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파불교(部派佛敎)-아비달마불교>
1. 불멸(佛滅) 이후의 불교교단 발전
BC 483년경 붓다 입멸 직후 불교교단은 중인도 일부에 퍼져 있던 지방교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붓다 입멸 후 마하가섭(摩訶迦葉, 산스크리트어 Mahākāśyapa) 존자 등 제자들에 의한 가르침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전도 사업이 왕성하게 이루어짐으로써 교세가 중인도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계속해서 서쪽지방과 서남방으로 전도가 진행되면서 불교교단은 서서히 이 두 방면으로 발전해 갔다. 이러 함은 중인도의 남방은 빈댜(Vindhya)산맥과 데칸(Deccan)고원에 의해 가로막혀 있고, 동방은 고열미개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점차 불교교단은 인도 각지로 진출, 정착해 갔다. 불교가 이처럼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불교의 평등주의와 자비사상이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붓다 입멸 후 100여 년간은 아무런 동요 없이 순조롭게 교단이 발전했다.
그런데 교세가 여러 곳으로 퍼져감으로써 그곳의 기후, 풍토, 습관 내지 문화적 제반 사정에 영향을 받게 되고, 시대 흐름에 따른 사회환경의 변화로 비구들 생활양식에도 변화가 왔다. 이러한 것이 원인이 돼 교단 내에 율법 혹은 교의해석에 이견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불멸 후 100여 년경(BC 4세경)에 계율 상 문제가 쟁점이 돼[십사(十事) 혹은 오사(五事)] 분쟁이 일어남으로써 교단이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와 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로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이때의 분열을 근본분열이라 한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 전반에 이르러서는 인도에 처음으로 등장한 통일국가 마우리아왕조(Maurya dynasty)의 황금시대를 연 아소카왕(Ashoka, 阿育王, 재위 BC 270년~BC 230년)이 불교사상을 국가통치이념으로 삼고, 호불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그는 성왕(聖王)으로 추앙받았다. 그리고 이에 힘입어 불교교세는 비약적으로 발전해 인도전역, 그리고 저 북방으로까지 확산됐다.
이와 같은 불교발전은 더욱 교학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교의해석에 대한 의견 역시 분분해지고 문제제기가 활발해지면서 불멸 후 200년 무렵에는 상좌부와 대중부 내에도 각기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을 지말분열(支末分裂)이라 한다. 이렇게 해서 붓다 입멸 후 100여 년경(BC 4세기)부터 시작된 교단분열은 BC 1세기까지 약 300~400년에 걸쳐 20여개 부파로 갈라졌고, 이시대의 불교를 부파불교(部派佛敎)라 한다.
그런데 불교를 이해하려면 부파불교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부파불교는 불교발전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허리와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부파불교 이해 없이 불교를 논하기 어렵다. 따라서 부파불교의 형성과정과 그 특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2. 교단분열과 불전결집(佛典結集)
(1) 교단의 근본분열(根本分裂)
불멸 후 100여 년이 지날 무렵(BC 4세경)에 불교교단은 중인도의 테두리를 넘어 서방으로 확대돼 있었다. 그 때 동인도 베살리(Vesali, 바이샬리/Vaisali, 毘舍利)라는 도시의 비구들이 정법(淨法,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 합법적인 일)이라 해서 시행하고 있는 10가지 문제[십사(十事)]에 대해 그것이 정법에 어긋난다고 하는 사람들과의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즉, 서인도 출신 야사(Yasa, 耶舍)라는 장로비구가 마가다지방 베살리로 여행했을 때, 그곳 왓지(Vajji, 밧지)족 비구들이 상가(sangha, 僧伽)를 위한다고 하면서 금전, 은전을 모으고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본래 무일물(無一物)을 표방하는 비구는 율법 상으로 금전을 받는 것은 물론, 손을 대는 것조차 금지돼 있었다. 그러나 당시 베살리는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기 때문에 화폐경제가 활발하고, 진보적인 문물이 교단에 일찍 영향을 미친 것이다. 따라서 금전시주(金錢施主)를 받아 이것을 승가생활에 활용하고 있었다. 당시 승려생활이 유행편력에서 승원생활로 변화했다고 하지만, 서인도 비구들에게는 금전시주를 받는 것이 계율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
이를 본 야사 비구는 그것이 비법(非法)임을 지적했으나 오히려 베살리의 젊은 비구들로부터 빈축만 샀다. 이에 야사는 서인도 지방 비구들에게 응원을 청했다. 야사는 서인도 비구들 도움을 받아 금전을 받는 행위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일에 대해 논의를 했다. 결국 이 자리에 모인 700명 장로들은 베살리 비구들이 주장한 ‘십사(十事)’를 비법(非法)으로 단정했다.
1) 십사(十事) 문제
베살리 비구들에 의해 저질러져 문제가 됐던 10사에 대한 것은 각 율전(律典)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염정(鹽淨) - 소금을 보관해 두었다가 먹는 것이 합법적(淨)이라는 주장.
② 양지정(兩指淨) 혹은 이지정(二指淨) - 스님들은 오후 불식이었으나 해 그림자가 손가락 두 마디 사이를 지나기 전까지는 먹을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
③ 취락간정(聚落間淨) - 한번 탁발을 해서 식사를 한 후에도 오전 중이라면 다른 마을에 가서 다시 탁발할 수 있다는 주장.
④ 주처정(住處淨) - 한 곳에서 포살을 하지 않고 다른 곳에 가서도 포살을 할 수 있다는 주장.
⑤ 수의정(隨意淨) - 원칙적으로 상가(僧伽) 일을 논의할 땐 전원참석이 요구되지만, 모든 비구가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사항을 결정한 후에 나중에 다른 비구들이 왔을 때, 결정된 사실을 알리고 허가를 받아도 정법이라는 주장.
⑥ 상법정(常法淨) - 구주정(久住淨)이라고도 하는데, 스승시대부터 관습적으로 행해온 것을 자신이 행하는 것도 합법적이며, 출가하기 이전에 행하던 것을 출가이후에도 행하는 것은 합법적이라는 주장.
⑦ 생화합정(生和合淨) - 오후에도 석밀(石蜜) 등을 섞은 우유를 마셔도 된다는 주장.
⑧ 음도루가주정(飮樓伽酒淨) - 수정(水淨)이라고도 하는데, 아직 발효되지 않은 술을 마시는 것은 합법적이라는 주장.
⑨ 좌구정(坐具淨) - 좌구를 만들 때 자신의 취향대로 만들어도 무방하다는 주장.
⑩ 금은정(金銀淨) - 금 ‧ 은이나 돈을 소유하거나 저축해도 된다는 주장.
이상의 10사는 그 일이 크건 작건 실제적 필요성이 대두돼 베살리 비구들에 의해 행해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열 번 째 금전을 시주받을 것인가의 여부가 그 당시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주목받았다. ‘베살리 논쟁’을 기록한 여러 율에 이러한 점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불교교단 발전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금전을 시주 받아 승가발전에 사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10사의 논쟁은 야사가 서쪽 지방 비구들에게 응원을 요청했기 때문에 동 ․ 서 비구의 싸움처럼 됐던 것 같지만, 동쪽 비구들 중에도 10사에 반대한 비구가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계율을 융통성 있게 지키고 예외를 인정하려고 하는 관용파(지법자/持法者) 비구들과 끝까지 계율을 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엄격파(지율자/持律者) 비구들 간의 대립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붓다 입멸 후 100여 년이 지나면서 상가가 확대돼 비구의 수도 늘어나고, 사회환경이 달라지고, 사고방식의 차이도 생겼기 때문에, 교단에 이러한 대립이 일어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베살리에서 700명 장로들이 모인 회의에서는 엄격파 장로들 주장이 전면적으로 채택됐다. 당시만 해도 완고한 장로비구들 세력이 엄중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10사는 모두 비사(非事)로 판정됐다.
그러나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 비구들도 많았다. 따라서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 많은 비구들이 따로 모여 대중부를 만듦으로써 이로 말미암아 교단이 분열됐고, 교단은 장로들을 중심으로 한 엄격파인 상좌부(上座部, 테라바다/Theravada)와 대체로 젊은 비두들을 중심으로 한 관용파인 대중부(大衆部, 마하상기카/Mahāsamgika)로 갈라졌다. 이것을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 한다. 대중부는 사람 수가 많았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관용파 비구들 수가 더 많았다는 사실이 암시돼 있다.
2) 오사(五事)의 문제
헌데 북방불교권인 중국에 전해진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이라는 논서에 따르면 근본분열 원인이 위의 내용[10사(十事)]과 다르다. 즉, 근본분열 원인이 10사 문제가 아니라 마하데바(Mahādeva, 대천/大天)라는 비구가 ‘아라한(阿羅漢)의 경지’를 밝힌 다섯 가지 견해[오사(五事)]에 대한 의견대립에 의해 상좌부와 대중부 분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다섯 가지 견해는 다음과 같다.
① 여소유(余所有) - 탐욕을 벗어난 아라한은 알고서 음행을 하는 일은 없어도 천녀(天女)에 의한 몽정과 같은 일은 있을 수 있다. 즉, 금욕을 하는 아라한도 성욕을 느낄 때가 있다.
② 무지(無知) - 아라한에게도 무지는 있다. 무명(無明)을 끊은 아라한도 자신이 이전에 가보지 않은 장소 이름이나 처음 만나는 사람 이름은 알지 못한다.
③ 유예(猶豫) - 아라한에게도 의문이나 의혹은 남아있다. 아라한도 처음 보는 물건 이름이나 사람에 대해 의심이 있을 수 있다.
④ 타령입(他令入) - 자신이 아라한이 됐다는 것을 타인이 알려줌으로써 아는 경우가 있다. 아라한과를 얻었지만 스스로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자각하는 경우가 있다.
⑤ 도인성고기(道因聲故起) - 아라한도 소리를 지르며 깨달음에 이르기도 한다. 즉, “아 괴롭구나”하는 소리를 밖으로 내어 무상 ‧ 고 ‧ 무아 등을 통절히 느끼고 성도에 들어가는 일이 있다는 말이다.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에 속한 학승 세우(世友, 바수미트라/Vasumitra, AD 1~2세기경)가 짓고 중국 당나라시대 현장(玄奘, 602?~664)이 번역한 것으로 부파불교 20부의 분파상태와 교리의 요지를 기록한 논서(論書)임.
불멸 후 100여 년이 지나서 위 5사(五事) 문제에 대해 비구들 사이에 이설이 생겼다. 5사는 아라한(阿羅漢, arahan)의 위상에 관한 것이었다. 아라한은 초기불교에 있어서 수행을 통해 최고경지에 이른 비구를 이르는 말인데, 이 아라한이 비록 최고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아직 인간적인 불완전한 5가지가 남아 있다는 점을 들어 다소 아라한을 폄하는 내용이었다.
문제를 일으킨 5사 제창자인 마하데바(대천/大天)라는 아라한은 그의 어머니와 통정을 하고, 아버지를 죽이고, 또 아라한도 죽이고, 나중에 어머니도 죽인 악독한 비구였다고 한다. 헌데 이러한 내용은 상좌부계통에서 대중부계의 마하데바를 심하게 깎아내린 모함인 것 같다. 당시 아무나 아라한이 될 수 없었으며, 더구나 이런 불한당 같은 사람은 도저히 아라한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든 마하데바는 불교교단에 들어와서 최고 경지인 아라한이 됐고, 그런 후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받고 ‘아라한(阿羅漢)에게도 여러 가지 불완전한 것이 있다.’고 솔직히 답한 것이 5사(五事)의 내용이었다.
이에 대한 논박과 논쟁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비구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위와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대중부가 되고, 모두 틀렸다고 하는 고지식한 사람들이 상좌부가 돼서 교단이 두 파로 갈라지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대중부는 부처님을 이상화하고 아라한의 본성을 폄하함으로써 뒷날 대승불교 발단의 전조를 보여줬다는 설이 있다.
이상에서 보다시피 5사(五事)는 상좌부교단에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성자인 아라한(阿羅漢)을 폄하한 것이다. 이때 표결에 의해 다수를 차지한 마하데바의 무리는 스스로 큰 집단임을 의미하는 ‘대중부’라 칭했고, 반면 소수파인 보수파 장로들은 기존입장을 고수하기로 공표하고 스스로를 ‘상좌부’라 칭함으로써 분열됐다는 것이다.
이처럼 근본분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10사(十事)라는 설과 5사(五事)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남방불교 전통에 의하면 10사(十事)를 둘러싼 계율해석 문제로 분열됐다는 것이고, 북방불교의 전통에 따르면 마하데바라는 아라한이 5사(五事) 문제를 제기한 것이 계기가 돼 분열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분열 원인 중 오늘날에는 대개 전자, 즉 10사 문제가 근본분열의 원인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러한 논쟁이 있게 된 다른 측면에는 당시 사회변화가 또 다른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불교교단이 지역적으로 넓게 확장되고, 생활환경이나 사회상황이 변화하면서 붓다 당시부터 내려온 기존율장만으로는 대처하는데 한계가 있었으므로 교단내부에서도 전통을 내세우는 보수파와 변화를 주장하는 진보파 사이에 의견충돌이 발생했던 것이다.
(2) 제2차 불전결집(佛典結集)
불멸 직후 마하가섭(摩訶迦葉)의 주도로 제1차 불전결집이 이루어졌었다. 고대 인도에서는 사람이 만든 문자를 부정한 것으로 생각해 성스러운 경전을 문자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외워서 전승하는 풍습이 있었다. 문자화가 되면 지나다니는 사람의 발길에 밟히기도 하고, 소나 말도 밟고 다닐 수 있다. 그래서 가장 신성하고 안전한 곳, 인간의 마음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비구들이 모인 집회에서 편집 정리된 성전을 함께 합송(合誦)해 - 외워서 그것을 불설로 승인함으로써 경전(經典)이 성립되는 형식이었다.
불멸 후 붓다 교설을 일정한 형태로 보존하기 위해 공식적인 합의를 거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붓다 입멸 직후 마가다국(Magadha) 서울 왕사성(王舍城, 산스크리트어 Rājagṛha)에 500명 비구들이 모여 마하가섭(摩訶迦葉) 주도로 제1차 불전결집이 행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100여년 후 근본분열이 일어났을 당시의 사정을 기록한 스리랑카 역사서 <디파밤사/Dipavamasa)-도사(島史)>와 <마하밤사(Mahavamsa)-대사(大史)>에 의하면, 중인도 베살리(毘舍利, Vesali)에서 계율문제로 분쟁이 일어난 후 700명 상좌부장로들이 왈리까 승원(바리카/婆利迦 동산)에 모여 10사(十事)에 대한 심의를 한 다음, 불전결집(제2차 결집)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상좌부로 지칭되는 노장층들은 젊은층의 새로운 주장[십사(十事)]으로부터 자기들 주장을 지키기 위해 따로 모여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의 동기를 유발한 사람은 서인도 출신 장로비구 야사(Yasa)였지만 회의를 주재한 사람은 레바따(Revata) 장로였다고 한다.
불전결집을 위한 집회는 레바따가 묻고, 붓다 직제자이고, 당시 나이가 가장 많았던 장로 삽바까민(Sabbakamin)이 대답을 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문제가 됐던 계율인 십사(十事)가 정당한가 부당한가를 심의하기 위한 것이 일차적 목적이었다. 그래서 레바따 장로는 상법정(常法淨)에 관해서만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9사(九事)는 모두 율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판정했다. 그리고 야사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하여 젊은 비구들의 주장을 근거 없다고 부정했고, 그것을 ‘십사비법(十事非法)’이라고 한다. 이후 계속해서 제2차 불전결집이 진행됐다고 한다.
이 집회는 8개월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불멸 직후 마하가섭의 주도로 이루어진 제1차 결집이 경장과 율장의 결집이었다면, 불멸 후 100여 년(BC 4세기)에 이루어진 제2차 결집은 주로 율장에 대한 해석과 결집이라는 성격 차이가 있었다. 이 집회를 ‘칠백결집(七白結集)’ 혹은 ‘베살리(Vesali, 毘舍離)결집’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를 계기로 장로파와 진보파 사이의 첨예한 대립으로 상좌부와 대중부로 근본분열이 일어났고, 이후 부파불교시대로 들어가게 됐다.
