용기를 안치하고 흙을 덮어 반원구형으로 만들었던 것이 예배의례(禮拜儀禮)가 확립돼감에 따라 커졌고, 복발형(覆鉢型) 등으로 변화됐다. 신도들은 경전을 외우면서 탑을 오른편으로 도는 형식으로 예배했으며, 불탑숭배는 공덕(功德)이라는 관념도 있었다. 보시(布施)를 하며 선행을 함으로써 공덕을 쌓고, 사후에 보다 좋은 세계에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는 것은 당시 인도 민간신앙형태에도 있었고, 불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재가신도들 뿐만 아니라, 일부 비구들까지도 불탑참배를 했다. 이것이 부처님의 덕을 흠모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하는 대상임과 동시에 공덕을 쌓기 위한 중요한 행위였다.
그리하여 불멸후 불골(佛骨)을 분배해 중인도에 세워진 여러 불탑은 점차 신자들 신앙심을 고취시켜 불탑신앙(佛塔信仰)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불탑신앙(佛塔信仰)이 대승불교 흥기의 전조현상(前兆現狀)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아소카왕(Ashoka, 阿育王)이 각지에 불탑을 세웠는데, 이로 인해 불탑신앙은 더욱 성행하게 됐으며, 이러한 불탑신앙이 재가신자 사이에 퍼지면서 하나의 불탑교단이 형성됐고, 불탑교단은 기존 부파불교와는 별개로 발전해 대승불교흥기의 요인이 됐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찬불승(讚佛僧)계통에서 발전했다는 불전문학(佛傳文學)이 어떤 부파에서 형성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점차 부파불교를 초월한 사상으로 발전해나갔고, 이 불전문학 사상이 대승불교 흥기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해서 불탑신앙과 불전문학을 주도했던 재가자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불교운동이 대승불교였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와는 전혀 다른 그룹, 부파불교에 불만을 품은 부파교단의 출가자집단, 혹은 대중부계 승가집단에 의한 새로운 불교운동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이 두 세력이 어느 때 어떤 과정을 거쳐 합세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합세한 이 두 세력에 의해 대승불교운동이 진행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것은 대중부를 비롯한 제부파에서 유래했다는 증거와 불탑신앙과 불전문학이 관련이 있었다는 흔적이 동시에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대승불교가 부파불교로부터 발전했다는 설이다. 즉, 부파불교의 대중부(大衆部)가 발전해 대승불교가 됐다고 보는 것이다. 대중부의 주장 가운데 일부가 대승불교의 사상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대중부의 교리 가운데 불타론(佛陀論), 보살론(菩薩論),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이 그것이다. 먼저 불타론에서는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한 분의 붓다를 설하지 않고 여러 명의 붓다를 설했으며, 또 이 붓다는 세상에 나와서 중생을 교화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유부의 불타관과 다르다. 유부에서는 오직 한 분의 붓다만이 존재하며, 이 붓다는 열반에 들어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대중부계의 보살론에서는 일체의 보살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모든 유정(有情)을 이롭게 하겠다고 서원했기 때문에 스스로 원해서 악취(惡趣)에 태어난다고 설하고 있다. 이는 유부에서 업에 따라서 윤회한다고 설한 것과 다른 것으로 대승불교사상에 가깝다. 그리고 아라한(阿羅漢)을 인간적으로 본 점, 불신론(佛身論), 공사상(空思想), 법무아(法無我) 등을 설한 점 등을 들어 대중부가 대승불교기원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중부가 발전한 것이 대승불교라고 하며, 제1차 불전결집과 부파불교교리를 설한 자료 등에 의해 보살장(菩薩藏)이 존재했음과 대중부계 부파교리가 대승불교교리와 공통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대중부기원설은 곧 대중부가 대승의 선구자라는 말이고, 대승불교의 원류가 대중부(大衆部)라는 말인데, 대중부의 교리를 살펴보면 대승불교의 교리와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대승불교는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이 숨어있다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인도라는 힌두적 환경에서 변질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부파불교의 철학적 연구결과였던 것이다. 이로서 모든 것이 변화하듯이 부처님의 정법 또한 시간의 변화에 따라 확장됐던 것이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인도에서 기존 소승불교를 뒤엎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반동적 개혁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대중부 이외에 다른 부파에서도 대승불교성립에 영향을 주었다. 즉, 상좌부계통의 화지부(化地部)와 법장부(法藏部)도 대승경전에 영향을 준 흔적이 있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어떤 한 부파의 교리를 전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대승의 기원은 교리의 기원임과 동시에 교단의 기원이기도 한데, 대중부의 교단과 대승교도 간에 어떠한 관계가 있었는지 그 점에 관한 분명한 근거가 없다. 그리고 대승불교가 출현한 이후에도 대중부는 존속하기 때문에 대중부가 발전해 그대로 대승이 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즉, 대중부에서 대승불교가 흥기했다고 하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으나 이것도 단정적으로 ‘대중부만’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부파들의 교리도 대승불교에 도입돼 있다. 특히 설일체유부의 교리는 비판되면서도 가장 많이 채용됐다. 또 경량부(經量部)의 교리도 대승불교에, 특히 유식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경량부에 속한 논사인 비유자(譬喩者)도 대승과 공통된 주장을 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연구를 계속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인데,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로는 특정 집단에 의해 대승불교가 흥기했다고 하기보다는 다양한 외적인 요인과 불교 내적인 복합적 요소가 얽힌 가운데 대중부의 영향이 가장 크게 작용한 새로운 불교운동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5) 대승불교의 지향
• 보살(菩薩, Bodhisattva)의 등장
부처님이 주창한 활기찬 초기불교도 2~300년이 지나면서 그 명쾌한 가르침은 아비달마의 발달과 함께 철학화 되고, 번잡화 돼서 청신한 종교로서의 생명력이 희석되고, 신앙마저 흔들려 혼미해졌다. 따라서 기원 전후로 해서 재가신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불교부흥운동이 전개됐다. 또한 이들은 인도 각지에 산재하는 불탑(스투파)을 중심으로 모이고, 부처님을 찬양하고 부처님에 대한 열렬한 신앙을 가졌다.
그들은 부처님 전생의 호칭인 ‘보살(菩薩)’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보고, 또한 이 운동에 매진하는 자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보살’라고 불렀으며, 재래의 출가자 중심의 교단인 ‘비구승가(Bhikkhu-sangha)’에 대해서, ‘보살가나(Bodhisattva-gana)’라고 했다. '가나(Gana)'란 승가(僧家)와 같은 의미로서, 보살가나는 보살중(菩薩衆), 보살의 집단을 가리킨다. 대승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을 향해 노력하는 사람을 부처님 전신(前身)과 마찬가지인 보살(菩薩, Bodhisattva)이라 불렀다. 즉, 스스로를 보살이라 칭해 결속하고 있었다.
보살이란 부처님 전생에 많은 수행과 공덕을 쌓았던 시절의 인간상을 가리킨다. 대승교도가 스스로를 보살이라 한 것은 부처님 전생의 수행과 공덕에서 대승의 원점을 찾고, 그 보살과 동일한 삶을 살고자 한 까닭이다. 따라서 보살이란 대승불교의 가장 이상적인 인물상으로 대승불교도들은 이러한 보살의 길을 가고자 맹세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보살의 이상을 가지고 불교를 재해석하고자 한 것이 바로 대승불교운동이었다. 그리고 재가불자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찬동하고, 아미달마불교에 만족치 못해 거기서 뛰쳐나온 일부 출가자들의 참여가 이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한층 성숙하게 했다. 그들 중에는 이 운동의 이론적 지도자가 되기도 했으며, 대승경전 제작에 참여해 중요한 시사를 준 자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결국 자신의 사상을 표명하는 수단으로서 새로운 경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 대승경전(大乘經典)의 지향
이러한 대승불교는 일종의 신앙운동이라 할 수 있는데, 부처님 가르침을 신앙운동으로 발전시킨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앙운동이기 때문에 부처님을 신격화하고, 나아가서 다불사상(多佛思想)이 성립됐으며, 중생을 구제한다는 대중운동을 펼치기 위해 보살사상(菩薩思想)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중생 모두에게 보살이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신앙적 기초를 만들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정토교에서는 아미타불신앙이 보편화됨으로써, ‘나무아미타불’을 외는 오늘날 신행형태는 결국 우리 모두가 정토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하나 덧붙일 것은 시대적으로 보아서 불교를 초기불교(初期佛敎=原始佛敎) - 부파불교(部派佛敎) - 대승불교(大乘佛敎)로 나눈다. 초기불교를 다시 부처님 당시와 직계자제들이 있었던 불멸후 30년까지를 대개 근본불교(根本佛敎)라 하고, 그 후부터 불멸 후 100 년까지를 협의의 초기불교(원시불교)라 한다. 그리고 초기불교 이후의 부파불교는 소승불교로서 불멸 후 100여년(BC 4세기) 이후의 불교를 말하고, 대승불교는 BC 1세기 무렵부터 일어난 새로운 불교를 말한다. 그리고 BC 1세기 이후 AD 4세기까지, 혹은 그 이후 7세기 무렵까지 부파불교(소승불교)와 대승불교는 공존한다.
그런데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인 소승불교는 근본적으로 틀린다. 초기불교는 모든 교설이 중도사상(中道思想)에 입각해 설해졌는데, 부파불교시대에 있어서는 유견(有見) 아니면 무견(無見), 무견 아니면 변견(邊見)으로써 각기 자기교설을 주장한 소승불교로서 중도사상이 전혀 없었다.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100여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제자들이 각지로 흩어져 살게 되고, 각지에서 자기 나름의 교리를 주장하게 되는데, 이 시대를 불교사적으로 부파불교시대라고 한다. 이 당시에 극단적인 분파주의가 생겨나서 각 계파 간에 이견이 첨예하게 대립해 서로 반목하고, 지나친 변견에 근거한 주장을 서로 인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부파불교는 부처님 중도사상에 어긋난 변견(邊見)에 속한 소승불교시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부처님 근본사상을 추구하는 대승불교운동은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부처님 마음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부처님 사리탑을 중심으로 부처님 마음을 닮고자 했다. 부처님처럼 수행하며 중생을 교화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기로 했다. 이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하는 자비심의 발로였다. 자비심은 무아(無我)를 체득하고 체현하는, 공성(空性)의 마음으로서 이를 실현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이다. 그리고 이러함을 펴는 이들을 보살(菩薩)이라 했다. 그들이 부처님을 마음에 담고, 그 마음에서 부처님 말씀을 대신 쏟아낸 것이 일련의 대승경전이다.