(3) 제3차 불전결집(佛典結集)
제2차 불전결집이 있는 후 다시 200여 년이 지난, 불멸 후 300여 년경인 BC 3세기 중엽에 제3차 불전결집이 이루어졌다. 이때는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마우리아 왕조 전성시대인 아소카왕(Ashoka, 阿育王, 재위 BC 270년~BC 230년) 치세였다. 당시 외도들이 의식(衣食)을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가짜 불교도가 돼 불교사회를 혼탁하게 하고 있었으므로 독실한 호불군주인 아소카왕은 이를 바로잡아 외도들로부터 불교를 보호하고, 국론통일을 위해 당시 최고의 진리로 인정받던 불교를 국교로 인정했다. 그리고 불교에 있어서 경(經) ‧ 율(律) ‧ 논(論) 삼장이 최초로 성문경전의 형식으로 편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헌데 초기경전은 한명의 승려에 의해서 암송된 것이 아니라 율장 암송자(vinaya-dhara), 가르침 암송자(dhamma-dhara), 아비담마 목록 암송자(mātikā-dhara) 등으로 표현되는 암송전문승려집단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전승됐던 것 같다.… 인도불교의 승단들이 몇몇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적으로 거대한 사원군(寺院群)을 형성하게 된 배경에는 많은 수의 암송전문승려들을 조직화해 체계적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숨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초기경전은 이 시기에 이미 변형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동일한 집단 내부에서는 합송을 통해 변형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었지만, 승단이 지리적으로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져나가고 점차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사상적 배경에 노출되면서 서로 왕래가 부족했던 집단들 사이에서 합송을 통해 변형을 줄이고 부족한 부분을 보안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 황순일.
그리하여 북전 <아함경>과 남전 <니까야>의 내용에 차이가 있는 점이 부파불교시대 각 부파에서 조성한 경전이기에 부파별 경전에 차이가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부처님 사후부터 이때까지 약 200여년의 구전의 시간이 흘렀는데, 그 사이에 불교계 내부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니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인간으로서 부처님의 실체는 점차 신비화되고 신화로 채색돼갔으며 생생한 사실적인 가르침은 중생들의 생각과 논리에 의해 조금씩 변질돼 갔고 문자가 발명돼 초기의 성문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부파간의 경전 결집과 교리논쟁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때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교리의 통일을 기하고, 해이해진 교단을 재정비하는 한편, 외국에 불교를 전파하려는 의도가 있어 제3차 불전결집을 주선한 것이다.
이때 아소카왕은 근본불전의 가르침을 기존 상좌부 교리를 기본으로 해 모두 팔리어로 결집하라고 공표해 팔리어가 공식적인 불경어가 됐다. 그리고 1, 2차 결집 때는 경(經) 혹은 율(律)만 결집했지만, 이때는 논장(論藏)까지 결집해 불경의 영역이 훨씬 확장 정비됨으로써 비로소 <팔리어 삼장(三藏)>의 기초가 성립됐다.
이 집회는 1,000여명의 대표들이 모여 무려 9개월간에 걸쳐 개최됐는데, 아소카왕은 그의 동생이자 종교적 스승인 목갈리풋타 팃사(Moggaliputta-tissa, 목건련제수/目健連帝須) 존자로 하여금 주관케 했다. 목갈리풋타 팃사는 아쇼카왕의 지지를 받아 상가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상가를 숙정했다. 이때, ‘분별설(vibhajjavada)’을 기본으로 하고, 자기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만든 논서 <논사(論事, Kathavatthu)>를 제시하면서 정법을 복원했다.
‘분별설’이란 모든 것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단정(一向記)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진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싸움이 일어난다. 현실은 그러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섞여 있다. 이러한 인식에 입각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구별(분별)해서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분별설’의 입장이다. 그리하여 목갈리풋타에 의해 정비된 상좌부를 분별설부(分別說部, Vibhajjavāda)라 했다.
이 집회가 수도 파탈리푸트라(Pātaliputra, 波陀利佛城, 華氏城 - 현재의 비하르주의 주도 파트나 부근)의 계원사(鷄園寺)에서 행해져서 이를 ‘아소카결집’, ‘파탈리푸트라결집’, ‘화씨성결집(華氏城結集)’, 혹은 ‘일천결집(一千結集)’이라 부른다.
제3차 불전결집은 매우 엄정해서 아소카왕은 상좌부 분별설부 이론을 반대하고, 공성(空性)을 주장하면서 부처님 법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대중부(大衆部) 승려들을 이단으로 규정해 모두 흰옷을 입혀 교단에서 추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제3차 불전결집 이전까지를 대개 초기불교(원시불교)라고 한다.
그리하여 제3차 불전결집이 끝난 후 아소카왕은 자신의 통치이념인 불법에 의한 정복을 실현키 위해 주변국으로 전법사(傳法師, 포교사)를 파견했다. 이때 아소카왕의 후원을 받은 상좌부계가 강력해서 이 계통(분별설부)의 불교가 남방 스리랑카에 전해졌다. 이것이 남방 상좌부라는 부파로 정착해 현재의 남방불교 기초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 무렵에 마투라(Mathurā)에서 서북인도의 간다라(Gandhāra), 카슈미르(Kashmir), 중앙아시아, 그리고 멀리 서방 마케도니아 등 9개국으로 전파됐다고 한다.
(4) 교단의 지말분열(支末分裂)
한번 갈라진 교단은 다시 그 내부에서 분열을 거듭하게 됐는데,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불멸 후 200여년 무렵에는 교의해석문제로 의견이 갈려 상좌부와 대중부 내에도 각기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근본분열에 이어 시작된 교단분열은 이후 2~300년 사이 점차 20여개 부파로 분열됐다. 이것을 지말분열(支末分裂)이라 한다.
오늘날 부파불교는 20여개 부파가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크게 상좌부 계통과 대중부 계통으로 나뉜다. 지말분열은 먼저 대중부에 내부분열이 일어났다. 대중부는 불멸후 200여년이 지나 네 번의 분열로 8개 부파가 성립됐고, 대중부를 포함해 본말 9부파가 형성됐는데, 처음 일설부(一說部) ․ 설출세부(說出世部) ․ 계윤부(鷄胤部)로 갈리고, 이어서 다문부(多聞部) ․ 설가부(說假部)가, 또 제다산부(制多山部) ․ 서산주부(西山住部) ․ 북산주부(北山住部) 등 본말 9부파가 형성돼 아소카왕 이전에 이미 분열이 완료됐다.
이에 비해 상좌부는 인도불교의 주류를 형성하며 한동안 화합하고 있었지만, 결국 분열이 일어났다. 상좌부는 불멸 후 300년 무렵인 BC 3세기부터 기원 전후 사이, 약 300여년에 걸쳐 지말분열이 일어났는데, 아소카왕시대가 절정기였다고 한다. 먼저 설일체유부(說一體有部) ․ 설산부(雪山部)로 갈리고, 설일체유부에서 다시 독자부(犢子部)가, 독자부에서 법상부(法上部) ․ 현주부(賢冑部) ․ 정량부(正量部) ․ 밀림산부(密林山部)가 생겨나고, 또 설일체유부에서 화지부(化地部)가, 화지부에서 법장부(法藏部)가, 다시 설일체유부에서 음광부(飮光部)가, 이어서 경량부(經量部)가 독립돼 11개의 부파로 나뉘었다. 이렇게 해서 상좌부 11개파 대중부 9개파로 총 20여개의 부파가 있게 됐다.
특히 아소카왕 때는 불교문화가 흥성해서 교의해석에도 의견이 분분했기에 분열의 절정기였을 뿐만 아니라 헬레니즘(Hellenism) 문화권과의 활발한 교역으로 도시상업이 흥성하고, 사원경제도 풍요로웠다. 이에 각 부파교단들은 안정적으로 교리연구에 몰두하는 본격적인 부파불교시대가 열렸고, 헬레니즘 영향을 받은 새로운 불교미술도 흥기했다. 지말분열 결과 나타난 부파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상좌부(上座部, 산스크리트어 Sthaviravāda, 팔리어 Theravada) 계통>
①설산부(雪山部, Haimavata) - 제1차 분열: 불멸 후 300년 초
②설일체유부(說一體有部, Sarvāstivāda) - 제1차 분열: 불멸 후 300년 초
③독자부(犢子部, Vatsīputrīya) - 제2차 분열: 불멸 후 300년 중반
④법상부(法上部, Dharmottara) - 제3차 분열: 불멸 후 300년 중후반
⑤현주부(賢冑部, Bhadrayānīya) - 제3차 분열: 불멸 후 300년 중후반
⑥정량부(正量部, Sammitīya) - 제3차 분열: 불멸 후 300년 중후반
⑦밀림산부(密林山部, Channagirika) - 제3차 분열: 불멸 후 300년 중후반
⑧화지부(化地部, Mahisasaka) - 제4차 분열: 불멸 후 300년 후반
⑨법장부(法藏部, Dharmaguptaka) - 제5차 분열: 불멸 후 300년 후반
⑩음광부(飮光部, Kāśyapīya) - 제6차 분열: 불멸 후 300년 말
⑪경량부(經量部, Sautrāntika) - 제7차 분열: 불멸 후 400년 초
<대중부(大衆部, Mahāsāṃghika) 계통>
①일설부(一說部, Ekavyāvahārika) - 제1차 분열: 불멸 후 200년 초
②설출세부(說出世部, Lokottaravāda) - 제1차 분열: 불멸 후 200년 초
③계윤부(鷄胤部, Gokulika) - 제1차 분열: 불멸 후 200년 초
④다문부(多聞部, Bahuśrutīya) - 제2차 분열: 불멸 후 200년 중
⑤설가부(說假部, Prajñaptivāda) - 제3차 분열: 불멸 후 200년 중 범어(prajñapti-vādin)
⑥제다산부(制多山部, Caitika) - 제4차 분열: 불멸 후 200년 말
⑦서산주부(西山住部, Aparaśaila) - 제4차 분열: 불멸 후 200년 말
⑧북산주부(北山住部, Uttaraśaila) - 제4차 분열: 불멸 후 200년 말
<기타 - 이외의 자료에 나타나는 부파>
‧ 설전부(說轉部, Sankrantika)
‧ 설경부(說經部, Sautrāntika)
‧ 왕산부(王山部, Rajagiriya)
‧ 의성부(義成部, Siddhatthaka)
‧ 동산부(東山部, Pubbaseliya)
‧ 서왕산부(西王山部, Apararajagirika)
‧ 안달라파(案達羅派, Andhra)
‧ 분별설부(分別說部, Vibhajjavāda)
이상과 같이 상좌부와 대중부를 합쳐 20여개 부파로 분열됐으며, 이들을 소승 20부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여러 연대기에 나오는 부파명칭을 모두 종합해보면 20여개 부파 이상이 된다. 그리고 상좌부에 속한 부파만을 소승불교라 하고, 대중부 쪽의 부파들은 대승불교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3. 부파불교의 특징
(1) 부파불교의 성립
불멸 이후부터 근본분열을 거쳐 부파불교가 성립하기까지 시기의 불교를 보통 초기불교 혹은 원시불교(原始佛敎)라고 부른다. 부파불교 성립시기를 아소카왕시대 전후라고 한다면, 초기불교는 아소카왕 이전까지의 불교에 해당한다고 보겠다. 따라서 초기불교(원시불교)를 추적하는 자료는 팔리어 삼장 중,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이다. 이 시기엔 아직 논장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파분열이 완성된 시기(기원 전후 경)가 되면 부파불교는 삼장 중에서 경 ‧ 율을 제외한 논장(論藏)에 그 특색이 드러난다. 원칙적으로 경 ‧ 율은 모든 부파에 공통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논장은 주로 부파불교시대에 발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붓다 가르침인 법(dharma)에 대한(abhi) 설명과 주석을 아비달마(Abhidharma)라 하는데 이 아비달마가 논(論)이며, 논의 모임이 논장(論藏, Abhidharma piṭaka)이고, 논장의 성립은 곧 삼장(三藏)의 성립을 의미하며, 부파불교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술한 바와 같이 부파불교가 완성돼가는 시기는 보살 중심의 대중운동 - 대승불교가 드러나는 시기와 겹치게 된다. 대승불교운동은 이 부파불교와 공방 속에서 자라나며, 부파불교는 대승불교가 흥기함으로써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발전해나가 AD 4세기경이 돼서 부파불교에 있어서의 논장체계가 공고히 된다. 단순히 생각하면 부파불교가 끝나고 그리고 AD 1세기 경 대승불교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이들 부파불교는 대승불교가 출현해 그 세력을 확산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당당하게 존재하면서 자신들의 교학체계를 발전시켜나갔다. 말하자면, 대승불교 흥기와 부파불교 발전이 시기적으로 겹쳐진다는 말이다.
(2) 부파불교의 특징
불교 전파지역이 넓어지고, 시대변천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로 불교교단 내에 분열이 일어나서 부파불교시대가 전개됐지만 거기에는 분열할 수밖에 없었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듯이 부파불교엔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었다. 굳이 공과를 따지기 전에 불교 발전과정에서 허리 역할을 단단히 했던 부파불교로서는 그 시대 상황에 걸맞은 발전상황이 있었다. 그것을 부파불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 아비달마(阿毘達磨) 중심의 학문불교
분열된 각 부파는 저마다 구전되는 가르침[아가마(Agama)-아함(阿含)]을 불경으로 고정시킨 뒤, 붓다 가르침인 법(法, dharma)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에 착수해 교의를 조직화 내지 체계화시켜나갔다. 이 정밀한 교의 연구체계를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또는 아비담(阿毘曇)이라고 했다. 즉, 붓다가 설한 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일종의 주석(註釋)인 셈이다.
이런 법에 대한 연구인 아비달마는 초기불교 당시에도 부분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지만, 부파 성립으로 더욱 특색 있게 진행됐다. 그리하여 각 부파는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결집해 간직했는데, 이러한 연구문헌의 집성을 논장(論藏, Abhidharma piaka)이라 했다.
이와 같이 부파불교 교학은 경(經)에 대한 주석인 논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교리를 중심으로 한 학문불교의 성격이 강했다. 즉,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어렵고 번쇄한 이론중심 불교였다. 그러나 이러한 폐단 가운데에도 교리가 체계화됨으로써 중요한 불교용어 개념들이 이 때 확립될 수 있었고, 이것은 뒤에 대승불교가 발달하는 데에도 중요한 기초가 됐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 속에 각부파가 경쟁적으로 방대한 양의 전문적인 아비달마를 발표함으로써 논장(論藏)이 형성돼, 비로소 불교의 경(經) ‧ 율(律) ‧ 론(論) 삼장이 완성됐다. 그러나 역시 어려운 불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대중과의 거리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것이 원인이 돼 BC 1세기 경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대승불교였다.
② 성문승(聲聞乘) 중심 불교
불교교단의 정계(正系)는 원시교단을 계승한 부파교단이었다. 즉 부처님 직제자인 마하가섭(摩訶迦葉, Mahākāśyapa)이나 아난다(阿難陀, Ananda), 우팔리(優婆離, Upali) 등에 의해 수지된 불교는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계승돼 부파교단으로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부파교단 불교는 제자의 불교, 배우는 입장의 불교였으며, 남에게 가르치거나 베푸는 입장의 불교는 아니었다. 이러한 수동적인 불교였기 때문에 대승교도들로부터 성문승(聲聞乘)이라 폄하됐다. 성문(聲聞)이란 부처님 말씀을 들은 사람, 즉 제자라는 뜻이다.
③ 승원(僧院) 불교
부파불교는 은둔적인 승원 불교(사원 불교)였다. 그들은 승원(사원) 깊숙이 숨어서 금욕생활을 하고, 학문과 수행에 전념했다. 따라서 가두의 불교는 아니었다. 승가(僧伽)가 점차 조직화되고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갖춤에 따라 출가자들은 재가신자들을 찾아다니면서 교화하고 걸식하는 생활을 하지 않게 됐다. 그들은 사원에 안주하며, 명상과 열반의 적정(寂靜)만을 추구하는 생활을 하고, 학문과 수행에 전념했다.
④ 자기수행에 치중
부파불교에서는 사회와 다른 사람에게 베풀기보다는 자기완성을 중시했다. 일체 모든 유정(有情)을 건지겠다는 이타행(利他行)보다는 자기수행에 더 치중하는 불교였다는 말이다. 따라서 부파불교의 수행구조는 단혹증리(斷惑證理), 즉 번뇌를 끊어서 진리를 증득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자기성찰에 우선했다. 부파불교가 이처럼 자리행(自利行)을 강조한 것은 계율문제와도 관계가 깊다. 부파불교는 엄격한 계율을 적용했기 때문에 이타행을 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타인의 구제보다는 먼저 자기수행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불교가 됐다. 그 때문에 훗날 대승교도로부터 소승(小乘)이라 폄하됐다. 불교는 본래 자리 타리(自利他利), 자각 타각(自覺 他覺)이어야 할 것이나, 부파불교는 자리 자각(自利自覺)에 중점을 두고, 남을 구제하고 깨닫게 하는 대중구제에는 소홀한 경향이었다. 이것 역시 대승불교 흥기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⑤ 계율의 강조
승원중심, 출가중심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계율이 강조됐다. 지금도 부파불교의 전통을 잇고 있는 남방불교는 엄격한 계율을 지키고 있다. 붓다가 정한 것은 무엇이든 정한대로 받아들이는 보존적 형식주의를 고집하고 있다. 따라서 계율에 대해서도 시대변화에 적응하려고 하지 않았다.