따라서 대승경전은 근본불교를 바탕으로 조성됐다. 대승경전 모든 곳에서 삼법인(三法印)을 비롯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다 스며있다. 무상(無常), 무아(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 사성제(四聖諦), 그리고 십이연기(十二緣起)와 중도(中道)의 가르침이 모두 녹아있다. 대승경전이란 시대적으로 봐서는 부처님과 5~600년의 시차가 있어도 사상적으로는 자비와 평등의 부처님 근본사상을 계승한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대승경전 중에서도 초기경전에 해당하는 <금강경(金剛經)>의 경우, 공(空)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연기법을 전제로 한다면 공(空)에의 귀결은 필연이다. 그런데 공사상(空思想)을 부처님이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것을 비불설이라고 할 것인가. 이 주장에 동의하는 불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즉, 비록 부처님이 직접 설하지는 않았더라도 부처님의 근본사상이 담겨있는 경전이라면 그것은 불법(佛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 대승경전의 편찬
(1) 대승경전의 성립 배경
• 대승경전 바탕은 초기경전
현존하는 초기경전(4아함과 5니까야)과 율장(광률/廣律)은 각 부파에 의해 결집 편찬돼 전승된 것이다. ‘아가마(āgama)’와 ‘니까야(nīkāya)’라는 말 자체가 ‘전승돼 온 것’, ‘부파에 의해 결집된 성전’이라는 뜻이다. 부파불교 당시 각 부파들은 자신들에 의해 결집 편찬된 경전을 ‘성교(聖敎, buddha śāsana)’나 ‘아가마(āgama, 혹은 니까야)’ 혹은 ‘불법(佛法)’으로 호칭해 ‘불설(佛說, buddha vacana)’과는 구분했다.
그리고 상좌부 전승의 팔리어 율을 비롯한 모든 율장에서 “불설이란 불타가 설한 것과 성문(혹은 제자) ․ 선인 ․ 천인이 설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들이 근본경전으로 믿고 있는 <아함경>과 <니까야>는 부처님 친설만을 결집한 것이 아니라, 경전 안에는 부처님이 설한 - 불설도 있지만 그 제자가 설한 것, 혹은 다른 선인, 선지식들이 설한 것도 있다는 말이다. 이는 불설이란 꼭 친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문(제자)이나 선지식이 설한 것도 포함된다는 말이다. 현존 <잡아함경>의 경우 실제로 그러하다.
모든 경전 내용이 부처님 친설(親說)인 것은 아니고, 현재 전하고 있는 북전 <아함경>과 남전 <니까야>는 초기불교시대에 결집 편찬된 것이 아니라 부파불교시대에 각 부파에서 구두로 전승돼 온 성전을 결집하고 편찬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근본경전이라고 하는 <아함경>과 <니까야>조차도 불멸 후 2~400년 후에 아비달마 논사들에 의해 부처님 법으로 취사선택되고 정리된 체계로서, 결집된 것이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부처님 원음을 결집 편찬한 친설(親說)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최근에 북서인도에서 발견돼 독일과 영국에서 편집되고 있는 산스크리트어(Sanskrit) 근본설일체유부 <장아함경>이 한역 <장함경>에 비해서 크기가 거의 두 배에 이르고 <중아함>에 있는 몇몇 경전들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한역 <4아함>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외형적으로 보았을 때 팔리어 <니까야>도 한역 <아함경>도 현재의 형태로서는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부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달하고 있는 문헌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황순일.
그리고 초기 아비달마는 경장 안에 포함돼 있었다. 예컨대 굿다까 니까야(Khuddaka Nikaya, 小部)에 속해 있는 <수타니파타(Suttanipata, 經集)>에 실려 있는 닛데사(Niddesa, 義釋)가 그렇다. 그리고 후기의 것으로 역시 경으로 불리는 것이 있다. 예컨대 카트야야니푸트라(가다연니자, 迦多衍尼子, Katyayaniputra)가 저술한 <발지론(發智論)>을 <발지경(發智經)>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상좌부나 유부에서는 다 같이 근본 아비달마 칠론(7論)을 요의(了義)의 불설로 간주하기 때문에 경과 논의 구분은 근본적으로 애매했다. 심지어 상좌부에서는 <제5 니까야>인 <굿다까 니까야(小部, Khuddhaka Nikaya)>에 실려 있는 제경을 경장에 포함시킬 것인가, 논장에 포함시킬 것인가에 대한 오랜 논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 제작된 대승경전 역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찬술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오늘 날 대승불교흥기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갖는 학자들은 대개 대승불교의 기원을 전통 부파교단의 연장선상에서 찾고 있다. 즉, 부파불교에서 전개한 행태, 그 연장선상에서 대승경전도 편찬됐을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대승경전 역시 이전의 경전을 수용해 해석하고 새롭게 읽는 과정을 통해 종류와 분량이 확대돼 간 것이지 결코 ‘역사적 붓다’의 권위를 빌려 날조된 것이 아니며, 경전의 증광(增廣) 또한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경전해석의 패턴을 의식해 이루어진 것이다. 결코 자유로이 무제한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 불교의 개방성과 유연성
불법(佛法) 혹은 불교사상의 다양성은 근본적으로 불교의 개방성에 기인한다. 불교는 결코 교조주의가 아니다. 깨달음은 누구에게도 열려있으며 진실은 누구에 의해서도 토론될 수 있다. 불교의 다양성은 처음부터 용인됐다는 말이다. ‘불법(불교사상)=불설=친설’이라는 도식은 부처님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후세인들의 강고한 편견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요컨대 대승경전이 날조된 창작이라는 것은 ‘불법=불설=친설’이라는 도그마(Dogma)를 전제함에서 비롯된 생각이며, ‘아비달마불교는 초기불교의 왜곡’이라고 한다든지 ‘대승불교는 불설이 아니다’라는 말은 불교의 전통과 역사성을 무시하고 불교의 발전과정을 도식적으로 이해한데서 비롯된 발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권오민
지금 초기의 경전으로 알려져 있는 아함경도 모두 한꺼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비교적 초기에 설일체유부 계통으로 보이는 <잡아함경>, <중아함경>이 만들어져 전승됐으며, 그 후 법장부 계통의 <장아함경>이 나타나고 진보적 성향을 가진 대중부 계통의 <증일아함경>이 제일 나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5니까야>는 남방 상좌부의 전승으로, 초기경전 자체가 근본불교시대의 것이 아니라 부파불교시대에 결집된 것이 전승된 것이다. 그리고 부파불교시대의 비바사사(毘婆沙師)를 비롯한 다수의 논사들은 제1차 불전결집 당시의 경전은 문자화 되지 않고 구두로 전승되던 것이므로 이미 멸실됐으며, 그 후로도 무량의 경전이 은몰했다고 전한다. 따라서 우리가 아는 초기불교의 교학은 거의 설일체유부와 남방 상좌부 등에 의해 전해진 것이지 제1차 불전결집 당시의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상은 끊임없이 해석되고 변용되며, 불교사상 또한 결코 예외가 아니다. 해석과 변용을 허락하는 유연성이 불교의 특징이다. 그런데 부파불교 제부파(諸部派) 사이에 있었던 단절과 간격은 해석과 변용을 고려하려고 하지 않는 폐쇄적 불교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사실상 도그마(Dogma)였다. 그리고 당시 부파교도들이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에 대해 비난했던 증거들이 대승경전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심지어 ‘대승은 악마의 설’이라고까지 반박했다. 그러나 이러한 부파교도들의 비난 역시 도그마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에 대해 대승교도들은 “부처님은 한 목소리로 설법하셨는데 대중이 여러 가지로 이해했다”며, 대승이 부처님 말씀임을 논증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경전 찬술경위를 논서에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불설 ‧ 비불설 논쟁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승경전은 지금도 확장돼야 한다. 그렇다고 위경(僞經)을 계속 생산하자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너도 나도 대승경전을 마구 만들어내어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불경의 의미가 소멸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사이비 신도들이 생겨 자칭 깨달았다고 사칭해서 궤변을 늘어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대는 급변하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불교의 새로운 사상을 끊임없이 발굴해야 하고, 시대에 맞는 교의와 율전을 계속 개발해 한다. 그러함에 모두의 요구가 일치될 때, 범세계적인 종단 차원에서 부처님에 의지해서 시대변천에 맞는 합의된 불설을 생산해야 할 것이다.
대승불교는 중국 등지의 북방으로 전래돼 카니시카왕의 제4차 불전결집 이후에야 고도의 철학적 사유로 말미암아 북방에서 크게 인기를 얻게 된다.
그 이유는 인도북방과 중국에서는 초기 불교교단의 전통과 영향력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었다. 대승불교의 철학적 논리과 수행정신이 중국의 사유적, 도가적인 수행기풍과 그 맥을 같이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도내의 소수 개혁파인 대승론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학적으로 전개해 완벽한 이론 체계와 관념체계를 갖추어 남몰래 경을 만들어가며 세를 확산해 나갔다. 그 결과 AD 1세기경에 반야계통의 대승경전이 나타났으며 AD 2세기경에 화엄경이, AD 4세기경에 법화경이 지어졌다. 그리고 3세기 경에는 용수(龍樹나가르주나/Nagarjuna)에 의해 공(空)에 관한 철학적 논리가 부여되면서 대승불교가 완전히 틀을 갖추게 된다.
그는 여러 저술들을 통해 <반야경>의 공(空)사상을 철학적으로 논리화시키고 대승의 철학체계를 발전시켜 부처님의 사실적인 견해와 기존 힌두교의 주장들을 모두 비판 배척하게 된다. 용수는 모든 존재는 연기에 의해 생기므로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으니, 이것을 깨달으면 진공중도의 바른 견해를 얻을 수 있다는 반야공관을 설했는데, 이 설에 기초를 둔 학파를 중관파(中觀派)라고 한다.
중관파의 시조인 용수(나가르주나)는 남인도 안드라 왕조의 데칸고원에서 탄생해 젊었을 때에는 브라만 출신으로 방탕을 일삼다가 후에 불교를 배운 사람으로서 힌두사상 뿐 아니라 그 당시의 여러 사상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처음 유부에 출가했으나 후에 대승의 교리를 체득한 후, 중싸타바하나왕조의 보호아래 공사상을 펼쳤다. 저서로는 <중론(中論, Madhyamakakarika)>, <대지도론(大智度論)>, <대품반야(大品般若)>, <십주 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등이 있는데, 특히 <중론> 은 중관학파를 형성해 크게 흥기했다. 용수 탄생 당시 인도 불교계는 기존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아비달마 승단들이 20여 종의 교파로 난립돼 있었고 한편에서는 이에 불만을 품은 혁신적인 불교도들이 대승경전의 편찬과 대승불교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또 불교 외적으로는 전통적인 육파철학이 하나 둘 정비돼가면서 대중적인 힌두교가 서서히 인도사회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계의 혼돈 속에서 공사상의 대가 용수가 나타나서 현실과 이상을 구분한 이원적 사유방식으로 불교를 재창조하게 됐다. 용수는 <중론>에서 모든 사물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연기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성(自性)이란 없으며 모든 실체는 공(空)이라고 했다. 자성이란 것은 인과 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자립적인 것이며, 항상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고정불변한 실체라고 할 수 있는데, 연기법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선 홀로 존재하는 자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의 본질은 무자성(無自性)이며 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
용수는 부처님이 “세속적인 ‘덮힌’ 진리와 ‘최고의 진리’에 기초해 법을 설했다”고 주장하면서 이원론적인 논리전개를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최고의 진리[진제, 승의제(眞諦, 勝義諦)]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실체로서 인간의 사고 내지 인식작용이 미치지 않는 초월적 상태를 일컫는 것이었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 본질의 세계와 유사하며, 세상의 흐름과 무관한 우주의 영원한 무루의 실체를 말했다. 이에 비해 덮인 진리인 세속적 진리[속제, 세속제(俗諦, 世俗諦)]는 상대적인 진리로 인간적 사유에서 본 법을 이야기하는데, 플라톤의 이론에 비유한다면 현상의 세계, 동굴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진제에 의하면, 이 세상의 일체사물은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늙고 죽은 것도 모두 거짓된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물이 생겨나고 멸하며, 인간이 늙어서 죽는 것은 ‘덮힘’의 결과에 지나지 않으니 이 ‘덮힘’을 제거하면 불생, 불멸의 무루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지에서 용수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덮힘’의 세상이며 꿈과 환영에 불과하니 눈을 뜨기까지 그것은 가슴을 괴롭히는 고통의 바다지만 일단 눈을 떠버리면 그 꿈은 아침 햇살 속의 이슬과 같은 것이니 더 이상 꿈속에는 한 조각의 진리나 사실이 없으며 영원히 자유로운 평안과 해탈 속에 머무르게 된다고 했다.
용수는 이와 같이 <중론>에서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관을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대승불교의 역사적 위상을 확립시켰지만 생생한 깨달음의 실체인 해탈지경을 실체가 없는 관념적인 공으로 변질시킴으로써 불교는 사실에 관한 실천적인 법에서 관념이 지배하는 추상적인 법으로 변질시켰다는 지적을 받는다. 즉 부처님의 해탈지경은 업(業)이 사라진 인간의 완성된 마음으로 우주의 실상과 진리를 비추는 생생한 거울이었는데, 관념론자의 사고와 논리에 의해 철학적 사유로만 존재하는 실체가 없는 텅 빈 허공으로 변해 버렸다는 것이다.
(2) 대승경전의 편찬 단계
더러 학자들은 대승경전이 찬술된 뒤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났다고도 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운동이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 그 독자적인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경전을 편찬하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대승경전의 편찬역사는 보통 3기로 나누어 논하게 된다.
제1기는 대승경전 초기로서 기원 전후로부터 3세기 전반까지의 시기에 해당하며, 이는 대체로 대승의 형성에서부터 용수(龍樹)시대까지이고, 경전제작이 대단히 성행했던 시기이다.
제2기인 중기는 용수 이후에서 무착(無着)과 세친(世親)시대까지이고, 이 시기엔 대승경전 제작이 조금 주춤했다.
제3기인 후기는 세친 이후 시대이다. 대승경전 제작은 밀교를 제외하고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대승경전이 성립되기 시작하면서 대승불교 자체에 여러 가지 새로운 현상이 발생했다.
첫째 그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대승경전에 대해 공양하고 숭배하고자 하는 요구와 법사(法師)를 존중하고자 하는 경향이다. 결국 경전이 불탑을 대신해 숭배의 대상이 됐다는 것은 대승경전이라고 하는 법의 절대화가 이루어진 것을 뜻한다.
둘째 현상은 성불도(成佛道)로서의 보살도가 정비되고 체계화된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처음에 비판했던 부파의 아비달마교학을 다시 도입하게 된다. 이것은 재가보살 대신 출가의 보살이 이상상(理想像)으로 등장한 것과 때를 같이 한다. 대승불교의 이론화와 체계화는 결국 출가주의화와 아비달마화를 초래해 이전의 부파불교가 걸었던 길을 답습하게 된다.
이에 대한 반발로 제3의 신운동으로 밀교(密敎)가 일어나고, 이윽고 그 주장을 담은 그릇으로서 밀교경전이 제작된다. 밀교경전도 역시 불설임을 표방하지만 그것을 설하는 이가 대승경전의 경우처럼 불타가 아니라 절대적 존재로서의 법신(法身)이라고 했다. 밀교도 대승불교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대승을 초월해 출현한 것이라는 점은 대승이 불교이면서도 이전의 불교를 초월해 출현했던 것과 대비된다. 그리하여 인도불교의 최후까지 소승과 대승, 그리고 밀교가 병존하고 있었다. 이상의 세 시기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자.
• 제1기(초기)---제1기는 공사상의 발전시기(기원 전후~3세기까지)
이 시기에 북인도에서는 쿠샨왕조(Kushan Dynasty)가 번창했고, 남인도에서는 인드라왕조(Indra Dynasty)가 지배하던 시대이다. 호불군주인 쿠샨왕조 카니시카왕(Kaniska, AD 2세기) 때 제4차 불전결집이 열렸다. 제4차 결집은 경(經) ․ 율(律)에 관한 결집이 아니라 주로 논장(論藏)에 관한 결집이었다. 이로써 삼장이 갖추어졌고, 제4차 결집에서부터 불전용어가 산스크리트어로 공식화됐다. 쿠샨왕국은 중국에서 대월지국(大月氏國)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중국(漢나라시대)과 교류가 많아 이 무렵 처음으로 중국에 산스크리트어 대승경전이 전해졌다.
그리고 이때 불교의 해외전파에는 실크로드를 오가던 카라반들의 역할이 컸다. 당시 실크로드는 동서양의 교통로이자 불교문화 전파의 대통로였다. 그리고 낯선 먼 길을 가는 카라반들에게는 복잡한 법에 대한 가르침보다 붓다의 축복이 더욱 절실한 문제였다. 따라서 대중부와 대승불교에서 붓다를 출세간적인 존재로 간주한 경향이 불교를 해외로 전파케 하는데 더욱더 큰 영향을 발휘케 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헌데 카니시카왕은 특히 부파불교에서 대표적 보수세력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호의적이었지만, 이에 대한 반작용인가, 대승불교의 발상지가 중앙아시아라는 추측을 낳고 있는데, 이 또한 쿠샨왕국을 의미한다. 그리고 남인도 인드라왕조는 BC 3C~AD 3C에 존속했던 왕국으로 해상무역이 발달했는데, 이에 따라 이 왕조 또한 불교를 보호해 주변으로 불교를 활발하게 전파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 초기대승경전 중에 가장 먼저 반야부계통의 경전 대부분이 성립됐는데, 이 시기 반야부계통의 경전들은 무집착(無執着) ㆍ 무소득(無所得) ㆍ 무소주(無所住)의 반야 공사상(般若空思想)을 지배적인 교리로 채용했고, 이로 인한 교리적 영향은 매우 커서 이후 모든 대승경전들이 그 영향을 받아 공(空)사상을 받아들이게 됐다.
대승불교 초기경전의 교리를 정립한 인물로 지목되는 용수(龍樹, Nagarjuna: 150년~250년)는 공사상의 선구자로서 제2의 석가 혹은 보살이라고 칭송받았다. 따라서 초기대승경전은 용수의 학설에 영향을 받거나 또는 인용되고 있는 경전류이다. 그러므로 용수와 유사한 교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은 대개 초기경전에 포함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대승경전 제작이 극도로 성행했으므로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대승경전은 주로 이 무렵에 편찬된 것들이다. 반야부계통의 경전들은 대체로 AD 1~3세기에 편찬됐으며, 잇달아 <화엄경>, <유마경>, <법화경>,등이 편찬됐다. 그러면서 불교가 급격하게 세속화하면서 정토교계통의 경전들이 편찬됐다. 동시에 여러 부처를 인정하는 신앙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는데, 그 중에서 아미타불 신앙이 보편화돼 정토교(淨土敎)를 대표하게 된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는 <무량수경> ㆍ <관무량수경> ㆍ <아미타경> 등이 이때 편찬됐다.
이러한 과정에서 새로운 <화엄경>의 그룹이 발전하고, 또한 <법화경>을 신앙하는 운동이 급속하게 퍼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교리의 조직 및 체계화에 동반해 다시 부파불교와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게 된다. 즉 부파불교의 교리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시기에 활약한 대표적 인물로는 용수에 이어 그의 제자 제바(提婆, AD 3세기)와 라후라(羅睺羅, Rahulabhadra, 200년~300년경) 등이 계속해서 반야 공사상을 설명했고, 나아가서 후일 중국에 들어와서 삼론종(三論宗)으로 발전했다. 이때 주요한 경론으로는 <대지도론(大智度論)> ㆍ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ㆍ <중론(中論)> ㆍ <백론(百論)> 등 논장도 조성됐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금강경(金剛經)>의 산스크리트어 원본은 대체로 AD150~200년 사이에 성립됐다. 그러니까 BC 5세기에 입멸하신 부처님은 전혀 모르시는 경전이다. <금강경>은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 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이렇게 시작되는데, 모두 창작된 말이다. 부처님이 한때 사위국 쉬라바스티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계셨겠지만, 그때 부처님이 <금강경>을 설하신 적이 없었다. 대개 대승경전이 이런 식이었다.
• 제2기(중기)---제2기는 여래장사상과 유식계열의 사상적 발전 시기(4~7세기)
제2기 무렵은 굽타왕조(Gupta dynasty, 320~550)가 흥성하던 시기이고, 용수 이후 주로 무착(無着, 아상가/Asanga, AD310~390)과 세친(世親, 바수반두/Vasubandhu, 320~400?) 등이 활동하던 시기이다. 이시기에는 유식계열 경전 외에는 경전제작이 주춤했다. 중기 이후의 대승경전은 대체로 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에 관련된 것이다. 여래장계 경전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중생에게 여래장(如來藏) 즉 불성(佛性)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인데,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東晋)가 번역한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을 선두로 해, 담무참(曇無讖-北涼)이 번역한 <대반열반경(大盤涅槃經)>,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南宋)가 번역한 <승만경(勝鬘經)>, <앙굴마라경(央掘魔羅經)>, <대법고경(大法鼓經)>, <불설보살행방편경계신통변화경(佛說菩薩行方便境界神通變化經)>, 보리유지(菩提流支-北魏)가 번역한 <불설부증불감경(佛說不增不減經)>, 진제(眞諦-梁, 陳)가 번역한 <무상의경(無上依經)> 등이 있다.