⑥ 승속(僧俗)의 구분 엄격
부파불교 교리의 특징은 출가주의라는 점이다. 출가해서 비구가 되고,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수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따라서 출가를 전제로 해서 교리나 승가체제, 수행형태를 조직했다. 부파불교가 승원중심, 출가자중심, 계율중심의 불교였으므로 승(僧)과 속(俗)이 명확히 구분돼 승려들은 227개의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나 속인들은 스님들 생활을 돕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오계(五戒)만을 받았다. 이처럼 부파불교는 계율에 따라 승 ‧ 속이 구분됐다. 오늘날에도 남방불교에서는 승 ‧ 속의 구분을 엄격히 한다. 재가자는 승가를 돕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할 정도로 승속의 구분이 엄격했음이 결국 재가자의 불만으로 이어져 이것이 대승불교 흥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⑦ 법(法)중심 불교
물론 붓다에 대한 존경이나 경외심은 한결같았지만, 붓다 가르침인 경(經)에 대한 주석에 치중했기 때문에 자연히 불(佛) ‧ 법(法) ‧ 승(僧) 삼보 가운데서 법이 중심이 됐다.
⑧ 소박한 실재론(實在論)을 중시
눈에 보이는 산, 나무, 인간들은 연기적 존재이기 때문에 모두 공(空)하지만 그것들을 구성하는 최소단위인 법은 ‘있다[아공법유(我空法有)]’고 봤다. 따라서 부파불교에서는 열반과 생사도 실재한다고 봤고, 그러므로 자연히 생사를 버리고 열반의 세계로 가는 것을 중시했다. 부파불교에서 현세를 떠난 출세간적인 면이 강조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또 부파불교에서는 번뇌도 실재한다고 봤기 때문에 번뇌를 끊어야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⑨ 아라한(阿羅漢)의 불교
오직 석가모니 한 분만을 부처님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부파불교에서는 아라한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남방불교에서는 법당에 오직 붓다 한 분만을 모신다. 보살은 없다. 여기에는 붓다를 존숭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범부가 성불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남방불교권에서는 우리나라처럼 불교신자들끼리 “성불하십시오”라고 인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부파불교는 아라한과를 이상으로 삼았으므로 출가자들은 번뇌를 끊는 자기완성에만 주력했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의 이상적 종교상을 비좁게 만든 결과를 낳았다. 왜냐하면 붓다는 자기완성을 향한 깨침과 일체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는 이타행(利他行), 양면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타행에 소극적이었다는 바로 이점이 부파불교의 큰 약점으로 지적됐다.
불타관(佛陀觀)에 대해서도 보수파(상좌부)가 어디까지나 인간이 불타가 됐다고 하는데 비해, 진보파(대중부)는 불타를 초자연적 존재의 화신(化身)으로 봤으며, 상좌부가 인간은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해도 어디까지나 아라한(阿羅漢)은 돼도 불타는 될 수 없다고 했는데 비해, 대중부는 보살의 도는 만인에 열려 있으므로, 인간은 조건에 따라 불타도 될 수 있다고 해서 대립했다.
⑩ 왕실, 대상인의 재정지원
부파교단은 국왕이나 왕비 또는 대상인 등의 귀의와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상인들은 타국으로 가서 이민족이나 다른 계급의 사람들과 자유로이 교제해야만 했기 때문에 카스트(caste)제도를 엄격히 지키는 브라만교는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농민은 브라만교와 강하게 결부돼 있었으나, 상인계급 중에는 불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 부상(富商)이나 지도자를 장자(長者)라고 했다. 이처럼 왕실이나 대상인들의 원조에 의해 승단은 그에 속하는 장원(莊園)에 의존했으므로 생활걱정 없이 출세간주의를 관철해 연구와 수행에 주력할 수 있었으며, 이로써 분석적이고 치밀한 교리연구를 중시하는 아비달마불교가 성립될 수 있었다.
장자로서는 붓다에게 귀의한 급고독(給孤獨/Sudatta/須達)과 같은 사람이 특히 유명했는데, 이 외에도 초기불교시대부터 불교신자로서 유력한 장자가 많았다. 따라서 경전에도 장자가 붓다 설법의 대상으로 종종 등장한다.
⑪ 각부파마다 결집한 경전이 있었다.
아비달마시대는 각 부파마다 그동안 구전돼온 붓다 가르침을 자신들이 보고 듣고 이해한 것을 기초로 경전을 만들어 나갔다. 이때는 경으로 정리하는 초기단계로서 각 부파마다 경전이 있었으며, 부파별 특징에 따라 경전의 내용에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하여 세친(世親)과 논쟁을 벌인 중현(衆賢)은 “각 부파에서 전승한 교법에 따라 서로의 경을 부정하게 되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상좌부와 대중부의 부처님 법에 대한 입장도 달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각 부파 나름대로 조성한 경전이 있었으나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은 BC 3세기 아소카왕의 제3차 불전결집 때 상좌부가 주도해 만들어 남방 상좌부에 전한 <니까야(Nikaya)>와 AD 2세기 카니시카왕 때의 제4차 불전결집 때 설일체유부 중심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아가마(아함경)> 중의 <잡아함>과 <중아함>, 그 외에 법장부의 <장아함>, 대중부의 <증일아함>이 남아 있으며, 나머지 각부파에서 결집된 경전들은 모두 산실됐다.
이상과 같은 배경을 가진 부파불교는 경전에 대한 주석과 연구를 주요 관심사로 삼았던 불교였다. 부파불교를 아비달마불교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와 같이 아비달마불교는 근본적으로 학문불교였는데, 이런 학문적인 작업은 전문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전문가들은 출가한 스님들이고, 그 중에서도 지식이 많은 학자 스님이 중심이 됐다. 따라서 아비달마불교, 즉 부파불교는 출가자 위주의 전문불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의 부파불교는 대승불교가 발생하기 이전 불교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불교가 심층적으로 발전한 반면 대중들로부터는 유리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대승불교가 일어나는 주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현실의 괴로움에 대해 연기설에 입각해 고찰하고, 바른 지혜와 수행으로 해탈하는 것이다. 이런 기본원칙 위에 교리를 세운 것이기는 하지만 부파불교는 실제수행보다는 번쇄한 교리해석에 치우치는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이에 대해 반발하고 비판하는 집단에 의해 대승불교가 싹튼 것이다.
4.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불교
(1)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의 성립과 그 특징
아비달마(阿毘達磨)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됐었다. 즉, 설일체유부에서는 ‘부처님 법(dharma)을 본의에 맞게 밝히는 것’이라는 대법(對法)의 뜻이었다. 이에 비해 일반 상좌부에서는 ‘뛰어난 법, 수승한 법(승법/勝法 혹은 증상법/增上法)’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이 양자는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다. 둘 다 같이 붓다 가르침의 원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마(dharma)라는 말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사회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비달마(Abhidharma)라는 말은 불교 독자적인 용어인데, <아함경>에서부터 나타나서 ‘법에 대해’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아비(abhi)에는 ‘향하여, 대하여’라는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나게, 매우’라는 의미가 있어서 ‘아비달마’를 뛰어난 법 혹은 수승한 법이라 해석했고, 설일체유부처럼 ‘대법(對法)’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아비달마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abhi + dharma = 대(對) + 법(法)」으로서 대법(對法)이라 하겠는데, 교법(dharma)에 대한(abhi-) 연구라는 뜻이 된다. 붓다 자신은 진리를 달마[Dharma, 법(法)]라 불렀고, 불교도들은 이것을 아가마(Agama, 가르침의 전승)라고 불렀으며, 아비달마는 달마(진리)에 대한 학습 ‧ 연구라는 의미이다.
아비달마가 성립된 것은 원칙적으로 <아함(阿含)>이나 <니까야(Nikaya)>의 경설이 붓다의 뜻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보아 일종의 부족분을 메우고, 나아가 보다 자세한 설명을 베푼다는 관점에서 출발했다. 이와 같이 아비달마(阿毘達磨)란 붓다 가르침에 대한 학승들의 연구, 주석, 설명, 조직에 의해 하나의 지적체계로 정리한 결과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로 출현한 갖가지 저작 - 교의의 해설서, 강요서, 논술서 등도 마찬가지로 아비달마로 불린다.
초기경전인 <아함경(阿含經)> 가운데 나타나는 아비달마적 요소로서는 대개 두 가지 종류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교설 속의 어구(語句)에 대한 주석을 한 것이고, 또 하나는 갖가지 교설을 정리하고 배열 ‧ 조직한 것이다.
붓다 교법은 일반적으로 쉬운 말로 이야기됐으며, 특이한 용어나 난해한 어구가 사용된 적은 드물다. 그러나 <아함경>에서 붓다 자신이 청중을 위해 그가 사용한 말의 의미를 주석하거나 부연해서 설명을 하는 경우가 있었고, 설법을 마친 후 제자 가운데 뛰어난 사람(이를테면 사리풋타, 목갈라나)이 그것을 해설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또 두 사람의 유력한 제자가 서로 대론(對論)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것이든 그렇게 이루어진 설명 ‧ 해석을 옆에서 듣고 있던 자(대개 붓다의 시자였던 아난다)가 훗날 그 상황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기술하는 것이 <아함경> 조성의 원칙이었다. 그러한 형식으로 이루어진 경장(經藏)이 승단 안에서 전승되는 동안 거기서 아비달마적 연구가 고조되고, 점차 부가 ‧ 증광이나 정리 ‧ 안배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경장을 보면 그 중에는 원초적이고도 간결한 교설을 그대로 전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비달마적 경향이 진전돼 이제 거의 하나의 아비달마 논서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내용이나 형식이 갖추어져 있는 부분이 있다. 이를테면 팔리어 경장 중 소부(小部, Khuddhaka nikaya)에 속하는 <닛데사(Niddesa, 義釋)>는 사리자(舍利子, 사리풋타/Sāriputta)의 작품으로 여겨지며, 매우 아비달마적인 초기논장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빠띠삼비다막가(Patisambhidamagga, 無碍解道)>는 역시 소부에 속하는 사리자의 작품인데, 이는 여러 교리적 개념들에 대해 분석하고, 실천수행 덕목을 해설한 것으로서, 이것도 상당히 아비달마적인 내용이어서 실제로 논장에 속하는 것으로 취급될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초기경전 안에서 갖가지 교설을 정리하고 배열 ‧ 조직한 경우도 있다. 초기경전에서 논사들이 교설을 정리하고, 조직한 일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숫자와 관계있는 교설을 그 숫자대로 정리해 일법(一法), 이법(二法), 삼법(三法)과 같은 순서로 배열하는 방법과 교설을 내용에 따라 분류, 구별해서 동일한 주제를 가진 것들을 모아 한 곳에 정리 배열하는 방법이다. 전자를 ‘법수(法數)’에 의한 정리라 하고, 후자를 ‘상응(相應)’에 의한 정리라고 한다. 각각의 짧은 경(단경/單經) 가운데에는 법수에 의해 정리된 경우도 있고, 몇 개의 단경을 모은 경전들에다가 그러한 방법을 적용시킨 것도 있다. 또 다수 경전들을 모아 동일한 방법으로 전체를 정리한 것이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이다. 그리고 상응(相應)에 의해 정리하는 방법은 단경 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경군(經群) 상에서 그것을 적용시킨 예는 많은데, 다수의 경군을 그 같은 방법으로 정리한 것이 <상응부아함(相應部阿含)>, 즉 <잡아함경(雜阿含經)>이다.
이상과 같이 아비달마가 점차 형성돼 갔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설명과 해석 모두가 붓다 생전에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중 상당부분은 붓다 입멸 후에 세월이 지나고 불교 전파지역의 확대에 따라 교설 속 어떤 어구에 대해 주석하고 설명할 필요가 더욱 많아지게 됐다. 따라서 승단 내부에서 점차로 발전한 아비달마적 연구내용을 제자들이 부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렇게 부가된 부분이 점점 더 증대해 마침내 <아함경전> 속에 도저히 포함시킬 수 없을 만큼 양과 질이 불어났을 때, 아함(경전)으로부터 분리 독립함으로써 아비달마라고 하는 불교성전의 새로운 장르가 성립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부파불교시대에 아비달마가 지나치게 번성한 데에 대해 과거 곱지 않은 시각으로 비판을 가했지만 이렇게 아비달마의 단점만 지적해서는 진실을 이해하기 힘들 것 같다. 실제로 <구사론俱舍論)>을 비롯한 아비달마 논서(論書, Abhidharma-sastra)를 읽을 때 지나치게 형식적이며, 너무 사소한 문제에 관한 논의가 많았음도 알 수 있다. 그 무수한 술어의 나열을 접하게 되면, 그들의 사상적 노작이 오늘에 있어서 전혀 무의미하고, 비현실적이며, 한가한 희론(戱論)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지나치게 아가마(Agama) 경전의 어구에 집착하는 경우가 있으며, 전통적 보수적이거나 분석적 형식적인 해석에 치우친 사변철학(思辨哲學)으로 흘러, 청신함과 새로움, 발랄함을 잃어버린 번쇄한 철학으로 평가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아비달마의 작업이 번뇌를 끊고 행복을 추구한다는 부처님 본뜻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설법(對機說法-방편설법)에 의해 단편적 삽화적 비체계적으로 설해진 붓다 가르침 속에서 불교의 기초적인 관념을 추출하고, 이를 조직해 장대한 사상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한 것은 확실히 아비달마 논사(論師; 비바사사/毘婆沙師)들의 공적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업적이 없었다면 후의 중관학파(中觀學派)와 유가유식학파(瑜伽唯識學派)와 같이 학문적으로 성숙한 대승불교철학의 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비달마를 단순히 실천구도와 관계없는 공론(空論)으로 단정해 버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아비달마(阿毘達磨) 논서의 발전단계
<아함경(阿含經)>의 내용은 즉흥적 우연적인 요소가 많았던 붓다 교설을 불멸 후 정리해 전승한 것이기 때문에 본래 짧고도 단편적인 제경(諸經)의 집성이었다. 그러한 비체계적인 아함의 경설(經說)이 점차 정리되고 조직화돼 질서정연한 교의체계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과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즉, 아비달마는 크게 네 단계를 거쳐 발전했다.
그 첫 단계는 부처님 원음을 있는 그대로 정리하는 단계였다. 제1차 불전결집에 의해 조성된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특징인데,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비달마는 아니며 경장(經藏) 가운데 ‘아비달마적 경향’을 띠고 있다고 할 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전술한 바와 같이 붓다 자신이 그러한 주석과 설명을 하는 경우도 있고, 설법을 마친 후 제자 가운데 그것을 해설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 두 사람의 유력한 제자가 서로 대론(對論)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경우와 같은 것인데, <숫타니파타(경집/經集)>나 <이띠붓따까(Itivuttaka, 여시어경/如是語經)>와 같은 초기경전들이 그러한 성격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전들은 붓다 일상의 삷 속에서 제자들과 자연스런 문답을 하는 과정을 그대로 기술했기 때문에 문구가 자연스럽고 순수하며, 사실을 놓고 그 인과법을 설하는 형식이다. 이것이 깨달은 분이 법을 설하는 기본 형태인 것이다. 왜냐하면 깨달은 분은 생각이 없기 때문에 사량(思量)으로 논리를 만들지 않고 맑은 반야심(般若心)에 비치는 대로 자연의 실상과 이치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계는 아비달마적인 경향을 띠는 경장이라 할 수 있다. 초기 붓다 말씀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인연에 따라 자연스레 이루어졌기 때문에 비체계적으로 설해져 있거나 그 의미가 불명료한 개념들이 더러 있었다. 그리하여 초기에는 주로 이러한 말씀을 정리하고 조직하며 해석하고 설명해 완벽한 체계를 갖추려고 했다. 이를테면 <증일아함경>이나 <중집경(衆集經, Sangiti suttanta)>과 <십상경(十上經, Dasuttara suttanta)> 같은 단경(單經)에서는 부처님 법을 법수(法數)에 따라 분류해 1법에서 10법, 혹은 11법으로 분류했다. 즉 삼법인, 사제, 육근, 육경, 팔정도 12연기라는 분류들도 원 가르침에는 평범한 언어로 상황에 따라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밖에 없었으나 부파불교의 논사들에 의해 숫자적인 개념으로 알아보기 좋게 새로 정의했던 것이다. 그리고 <상응부아함(相應部阿含)=잡아함경>처럼 주제가 분명한 경들을 주제나 내용의 유형에 따라 정리했고, 여러 가지 개념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자세한 분석적 고찰이나 개개의 문제에 대한 전문적 연구 등이 두드러지게 발달했다. 예컨대 팔리어 경장 중 굿따까 니까야(小部)에 속하는 <닛데사(Niddesa, 義釋)>와 <빠띠삼비다막가(Patisambhidamagga, 無碍解道)>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렇게 불교를 체계화하고 자신들의 언어로 열반, 무루, 무상, 무아, 중도, 공, 삼법인, 사성제, 육근, 육경, 팔정도, 12연기 등과 같은 개념과 이론들을 구축해나가면서 이러한 단편적인 정의들이 부처님의 전체적인 말씀과 모순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됐던 것이다. 즉 부처님 살아계실 때는 모든 것이 하나의 삶의 이치로 조화됐으나 중생들이 자신들의 생각으로 이론화하자 서로 모순되는 현상이라는 문제점이 발생한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두 번째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장을 더욱 세밀하게 정리하고 체계화해 그 주제에 따라 정리하는 단계이다. 이를테면 설일체유부의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이나 <법온족론(法蘊足論)>의 경우, 전자는 앞의 <중집경(衆集經)>의 내용을 부연 설명한 것이며, 후자는 아함경전 중에서 21가지 중요한 교설을 선정해 이에 대해 상세히 해석하는 형태의 논서이다. 이 단계의 논서는 아비달마로 성립했지만 아직 경(經)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이 아니며, 말 그대로 다만 붓다 교법에 대한 해석 ‧ 정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경전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논(論)’ 정도의 수준이다. 따라서 다른 부파와 공통되는 요소도 많이 포함하고 있다.