유식계의 근본성전은 <해심밀경(解深密經)>인데 이의 전모는 보리유지에 의해 처음으로 전해졌으나, 부분적으로는 구나발타라에 의해 번역돼 있으므로 4세기 말까지는 성립됐을 것이다. 이외에 <입능가경(入愣伽經)>,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 <섭대승론(攝大乘論)> 등이 있다. 이 시기에는 경전과 논장과의 구별이 어렵다. 더욱이 이 시기의 경전에는 논장을 기초로 해서 개작된 것도 있다. 특히 능가경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함께 여래장과 아뢰야식(阿賴耶識)과의 관계를 논함으로써 여래장사상과 유식설(唯識說)의 융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은 산스크리트어로 붓다가르바(tathagata-garbha)라고 하는데, 중생에게 본래 여래가 될 요인(여래의 태아), 즉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으로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주장이다. 불성(佛性)이 결국은 법성(法性)이고, 자성(自性)이다. 그래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즉 밖으로는 번뇌로 가려 있지만, 안으로의 본질은 청정한 마음이 함장돼 있다는 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인도에서는 불교세력이 그 지지기반을 확충할 필요성을 느꼈을 때이다. 따라서 대대적으로 교리를 정비, 변경해 신앙을 위주로 하는 힌두교사상을 대폭 채용한 것이 바로 여래장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가 근본적으로 부처님 가르침과는 다른 사상이라는 것이고, 그리하여 여래장사상이 불교의 타락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에 유식사상(唯識思想)은 나름대로 초기경전에 대한 반성에 비추어 부처님 가르침을 좀 더 발전시킨, 불교 최고사상이라고 평가 받는다. 그리하여 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 이렇게 두 사상이 제2기에 동시에 벌어진 현상이다. 즉, 한편은 부처님 가르침과 다른 힌두교의 유아론(有我論)을 받아들인 여래장사상이 발전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부처님가르침을 좀 더 심화시킨 유식사상이 발전했다는 이율배반적인 그런 현상이 동시에 벌어졌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은 여래장사상과 함께 유식설과의 융합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평가한다.
유식(唯識, vijnaptimatrata)이란 인간을 중심한 정신과 물질 등 내외의 일체는 오직 심식(心識)에 의해서 창조되며, 일체는 심식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놀라운, 인간이성의 극한에 이른 사상적 전개를 했다. 그것이 또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유식사상은 용수의 중관사상 또는 공(空)사상이 지나치게 공허한 사변으로 치우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대두된 사상으로, 미륵(彌勒. Maitreyanatha, 270~350), 무착(無着. Assanga, 310~390)과 세친(世親. Vasubandha, 320~400?) 등에 의해 성립됐다. 주요경론으로는 <해심밀경(解深密經)> 외에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섭대승론(攝大乘論)>, <유식삼십론(唯識三十論)>, <성유식론(成唯識論)>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연구되고 있는 것이 <성유식론>이다.
• 제3기(후기)---제3기는 세친 이후 밀교(密敎) 시기
제3기는 7세기 이후에 밀교의 전개과정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리고 대승경전 제작이 밀교를 제외하고는 극히 드물었다. 7세기 후반 이전에는 순수한 밀교경전이 형성되지 않았다. 대승경전의 제작은 후대에까지 계속됐지만 그 수는 갑자기 줄어들게 된다. 대신 밀교경전이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그것은 650년을 전후로 <대일경(大日經)>의 성립을 통해 현교(顯敎)인 대승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하고, 또한 7세기 말의 <금강정경(金剛頂經)>에 의해 그 교리가 확립됐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5. 대승 불설(佛說) ‧ 비불설(非佛說)의 진실
(1) 대승경전의 친설론(親說論)과 불설론(佛說論)
대승경전의 불설 ‧ 비불설 논의는 역사적으로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됐다. 하나는 ‘역사적 붓다’가 대승경전을 직접 설했느냐 설하지 않았느냐를 따지는 친설론(親說論) 여부이고, 다른 하나는 대승경전이 참된 부처님 가르침에 합치하느냐 합치하지 않느냐를 따지는 불설론(佛說論)이다 - 마성 스님. 그런데 이 논의는 대승경전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부처님이 직접 설한 친설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①친설론(親說論)---친설론에 관한 논의는 ‘역사적 붓다’가 대승경전을 직접 설했느냐 아니면 후대 대승불교도들이 지어낸 것이냐를 따지는 것이다. 부파불교와 대립했던 당시 대승논사들은 대승경전이 부처님 친설임을 주장하는 논리를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이에 대한 대표적 논사(論師)들은 무착(無着, Asanga, 310~390), 세친(世親, Vasubandhu, 320~400), 청변(淸辨, Bhavyaviveka, 500~570) 등이었다.
그러나 대승경전을 ‘역사적 붓다’에까지 연결시키려고 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주지하다시피 대승불교운동은 BC 1세기경에 일어났으며, 그때 <반야경>의 원형이 성립됐다. 이때는 부파분열이 끝난 시점이다. 그리고 AD 1세기경부터 초기 대승경전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대승경전의 편찬과 관련된 신화는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언급돼 있다. 이 신화에 따르면, 대승경전은 불멸 후 보살과 신들에 의해 은밀히 보관돼 왔는데, 불멸 후 500년경에 용수(龍樹) 등의 보살이 출현해 깊은 바다에서 꺼내왔다고 한다. 또 청변(淸辨, Bhavyaviveka, 500~578)은 그의 저서 <사택염(思澤炎)>에서 “대승경전은 성문이 아니라 보현 ‧ 문수 ‧ 미륵 등에 의해 결집됐다거나, 혹은 용들에 의해 결집돼 용궁 등에 보관됐다가 그것을 인간세계에 퍼뜨리게 됐다.”라고 했다. 이러한 신화는 사실적 근거 없는 신화일 따름이라서 이 신화 자체가 오히려 대승경전은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그리고 <아함경>도 불멸 후 3~400년 이상을 거쳐 현재의 형태로 정비됐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친설 그 자체는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아함경> 이후에 성립된 대승경전은 더욱더 친설일 리가 없다. 대승경전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초기경전은, 현재의 형태는 어찌됐든 역사적으로 보면 그 원천은 붓다의 설법에서 유래한다. 그렇지만 대승경전은 사정이 다르다. 역사적으로 봐도 불멸 후 500년이 훨씬 지난 뒤에야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더욱 붓다의 직접적인 설법이라고 할 수 없다 - 미즈노 고겐(水野弘元).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대승경전은 불멸 후 부파불교에 불만을 가진 여러 불교학자가 당시의 시대적 요구를 담아 불설 형식으로 기록하고 뒤에 여기에 다시 여러 학자가 고치고 보태어 정리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② 불설론(佛說論)---불설론에 관한 논의는 대승경전이 참된 부처님 가르침에 합치하느냐 합치하지 않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이 논의는 대승경전의 정통성과 정법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시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됐다. 하나는 불설의 기준과 해석에 의해 대승경전이 참된 불설임을 논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파교단이 전승한 <니까야(Nikaya)>와 <아가마(Agama)-아함경>의 정통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첫째, 불설기준과 해석에 의해 대승경전이 불설임을 논증한 경우이다. 이에는 이른바 불설기준인 사대교법(四大敎法)과 사의(四依)가 등장하게 된다. 부처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음을 논증함으로써 대승경전이 <니까야>나 <아가마>보다 오히려 위대한 가르침임을 강조했다. 즉, 대승경전은 비록 ‘역사적 붓다’의 친설은 아니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했다.
※사대교법(四大敎法, Mahapadesa)---<대반열반경(소승열반경)>에서 설한 불전결집의 기준을 말한다. 부처님이 아래와 같이 사대교법(四大敎法) 법문을 설하셨다.
“어떤 비구가 어떤 법문(경․율․교법)을
1)불타로부터 직접들은 경우,
2)대다수 박식한 장로들로 구성된 승가로부터 직접들은 경우,
3)경과 율과 논모(論母, 주석)를 지닌 다수의 비구로부터 직접들은 경우,
4)혹은 그러한 한 명의 비구로부터 직접들은 경우, 그의 말을 잘 듣고 단어와 문장을 잘 파악한 다음, 경에 포함돼 있는지, 율(vinaya)을 드러내는지를 검토해, 만약 그렇지 않다면 비불설로 판단해 버려야 하고, 그러하다면 불설로 취해야 한다.” 이에 따르는 한, 한 명의 비구로부터 들은 것도 경과 율에 부합하면 불설로 취해야 하고, 불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 것조차 비불설이면 배척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설자(說者)가 아니라 경을 관통하는 정신 즉 ‘법’이었기 때문이다.
※사의(四依-法의 4의)---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에서 불전결집의 기준을 세운 것이다. 불도(佛道)를 이룰 수 있는 정법(正法)에만 의지하고, 그렇지 않은 것에는 의지하지 않는 것.
1)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
2)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불요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않는 것.
3)의(義)에 의지하고, 어(語)에 의지하지 않는 것.
4)지혜에 의지하고, 식(識)에 의지하지 않는 것. 즉, “사람(人)에 의지하지 말고 법(法)에, 밖으로 드러난 말(語)에 의지하지 말고 그 말에 담긴 뜻(義)에, 언어를 매개로 한 상대적 인식(識)에 의지하지 말고 통찰의 직관지(智)에, 그 뜻이 애매하거나 부실한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고 요의경에 의지하라.”는 것이 4의(四依)의 체계이다. 설일체유부나 남방 상좌부에서는 다 같이 근본 아비달마(7論)를 요의(了義)의 불설로 간주했다.
둘째, 부파교단이 전승한 <니까야>와 <아가마>의 정통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경우를 살펴보자. 부파교단에 전승돼 온 <니까야>나 <아가마> 또한 부처님 친설이 아니라 전승돼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친(世親)과 청변(淸辨)이 근본결집은 산실됐다고 주장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부학자는 “대승경이 비불설이라면, 오늘날 접하는 아함 또한 친설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비불설이다 - 권오민.””라고 했다.
즉, 대승경이 대승논자에 의해 찬술 결집된 것이라면, 아함 역시 유부 등에 의해 취사되고 개변 ‧ 증광 ‧ 찬술된 제경의 집성으로 당시조차 비불설로 비판받았을 뿐더러 역사적으로도 부처님 직설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한번이라도 초기경전을 조심스럽게 분석하고 다른 번역본들과 대조하면서 읽어본 사람이라면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이야기들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옮겨놓은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동일한 경의 이본들 사이에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차이점들이 발견되기도 하고, 동일한 내용의 가르침이 다른 경들에서 때로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기도 하며, 교리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들이 초기경전의 도처에서 혼재돼 나타나기 때문이다 -황순일.
<구사론(俱舍論)>의 저자인 세친(世親)이나 그와 논쟁했던 중현(衆賢)이 전하는 글에 의하면, 부처님 사후 바로 이루어진 제1차 불전결집도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계율제일로 불리었던 교범파제(憍梵波提, Gavāṃpati)는 율장을 결집할만한 이로 추천됐지만 이를 거절했고(대지도론), 설법제일로 알려진 부루나(富樓那, Purna)는 결집의 추인을 거부하고 자신이 직접 들은 것만을 전승했으며(남전율장 소품), 마하가섭(摩訶迦葉)이 주도한 제1차 불전결집과는 별도로 다른 결집이 있었다고도 한다(대당서역기).
이러한 정황을 살펴보건대 불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완벽한 체계로 만들어지지 못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당시 논사들은 ‘불설(buddha vacana)’과 부파에 의해 결집된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아함과 니까야)’을 분명히 인식하고 엄격히 구분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아함경>이나 <니까야>는 부처님 친설이라 하기보다는 아비달마 논사들에 의해 부처님 법으로 취사선택되고 정리된 체계로서, 제 부파간의 불설 ‧ 비불설의 논쟁 또한 이러한 구분에 의한 것이었다. 즉 당시에는 자신들의 경전이 부처님 친설에 해당 되는가 아닌가가 불설 ‧ 비불설 논쟁의 주요한 근거가 됐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승경전의 불설 ‧ 비불설 논의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됐다. 하나는 ‘역사적 붓다’가 대승경전을 직접 설했느냐 설하지 않았느냐를 따지는 친설론이고, 다른 하나는 대승경전이 참된 부처님 가르침에 합치하느냐 합치하지 않느냐를 따지는 불설론이었다.
친설론(親說論)은 처음 대승경전이 나타나자 부파교단의 비구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대승경전인 <대품반야경>과 그 주석서인 <대지도론> 및 <대보적경>에서 대승경전이 친설임을 주장함과 동시에 비구들의 비난에 현혹돼서는 안 된다고 단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대의 대승논사들은 대승경전이 부처님 친설임을 적극적으로 논증해 나갔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대부분 학자들이 대승경전이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이라는 증거가 있을 수가 없고, 따라서 대승전과 ‘역사적 붓다’와의 관계를 연결시킬 수 없음이 당연한 결과임을 수긍한다. 그러니 대승경전은 친설이 아니다.
불설론(佛說論)은 불설이란 반드시 부처님이 직접 설한 내용만이 아니라 법성(法性)에 잘 부합되는 것, 잘 설해진 것(subhasita)을 말한다. 대승경전의 정통성과 정법성을 확보하기 위해 불설기준이었던 <대반열반경>에서의 사대교법(四大敎法)을 사의(四依)로 대체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변론했다. 그러한 끈질긴 노력 덕택에 현대의 학자들은 비록 대승경전이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불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불설의 내용과 진리성은 역사적 붓다의 친설 여부가 아니라 붓다의 원의도와 의미를 반영하고 있는, 불설인가에 달려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함은 유부 아비달마 문헌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고 있으며, 대승 선구자들로 이런 구별에 입각해서 대승사상을 전개했다.
그리고 일부학자들은 대승경전이 불설임을 강조하기보다 부파교단에서 전승해 온 <니까야>나 <아가마(아함경)> 또한 부처님 친설이 아니라 전승돼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니까야>나 <아가마>와 대승경전은 그 전승계보나 체계사상이 다를 뿐만 아니라 논리전개방식도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굳이 <니까야>와 <아가마>의 사례를 빗대어 대승 불설 ‧ 비불설을 논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부파불교시대에 각 부파에는 나름대로 경전이 있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남아있는 경은 BC 3세기 아소카왕시대의 제3차 불전결집 때 상좌부가 주도해 공식적으로 만든 <니까야>와 AD 2세기 카니시카왕의 제4차 불전결집 때 설일체유부 등 각부파 중심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아가마(아함경)> 뿐이다.
그 이유는 <니까야>의 경우 아소카왕의 명으로 BC 3세기 상좌부계 분별설부(分別說部)가 남방 섬나라 스리랑카에 전한 <니까야>가 지금껏 잘 보존돼 왔기 때문이며, 또한 <아가마>는 북인도에서 번성한 쿠샨왕조시대에 설일체유부의 <중아함>과 <잡아함> 등을 중심으로 해서, 법장부의 <장아함>, 대중부의 <증일아함> 등으로 조성된 것을 잘 보전하다가 중국으로 전승해 오늘날 동북아시아의 <아함경>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 외 나머지 경전들은 인도의 정치적 격변기에 이슬람세력의 침입과 힌두교의 포섭으로 불교가 소멸되면서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2) 대승경전 찬술자, 그들의 태도
대승불교운동을 주도한 집단이 어느 그룹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단정할 수 없지만, 대승불교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이 대승경전을 찬술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대승경전을 직접 편찬한 사람들은 상좌부계통에 반발한 진보파인 대중부 정신을 이어받은 일단의 급진적 학승집단이었을 것으로도 짐작된다. 대승불교는 재가자들이 주도해서 일어나기 시작했으나 기원전후 무렵부터는 학승들이 주도하게 됐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승불교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될수록 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사상적인 지도와 교의의 정립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뛰어난 학승들이 많이 배출됐다. 특히 용수(龍樹), 미륵(彌勒), 무착(無着), 세친(世親) 같은 학승은 ‘보살’이라는 칭호를 들을 만큼 위대한 인물들이었으니 그들이 설하는 것이 곧 불설이라 했어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수준이었다면 아마 부처님과 동일체라고 존중 받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여러 대중의 동의와 참여 아래에 이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부처님 입장에서 경전을 조성한다면 나름대로 당위성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한다. 따라서 용수와 같이 해박한 구도자가 부파불교를 그렇게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부파불교 측에서 대승불교를 공격했어도 대승경전이 위경(僞經)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위경이라면 왜 가만히 있었겠는가.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부파불교교리가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남에 확신을 가졌기에 비록 부처님에 가탁(假託)해서라도 부처님 법을 바로 세워 지켜야겠다는 의무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작업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대승경전을 찬술할 수 있었던 확실한 근거들을 살펴보자.
부처님 법을 왜곡하고 있는 부파불교에 대해 파사현정(破邪顯正)을 해야 한다는 절실한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말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에 대한 상기(想起 - 염불선, Buddha-anussati)’와 같은 수행법은 초기부터 매우 잘 알려져 왔고, 그것이 주는 효과는 수행자가 마치 지금 부처님 면전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초기 대승경전인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서 수행자는 정토에 계신 아미타불을 하루 종일 나아가 일주일 내내 관하는 관법을 상세히 배우게 된다. 그 이후 수행자는 삼매 속에서 아미타불의 영상을 얻게 되고 그를 통해 아직 듣지 못했던 가르침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 마성 스님
※팔리어 Buddha-anussati는 염불(念佛)로 번역되는 말로서 원래는 ‘부처님에 대한 선정’을 의미하며, ‘부처님에 대한 간단(間斷) 없는 염염상속(念念相續)의 조견(照見) 상태’로 정의되는 말이다. anussati는 염불수행과 흡사하며, 진정한 염불이다.
이러한 종교적 체험이 있었다면, 그들은 새로운 경을 찬술함에 부처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항시 현존하는 부처님의 대자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선정 속에서 살아 있는 부처님을 친견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가르침을 받는 것은 부분적으로나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마치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처럼 가탁(假託)했다는 것은 지금의 기준으로 볼 때, 문제 있는 행위였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점이 대승경전 찬술자들에 있어서는 가장 아픈 약점이다.
그리하여 혹자는 이에 대해, “그들은 스스로 깨달음을 증득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렀거나 종교적 체험을 통해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었다 할지라도 자신의 저술을 전승된 경전과 구별하지 않고 불설로 가탁한 것은 잘못된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행위로 인해 후대에 불필요한 논쟁과 혼란을 초래시켰기 때문이다.”라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이 매우 합리적이어서 근본적으로 이에 동의하면서도 부분적으로 다른 생각을 해 본다.
그 전반부, “그들은 스스로 깨달음을 증득해 부처님 경지에 이르렀거나 종교적 체험을 통해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었다 할지라도 자신의 저술을 전승된 경전과 구별하지 않고 불설로 가탁한 것은 잘못된 행위라고 생각한다.”라는 부분에는 대해서는 다른 각도에서의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에 동의하려면 “깨달음을 증득해”라는 말이나, “종교적 체험을 통해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었다“는 부분에는, ‘깨달음’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하고, 종교적 체험으로 과연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불교계에서는 ‘깨달음의 증득’에 대해 자주 말을 하지만 과연 이것이 과학적 논증의 단계에 들어가면 함부로 이야기해도 되느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종교적 체험을 통해 부분적인 가르침은 모르겠지만 그 장황한 이야기를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다. 아무리 종교적 영역이라 하더라도 과학적 논증을 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비과학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의 세계나 정신세계를 일반적으로 증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모두 조작된 것이라 한다면, 이는 불교를 한다 하면서 우리가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려 하는 유물론적인 사고에 젖어있는 것은 아닌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지혜의 종교이다. ‘불타’는 말 그대로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불교도의 이상인 열반(혹은 해탈)은 절대자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지혜)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가? 그런데 문제는, 관견(管見)을 통하는 한 그것이 불교의 장점인지 단점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불타의 깨달음은 다른 유일신교의 종교와 달리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고 변용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 권오민
그리고 대승이 비불설일 때 결과적으로 우리 불교 전통은 긴 세월 동안 기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대승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착각하고 그 길을 걸었던 어리석은 자들을 대량 배출한 셈이 된다. 또한 그들은 참으로 어리석어 그 존재 가치까지 평가절하 된다. 설사 그것이 우리역사를 통틀어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원효 스님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대승이 모두 창작이고 조작이며 한 마디로 거짓이라면 천 년이 넘는 역사 속에 수많은 성취자와 수행자에게 깨달음을 준 대승의 진리를 어떻게 평해야 하겠는가. 한 두 편의 제한된 연구 자료 혹은 문제제기만으로 그 심오하고 방대한 정신세계와 진리를 어디까지 얼마만큼 파악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젖비린내 나는 아둔한 중생인 주제에 감히 부처님 세계를 이렇다느니 저렇다느니 못난 소리를 늘어놓은 것 자체가 몹시 부끄러울 뿐이다.
따라서 이런 비과학적인 영역까지 들추기보다 차라리 이것저것 핑계를 떠나 대승경전이 당당히 홀로 설 수 있는 주장을 펴야 경전으로서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으리라고 본다. 대승경전은 비록 부처님 친설은 아니라 할지라도 사상적으로 매우 훌륭하다. 오히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잘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초기불전의 가르침에 위배되지도 않고, 부처님 가르침을 멋지게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처님에 가탁해서 대승경전을 편찬한 것”에 대해서도 다른 각도에서 좀 더 생각을 해 보면, 당시 편집풍습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 당시의 풍습으로는 경전을 부처님께 가탁하지 않고, 자기이름으로 발표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불경스러운 일로서 마땅히 배척돼야 할 일이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당시의 일반적인 편집풍습이 여시아문(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이라는 형태였기에 찬술자 자신이 일부러 자기이름을 밝히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다. 더구나 혼자 쓴 것도 아니고, 여러 대중의 의견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경(經)’이란 비록 형식적이라도 교조(敎祖)의 가르침만을 뜻하는 것이다. <아함경>에 부처님 말씀이 아닌 다른 제자들의 말이 많이 포함돼 있다고 하더라도 그야말로 부처님 앞이거나 부처님 동의하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역시 부처님 가르침에 포함된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어찌 감히 특정 개인이름으로 경전을 조성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부처님 입멸 후에 아라한(阿羅漢)이나 보살(菩薩)의 칭호를 들을 만큼 존경 받을 만한 종교계 지도자들은 부처님이 이미 입멸했으므로 교단의 지도와 통제를 위해서도 단순히 부처님을 추종하는 입장이 아니라 각기 독립적인 존재의 아라한이나 보살임을 나타내 보였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중심이 돼 대승경전을 조성할 경우, 부처님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전들을 만들었고, 부처님이 살아계셨으면 전에도 그랬듯이 이에 대해 당연히 동의해 주셨을 것이라 믿고 당시의 풍습대로 “여시아문(如是我聞)…”했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진리를 전하면서 설주(說主) 등을 거짓으로 꾸민 것은 잘못이다.”라는 비판은 지나쳤다고 할 수 있다. 거짓으로 꾸민 것이 아니라 감히 개인이름을 밝혀 경전으로 조성한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므로 당시의 풍습대로 “여시아문…” 했을 것이란 말이다.