네 번째 단계에 있어서 아비달마는 단순한 아함경설의 해석이나 조직에 머물지 않고 그러한 기초 위에서 장대한 교의체계를 구축했다. 그리고 부파불교에 있어서 각 부파는 저마다 구전의 가르침[아가마(Agama, 아함/阿含)]을 불경으로 고정시킨 뒤에, 정리하고 해석해 명료해진 개념들을 가지고 교의를 조직화 내지 체계화했고, 여러 논사들이 독립적인 해석을 가해 거대한 불교학의 체계를 성립시킨 단계이다.
이렇게 종합적으로 해설된 각 교설은 점차 부파에 따라 매우 복잡한 체계로 해석되고, 각 술어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도 극단적일 정도로 자세한 분석이 이루어져 방대한 분량의 논서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때는 경장으로 취급될 단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독자적인 연구논문 형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논장은 BC 3세기 목갈리푸타 팃사(Moggaliputta tissa, 목건련자제수/目犍連子帝須)에 의해 편찬된 <논사(論事, Kathayatthu)>로 알려져 있다. 이는 기원전 3세기경 아소카왕 치세의 제3차 불전결집 때 편찬됐는데, 이로써 그릇된 견해[이의사설(異議邪說)]를 논박했다고 한다. 그리고 BC 2세기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에서는 이전의 개별적인 논의를 근거로 해 설일체유부의 학설 전반을 주요범주에 따라 8장으로 나누어 정리 조직해 논술하고 있으며, 나아가 이에 방대한 분량의 주석서로서 AD 2세기에 이루어진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과 같은 백과사전식 주석서가 작성되기도 했다. 그리고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Abhidharmakosa-sastra)>이 AD 5세기 초에 등장함으로써 아비달마교학이 완성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아비달마 논사들의 노력에 의한 불교교리의 발전이 최종적으로 경 ‧ 율 ‧ 논 삼장으로 정립돼 오늘날과 같은 불교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방대하고도 체계적인 초기교리의 성립은 바로 이러한 아비달마 논사들의 피땀 어린 정성과 노력의 결과였다.
5.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의 교학체계
(1)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교학
20여개 부파로 갈라져서 서로 경쟁하며 전개된 부파불교에는 나름대로 교학의 발전이 있었다. 그런데 부파불교의 교학체계라 하지만 대중부계가 뒷날 대승불교의 모체가 됐으므로 당연히 부파불교의 주류를 이루었던 상좌부의 교학체계를 살펴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런데 남쪽으로 전파된 남방 상좌부는 스리랑카에서 부파분열 없이 충실히 상좌부불교(Theravada)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으나 인도본토에서는 상좌부의 맥이 끊어진 반면 상좌부 내의 한 분파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아소카왕 이후 북방불교의 중심교단은 같은 상좌부계통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였다. 설일체유부는 비교적 일찍 상좌부에서 지말분열을 해 독립했으며, 서북부의 간다라(Gandhāra)와 카슈미르(Kashmir) 지방에서 부파불교를 대표할 만큼 세력이 컸다. 따라서 설일체유부는 여러 부파 가운데 학문적으로 가장 강력한 부파였고, 가장 많은 아비달마 논서를 생산했으므로 현존하는 북전 논서(北傳論書)들은 대부분 설일체유부에서 생산한 것들이다.
따라서 설일체유부 교학에 대한 이해 없이 부파불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논서의 생산실적이나 영향력, 교학의 체계성으로 봐서 20여개 부파 중 가장 강력했고, 사상성이 가장 선명했기 때문에, 이런 상좌부를 대표하는 설일체유부의 ‘유(有)’ 철학의 이해 없이는 상좌부불교의 전모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설일체유부 교학을 중심으로 해서 인도 본토의 부파불교 상좌부 교학체계와 논장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완성된 설일체유부 교학이론에 의하면, 이 부파는 독특한 법(다르마)의 이론에 따라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것을 자세히 논증해 연기(緣起) - 유위(有爲) - 무상(無常)의 이치를 분명히 밝히고자 했다. 그리고 존재의 요소로서 법(法)을 75가지로 분류하고, 그것을 다시 다섯 가지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이것을 이른바 5위 75법(五位七十五法)이라고 한다. 5위(五位)라는 것은 색법(色法), 심법(心法), 심소법(心所法),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무위법(無爲法)을 말한다. 존재의 제1법으로 물질(色)을 들고, 제2로 그것에 대립하는 마음을, 제3으로 마음과 상응하는 심소법을, 그리고 제4로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심불상응을 제시했다. 이들 4종은 유위법(有爲法)이다. 이들과 대립하는 것으로서 제5의 무위법(無爲法)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색에 11법, 심에 1법, 심소에 46법, 심불상응행에 14법 및 무위법에 3법을 상정해 모두 75법이 된다. 이러한 75가지의 법은 상호 다양한 인과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같은 인과관계 위에서 유동적으로 구성되고 있는 것이 현실세계라고 한다. 그렇다고 할 때 그러한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이다.
유부의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존재의 기본적인 요소인 법(法)에 관한 것이다. 모든 것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 현재 ‧ 미래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데, 이 모든 것이 있다, 즉 존재한다는 유(有)철학은 모든 것이 과거 ‧ 현재 ‧ 미래의 시간을 통해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렇다면 일체의 사물은 무상하다고 하는 불교의 기본입장과 모순되지 않는가라는 것이 바로 설일체유부가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되게 했던 문제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은 소박하게 사물, 존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기본요소인 법(法)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러한 논란이 반드시 적용되지는 않는다. 과거의 법도, 현재의 법도, 미래의 법도 모두 있다고 하는 것이 일체유(一切有)의 의미이며, 그러한 과거 ‧ 현재 ‧ 미래 어디에서도 존재하는 법의 고찰을 통해 비로소 일체의 사물이 무상(無常)하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분명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유부 아비달마의 입장이었다. 유부는 이처럼 변치 않는 자성(自性)의 개념을 가진 법의 이론을 바탕으로 광대한 교리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기본교리를 바탕으로 유부는 삼세실유 법체항유설(三世實有 法體恒有說), 오온상속설(五蘊相續說), 5위(位) 75법(法),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 등 다양한 교리체계를 전개하며 모든 불교이론을 완비하려고 노력했다.
초기불교는 붓다 법을 외워서 전승해오다가 부파불교에 와서 각부파별로 저마다 자기네 경전을 조성했으나 그 대부분이 산실되고 오늘날까지 전해온 초기불교의 경전이나 기본교리체계는 초기부터 부처님이 밝히신 실상법과 인과법을 세상에 널리 전하고자 하는 상좌부계통, 특히 설일체유부에 의한 노력의 결과이다. 그들은 산스크리트어(Sanskrit)로 경전을 편찬했고, 이들의 불교가 대승불교와 더불어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중국에 산스크리트어 문헌이 소개돼 소위 북전불교를 형성했다. 이에 따라 불교의 큰 한 줄기가 동북아시아 일대에 화려하게 활짝 꽃을 피웠다.
이러한 설일체유부 교리의 바탕에는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라는 기본개념이 있었다. 즉 모든 법은 이 세상을 유지 보존하는 근거로서 과거 ‧ 현재 ‧ 미래의 3세에 걸쳐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법들이 3세에 걸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현상에 고유한 성질인 자성(自性 혹은 自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부가 일체를 유(有)라고 말할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이 변치 않는 성질인 자성이 있어 서로 간에 영향력을 주고받는데 이것이 인과법에 의해 일체를 구성한다고 본 것이다. 상좌부 계통은 원칙적으로 모든 것은 실체가 있다는 유부의 입장을 같이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상좌부계통이지만 독자부(犢子部)와 정량부(正量部)에서는 자아(自我)에 비견될만한 개아(個我, pudgala, 보특가라/補特伽羅)라는 실체를 주장했으며, 이와 반대로 경량부(經量部)나 대중부계통 설가부(說假部)에서는 12처의 실재성을 부정했다. 또 그들은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은 자성(自性)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붓다를 초월적 존재로 여기기도 해서 대승불교 교의와 유사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전승한 경 ‧ 논은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의 경전이나 논서가 전승됐다면 대승불교와 대승경전 출현에 대한 것을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설일체유부의 주장과 같이 그 어떤 사유 판단에 영원불변의 실체적(實體的) 존재가 전제돼 있다면, 이는 벌써 근본불교의 본질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는 「무상(無常) - 무아(無我) - 연기(緣起) - 중도(中道)」라는 붓다 교설의 근본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붓다의 근본 뜻은 붓다 자신과 설법내용을 포함한 일체가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인 것들이며, 연기(緣起)하는 것들임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붓다는 이런 연기법을 통해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비고비락(非苦非樂)의 중도(中道)에 의해서 정각(正覺) 열반에 도달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따라서 설일체유부와 같이 다원론적 존재가 3세(三世)에 실재한다는 전제하에서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이는 근본불교에 어긋나는 잘못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대승불교를 확립한 용수(龍樹, Nagarjuna, 150~250)는 이를 비판하고 시정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대승경전인 <반야경>의 공관(空觀)을 다시 심화시켜 밝혔다. 즉, 이러한 유부 교학의 법 실체화는 후에 용수(龍樹)에 의해 크게 비판받게 됐다.
1)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
모든 존재는 우리 눈앞에 인식되는 현실에서만 그 존재성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또 미래에도, 즉 현실공간에 나타나기 이전에도 또 사라진 뒤에도, 그 본체나 본성을 실질적으로 인정해야 된다는 이론이다. 그래서 본체(本體), 모든 존재의 본성은 항유(恒有), 즉 과거 ‧ 현재 ‧ 미래에 관계없이 존재한다고 하는 주장이다. 마치 설일체유부라는 부파 이름에 걸맞은 명제 같은 논지이다. 이것이 바로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이다.
불교 형이상학은 근본적으로 ‘법(法 dharma)’이라는 존재를 가정해서 이루어지는데, 이 법, 즉 다르마(dharma)라는 말은 여러 의미를 지닌 말이다. 그동안 논의된 내용을 종합해보면,
① 법칙, 법, 기준 ② 도덕, 종교 ② 속성, 성격 ③ 가르침 ④ 진리, 최고의 실재, ⑤ 경험적 사물 ⑥ 존재의 형태 ⑦ 존재의 요소 등 여러 가지 의미로 다르마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의미가 다르마라는 하나의 말 속에 포함돼 있다. 아비달마 논서에는 다르마라는 어휘를 위의 ⑤,⑥,⑦ 중의 어느 하나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경험적 세계의 모든 것, 존재, 현상, 요소 등을 일컫는 ‘법(法-dhamma)’이란 말은 복잡한 인과관계로 서로 얽힌 무수한 법(法)의 이합집산에 따라 유동적으로 구성돼 있다고 하는 뜻이 되겠는데, 이러한 ‘법의 존재론적 실재’에 대해 여러 부파들 사이에는 다양한 견해 차이가 존재했다.
그 중에서 설일체유부 논사(論師, ābhidhārmika:교리학자)들은 당시 대부분 불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유심론(唯心論)에 경도돼, 경험적인 모든 존재는 환상이라고 간주하면서도 법(法)이라는 요소들은 영원히 존재하는 실재라고 주장했다. 그들 사상에 의하면, 법들은 순간순간 작용해 경험적 현상세계를 만들어내는데, 이 경험세계는 환상이며, 법은 이 경험세계 너머에 존재한다고 했다. 즉, 유부에서는 아공법유(我空法有)의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법체(法體)란 모든 법의 체성(體性)이란 뜻이다. 만유제법의 실체, 즉 우주 삼라만상의 근본이 되는 실체를 말한다. 즉, 법체란 개체들의 변하지 않는 실체를 말하며, 항유(恒有)는 항상 변함없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마치 고대인도 브라만교의 아트만(Atman)과 비슷한 존재이다. 시간이 과거 ․ 현재 ․ 미래에 걸쳐 실재하는 것은 법체가 불멸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간이란 거대한 컨베이어벨트가 무한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그 위에 법체라는 것이 걸쳐 있기 때문에 인식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법체가 항유하기 때문에 3세[시간]가 실유하다는 이론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설일체유부 교학에서는 실재론적 경향을 중시해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를 주장했다. 모든 존재는 현상적으로는 무상해 변화하는 것이지만, 그 체성(體性), 즉 법의 본체(本體)는 과거 ‧ 현재 ‧ 미래 3세를 통해 변하지 않으므로 영원히 소멸하지 않고 실재한다는 뜻이다. 법의 본체가 시간적으로 실재함을 표현한 것이 삼세실유(三世實有)이며, 공간적으로 실재함을 표현한 것이 법체항유(法體恒有)이다. 즉, 75가지 다르마(dharma, 法)들의 실체가 과거 ‧ 현재 ‧ 미래 3세에 걸쳐서 실재한다는 주장이다.
설일체유부의 교의에 의하면, 유위(有爲)의 다르마 전체에 공통된 성질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순간성[찰라멸(刹那滅)]이며, 다른 하나는 삼세실유성(三世實有性)이다. 이 두 성질은 모순된 것으로 보여서 다른 학파로부터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됐지만, 설일체유부의 입장에서는 이 둘에 의해 그들의 교의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런데 붓다가 무상과 찰나멸을 설명했는데, 어째서 삼세가 실유이고 법체가 항유한 것인가? 유부는 삼세실유(三世實有)에 대해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고 있다.
첫째 붓다께서 “과거의 색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의 색에 대해 추구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과거의 색과 미래의 색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둘째 “인식은 반드시 두 가지 조건(감관과 대상)에 의해 생겨난다.”고 했기 때문이다. 과거나 미래의 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식의 필수조건인 대상이 결여된 것이다.
셋째 선행된 행위는 반드시 그 결과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만약 현재의 법만이 실재하고 과거와 미래의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업(業)의 인과설에 모순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법체항유(法體恒有)에 대해서도, 세우(世友, Vasumitra)는 ‘어떤 법이 아직 작용하지 않는 상태에 있을 때 미래라고 하고, 지금 작용하고 있는 상태를 현재, 이미 작용을 마친 상태를 과거라고 한다.’는 위부동설(位不動說)을 주장했는데, 유부는 이 세우의 주장을 정설로 인정했다.
삼세실유 법체항유에 대한 예를 들면, 책상 위에 있는 컵은 한 시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컵으로서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것을 법의 이론에서 본다면, 순간에 생겨나 순간적으로 소멸해버리는 유위제법(有爲諸法)의 끊임없는 연속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제법 하나하나는 시간적 지속성을 전혀 갖지 않으며, 다음 순간에 모두 소멸해버리는 찰나멸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순간에도 그대로 컵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선행한 제법을 상속해서 그것과 동류의 법이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관계를 가지고 계속 생기(生起)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세 번째 순간 이후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비지속적(非持續的), 순간생멸적(瞬間生滅的)인 제법의 연속적, 비단절적(非斷絶的)인 생기 위에서 컵의 존재라고 하는 시간적 지속현상이 우리 눈의 경험적 세계의 사실로서 비치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 경우, 법이 생기한다고 해도 무(無)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소멸한다고 해도 무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생기(生起)라는 것은 법이 미래로부터 현재로 현현(顯現)하는 것이며, 소멸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현재로부터 과거로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에 나타난 법은 미래의 영역에 존재한다. 현재에서 과거로 사라진 이후의 법은 과거의 영역에 존재한다.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나타나 과거의 영역으로 사라지는 동안의 한 순간의 법은 현재에 존재한다. 미래에도 존재하며, 현재에도 존재하고, 과거에도 존재한다. 법은 3세 어디에서나 그 자체로서 변함없는 특성[자성(自性)]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 다시 말해, 3세에 실유(實有)한다. 이와 같은 설일체유부의 순간적 존재론에 대한 설명에 적합한 비유가 있다.