다시 정리해보면,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그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기이름을 감추고 불설로 가탁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경전편찬 풍습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 많은 신도들이 동의했을 것이고, 감히 불경스러운 일이기에 자기이름을 밝히지 못했던 것이며, 파사현정(破邪顯正)하는 일이기에 당연히 부처님께서도 동의하시리라 믿고 그렇게 했을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당시 부파불교에서 ‘대승은 악마의 설’이라고까지 반발한 것도 ‘여시아문(如是我聞)…’ 때문이 아니라, 대승경전이 부파불교 자기네들의 교설을 비판해 들어와서 자기네의 입지가 곤란해지기 때문에 반발했던 것이다. - 마성스님
(3)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진실성
불교경전에는 기본구성체제로 육성취(六成就)라는 것이 있었다. 즉 경전 첫 부분에, “나는 이와 같이 (언제) 세존이 (어디)에서 ○○와 ○○을 설함을 들었다[여시아문(如是我聞…)]” 라고 기술하는 부분이 있다. 이것은 이 경전을 편집하는 사람이 직접 부처님께 들었다는 말인데, 바꾸어 말하자면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신 내용[친설(親說)]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경전서술방식이었을 뿐, 이것이 부처님이 친설하신 것을 확증하는 근거는 아니다. 왜냐하면 가장 먼저 조성된 경전이라는 <니까야>조차도 불멸 후 200여년이 지난, BC 3세기 아소카왕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도대체 부처님의 친설로 된 경전은 남아 있는 게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여시아문…’으로 그 진실성 판단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에 근거해 불설임을 판단해야 할까. 이 문제에 대해, 질문을 바꾸어 “어떻게 해야만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알 수 있겠느냐” 라고 하며, 그 해답을 제시한 학자가 있다[일본인 우이 하쿠주(宇井伯壽)]. 그에 의하면,
“첫째, 부처님의 중요한 사적(史蹟)을 기초로 삼고,
둘째, 부처님 당시의 인도 일반사상을 참고하고,
세째, 원시경전 가운데서 제일 오래된 부분이라고 인정되는 것을 종합하면, 이것만은 꼭 부처님이 설했으리라고 믿어지는 공통된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원칙들을 기둥삼고 부처님의 근본불교를 알려고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어디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를 연구해 불교의 근본사상을 밝혀나간다고 가정했을 때, 이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잠정 결론은 이렇다.
“부처님 친설(親說)이라는 초기경전의 가르침의 핵심은 중도이다. 대승경전도 중도이다. 부처님 친설은 없지만 불설은 엄연히 존재한다. 대승경전도 부처님 친설이 아닌 것은 맞지만, 부처님사상이 아니라는 건 틀렸다. 대승경전도 불설이다.”
(4) 불설 판단의 기준
• 연구방법의 문제와 그 한계성
부처님 법의 전승 및 불설 논의과정을 ‘인도역사를 통해’ 명확히 파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만큼 인도역사는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인도인 그들에겐 역사의식이나 기록유산을 남기는 습관이 없었다. 더구나 경전내용 및 그 진위는 본래 역사기록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또 당시의 경전이 검증 가능한 유물로 현재 전승돼 있지도 않다. 이런 사정으로 대승비불설을 역사과학으로 검증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역사학방법으로도 한계 밖이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연구의 또 하나 걸림돌은 경전이 수백 년간 암송에만 의존해 전승됐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경전을 오직 수백 동안 암송에만 의존해 전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그 방대한 경전 량을 생각하면 이를 상상하기 힘들다. 물론 많은 분량을 많은 사람이 부분 부분 체계적으로 나눠 암송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오늘날 같은 불설문제가 제기되면, 타인이 암송한 부분을 다른 사람이 판단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와 같이 구두로 전승된 불확실한 영역을 과학적으로 규명한다는 것은 난센스다.
더구나 불멸 후 4∼5백년 경 대승경전이 성립됐으므로 부처님 당시와 대승경전 편찬시기 사이에 너무 시차가 멀고, 그 사이에 부파분열이 일어났으므로 분열과정 자체가 불설문제에 연계됐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어떤 특정 부파의 설을 정론으로 삼아 그 기준으로 불설 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은 곤란하다.
그리고 불교의 인도 내외 전파과정에서도 불설논의가 있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전파자는 어떤 경전을 대표적 불설로 전할 것인가가 하는 선택의 문제가 있었을 것이며, 수용자 입장에서도 많은 수입경전 중 무엇이 진정한 불설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 했음이 오늘날 전하는 각지의 불교형태와 경전에 차이가 있음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팔리어로 된 <니까야>를 고스란히 보전하고 있는 스리랑카였다고 하지만, 멀리 떨어진 섬나라인 스리랑카에서 본토에서 일어난 경전들의 불설 여부를 전체적으로 정확히 판단할 입장에 있었다고 볼 근거가 없다. 따라서 스리랑카도 취산선택을 해서 보전한 것이 아니라 상좌부계에서 전해준 것을 그대롤 간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당시 중국에서 행한 AD 4세기경의 위경(僞經)과 의경(疑經) 분류도 인도에서 편찬된 것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편찬된 것에 한했으며, 더구나 교상판석(敎相判釋)은 그 기준 자체가 객관성이 결여된 극히 주관적인 이해관계에서 출발했고, 주목적이 위경여부를 판단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중국도 스리랑카처럼 명확한 불설 판단을 할 입장에 있었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역사자료나 유물로서 변변히 남아 있는 것이 없으므로 불교 발상지인 인도에서조차도 불설논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곤란하다고 하니 무엇에 근거해서 불설 ‧ 비불설을 논의하겠는가.
불설 ․ 비불설에 대한 오늘날의 문제제기는 근세 일본에서 비롯된 ‘대승비불설’이 기점이 됐다. 또한 불교신앙 기초가 상대적으로 얕고 명확한 실증근거 없이는 경전내용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쉬운 서양학계의 연구방법이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영향을 줬다. 이런 영향을 받아 오늘날 대부분 불교개설서나 불설 ․ 비불설이 이들 학설에 따르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일반지식인이나 불교지식인도 불교경전에 대해 대승비불이라는 역사인식을 갖게 됐다. 그러나 엄밀히 살피면 불설 ‧ 비불설 논의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 위에서 살폈듯이 지금으로서는 불설ㆍ비불설에 대한 주장을 직접 실증할 수 없으며,
㉡ 또한 이 문제는 성격상 추리를 통해 타당한 결론을 얻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 그럼에도 일정근거를 통해 불완전하나마 학문적 가설을 세우는 입장들은 모두 추론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 만약 오류를 배제하고 이론상 불설이거나 아니면 불설이 아니라고 확정하려면,
① 역사상 실존인물임이 분명한 붓다의 명확한 정체와 그가 설한 모든 내용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② 불설 주장자는 어떤 내용이 왜 불설에 포함되는지 그것을 입증해야 하며,
③ 만약 어떤 내용이 불설이 아니라고 하려면 - 비불설이라고 주장하려면, 그 내용이 왜 불설에 일치되지 않는지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조건들 중 일부도 오늘날 만족하게 충족시킬 수 없다. 이미 본 것처럼 인도에서 이런 역사학적 요구를 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그리고 이렇게 불가능함도 분명하지만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어느 쪽 주장도 참, 거짓을 단정할 수 없음도 분명하다. 그것은 비록 누군가 당장 엉터리 내용을 부처님 설로 주장하더라도 마찬가지가 된다.
• 실증의 한계성
인도에서 소승불교(부파불교)는 대승불교 출현 후 7세기 전후까지 대승과 더불어 오래 번성했음에도 소승경론에서 특별히 대승사상과 경전을 비불설로 비판한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또 대승경론도 부파불교계열을 소승이라며 저열함을 비판해도 비불설로 비판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근본적으로 불교는 포용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많은 이설을 오랫동안 인정해왔다는 말이다. 때문에 굳이 타설을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불설 ․ 비불설 논의는 인도 밖에서, 불교권 밖에서(주류종교가 불교가 아닌 곳 - 일본, 서양에서), 그것도 근세 이르러 일어난 일이라는 점에 유의할 일이다.
그리고 근세불교학계는 실증적(實證的) 방법에 많이 의존한다. 그러나 사실상 인도에서 일반사료와 유물로 불설문제를 실증하는 것은 한계 밖이다. 불설 ‧ 비불설론 모두 그 결론을 실증할 길은 근본적으로 어렵다는 말이다. 따라서 불설문제에서 오늘날 대승비불설론이 ‘실증적’이라 할 부분은 단지 실증되지 않는 경전의 초경험적 내용을 배척하는 것에 한해서의 일이다. 그러나 실증적 자세를 관철하자면 이를 배척함에도 엄격한 실증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세의 대승비불설론은 명백한 실증근거 없이, 모호한 근거에 의한 가설을 내세워 배척하고 있다. 그리고 연구는 실증적 방법으로 진행해야 함은 기본이다. 그러나 종교문제나 영적인 문제는 실증적인 방법만으로는 곤란하다. 더구나 인도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인해 실증에 도움 될 사료나 유물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실증적 방법이 불가능하다.
진경(眞經)의 표준으로 간주하는 경전이 왜 진경인가 하는 선결문제를 확정하지 못한 채 막연히 이를 표준으로 다른 경전의 위경판단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벌써 오류이다. 똑같이 진위가 의문시되면서 어느 한 형태를 진경으로 정한 후 추론하면, 결국 반대 입장의 주장과 문제를 끊임없이 악순환시키게 된다. 이처럼 불설판단은 실증(實證)과 추리 어느 방식으로도 모두 확실한 결론을 얻는 것이 곤란하다.
더구나 모든 경전을 부처님이 설했다고 보기에는 분량이 너무 많다. 따라서 모든 경전엔 부처님 설법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제자들을 비롯한 후대 선지식들의 법문도 많이 포함돼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대승경전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친설이 아닌 부분, 혹은 제자 등 타인에 의한 법문이라든가 위작(僞作) 가능성은 가장 신뢰받는 근본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각 부분마다 있을 수 있다. 또한 결집과정에 첨가되고 미화됐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 어느 입장의 단정과 추리, 그 어느 것도 ‘실증(實證)’에 있어서는 모두 한계 밖이다.
6. 결론 - 대승불교(大乘佛敎), 어떻게 해야 할까.
• 중도 대선언(中道大宣言)
학자들이 신빙한 것은 초기경전인 아함경도 대승경전도 아닌 율장(律藏)이라 해서 이를 많이 연구했다. 율장을 보면 시대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나 문법학적으로나 부처님 당시부터의 사실을 그대로 기록해 내려온 것으로서 혹 중간에 오면서 가필한 내용이 더러 있기는 하나, 근본적으로 가장 부처님 말씀에 가까운 것으로 학자들은 판단하고 있다.
율장 가운데서도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한 말씀의 기록을 통칭해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한다. 이 초전법륜편이 불교에 있어서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부처님 말씀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그 율장의 초전법륜 편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출가자는 이변(二邊)에 친근치 말지니 고(苦)와 낙(樂)이니라. 여래도 이 이변을 버린 중도를 정등각(正等覺)이라 했다.”
이변(二邊)이라 하면 시비, 선악, 상하, 유무 등이겠는데, 여기서는 ‘고와 낙’을 예로 들었다. 그것은 부처님이 당시 실정에 비춰서 말씀하신 것이다. 당시 외도(外道) 수행자들은 대부분이 고행주의자였으며 다섯 비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고행주의자란 세상의 향락을 버리고 자기육신을 괴롭게 해야만 해탈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병을 따라 약을 주듯이 고행주의자들인 다섯 비구에게 “고와 낙을 버리라”고 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이 세상의 향락만 버릴 줄 알고, 고행하는 이 괴로움(苦)도 병인 줄 모르고 버리지 못하지만, 참으로 해탈하려면 고와 낙을 다 버려야 한다. 이변을 버려야만 중도를 바로 깨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변을 버리고 중도를 정등각했다’는 이 초전법륜이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부처님의 근본법이라는 것은 누구나 확신하고 있으니, 이것을「부처님의 중도 대선언(中道大宣言)」이라고 한다.「욕락(欲樂)과 고뇌(苦惱)의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中道)는 여래에 의해 정등각(正等覺)됐다.」
이 중도 대선언은 남전대장경(니까야) <중부경전>에 있다. 오분률(五分律) ‧ 사분률(四分律) 등에도 기록돼 있으나 남전대장경과 같이 명백하고 정확하지는 못하다. 다만 경전성립에 있어서 율장보다도 더 앞선 <수타니파타(Suttanipata, 경집/經集)>도 중도를 설명하고 있다. 수타니파타의 피안도품(彼岸道品)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이변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도 집착하지 아니 하느니라.」
따라서 ‘중도 대선언’을 불교의 근본출발점으로 삼는데 무리가 없다. 그러므로 대승불교가 부처님 돌아가신 후 몇 백 년 뒤에 성립됐든지 간에 중도사상에 입각해서 설법돼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 법이고, 그렇지 않다면 부처님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선종(禪宗) 역시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그대로 이은 것임에 틀림이 없다.
부처님 재세 시에는 이런 문제가 제기돼도 부처님에 의해 분명한 판단이 이뤄질 수 있었으므로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러나 부처님 열반 후는 해결이 어렵게 되고, 사견(邪見)으로 불설이 훼손될 우려마저 있게 됐다. 부처님 재세 시부터 이런 우려가 있었음은 <장아함경>의 <중집경(衆集經)> 및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에서도 볼 수 있다.
<집이문족론>은 근본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논서로서, 첫 부분에 사리자(舍利子)가 부처님 멸도 후 서로 다툼이 없도록 교리를 미리 결집논술하자는 취지가 나타나 있다. 부처님 열반 후 가섭(摩訶迦葉)도 이런 우려 때문에 제1차 불전결집을 단행한 것이다. 그러나 마하가섭 주도로 이루어진 제1차 불전결집은 불설논의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따른다.
우선 이 결집이 오늘날 경전의 어떤 범위 어떤 내용인지 명확하지 않다. 한편 모든 제자가 이 결집에 동의한 것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실제로 10대제자인 부루나(富樓那)는 늦게 5백 비구와 함께 돌아와 결집내용에 동의하지 않은 채, 자신은 부처님의 별도 뜻에 따르겠다고 한 것으로 남전에 전한다. 이런 사실은 10대 제자도 당시 결집을 불설의 완전한 표준으로 함께 승인한 것은 아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그 여부를 떠나 오늘날 불설 논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그 제1차 결집조차도 구두로 전승되다가 보니, 이미 부파불교시대에 이르러 모두 산실되고 전하지 않는다.
대승비불설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대승불교는 용수(龍樹) 자신의 불교이지 부처님 불교는 아니라고 해 소승불교만이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불교라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 근본불교가 중도에 있음이 확실하므로 이런 주장은 힘이 없다. 그리고 용수가 주창한 대승불교의 근본 뜻 역시 부파불교에서 벗어나 부처님이 설하신 근본불교로의 복구운동이었다.
용수가 대승불교를 선언한 것은 삿된 것을 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破邪顯正)는 것이었다. 즉 유견(有見)이 아니면 무견(無見)인 부파불교의 삿된 변견을 부숴버리고 부처님의 바른 견해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나선 것이 용수의 근본목적이며 사명이었다. 그리하여 용수는 <중론(中論)>과 <대지도론(大智度論)>을 저술해 부처님 근본사상인 중도를 선양했다. 그리하여 그의 제자 제바(提婆, Aryadeva, 170년~270년)와 같이 부파불교의 추종자들과 일대 논쟁을 벌여 변견을 부수고 중도사상을 복구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와 같이 대승경전이란 시대적으로 봐서는 혹 부처님과 5~600년의 차이가 있다 해도 사상적으로 봐서는 부처님 근본사상을 정통으로 계승한 것이 확실하다. 대승경전이야말로 초기경전 연기설의 새로운 전개요 재해석이고 발전적인 확장이었다. 그리고 반야부의 공사상(空思想)은 일차적인 연기설의 변신에 해당한다.
• 대승불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원래 불설 ‧ 비불설 논쟁은 대승경전과 관련된 것으로, 대승불교흥기와 동시에 제기됐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대승경전이 ‘불설’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우리는 아직까지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어떻게 성립됐는가 하는 것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 한 대승경전의 진위 여부는 판가름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앞의 주장들은 모두 추정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는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대승경전이 ‘불설’이라고는 하지만 ‘친설’은 아닌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성립과 대승경전의 편찬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불교의 성립에 대한 명백한 사실이 밝혀진다면 대승경전의 편찬에 대한 의문도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사실이 밝혀질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혹시 대승경전의 편찬에 대한 명확한 사실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현존하는 대승불교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미 대승불교는 대승경전이 불설이든 아니든 이에는 상관없이 종교로서의 확고히 정립돼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대승경전의 위상이나 권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 마성 스님.
따라서 장래에 혹시 전개될지도 모를 대승경전에 대한 불설 ‧ 비불설 논의는 종교로서의 대승불교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대승경전의 성립과정과 그 성격을 규명하는 학술적 연구의 범위를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에서 1901년 대승비불설론을 제기해 승적을 반환할 수밖에 없었던 무라카미 센조(村上專精, 1851~1928)도 “대승경이 역사적인 불타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에 불교를 믿지 않는다면, 이것은 참다운 신앙이 아니다. 그리고 신앙의 확립은 대승비불설론과 관계가 없다.”라고 한 말도 이와 유사한 발언이다.
대승경전이 날조된 후대 창작이라는 것은 ‘불법=친설’이라는 전제에서 비롯된 편견이며, ‘아비달마불교는 초기불교의 왜곡’이라 하는 주장이나 ‘대승불교는 초기불교로 되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는 주장 또한 불교의 전통과 역사성을 무시하고 불교의 시대적 구분을 도식적으로 이해한데서 비롯된 발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근본경전인 <아함경>은 유부(有部)를 비롯한 부파불교의 전승이고, <5니까야> 역시 상좌부(上座部)의 전승으로, 이들 경전들은 출가 승려를 위해 편찬된 교과서로서 이들 초기경전 자체가 이미 상당하게 아비달마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각 부파가 붓다의 취지(dharma)를 밝히려고 했듯이 대승불교 역시 부처님의 뜻을 밝히고 그 뜻을 확장하려는 것이었지 초기불교로 회귀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불교는 스스로 진리를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불교는 부처님이나 경전 자체에 대해 올바른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지 맹신(盲信)을 강조하는 종교가 아니다. 열린 종교인 불교는 맹신적인 자세를 거부하고 이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지혜(般若)를 닦으라고 한다. 그리고 그렇다면, 경전의 불설 여부는 끝내 확정되지 않아도 무방하다. 사실상 진리는 붓다가 설하든 설하지 않았든, 또 누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관계없이, 우리 앞에 언제나 그 자체로서 떳떳하게 진리여야 한다. 따라서 만일 무엇이 진정한 깨달음이고, 또 이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스스로의 지혜로써 판별하는 자세로 임한다면, 대하는 경전이 비록 위경(僞經)임이 분명하더라도, 그것은 최종적인 불교의 목적과 실천에 모두 큰 장애를 일으킬 수는 없다.
이 지구상의 어떤 문명과 문화도 홀로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도 알게 모르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불교도 인도의 바라문과 수많은 사상의 영향을 받아 태동했다. 윤회(輪廻)나 해탈(解脫)에 관한 사상도 이미 고대 인도에 그 기반이 있었다. 이러한 토대 위에 부처님은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신 후 연기(緣起)의 이치와 삼법인(三法印), 그리고 중도(中道)의 원리로 해탈 ‧ 열반의 의미를 다시 재해석 정립하신 것이다. 윤회사상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오직 근본불교의 경전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직된 사고방식으로는 끝내 대승불교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초기불교가 발달하면서 극단적인 분파주의가 생겨났다. 각 계파 간에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해 교단이 분열되고 서로 반목했다. 왜 이런 분열이 일어났겠는가. 누가 조성한 경전이 불설인가 아닌가의 다툼에서 일어난 것이다. 말하자면 불설 ‧ 비불설의 역사는 오래다. 이러한 배경 속에 지나친 분파주의 결과 대중들과의 사이에 간극이 생기고, 이에 불교중흥을 위해 나타난 운동이 바로 대승불교운동이고, 보살사상(菩薩思想)이다. 그리고 대승경전은 근본경전을 모태로 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확장한 것이다.
대승불교가 흥기한 것은 BC 1세기경이나 이 움직임의 태동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됐다. 대승불교의 대두로 그 이전 5세기 간에 걸친 불교를 통칭해 소승불교(小乘佛敎)라 불러 대승불교와 함께 오늘날까지 불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2대(二大) 유파로 존속하고 있다. 대승불교의 대두로 소승불교가 쇠퇴소멸의 길을 달린 것도 아니다. 대 ․ 소승은 서로 정통을 주장하며 투쟁하는 가운데 계속 부파적 발전을 보았고, 그러했기에 불교세력은 동북아시를 비롯해 남방으로는 실론을 위시한 여러 나라에 전파될 수 있었다.
이때 대 ‧ 소승의 다툼은 도식적으로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대 ‧ 소승 둘 다 옳은데 어느 쪽이 더 부처님 법에 가깝고, 어느 쪽이 더 부처님 법을 바르게 확장했느냐 하는 다툼이었다. 따라서 이 다툼은 불교발전에 이바지 한 것이지 쇠멸하게 한 다툼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경쟁과 같은 것이었다. 상대를 말살시키려고 한 투쟁과는 성격이 달랐다.