영화필름(film)의 흐름은 릴(reel)에서 릴로 움직여 그침이 없으나 필름에 현상된 한 토막의 화면 그 자체는 처음의 릴 속에 있을 때도, 램프(lamp)에 조명될 때도, 다음 릴에 감겨진 뒤에도, 변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스크린(screen)에 차례차례로 투사된 영상은 하나하나로서는 순간적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면서, 그것이 무수하게 부단히 연속함으로써 변화하며, 활동하고, 시간적 경과를 가진 한편의 줄거리를 엮어간다.
첫 릴은 다르마의 경과라는 3세 중 미래의 영역에 해당하고, 램프에 의해 조명되는 순간은 현재에 해당하며, 나중의 릴은 과거 영역에 해당한다. 필름 한 토막 한 토막이 곧 다르마, 엄밀히 말하면, 같이 생하는 무수한 다르마의 집합이다. 그리고 스크린에 영사된 영상의 활동변화에 의해 엮어지는 이야기는 정녕 현실의 경험적 세계, 즉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세계에 해당한다. 릴에서 릴로 필름이 흐르듯이 다르마의 시간은 횡으로 공간적으로 확대돼 있다. 스크린에 영사되는 이야기의 경과와 같이 경험적 시간은 그것을 종으로 관철한다. 그 두 가지 시간의 교차점을 절대의 현재라고 할 수 있듯이 우리들 경험적 세계에 사는 자는 언제나 거기에서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상과 같이 존재론에 대해 설일체유부에서는 삼세실유 법체항유로 표현되는, 과거 ‧ 현재 ‧ 미래에 영원히 존재하는 법체(法體)가 실재한다고 하는 다원론적 실재론을 주장했으며, 경량부(經量部)에서는 오직 현세에만 찰나적으로 생멸할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과거 ‧ 현재 ‧ 미래에 항상 존재하는 법체를 부정했다. 또한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중관학파(中觀學派)에서는 이들이 연기적(緣起的)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실체성이 없는 공(空)한 존재라고 했으며, 유식학파(唯識學派)에서는 오직 식(識)만이 존재할 뿐 대상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존재론을 주장하게 됐다.
2) 5위(位) 75법(法)
여러 부파들 중 가장 권위 있는 부파였던 설일체유부의 철학체계는 부처님 사후 약 천여 년 간에 걸쳐 완성된 것이지마는 '모든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이 기본입장이었다. 이들은 사실에 기초해 명확한 인과의 이치를 밝히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존재들의 사실 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현상을 이루는 원리(법, 다르마)를 밝히려 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내면세계와 객관세계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분류했다. 이것을 제법분류법이라고 하는데, <구사론>에서 말하는 5위 75법이 그 완성된 모습이다.
원래 설일체유부 소속 논사였던 세친(世親, 바수반두/Vasubandhu, 320~400)은 대승불교 유식학파로 전향하기 직전,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을 주석해, 유부 교의체계를 간결하게 요약한 논서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을 저술했다. 이는 명실상부 부파불교 교학을 대표하는 명저로서 인도에서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부파교학 입문서로 연구됐다. 그 내용은 계(界), 근(根), 세간(世間), 업(業), 수면(睡眠), 현성(賢聖), 지(智), 정(定), 파아(破我)의 9품으로 구성돼 있다.
그는 설일체유부의 교의를 체계화함에 있어서 비바사사(毘婆沙師, 주석가)의 설을 고집하지 않고, 다른 부파 특히 경량부(經量部)설까지도 참조해 비판적 태도로 저술한 점에 특색이 있다. <구사론>이 부파불교학 기초이론으로서 오랫동안 평가돼온 것은 그 교의가 정연한 체계로 논술돼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학설은 제법(諸法), 즉 모든 존재를 5위(位) 75법(法)으로 포괄하려는 논리였다. 유부에서는 세상 모든 것을 5위(五位) 75법(法)으로 나누어 이들 각각을 영원불변의 실체성(實體性) 내지는 실재성(實在性)을 지닌 것들로 파악한 다음, 이들이 여러 형태로 상응(相應) 상반(相反)하는 관계에 의해 모든 형상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75법이란 존재를 분석해 얻은 요소들의 전체를 가리키며, 이 존재는 색(色) ‧ 심(心) ‧ 심소(心所) ‧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 ‧ 무위(無爲)의 다섯 가지 범주[5위]에 포괄된다고 했다. 즉, 5위(位)는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정신과 물질세계를 크게 다섯 가지 그룹으로 분류한 것으로 물질적 요소(色法), 마음의 요소(心法), 마음의 작용(心所法), 물질과 마음이 어우러져 나타난 것(心不相應行法), 인간의 사량으로는 잘 알 수 없는 것(無爲法)으로 구분했다. 그래서 모든 존재하는 것이 연기법으로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들은 법(法)이라는 것은 삼세(三世) 어디서나 있으며 인간의 내면세계와 외부세계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으므로 법은 삼세(三世)에 실유(實有)한다고 했다. 이를 삼세실유론(三世實有論)이라 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 무위법 또한 대승의 해석과는 달리 하나의 존재하는 유적 형태였으며, 부처님의 해탈심 또한 인과관계의 결과로 나타나는 유적 존재(有的存在)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구사론>은 전 존재를 법에 의해서 분류했는데, 그 법을 ‘존재요소’로서 실체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푸른 병은 깨어지면 없어진다. 그러나 그 청색이라고 하는 것은 병이 깨어져도 존재한다. 이와 같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을 자성(自性)을 갖는 것이라고 하며, 법(法)이라고 불렀다.
이 주장이 근본불교의 무상(無常) ‧ 무아(無我)사상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유부에서는 현재세를 일찰나로 보고, 법체는 항유이지만 찰나멸(刹那滅)로서 미래에서 현재를 통과해 과거에 낙사(落謝-사라진다)한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이 법을 삼세실유 법체항유에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유부의 설이 단순한 실재론(實在論)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심리현상이 찰나멸인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으나 상주불변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 변화는 결국 찰나 속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유부에서는 실유(實有)의 법이란 가법(假法)으로서의 현상을 성립시키는 기체(基體 -要素)라고 했으며, 그 기체들의 개수를 다음과 같이 체계적으로 헤아려 총 72법이 있다고 했다.
① 색법(色法); 물질의 요소 - 11종
② 심법(心法): 마음의 주체(心王) - 1종
③ 심소법(citta와 caitta, 즉 心과 心所法); 마음의 작용 - 46종
④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물질도 마음도 아닌 관계, 능력, 상태 등을 나타내는 요소, 즉 물질에도 정신에도 속하지 아니하는 법 - 14종
이상의 72법에, 허공(虛空)과 택멸(擇滅-열반), 비택멸, 이렇게 연기한 존재가 아닌 것 3종을 통틀어 무위법(無爲法)이라 하고, 이들 무위법 3종을 더하면 75법이 된다.
이와 같이 유부에서는 앞 72법은 연기되는 존재라고 해서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했다. 그리고 일체법을 유위법 4위와 무위법 1위의 5위로 조직하고, 다시 그 5위는 75종의 법으로 분류된다고 해서, 일체법을 5위 75법이라 했다.
이와 같이 유부는 세상의 모든 현상을 5위 75법으로 분류해,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다고 봐서, 일체법을 유위법과 무위법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유위법에는 물질적 요소(色法) 11가지, 정신작용과 정신작용의 요소(心과 心所) 47가지, 정신적 물질적 요소에 포함되지 않는 요소(色心不相應行) 14가지 있으며, 무위법에는 사성제(四聖諦) 중 열반에 해당되는 도제(道諦)만이 해당되며 여기에는 3가지가 있다고 봤다. 이러한 유부의 무위(無爲)는 열반만이 무루(無漏)라는 초기불교의 기본적인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괴로움으로부터 그 소멸로 나아가는 방법으로, 유부에서 인정하는 무위법은 다음과 같다 - 삼무위(三無爲).
첫째 허공무위(虛空無爲)로서 ‘아가사(阿迦舍)’라 음역하며, 마음의 모든 장애와 차별이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혹은 걸림 없음을 성품으로 해서 다른 것을 장애하거나 다른 것에 장애됨이 없어 허공ㆍ공간과 같은 무위를 말하며, 절대공간을 말한다. 절대공간은 인연의 화합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불생불멸이기 때문에 무위(無爲)라고 한다. 따라서 유위법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를 막론하고 시방세계(十方世界)에 가득차서, 모든 세계가 끝없이 일어나고 멸하는 근본세계를 말하며, 모든 존재가 나타나는 근본 장을 가정해 말한다.
둘째 택멸무위(擇滅無爲)로 해탈의 지혜를 말한다. 택(擇)은 지혜를 뜻하고, 지혜로써 번뇌를 소멸시킨 상태, 즉 해탈 ‧ 열반과 같은 말이다. 택(擇)은 결택(決擇)의 줄인 말인데, 멸(滅)은 번뇌가 멸한 것이다. 따라서 택을 통해 번뇌를 멸한 것이 택멸(擇滅)이다. 즉, 택멸은 지혜의 작용인 결택을 통해 번뇌를 멸했을 때를 말한다. 우리가 지혜로써 정도(正道)를 수행함으로써 해탈해서 성불한 경지를 말하는 것으로, 나쁜 것을 가려내서 참다운 진리를 선택해 성취하는 무위법을 일컫는다.
셋째 비택멸무위(非擇滅無爲)로 인간이 선택하는 것과 관계없이 저절로 우주가 성주괴공(成住壞空) 해서 공(空)이 되듯이 저절로 무위법인 참다운 진리의 도리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비택멸은 지혜로써 소멸된 것이 아니라 생겨날 인연이 없어 번뇌가 생겨나지 않은 상태, 혹은 지혜와 관계없이 본디 청정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이는 수도(修道)의 결과 존재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연(緣)이 닿지 않아 나에게 지각이나 인식이 되지 않은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구의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존재는 하지만 나에게 지각이 되지 않으니 비택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위에 관한 상좌부 기본입장은 일체현상[법]이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오직 부처님의 열반에 한해 무루를 인정할 수 있으며, 원칙적으로 무위법을 부정하는 것이 기본입장이다. 즉, 초기불교에서는 무위를 존재론적이 아닌 생사윤회를 초월한 열반을 의미했다.
위의 내용을 좀 더 알기 쉽게 설명을 해 보면, 허공무위(虛空無爲)는 마음의 모든 장애와 차별이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허공은 온갖 것에 두루 가득하지만 장애하지 않고, 장애 되지도 않으며, 이런 허공이 무위이므로 처소에 만물은 각자 존재할 수 있다.
택멸(擇滅)은 선택해서 소멸시킨다는 의미이다. 택(擇)은 지혜를 뜻하고, 지혜로써 번뇌를 소멸시킨 상태, 즉 해탈 ‧ 열반과 같은 말이다. 내가 수도(修道)의 결과로 분노가 없어졌다고 한다면, 나에게 분노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수도의 결과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 존재를 의미한다.
그리고 비택멸(非擇滅)은 지혜로써 소멸된 것이 아니라 생겨날 인연이 없어 번뇌가 생겨나지 않은 상태, 혹은 지혜와 관계없이 본디 청정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그리고 ‘비택멸무위’란 지혜의 힘에 의하지 않고, 생길 인연이 없어서 나타나는 무위를 말한다.
이와 같이 설일체유부에서는 존재일반을 5위 75법으로 분류한데 비해, 본상좌부에서는 4위 82법으로 분류했다. 즉, 해탈을 목적으로 해 해탈에 이르는 과정 속에 있는 모든 요소들을 유위법으로 분류해 해탈에 도움을 주는 25개의 선법, 방해하는 14개의 불선법, 그리고 13개의 중성적인 법들의 3범주로 분류한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81개의 유위법 외에 열반이라는 무루의 경지 한 개만을 무위법만을 인정해 모두 합쳐서 4위 82개의 법으로서 세계의 일체 현상과 인간의 체험세계를 분석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대승불교 유식(唯識)에서는 5위 100법으로 분류했다.
이상에서 보다시피 부파불교의 아비달마는 이토록 세분화하고 미세한 곳까지 논함으로써 필요이상으로 논리의 세분화가 이루어진 것 같은데, 그것이 과연 신앙생활에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참으로 번잡한 이론전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이런 번쇄한 이론들이 민중으로부터 외면당하게 되고, 대승불교 흥기를 불러온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초기의 실상에 근거한 가르침은 점차 논사들에 의해 논리화 사변화 되고, 거기에다가 힌두적 영향, 정치적 영향 등으로 다른 이교의 관념들이 들어오면서 그 생명력이 약화되게 됐다.
3) 업론(業論) -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
설일체유부에서 업론(業論)으로는 극단적인 선ㆍ악 행위를 이루었을 때, 인간의 신체에 일생동안 그 영향을 주고 있는 무표색(無表色-잠재력)이 생긴다는 주장을 했다. 이는 현대에는 심리적 영향으로 생각되는데, 유부는 이를 물질[색(色)]로 본 점에 특징이 있다.
그리하여 유부에서는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을 중시했는데, 업감(業感)이라고 하는 말은 업(業)이라는 행위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펼쳐지고, 서로 간의 관계성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불교는 우주만유의 생성을 연기론으로 설명한다. 기독교나 그 밖의 다른 종교들은 우주근원으로 조물주를 내세우지만 불교는 무신론이다. 만물이 생겨나고 발전하는 원인은 만물 밖에 있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 그 만물 자체 안에서 행해지는 인과법칙(因果法則)에 의해 생성되고 발전한다는 것이 불교 입장이다. 그 인과의 이치를 인연(因緣)이라 하고, 인연에 의해 생기 발전한다는 것이 연기설이다. 일종의 진화론(進化論)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업감연기론이란 만유(萬有)가 인연의 원리에 의해 서로 인(因:근본원인)과 연(緣:보조원인)이 돼 생겨나고 이루어지고 발전한다는 것으로, 그 연기주체가 바로 업(業)이라는 것이다. 만유는 모두 자기가 짓는 업이라는 세력이 주체가 돼, 그것을 인으로 하고 다른 연을 만나 이루어진다고 한다. 우리가 벌이는 일체행위가 하나의 세력[업]으로 잠재했다가 그 자체를 인으로 삼고 다른 연과 결합해 온갖 현상을 낳는다는 것이 업감연기론이다.
“이 세상엔 어찌해서 일찍 죽는 자가 있고, 오래 사는 자가 있는가. 병 많은 자가 있고, 병 없는 자가 있는가. 용모가 추하게 생긴 자가 있고, 잘 생긴 자가 있는가. 가난하게 사는 자가 있고, 부자가 있는가. 어리석은 자가 있고, 지혜로운 자가 있는가.”
모든 유정(有情)은 각자의 업이 있어 그 업의 상속자이며, 업에 묶여 살고, 업이 모든 유정들을 분별해 우열이 있게 한다. 즉, 이 우주 유정은 모두 그 유정들이 지은 업력에 의해 자기 자신과 각자의 환경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이 업엔 사사로움이 없어 부모가 지은 업의 결과를 자식이 대신할 수 없고, 남편이 지은 업의 결과를 아내가 대신 받을 수 없다. 이것이 업인업과(業因業果)의 철칙이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인간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을 자기가 저지른 잘못된 행위[업]로 보고, 그 궁극의 원인을 번뇌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인간존재를 「번뇌[혹(惑)]→업→고통」의 연쇄로 윤회하는 존재로 봤다. 이것을 업감연기라고 한다. 그 때문에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서 열반의 경지를 얻기 위해서는 번뇌를 끊어야 한다. 결국 유부는 번뇌를 끊는 방법을 고찰했다. 즉, 사성제(四聖諦)의 이치를 반복적으로 연구ㆍ고찰함으로써 지혜가 생기고, 이 지혜에 의해서 번뇌를 끊는다는 것이다. 모든 번뇌를 끊는 수행자는 성인이 돼서 아라한(阿羅漢)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열반의 경지라고 했다.
4)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모든 존재는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의 가르침은 붓다의 기본교설이다. 일체존재는 모두 시간과 함께 변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무상한 것을 있는 그대로 무상하다고 보려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에 대해 당치않은 욕망을 품고 집착하며 괴로워한다. 무상한 것을 무상하다고 알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 집착을 떠나라고 하는 것이 붓다의 기본 가르침이며, 그것이 올바른 지혜로 본다.
그런데 범부중생은 무지로 말미암아 무상한 것에 상주성(常住性)을 기대한다. 이 기대가 어긋날 때, 실망과 불만을 느낀다. 무아(無我)인 것에 대해 ‘나’를 의식하고 ‘나의 것’을 의식한다. 이런 ‘아상(我相)’으로 말미암아 욕구와 갈망이 생기고 고뇌한다.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을 기대하고, 의식해서는 안 될 것을 의식하는 곳에 번뇌에 의한 업이 있게 된다. 그 결과는 고(苦)이다. 따라서 무지(無知)를 떠나 무상을 무상으로 알고, 무아를 무아로 아는 올바른 지혜를 얻음으로써 인간은 번뇌의 구속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현실에서부터 시작해 무루(無漏) 깨달음의 영역으로 진행하는 불교의 실천체계는 「무상(無常) ‧ 고(苦) ‧ 무아(無我)」의 간명한 가르침에 남김없이 포함돼 있다. 이를 엄밀히 설명하는 것이 아비달마의 임무라고 아비달마논사들은 생각했다. 그리하여 설일체유부의 경우에는 ‘일체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하나의 이론으로 해서 정밀한 학설을 전개하고, 이를 가지고 무상과 무아를 논증하려했다.
무엇 때문에 모든 것은 무상한가, 연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여러 가지 원인에 연한 결과로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독자적으로, 자주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그것을 나타나게 하는 원인 여하에 따라 존재한다는 점에서 상주불변이란 있을 수 없다. 이렇듯 모든 것은 인과(因果)의 관계 위에서 생긴다는 견해가 불교 입장이다.
이처럼 무릇 현실에 있어서 인간생존에 관계하는 일체사실은 연기한 것이지만 그것을 또한 유위(有爲)라고도 한다. 유위라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연기하며, 유위이며, 무상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무상하다고 확실히 앎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소멸될 때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 깨달음의 세계가 전개된다. 깨달음의 세계는 이제 더 이상 인과(因果)에 속박되지 않는다. 그러한 구속을 받지 않기 때문에 바로 무위(無爲)이다.
연기(緣起)의 원리는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상주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에 무위로 인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이 원리는 항상 존재하는 이법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항상 존재하는 이법으로 인해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음으로 12연기 각각을 모두 무위로 보는 것이다.
처음에는 열반만 무위법이라 했는데 점차 학문적으로 발전해 조건 없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을 무위로 이해하기 시작하자 연기와 같이 이 우주 속에 영원히 내재하고 있는 법을 무위로 보게 됐다. 이것은 본래의 무위 개념이 아니었으며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도 아니다. 불교철학의 확장에 의해 연기가 무위로 발전했고, 특히 용수(龍樹)가 연기법의 상의성을 강조해 상의하는 것은 자성이 없다고 함으로써 결국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는 공(空)의 개념으로까지 확장됐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실상법은 대중부 논사들의 사유에 의해 실체가 없다는 논리로 발전해 마침내 모든 것이 공(空)이라는 식으로 관념화됐다. 즉 부파불교에 있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나치게 확장된 나머지 부처님의 생생한 깨달음의 경지인 반야지경(般若之境)이 논사들의 관념적 사유에 의해 우주의 모든 것이 실체가 없는 공이라는 존재론으로 변질돼 부처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관념적 우주철학으로 확장됐다. 이처럼 아비달마교학을 특징짓는 기본개념인 무위법은 대중부를 위시한 여러 부파들의 확장적 해석으로 실상법의 무위화를 확대시켰고 결국 불법 자체의 비실체화가 대승불교로 이어지는 바탕이 됐다.
5)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무상(無常)한 것을 무상하다고 보지 않고, 그것에 대해 욕망을 일으키고 거기에 집착함으로써 번뇌하는 현실세계를 유루(有漏)라고 한다. 그리고 무상을 무상으로 알아 욕망과 집착을 끊음으로써 전개되는 고요하고 편안한 깨달음의 세계를 무루(無漏)라고 한다. 여기서 유루라는 것은 번뇌를 가진, 번뇌에 더럽혀진 것이라는 의미이며 무루는 그 반대의 의미이다.
불교의 목적은 고뇌하는 현실세계, 미혹한 세계를 떠나 열반 -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유위 ‧ 유루의 세계로부터 무위 ‧ 무루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유위 ‧ 유루의 세계는 사성제(四聖諦)에서 볼 때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이며, 무위 ‧ 무루의 열반은 멸제(滅諦)이다. 그리고 괴로움으로부터 그 소멸로 나아가는 방법, 즉 도제(道諦)는 아직 열반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유위이지만 이미 번뇌를 떠나는 도정에 있기 때문에 무루이다.
그런데 유부에서는 열반에 2종류가 있다고 했다. 아직 육체가 존재하는 아라한 경지는 육체적 고통이 존재하므로, 불완전하다고 보아 유여의열반(有余依涅槃)이라 하고, 아라한 사후를 완전한 열반으로 봐서 무여의열반(無余依涅槃)이라고 했다.
또한 붓다를 초월적인 인격자로 보고, 일반수행자는 결코 붓다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며, 아라한(阿羅漢)까지밖에 되지 못한다고 했다. 유부는 붓다 교설을 충실하고 정확히 해석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는 출가중심주의가 되고, 번잡하고 팽대한 교의체계는 일반인이 근접하기 어려워서 대승불교 흥기를 촉진했다. 그렇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유부교의가 동시대 및 그 후 불교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유위(有爲)와 유루(有漏), 무위(無爲)와 무루(無漏)
여기 자동차가 한 대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 자동차로 인해 즐거움을 누리기도 하지만, 고통을 겪기도 한다. 멋진 드라이브를 하면 즐거우나, 생각지도 않은 고통사고를 당하면 고통스럽다. 그 자동차는 공장에서 부품이 조립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폐차장에서 해체되고 나서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해체되는 순간, 자동차는 사라지고 수많은 부품만이 남을 뿐이다. 결국 자동차는 개별적인 부품의 결합체일 뿐,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며 즐거워하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세계란 무엇에 의해 존재하며,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우리는 만난 적도 생각해 본적도 없는 그 어떤 사람으로 인해 고통 받거나 기뻐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만 기뻐하기도 하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경험한 사람들과 주위환경에 의해 자신의 세계가 형성된다. 따라서 아비달마불교에 있어 세계란 경험된 세계이다. 여기서 '경험'이라 함은 다만 지식의 근거라거나 수동적으로 일어나는 지식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능동적이고도 주체적인 의식적 언어적 신체적 행위(業)라고 하는 생명활동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나 경험 혹은 그것에 의해 드러나는 세계는, 자동차처럼 현실적으로는 단일하고 항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수많은 조건들에 의해 조작된 것이며, 조건이 결여될 때 바로 소멸한다.
예컨대 지금 나에게 분노가 일어났다고 하자. 그것은 바로 분노의 세계이며, 나 자신은 그러한 분노를 통해 '분노하는 나'로서 밖에 드러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같은 분노가 언어적 신체적 행위로 드러나 욕설을 하거나 살인을 하게 될 경우, 욕쟁이라거나 살인자와 같은 또 다른 존재위상을 획득하게 될 것이며, 그러한 행위는 다시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잠재하면서 행위 할 때의 마음과는 다른 상태에 있거나 다르지 않는 상태에 있거나 혹은 무심의 상태에 있거나 유심의 상태에 있거나 간에 항상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또 다른 조건이 된다.
그럴 때 우리의 현실존재를 규정하는 분노의 세계는 무엇으로 존재하며,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것의 조건은 무엇인가. 아비달마불교에서는 궁극적으로 그 같은 세계의 조건을 분석 해체함으로써 세계의 속박(예컨대 분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데, 이를 제법분별(諸法分別)이라고 한다.
원래 법(dharma)이란 '유지하다' '지탱하다'는 의미의 어원 √ dhr에서 파생된 말로서, 일반적으로 세계존재를 유지 지탱하는 질서 ‧ 규범 ‧ 법칙 등을 의미하며, 나아가 도덕 ‧ 정의 ‧ 진실 ‧ 습관 ‧ 성질 등의 뜻을 갖지만, 아비달마불교에서는 보통 현상의 경험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의 요소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자동차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적이고도 객관적 실체 - 수많은 부품에 의해 유지되는 주관적 관념에 불과하다. 곧 설일체유부 교학에 있어 법이란 그 같은 경험을 구성하는 조건으로서, 개별적이고도 더 이상 환원 불가능한 독립된 실체(dravya)이다. 그것은 자기만의 고유한 특징과 작용을 지닌 것으로, 그것으로 인해 인식이 가능하며 행위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바로 궁극적인 존재(勝義有)이다. 그리고 그러한 온갖 존재가 원인과 조건 (즉 因緣)이 돼 화합함으로써 드러난 현상의 세계는 다만 가설적 개념적 존재(世俗有)일 뿐이다.
아비달마에 있어 이른바 제법(諸法)으로 일컬어지는 그러한 모든 존재는 대승 유식학에서 말하듯이 의식작용에 의해 구축된 사유의 산물이 아니다. 사유가 그 같은 모든 존재에 의해 한정되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무자성(無自性)의 존재, 허깨비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의 시계는 영원하지 않으며, 괴로우며, 진실로 '나' 혹은 ‘나의 것’이 아니며, 그 자체 실체성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세계의 진실된 모습이다. 이렇듯 온갖 존재가 인연화합 해서 드러난 생성과 소멸의 시계를 유위(有爲)라고 하며, 이 따위 온갖 존재를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한다. 유위(samskrta)란 다수의 요소가 함께 작용된 것, 조작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컨대 두 개의 수소와 한 개의 산소가 동시에 함께 작용함으로써 물로 나타나게 되며, 나타난 물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닌 가변적 존재인 것과 같다.
이와 반대로 조작돼 나타나지 않은 세계, 혹은 생성과 소멸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세계를 무위(無爲)라 하고, 그러한 존재를 무위법(無爲法)이라고 한다. 따라서 인연이 결여돼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세계도 무위이지만, 세계의 진실 된 모습을 참답게 관찰해 세계 생성의 원동력이 되는 무지(無知)와 욕망(慾望), 그리고 업(業)이 소멸된 세계, 깨달음의 세계가 무위(즉 열반)이다.
한편 무지와 욕망 등의 번뇌가 수반되는 세계를 유루(有漏)라고 하고, 그것의 조건이 되는 온갖 존재를 유루법(有漏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유위와 유루는 무엇이 다른가.
깨달음에 이르는 도정(道程)은 온갖 존재가 인연화합 해 드러난 현실에서의 경험이기에 유위이지만, 더 이상 번뇌를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무루(無漏)이다. 여기서 '누(asrava)란' 누설의 뜻으로, 여섯 감관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번뇌를 뜻한다.
이처럼 일체의 존재는 유위와 무위로 분류되며, 무위는 무루이지만 유위는 다시 유루와 무루로 분류된다. 이를 불타교법의 기본구도인 4성제(四聖諦)에 대입시켜 보면, 미혹한 현실과 그 원인인 고(苦)와 집(集)은 유위이고 유루이며, 깨달음의 이상인 멸(滅)은 무위이고 무루이며,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도정인 도(道)는 유위이고 무루이다 - 권오민.
6) 윤회설(輪廻說)
윤회란 태어나고 죽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윤회하는 중생의 영혼이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상 세계라는 이 여섯 가지 길을 번갈아 떠도는 모양을 육도윤회(六途輪廻)라 했다. 이러한 윤회의 삶은 깨치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세계이다. 그리고 부파불교에서는 윤회의 삶을 시간적으로 생유, 본유, 사유, 중유라는 과정으로 나누었다.
생유(生有)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을 말한다. 그리고 본유(本有)는 태어난 뒤 일정 기간을 사는 것을 말한다. 본유기간은 사람 일생에 따라 다르다. 젊어서 죽는 사람도 있고, 오래 사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사유(死有)는 생을 마치는 순간을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생을 끝마치는 것으로 아는데 부파불교에서는 이 사유 다음에 중유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중유(中有)란 죽고 나서 다음 생을 받기 전까지를 말한다. 그러한 불교의 윤회사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윤회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윤회하는 생은 괴로운 삶이기 때문이다. 부파불교에서는 윤회를 죽은 후에 가는 세계로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 깨치지 못한 중생들 삶은 하루에도 몇 번씩 지옥(地獄)을 가기도 하고 아귀(餓鬼)가 되기도 한다.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윤회로부터 해방돼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윤회의 사슬을 끊고 대자유의 세계에서 살라는 가르침이다.
둘째 자율적이고 자기 책임적이다. 모든 것이 자업자득(自業自得)이기 때문에 나의 말과 행동의 결과를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내 운명은 내 손에 달려있다. 따라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고 창조하기 위해 낡은 생각과 낡은 행동을 전환해서 새로운 삶을 마련해야 한다.
셋째 윤회의 세계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항상 변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래서 희망적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한번 지옥에 떨어지면 영원히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지옥에서 생이 다하면 다시 윤회하므로 언제나 다른 세계에서 태어날 수 있는 여건이 열려있다. 비록 어려운 여건 속에 있더라도 마음을 바르게 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면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넷째 윤회사상은 모든 생명에 대한 자애심을 갖도록 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들은 무량한 시간동안 윤회를 해 왔기 때문에 나와 무관한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 모두 전생의 벗일 수도 있고, 부부나 부모, 형제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향한 자비의 삶이 요청되는 것이다.
원래 붓다는 윤회를 말하지 않았다. 윤회는 당시 인도에 보편화된 상식이었고, 부파불교시대에 그것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다만 불교교의는 무아(無我)인데, 무엇이 윤회하느냐는 것이다. 아직 이제설(二諦說-眞諦와 俗諦)과 공성(空性)이 설명되기 이전의 부파불교시대엔 이것이 혼란을 주었다. 이와 같은 무아(無我)와 윤회(輪廻)의 양립을 해명하기 위해 부파불교의 각 부파들은 윤회의 주체를 상정했다. 즉, 부파의 이론가들은 무아론을 견지하면서도 어떠한 주체의 지속을 설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담론들은 윤회론과 무아론이 충돌되지 않으면서 ‘영혼’을 대신할 수 있는 ‘원리’ 개념을 발견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무아론을 견지하면서도 어떠한 주체의 지속이 가능함을 설명하고자 한 노력이었다. 붓다는 이러한 모순에 구애받지 않고 윤회를 받아들여 불교 고유의 설로 가공해 입론했던 것이다 - 고영섭.
※부파불교의 심식설(心識說)과 대승의 심의식설(心意識說)
부파분열시대의 불교를 일명 아비달마불교(阿毘達磨佛敎)라고 하는, 이 명칭은 매우 탐구적인 명칭이었다. ‘아비(阿毘)’는 공경하고 결택(決擇)한다는 뜻이며, ‘달마(達磨)’는 진리 또는 물질과 정신계를 모두 포함한 법(法)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명칭이 말해 주듯이 아비달마불교에서는 정신계와 물질계를 깊이 있게 탐구하고 정신계와 물질계는 모두 업력(業力)의 힘에 의해 운영되고 유지된다는 이론을 세웠다. 이러한 논리를 업감연기(業感緣起)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은 업력에 의한 결과로 초감(招感)되고, 감응돼 연기(緣起)된다는 것이다. 연기라는 말은 인연이 모아 결과가 생기(生起)한다는 뜻이며, 무엇이든 인과의 도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부파불교(소승불교)는 업력에 의해 인간의 현실은 물론 삼계 육도(三界六道)인 우주도 창조되고, 또 정신의 현상도 선과 악 등 유루성(有漏性) 등으로 나타난다고 봤다.
이와 같이 부파불교는 필연적으로 그 업력의 출처가 어디에 있는가를 마음을 중심으로 해 밝혀내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초기불교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6식설(六識說)을 바탕으로 해서 마음의 작용론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를 심소(心所)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6식은 행동을 나타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마치 국왕이 무엇이든 마음대로 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해서 심왕(心王)이라 하고, 이 심왕에 소속돼 착한 행동(善行)과 나쁜 행동(惡行)을 야기하는 정신작용을 심소(心所)라고 했다.
이들 심왕과 심소의 행위에 입각해 선업과 악업이 결정된다. 이러한 심소론(心所論)은 <품유족론(品類足論)>과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구사론(俱舍論)>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정리된 <구사론>에 의하면 선법(大善地法)과 악법(大煩惱地法) 등을 야기하는 46종의 심소법(心所法)이 있다. 이와 같이 심왕(心王)과 심왕에 의해 나타나는 심소(心所)가 곧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 행동은 곧 업인(業因)으로 조성돼 마음속에 보존돼 있다가 인연이 도래하면 곧 결과로 현실에 나타나기도 하고 미래세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 업력은 마음속 어느 곳에 보존되는가 하는 의문에 직면하게 됐다. 그것은 종래의 6식(六識) 가운데 제6 의식(意識)이 눈, 귀, 코, 혀, 몸 등으로 인식하는 마음을 통제하고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며, 동시에 평소에 몸과 마음으로 조성되는 업력까지도 보존하는 주체라고 믿어왔었다.