그리하여 소승의 경우, 스리랑카에서 4∼5세기에 붓다고사(Buddhaghosa, 불음/佛音)와 같은 일단의 학자들에 의해 수많은 주석서들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바탕을 이루어 미얀마 ‧ 타이 ‧ 캄보디아 ‧ 라오스 등지의 소승불교와 함께 남방불교 문화권을 형성했다.
그리고 소승에 대해 대립적 자세를 취하며 일어난 대승불교는 종래의 관점을 혁신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수행관(修行觀)에 있어서 자기형성을 주장하는 대신 대중구원을 선행시킬 것을 주장했다. 열반의 상태에 안주해 버리는 아라한(阿羅漢, Arhan) 대신에 보살(菩薩, Bodhisattva)이라는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했고, 또 이미 열반에 들어간 역사적 불타를 대신에 미래의 초월적 불신관(佛身觀)을 내세웠다. 이러한 변화는 자타카(Jataka:本生譚) ‧ 아바다나(Avadana:譬喩文學) 및 아비달마(Abhidharma ; 論藏)에 근거해 점진적으로 형성됐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상이 조직적으로 종합되면서 새로운 경전(經典)들이 만들어졌다. 대승경전의 성립이 그것이다. AD 1세기 후반에 쿠샨(Kusan:貴霜)왕조가 성립되고, AD 2세기 그 3대 왕인 카니시카(Kania)왕이 즉위한 후 불교는 또 한 차례 흥왕기를 맞았다. 그는 푸르샤푸라(Pursapura - 현 페샤와르/Peshawar)에 수도를 정하고 북인도의 대부분과 서인도 북반(北半),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대월지국(大月氏國)].
카니시카왕은 국내 각지에 불탑과 사찰을 건립하고 적극적인 불교보호정책을 폈다. 이때 불교는 파르티아(Parthia) ‧ 타지키스탄과 그 서쪽 속디아(Sogdia-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지방) ‧ 파레스타인 지방, 심지어 이집트까지 보급됐고, 이 시기부터 이곳의 학승(學僧)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불전(佛典) 번역에 종사하기에 이르렀는데, 쿠샨왕조의 영토가 인도와 중국을 잇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간다라지방에서 마투라(Mathura)지방에 이르는 지역에는 아직 부파불교가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어 설일체유부(說一體有部)를 위시해 대중부(大衆部) ‧ 음광부(飮光部) ‧ 법장부(法藏部) ‧ 화지부(化地部) 등 여러 부파가 병립한 상태에 있었는데, 그중 설일체유부가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유부(有部)가 중심이 돼 아비달마 불교를 더 한층 발전시켜 그 결과 유부학설의 총서인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이 캐시미르지방 학승들의 손에 의해 편찬됐다. 그리고 이 논서를 중심으로 한 학문경향이 성행하게 됐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부파불교는 부파불교 나름으로 발전하고 있을 때, 대승운동은 그 나름으로 계속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하여 BC 1세기에서 AD 3세기에 이르는 사이 대승운동의 결실로 수많은 대승경전들이 출현했다. 그 가운데 초기의 <반야경>은 대승경전을 대표하는 경전으로, 이 경전에 실린 공사상(空思想)은 대승불교의 기본교리로서 대승불교사상의 근본사조를 이루었다.
공사상(空思想)을 정립한 대표적 인물은 남인도 출신의 용수(龍樹, Nagarjuna)로서 그의 <중론송(中論頌)>은 부파불교가 지닌 오류를 결정적으로 논박했다. 그리고 용수 이후에 나타난 여러 경전 중, 특히 <해심밀경>의 유식설(唯識說)은 AD 3~4세기 사이에 미륵(彌勒, Maitreya) ‧ 무착(無着, Asanga) ‧ 세친(世親, Vasubandhu) 등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됐으며, 용수의 공사상과 더불어 대승불교사상의 2대 조류를 형성했다.
진리는 영원해서 변함이 없다. 그러나 변함이 없는 만큼 진리는 유연성과 확장성이 있다. 따라서 편협한 일방적 해석을 고집하는 것은 법집(法執)이다. 마찬가지로, 근본불교를 주장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것에 집착한 나머지 대승불교를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도 바로 법집에 해당한다. 그냥 근본불교를 실천하고 행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대승불교에 집착하고 근본불교를 소승이라 몰아세우는 것도 법집(法執)에 해당한다. 그냥 대승불교를 실천하고 행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화엄(華嚴)의 도리이다. 근본불교만이, 혹은 대승불교만이 바른 불교라는 주장도 하나의 도식이다. 따라서 이것도 법집(法執)이다. 대승경전도 훌륭한 경전이고, 근본경전도 훌륭한 경전이다.
이와 같이 대 ‧ 소승이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에 불교는 화려한 꽃을 피운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대 ‧ 소승의 다툼은 우리의 편협한 지각으로 바라보는 그런 투쟁이 아니었다. 경쟁 상대를 말살시키고 자기네만 살아남으려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활을 건 투쟁이 아니라, 누가 더 부처님 법을 바르게 계승해 바르게 확장하고 있느냐 하는 경쟁에 가까운 다툼이었다. 따라서 그런 치열한 경쟁 속에 불교라는 꽃이 활짝 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부파불교시대에 부처님 가르침을 깊이 연구해 많은 논서(論書)들이 발간돼 많은 논쟁이 있었다. 이때의 분파주의는 한마디로 자기만이 옳다는 주장이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틀렸다. 내가 불설에 더 가깝다. 따라서 내 주장이 옳다.”라는 주장이었다. 이렇게 해서 논쟁을 일삼다가 학문불교에 빠져버림으로써 불교가 종교적인 생동감을 잃어갔다. 또한 이러한 불교가 출가자와 사원(寺院) 중심의 불교가 됨으로써 자연히 교단과 멀어진 일반 민중들은 미신화 돼 감으로써 불교에 큰 위기가 닥쳐왔다.
그래서 이에 대한 반발로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났다. 대승불교운동은 고루한 논쟁불교와 출가자들만을 위한 자리(自利)불교에서, 불탑(佛塔)을 중심으로 해 다시 신앙을 강조하고 자리(自利)뿐만 아니라 이타(利他)까지 강조함으로써 많은 호응을 받았다. 대승불교는 이전의 부파불교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들 수 있다.
첫째 소승이 자기형성(上求菩提, 自利)에 중점을 둔데 반해, 대승은 중생구제(下化衆生, 利他)에 더 중점을 두었다.
둘째 소승이 출가자 위주인데 비해 대승은 재가자와 출가자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재가가와 출가자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음으로써 새로이 생겨난 이상적인 인간상이 바로 보살(菩薩)이다. 그리고 이러함에 바탕 해 상징적 존재로서의 여러 보살과 부처가 탄생됐다. 즉,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등이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말하자면 대승적인 중생구제의 큰 뜻과 신앙을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불교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 이 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한 법사(法師)들은 서원(誓願) ‧ 회향(回向) ‧ 육바라밀(六波羅蜜) 등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경전을 조성했다. 따라서 이 때 만들어진 대승경전들은 부파불교에 견주었을 때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이에 입각해 대승경전은 다 위경이라는 극단적인 주장도 있었다. 이를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이라 한다. 그러나 대승비불설에 대해서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반론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 뜻을 불교근본교설(연기, 중도,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12연기)에 바탕을 두고 있음이 분명한 이상 대승경전도 부처님 말씀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반론으로는 불전(佛典)에 나오는 모든 말이 반드시 역사적 실재인물인 석가모니 말씀만이 아니듯이 대승경전의 작자가 부처님 말씀을 다소 윤색했다 하더라도 이 역시 부처님 말씀에 다름이 없다.
중국은 이러한 바탕 하에 이루어진 경전을 자국으로 가져가 자기문화와 실정에 맞게 번역해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런데 이 번역과정에서 문화적 이질감으로 많은 고민을 하게 됐다. 예컨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 합당한 한자를 선정하는 것, 인도에만 있고 중국에는 없는 개념의 표현방식 등이다. 그래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경전의 정확한 번역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아무래도 원어와 비교했을 때 왜곡되거나 무리한 부분이 없을 수 없었다. 때로는 중국인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불교교리를 이해하기 쉽도록 유교(儒敎)나 도교(道敎) 등에서 개념이나 용어를 차용하기도 했다. 이를 격의(格義)불교라 한다.
그리고 각종 위경(僞經)이 편찬됐다. 기록에 의하면 남북조시대에 46부 56권, 수나라시대에 209부 490권, 당나라시대에 406부 1074권의 위경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불교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었던 수 ‧ 당시대가 위경의 전성기였다고 한다. 문화적 차이로 인해 인도에서 도입된 기존 불경엔 중국인 정서에 맞는 불경이 적어 그들 나름대로 중국인 정서에 맞는 불경을 조성한 것이 위경이 됐다. 헌데 비록 위경이라는 형식이더라도 부처님 근본교설을 훌륭히 표출하고 있다면 위경이 아니라 불지(佛智)의 확장이라 해야 할 것이다. - 학륜
이와 같이 대승경전들이 근본교설에 바탕을 두고 있음이 분명하고, 또 그 참뜻을 새롭게 전하고자 한 것임이 분명한 이상, 그것들을 붓다의 교설이 아니라고 봐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초기불교와 소승불교가 뿌리요 줄기라면 대승불교는 꽃이요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참뜻은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에 있고, 그 진리를 열어 보이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따라서 가탁(假託)한 것을 지금의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의 풍습이었을 수도 있고, 외람돼 자기이름으로 못하고 부처님께 의지한 것이 가탁일 수 있다. 더구나 오늘날 대승불교신자들이 광범위하게 믿고 있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같이 보살사상이 분명 불교임이 틀림없는데, 이를 부정해서 공황상태를 초래할 수는 없다. - 큰수레
<아비달마구사론>의 저자 세친(世親, 바수반두)과 그의 친형인 무착(無着, 아상가)과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세친은 제2의 부처라고 일컬어질 만큼 그 학식과 수행이 대단해서 인도 전역에 그 이름을 떨쳤다. 친형인 무착이 대승법을 수행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형이 대승경전을 읽는 소리가 들리면 귀를 막고, 대승을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비방했었다. 그러던 세친이 후에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과오를 알게 되자, 깊이 참회해 대승을 비방한 자신의 혀를 자르려 했다는 일화가 있다. 참다운 가치와 원대한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고 또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혹 세친과 같은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 이 글을 작성하메 있어서 성철 스님, 마성 스님, 미산 스님, 영석 스님, 이태승 교수, 권오민 교수, 황순일 교수, 안성두 교수, 진현종 교수, 김성철 교수, 전재성 박사, 조인숙 선생, 영운(榮雲)님, 학륜님, 김철님, 명전(茗田)님, 큰수레님 등 많은 분의 글을 읽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 스크랲 해 가시는 분은 출처를 분명히 밝히며 이용해 주세요. 아니면 저적권법에 저촉됩니다. 오류의 문제에 책임소재를 분명히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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