그러나 그 의식, 즉 제6식의 작용이 불완전하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의식이 평상시에 잘 활동할 때에는 별로 문제가 없지만 만약 어떤 불의의 사고나 극한 상황 하에서 의식불명이 되거나 의식이 분명치 않을 때는, 의식의 체성이 영원한 생명체로서, 또는 미래세까지 이어지는 윤회의 주체가 과연 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따라서 제6식은 업력의 보존체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심리분석론이 대두됐다.
이러함에 부파논사들은 제6 의식(意識) 이외에 또 다른 심성(心性)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것은 초기불교에서「무상 ‧ 고 ‧ 무아」를 중심으로 주장하던 무아론(無我論)에서 점차 유아론(有我論)으로 기울기 시작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부파불교에서 주장하게 되는 심성은 금생과 내생에 관계없이 중생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고 또 업력도 보존해 주며 동시에 인연에 따라 모든 결과까지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이러한 마음의 주체를 부파불교시대의 여러 부파(部派)들은 다각도로 탐구했다. 훗날 대승불교에서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상정하게 되는데, 먼저 이 제8 아뢰야식설이 성립하게 된 연원을 살펴보면, 부파불교에서도 마음을 영원히 유지시켜주면서 업력까지도 보존해 줄 수 있는 어떤 것들을 탐구했는데, 그 결과로 대중부(大衆部)에서는 이와 같은 것을 상정해 근본식(根本識)이라고 했으며, 상좌부(上座部)에서는 이를 유분식(有分識), 즉 과거와 현재 및 미래 등의 삼세에 걸쳐서 생존의 원인이 되는 식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리고 설일체유부에서는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가 끊임없이 상속된다며 오온상속설(五蘊相續說)을 주장하는 한편, 이생을 끝내고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중유(中有)의 몸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다시 태어날 인연을 구한다며 중유설(中有說)을 내세웠고, 독자부(犢子部)와 정량부(正量部)에서는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個我)라고 해서 이를 불변의 식체(識體)로 간주했다. 그리고 화지부(化地部)에서는 궁생사온(窮生死蘊)이라고 했으며, 경량부(經量部)에서는 끝없는 옛적부터 단절되지 않고 같은 종류로 계속해서 상속된다는 미세한 세의식(細意識)을 내세웠는데, 그 성류(性類)가 일정하기 때문에 또한 이를 일미온(一味蘊)이라고 명칭을 정해 여러 심식사상(心識思想)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이 부파불교에서 인간의 심성을 부단히 연구하고 탐구해 합리적인 인과사상과 윤회사상 등의 교리를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인간의 심성은 한없이 넓고 깊어서 이 시대에도 그 논리가 미완성으로 남긴 채 그 의무를 대승불교에 넘기게 됐다.
즉, 부파불교의 심식설은 그 시대의 사상 가운데서 핵심이었지만 불교의 사상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데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AD 4세기 무착(無着, Asanga)이 나타나서 대승적인 심식설로 개혁하기에 이른다. 무착은 <해심밀경(解深密經)>의 심의식설(心意識說) 등의 영향을 받아 종래의 부파불교에서 주장해 온 6식설에다 제7 말나식(末那識)과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더 보태어 8식설로 논리화했다. 부파불교의 6식설과 이에 의해 나타나는 심소(心所)의 이론에서는 가장 근본이 되는 번뇌를 설명하는 이론이 부족했다. 그리고 부파불교에서는 전념(前念)이 후념(後念)에 대한 의지처가 된다고 해서 전념(前念)을 의근(意根)이라고 했는데, 이것도 역시 의식불명 등 심식의 단절이 있으면 고정불변한 의근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2) 설일체유부 교학과 대중부 교의의 갈등
초기부터 붓다 법을 전통적으로 계승해오던 상좌부계통의 설일체유부는 원칙적으로 모든 것은 실체가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교리의 바탕에는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라는 기본개념이 있었다. 즉 모든 법은 이 세상을 유지 보존하는 근거로서 과거 ‧ 현재 ‧ 미래 3세에 걸쳐 존재하며, 이러한 법들이 3세에 걸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현상에 고유한 성질인 자성(自性)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유부가 일체를 ‘유(有)’라고 말할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이 변치 않는 성질인 자성이 있어 서로 간에 영향력을 주고받는데, 이것이 인과법에 의해 일체를 구성한다고 봤다.
유부는 법계(法界)가 모두 실체가 있으며 서로 인과로 이어진다고 보기 때문에 3세(三世)에 걸쳐 존재하는 법들이 어떠한 관계를 유지하며, 존재하는가를 탐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붓다는 일체지자(一切智者)로서 3세의 모든 실상을 밝혔기 때문에 그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3세에 있는 일체현상[법(法)]들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으며, 어떤 관계로 놓여있는가를 밝히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자 사명이었다.
그래서 유부는 현재를 중심으로 현재와 미래, 현재와 과거와의 관계, 그리고 그 속에 항유(恒有)하는 법과의 관계성을 규명해 3세에 존재하는 법의 관계를 크게 인과 연으로 보고, 그것을 세분해 6인(六因) ‧ 4연(四緣) ‧ 5과(五果)로 인과관계를 분석했다.
또 이와 같이 법계의 모든 현상을 하나의 사실과 인과관계로 분석하는 틀을 갖춤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개념은 바로 해탈(解脫)이었다. 붓다는 더 이상 변하지 않는 무루(無漏)의 경지이며, 취사선택과 분별의 갈등구조가 없는 영원한 자유의 경지인 해탈을 성취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불제자들에겐 유일무이한 목적이 해탈이었다. 법계의 모든 현상은 무상한 인과관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더 이상 변하지 않는 영원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일체법[현상]은 열반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보조적인 조건으로 봤다. 그래서 불법의 교리체계를 영원한 무위법(무루)과 변화하는 유위법(유루)으로 분류해 우주의 일체현상을 설명하고자 했다.
초기불교에 있어서 영원불변하는 무루의 경지는 오직 붓다의 깨달은 경지만을 의미했다. 이는 오직 붓다만이 이룬 개인적인 체험의 경지로서 여기에 대해 아는 체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초기 상좌부에서는 이러한 열반관(涅槃觀)을 그대로 계승해 무위(無爲)에 관한 더 이상의 이론적인 전개를 하지 않고, 오직 붓다의 해탈지경(解脫之境)만을 무루로 인정했다. 이러한 기본교리를 바탕으로 유부는 5위 75법, 유위 유루(有爲有漏)와 무위 무루법(無爲無漏法),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 오온상속설(五蘊相續說) 등 다양한 교리체계를 전개하며 모든 불교이론을 완비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부파불교가 발전해 붓다 법을 지식적 체계적으로 연구해 나가기 시작하자 불교 기본교리체계는 붓다가 이룬 인류 최고목적지인 열반과 일반중생이 그에 도달하는 길로 구분해 일체현상을 설명하게 됐다. 그리고 이러한 초기 가르침은 점차 발전해 세친(世親)의 <구사론>으로 최종 완성됐다.
하지만 삼세실유(三世實有)로 대표되는 유부의 실체법에 대해 대중부(大衆部) 부파들은 이를 부정하며 강력히 반발했다. 그들은 모든 것이 실체가 있다는 것이 무상 ‧ 무아라는 불교 기본개념과 맞지 않으며,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무지한 중생들을 위해 방편으로 설한 것으로 실제 아무 것도 설한 게 없고,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공(空)이라는 주장을 했다.
불멸 후 직제자들은 붓다 법을 잘 보존하고 널리 전해 큰 공덕을 쌓고자 했다. 그들 각자는 붓다 가르침을 전한다는 사명감으로 충만해서 인도 전역으로 흩어져 부파를 형성하고 법을 전했다. 하지만 그들은 붓다와 같이 완전한 법안(法眼)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붓다 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각자의 기억과 이해수준에 따라 불법을 받아들이고 전했던 것이다. 그래도 직제자들이 살아있어 그 영향력이 미치는 초기에는 붓다 원음이 나름대로 지켜졌으나 그들이 모두 입멸하고 세월이 흐르자 붓다 가르침의 실체가 점점 흐려져 갔다. 더구나 구전으로 전승된 것이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 후로 불교교리의 정립과 전파는 직제자들 몫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배운 제자들, 그리고 제자의 제자들 몫이 됐다. 그들은 붓다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전하기 위해 각 부파별로 자신들이 보고 듣고 이해한 것을 기초로 교리를 만들어 나갔다. 이것이 아비달마((阿毘達磨)였다. 그러나 그들은 법안(法眼)이 열린 것이 아니라 불교를 이론적으로 배우고 연구한 학승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정리하고 사유한 불교교리에는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의 습(習)이 묻어있었다. 또한 그들은 인도에서 태어나 힌두적 관념과 논리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그들이 불교를 정립하면서 만들어낸 아비달마이론 속에는 자연스레 관념적인 힌두교 논리가 침투해 있었다.
즉,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부파불교 교리는 붓다의 생생한 깨달음의 원음이 아니라 부파논사들이 철학적 사유로 정리보완하고 취사선택한 이론체계였다. 초기경전을 <아함경>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아함(Agama)이란 말은 ‘전승된’이라는 뜻으로 그 말처럼 각부파가 조성한 경전은 구전으로 전해진 불설을 부파논사들이 정리하고 체계화시킨 것이지 붓다 친설(親說)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각 부파별로 자신들이 전승해온 경전과 논리를 기초로 경전을 만든 것이어서 각 부파마다 정립한 경전들이 부파별 특징에 따라 내용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함이 원인이 돼 부파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이들 아비달마가 구전으로 맥을 이어오다가 제3차 불전결집 이후로 부파에 관한 기록이 역사 속에 처음 등장했을 때 이미 교리의 진화는 상당히 진행돼 있어서 두개의 정반대의 교리가 불교계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부처님 이래 가섭존자로부터 전통적으로 교리를 이어 내려온 고승들이 즐비한 상좌부의 견해로 부처님이 깨달음의 눈을 얻으시고 세상의 실상과 사실간의 인과의 이치를 밝혔다는 주장이며, 다른 하나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관념적인 철학성을 강조하는 진보적 개혁파인 대중부로 그런 사실적인 가르침은 어리석은 중생들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고 진정한 가르침은 비의로 전해진 고차원적이고 철학적인 공성이라 주장한 것이다.
이와 같이 부파불교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불교교리를 철학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붓다 법의 실체가 흐려지고, 부파논사들은 붓다 법의 근본인 실상법(實相法)과 연기법(緣起法) 자체를 의문시하고 철학적 논란거리로 만드는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법안(法眼)이 제대로 열리지 않아 눈 뜨고도 눈앞에 있는 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 뜬 장님인 중생들 사유가 붓다의 본질적인 가르침을 농단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 대중부계통에서는 이 세상의 실체를 공(空)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기 이르렀다. 그래서 그들은 붓다가 가르친 실상법과 인과법 등 일반적인 가르침 이외에 비밀리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空)함을 전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진보적인 개혁성을 띤 대중부와 전통을 강조하고 실체를 강조하던 상좌부 사이에 지속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부파불교가 시작된 불멸 후 100여년부터 약 천여 년에 걸친 부파불교의 발전과정 속에서, 처음에는 오직 붓다의 열반만이 무루였으나 대중부에 의해 많은 부분이 무위로 바뀌고, 최종적으로 중관론(中觀論)에 의해 일체현상이 모두 공(空)이며, 환상이라는 관념적인 결말로 변화하게 됐다.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가 출현하게 된 근본배경이며, 대승불교 철학의 중심인 중관론이 성립하게 된 사유이다.
대중부에 의하면, 제불세존은 모두 출세간적이고, 모든 여래는 유루법이 없으며, 그의 말은 모두 설법이고, 그의 몸과 위력과 수명은 끝이 없으며, 일찰나에 일체법을 다 안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중생의 심성은 본래 깨끗하나 객진(客塵)과 같은 번뇌에 의해 더럽혀져 있을 뿐이어서 객진만 털어내면 모든 중생이 불(佛)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유위법은 현재에만 존재한다고 해서 법이 3세에 항상 존재한다는 유부의 법체항유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보수적이고 계율에 엄격했던 상좌부에 비해 대중부는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을 가졌다. 이들은 불교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전통에 얽매기 보다는 개인의 사유와 논리를 중시했으며 붓다 가르침에 근거한 사실적이고 과학적인 인과법보다는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사유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생각 속에 사는 학승들로서 그들은 당시 최고의 철학적 사유를 자랑하는 관념적인 힌두논리를 불교에 들여오는데 적극적이었다. 그리하여 실유성과 인과법을 중심으로 한 정통적인 불교교리에 대해 고도의 철학적인 힌두적 관념과 논리를 활용해 비판을 가했는데, 힌두교의 마야[산스크리트어 māyā-환(幻), 환영(幻影)]사상 영향을 받아 일체법의 존재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이 실제로는 텅 비어 있는데 사람들이 착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고 했다. 대중부의 공사상이 힌두교의 마야사상과 연결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오늘날 불교교리는 부처님의 생생한 깨달음의 원음이 아니라 부파의 논사들이 철학적 사유로 정리 보완하고 취사선택한 이론적 체계로서 힌두교의 염세성과 마야(환, 공, 무실체)성이 강하게 묻어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
그들은 부처님이 완전하신 분이니 부처님 말씀을 한치의 오차나 흠이 없게 만들기 위해 빠진 부분을 보완하고 당시 인도 풍토에 맞게 호소력있는 사례와 신화를 가미하면서 최고의 완성된 체계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부파의 논사들은 다양한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선택하여 각각의 의미에 대해 상세히 해설하고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렸으며 이를 정리할 필요성에서 일정한 체계로 틀을 짰다. 이때 가장 두드러진 방식은 관계있는 교설을 숫자에 따라 정리하는 방법으로 일법(一法), 이법(二法), 삼법(三法)과 같은 순서로 배열하는 방법과 동일한 주제를 한 곳에 모아 정리, 배열하는 방법이었다. 즉 삼법인, 사제, 육근, 육경, 팔정도 12연기라는 분류들도 원 가르침에는 평범한 언어로 상황에 따라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밖에 없었으나 부파불교의 논사들에 의해 숫자적인 개념으로 알아보기 좋게 새로 정의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각부파가 나름대로 불교를 체계화하고 자신들의 언어로 열반, 무루, 무상, 무아, 중도, 공, 삼법인, 사성제, 육근, 육경, 팔정도, 12연기 등과 같은 개념과 이론들을 구축해나가면서 이러한 단편적인 정의들이 부처님의 전체적인 말씀과 모순되는 현상을 가져오기도 했던 것이다. 즉 부처님 살아계실 때는 모든 것이 하나의 삶의 이치로 조화를 이루었으나 중생들이 자신들의 생각으로 이론화하자 서로 모순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초기부터 내려오던 붓다의 전통적인 실상법과 인과법은 낮은 수준의 중생들을 위해 방편으로 설한 것에 불과하며, 실제 붓다가 전하려고 한 고차원적인 진리는 따로 숨겨져 있었으며, 그것이 바로 일체가 아무 것도 없다는 공법(空法)으로서 중도(中道)에 그 비의(秘義)가 숨겨져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그동안 전해져 내려온 기존불교 교리와는 다른 가르침이 있다고 하는 주장으로, 기존불교계를 이끌어오던 상좌부에서는 대중부의 이런 주장을 붓다 법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려는 말법의 음모로 규정하고 투쟁을 벌이게 됐다. 즉, 실상법과 인과법을 고수하려는 기존 법통을 계승한 상좌부와 이러한 가르침은 방편에 불과하며 참된 진리는 말씀하지 않은 중도(中道)인 공(空)에 있다고 하는 대중부간의 다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다툼 속에 대승불교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당시 상좌부를 근간으로 한 기존 부파불교는 승원을 중심으로 고도의 복잡하고 난해한 법(法)논리를 전개하면서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알 수 있는 철학적인 종교가 되어갔고 왕실과 귀족들의 지원 아래 엘리트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 재가 신자들과 개혁적인 대중부 승려들은 중생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권력과 유착하여 일신의 안락함을 누리면서 추상적인 논란만 일삼고 있는 기존 승단을 비판하면서 부처님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 중생들의 구원을 위한 불교가 되자고 대중부를 형성하고 대승불교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 승려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소승'으로 공격하고 스스로를 '대승'이라 이름 하면서 경전을 편찬하고 대중적인 신앙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6. 남방 상좌부(南方上座部) 불교
(1) 남방 상좌부의 성립
고대 인도문명을 탐구하려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난점이 역사자료의 부족이다. 특히 기록유산이 드문 것은 고대 인도인들에게 희박했던 역사의식 때문이다. 지나간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를 중요시하는 민족성 때문에 인도인들은 과거기록을 남기는데 소홀했다. 따라서 인도역사 혹은 불교역사를 탐색하려면 역사자료의 부족이라는 벽에 부딪친다. 거기에다가 문자 자체를 불경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으로 인해 성전을 문자화하는 일을 기피해, 여러 성전을 암송(暗誦)으로 전승했다. 불전의 경우에도, 성스러운 부처님 말씀을 인간의 때 묻은 손으로 만든 문자로 기록한다는 것을 불경스러운 일로 여겼다. 또 문자화하면 지나다니는 사람의 발길에 밟히기도 하고, 소나 말이 밟고 지나다니고… 그래서 성전은 가장 신성하고, 안전한 곳, 인간의 마음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도인들이 최고성전이라고 하는 힌두교 베다도 오히려 불경보다도 늦게 기원 후 1세기경에 문자화됐다.
이러하기 때문에 불경성립의 내력이나 불교사를 탐구하는데 더욱 곤란을 겪는다. 각종 불경의 성립배경이나 대승불교 흥기과정에 대해 논란이 많은 것도 바로 이러한 사료의 빈곤 때문에 확실한 근거를 찾기 어려운 데에서 야기되는 비극이다.
그러나 다행히 인도 남쪽의 섬나라 스리랑카엔 역사서가 전한다. 그것이 도사(島史)로 번역되는 <디파밤사(Dipavamsa)>와 대사(大史)로 번역되는 <마하밤사(Mahavamsa)이다.
<디파밤사(Dīpavaṁsa, 도사/島史)>는 팔리어로 쓰인 스리랑카 최고의 편년체 역사서로서, 불교를 중심으로 해 4세기 초에서 5세기 초에 걸쳐 작성됐으며, 전체 22장(章)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제1~8장에는 불교성립부터 아소카왕시대에 이르는 인도 정치사ㆍ불교사, 제9장 이하에는 스리랑카 건국에서부터 마하세나왕(4세기 중반)시대까지 스리랑카 정치사ㆍ불교사가 언급돼 있다. 편자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하밤사(Mahavamsa, 대사/大史)>는 팔리어로 쓰인 불교를 중심으로 해 작성된 스리랑카의 고대 역사서로서, 전체 37장(章)의 게송으로 돼 있다. 스리랑카 왕 다투세나(재위 460∼478)의 숙부인 비구승 마하나마(Mahanama)가 왕명에 따라 5세기 중엽에 역사서 <디파밤사(Dīpavaṁsa)>를 수정해서 편집했다고 한다.
1) 남방으로 불교전파
스리랑카 불교는 역사가 매우 유구하다. 기원전에 벌써 불교가 전래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리랑카 불교를 말할 때 아소카왕(Ashoka, 阿育王, BC 273년~232재위)을 빼 놓을 수 없다. 아소카왕에 의해 불교가 전래됐기 때문이다. 불멸 후 200년경(BC 3세기경) 마우리아왕조(Maurya dynasty) 아소카왕에 의해 불교가 인도 전역에 퍼져 불교교세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전술한 바와 같이 아소카왕의 주선으로 제3차 불전결집이 열려 상좌부 분별설부(分別說部) 교의로 통일을 했다.
그 후 아소카왕은 자신의 아들인 마힌다(Mahinda) 장로와 딸인 상기밋다(Sanghamitta) 비구니를 스리랑카로 보냈다. 이에 스리랑카 왕 데와남삐야-티샤(Devanampiya-Tissa, BC 250~207년 재위)는 이들을 맞이해 스스로 마힌다 장로에 귀의함으로써 불교신자가 돼, 수도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대사(大寺)를 세웠다. 이것이 스리랑카 상좌부의 분별설부(分別說部, Vibhajjavadin) 기원이다(BC 3세기).
그리고 AD 1세기경 왓따가마니 아바야(Vattagamani Abhaya)왕이 무외산사(無畏山寺, 아바야기리 비하라/Abhayagiri Vihara)를 건립해 마하팃사(Mahatissa) 장로에게 헌납함으로써 스리랑카불교는 대사파와 무외산사파 둘로 나뉘어 서로 경쟁을 벌였다. 그런데 대사파는 상좌부계통 분별설부불교를 고수했는데 비해, 무외산파는 AD 1세기에 대중부, 그리고 AD 3세기에는 대승불교를 각기 받아들여 대사파와 경쟁을 벌였다. 그리고 AD 4세기경 마하세나(Mahasena, 334-362년 재위)왕 집권 시에는 대사파를 탄압했기 때문에 무외산사파의 대승불교 황금시대가 오래 지속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사파는 이에 굴하지 않고 청정한 상좌부(분별설부)의 교학과 계율을 잘 유지했고, 결국은 대사파(大寺派)의 상좌부불교가 압도했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사라지고 스리랑카엔 초기불교가 고스란히 살아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스리랑카로 전래된 경전(팔리어 삼장)은 AD 5세기에 미얀마로 전래 됐고, 미얀마의 통일왕조인 페간(Pagan)왕조에 의해 13세기에 태국으로, 14세기에는 캄보디아, 라오스 등지로 전파됐다. 이렇게 해서 남방 상좌부불교(소승불교)가 오늘날까지 번성하게 된 것이다.
2) 제4차 불전결집(알루비하라 결집)
남방불교권인 스리랑카에서 제4차 불전결집이 이루어졌다. <마하밤사(Mahavamsa)>에 따르면, 제3차 결집 후 아소카왕이 파견한 아소카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 장로를 비롯한 4명의 전법사가 스리랑카에 불법을 전했다. 스리랑카에서는 상좌부계통의 마힌다 장로가 도착하자, 즉시 그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전(口傳)으로 전수받기 위한 경전편찬회의가 열렸다. 이때 모인 인원은 16,000명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150여 년이 지난 BC 1세기 중반에 대대적인 경전편찬 작업이 개최돼 이 경전편찬회의를 남방권에서는 제4차 불전결집으로 공식화하고 있다.
당시 스리랑카에는 국내외의 혼란과 흉년에 의한 기근 등 엄청난 시련이 있었기에 자칫 부처님 가르침을 잃어버릴 것을 염려해 그런 시련 속에서도 경전편찬 작업에 착수 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 고려시대에 몽고침입으로 힘든 고통 속에서 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상황과 비슷하다 하겠다.
이 편찬사업이 당시 스리랑카의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서 남쪽으로 100여 킬로 떨어진 마탈레(Matale) 지역의 알루비하라(Alu Vihara, 알루위하라) 석굴사원에서 열렸기 때문에 이 경전 편찬회의를 ‘알루비하라(Alu Vihara) 결집’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편찬회의는 마하테라 라키타의 주재 하에 상좌부계통 분별설부교의를 고수하는 500명의 학승들이 참여했다고 하며, 이들은 7년에 걸쳐(BC 1세기) 네 차례의 결집을 통해 그때까지 전승되던 모든 가르침을 총망라한 경(經) ․ 율(律) ․ 론(論)의 <팔리어 삼장(三藏), Tipiṭaka>을 완성하고, 이때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팔리어 삼장 일체를 종려나무 잎을 말려 거기에 문자로 기록했다. 이로써 처음으로 완성된 <팔리어대장경>이 조성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경전이 팔리어로 문자화 된 것이 BC 35~32년 스리랑카의 알루비하라(Aluvihara)에서 였고, 이것을 패엽경(貝葉經)이라 하며, 알루비하라 사원에는 패엽경 제작을 위해 조성된 동굴이 14곳이나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두 곳만이 온전하게 보전돼 있다.
※패엽경(貝葉經)---고대 스리랑카에서는 야자수나무의 일종인 종려나무(多羅樹) 잎을 말려 그 잎을 종이 대신 사용했다. 잎은 바탕이 곱고 뻑뻑하며 길어서, 글을 쓰려면 말려서 일정한 규격으로 자르는데, 너비 6.6cm, 길이 66cm 정도 크기로 잘랐다. 이렇게 다듬은 것을 산스크리트어로 pattra(파트라)라 불렀는데, 한역해서 패다라(貝多羅)라 한 것이다. 패다라에 송곳이나 칼끝으로 글자를 새긴 뒤 먹물을 먹인다. 그리고 끝 2군데에 구멍을 뚫어서 몇 십 장씩 꿰어 묶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패엽경은 각각 경전, 논장, 계율로 나누어져서 3개의 광주리에 보관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서 ‘바구니’라고 하는 의미의 ‘장(藏, pitaka)’이라는 용어를 쓴 것에 유래해서 <대장경>이라 할 때 장(藏)이란 글자를 쓴다.
헌데 전술한 바와 같이 대승불교가 스리랑카에도 파급됐다. 이때 무외산사(無畏山寺)가 중심이 돼 대승불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스리랑카 상좌부계통의 출가자들은 대승불교운동을 일종의 ‘불교 타락’으로 봤다. 그리하여 <팔리어 삼장>에 들어 있지 않은 내용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으로 간주해 대승불교를 배척했다.
그리고 대승불교로부터 오염될 것을 걱정해 <팔리어 삼장>과 주석서 원본을 잘 보존하기 위해 일단 싱할리어로 번역해 가두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싱할리어 문자로 기록한 <팔리어 삼장>과 그 주석서를 수정 없이 고스란히 전승했기 때문에 원본의 훼손이 없었다. 그리하여 수백 년간 싱할리어로 가두어 뒀다가 스리랑카 내에 대승불교의 기세가 꺾이고 상좌부불교가 승리하면서 이를 다시 팔리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전개했다. 즉 5세기에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 4세기 후반~5세기 생존) 비구는 싱할리어로 된 삼장인 패엽경을 도로 팔리(Pali)어로 번역하고 주석서를 썼다. 그리고 그의 <청정도론(淸淨道論)>도 바로 이때 집필했다. 그래서 지금 보는 <팔리어 삼장>은 원본 훼손 없이 부처님 당시의 원음을 그대로 보전 할 수 있게 됐을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에는 당연히 대승불교는 물론 밀교와 같은 불교도 도입되지 않았다.
(2) 남방 상좌부(南方上座部)의 교학(敎學)
남방 상좌부의 아비달마도 <니까야> 중의 교설을 조직해 체계적인 학설로서 논술한다고 하는 점에서 설일체유부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단지 이 부파에는 처음부터 이 부파 특유의 이론을 발전시킨 면도 없지 않다.
1) 색법(色法)
남방 상좌부에 있어서는 색법(물질적 존재)을 사대종(四大種) 및 대종소조(大種所造)로 정의하고 있다. 사대종이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네 가지 원소를 의미하고, 대종소조란 이러한 네 가지 원소에 의해 합성된 제물질을 의미한다. 남전 아비달마는 대종소조의 색(色)으로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색(色), 성(聲), 향(香), 미(味), 남근(男根), 여근(女根), 명근(命根), 심사(心事), 단식(段食), 신표(身表), 어표(語表), 허공계(虛空界), 색(色)의 가벼움, 색의 부드러움, 색의 적응성, 색의 적집, 색의 지속, 색의 노성(老性), 색의 무상성 등 24가지를 들고 있다.
처음 다섯 가지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은 시각기관, 청각기관, 후각기관, 미각기관, 촉각기관(신체란 의미가 아님)의 오관(五官=五根)이며, 색(색채, 형태), 성(聲, 목소리뿐만 아니라 소리 일반), 향(香), 미(味)는 오관 중 앞 네 가지 안(眼), 이(耳), 비(鼻), 설(舌)의 대상을 말한다.
남, 여근은 성적 기능의 근본이 되는 것이고, 명근(命根)은 생명적 기능의 근본이 되는 것, 심사(心事)는 마음의 자리로 생각되는 심장이다. 단식(段食)이란 입으로 섭취하는 음식물의 뜻이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영양분으로 삼아 육체를 지탱, 유지하는 작용을 말하며, 신표(身表)와 어표(語表)는 내심(內心)의 업(業, 그것은 心. 心所의 작용)이 신체의 동작과 말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허공계(虛空界)란 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 가지 ‘색(色)의 가벼움, 색의 부드러움, 색의 적응성’은 색법이 공통적으로 갖는 변응성(變應性)을 말한다. 마지막 네 가지 ‘색의 적집, 색의 지속, 색의 노성(老性), 색의 무상성’은 유위(有爲)이고, 무상(無常)인 색법이 공통적으로 갖는 성질(有爲四相이라고 함)로서, 즉 생기, 지속, 변화, 소멸의 성질이다. 이것들은 말하자면 색법의 속성이지만 그 자체를 바로 색법이라고 생각한다.
2) 89가지 마음과 심작용(心作用)
마음(心)을 89가지로 분류하는 것은 완전히 남방 상좌부의 독자적인 교설방법이다. 먼저 마음을 선(善), 불선(不善-惡), 무기(無記)로 나누어 보면, 선심 21, 불선심 12, 무기심 56가지이다. 또 선심으로서 욕계선심 8, 색계선심 5, 무색계선심 4, 출세간 즉 삼계를 떠난 무루(無漏)의 선심 4가지를 들고 있다.
불선심(不善心)은 모두 욕계에 속하지만(색. 무색계에는 불선심이 존재하지 않음) 그것을 다시 탐심(貪心) 8, 진심(瞋心) 2, 치심(癡心) 2가지로 나눈다.
무기심(無記心)은 업의 결과인 이숙(異熟)과 오직 작용일 뿐인 유작(唯作) 등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이숙의 무기심은 욕계의 선이숙(善異熟) 16, 욕계의 불선이숙(不善異熟) 7, 색계의 이숙 5, 무색계의 이숙 4, 출세간의 이숙 4 가지 등 모두 36가지이다. 그리고 유작(唯作)의 무기심은 욕계 11, 색계 5, 무색계 4 가지 등 모두 20 가지이다.
그리고 마음이 작용을 일으키는 과정에 대해 자세하게 분석해 14가지 단계로 나누는 것 역시 이 남방 상좌부의 독특한 교설이다. 14가지 단계에 대해서는 각기 특유의 술어로써 표현하고 있는데, 일단 그 번역어를 적어보면, ①결생(結生) ②유분(有分) ③전(轉) ④~⑥안식(眼識) 내지는 신식(身識) ⑨영수(領受) ⑩추도(推度) ⑪결정(決定) ⑫속행(速行) ⑬피소연(彼所緣) ⑭사(死)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①결생(結生)은 어떤 생애에 생(生)을 받는 순간의 마음을 말하며, ⑭사(死)는 생을 마치고 죽을 때의 마음을 말한다. ①결생(結生)에서 시작해 ⑭사(死)로 끝마치는 한 생애 동안, ② 내지 ⑬의 순서로 중생의 정신생활이 전개된다. ⑭사(死)에서 한 생애가 끝나면 계속해서 다음 생애의 ①결생(結生)이 일어나 끝없이 윤회가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②유분(有分)은 정신활동의 기반이 되는 잠재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작용도 갖고 있지 않지만 모든 정신작용은 여기에서 나와 여기로 돌아간다. ③전(轉)은 안팎으로 자극을 주어 마음을 일으켜,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상태로부터 표면에 나타나는 상태로 향하게 하는 작용을 말한다. 여기에는 안식(眼識) 내지 신식(身識)의 5식(五識) 가운데 어떤 하나를 일으키는 경우와 의식(제6식)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④~⑧은 안식(眼識-시각작용), 이식(耳識-청각작용), 비식(鼻識-후각작용), 설식(舌識-미각작용) 신식(身識-촉각작용) 등 다섯 가지로서, 여섯 번째 의식(意識-판단, 사고작용)에 대해 전5식(前五識)이라 한다. 이것들은 ③전(轉)에 의해 일어나 ⑨영수(領受)로 이어진다.
⑨영수(領受)는 전5식을 통해 파악된 대상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여 쾌(快) 혹은 불쾌(不快)로 받아들이는 마음작용이다. ⑩추도(推度)는 ⑨영수(領受)와 마찬가지로 그 대상을 감각적으로 판단해 기뻐하고 혹은 슬퍼하는 마음작용이다. ⑪결정(決定)에 이르러 비로소 감각이 아닌 지각인식작용이 일어난다. 감각작용으로부터 지각작용으로 진입하는 단계가 ⑪결정(決定)이다. 즉, 지각, 인식, 판단, 의지 등이 정(定)으로 진입하는 단계가 ⑪결정(決定)이며, ⑫속행(速行)은 지각, 인식, 판단, 의지 등 정신작용이 완전히 발휘된 단계이다. 앞의 ③전(轉)에서 의식(제6식)이 일어날 경우에는 ④~⑪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⑫속행(速行)으로 들어간다. ③전(轉)은 두 순간, ④~⑪은 모두 한 순간으로 이루어진 마음작용이지만, ⑫속행(速行)은 가장 길 경우 7순간에 걸쳐 일어난다고 한다.
만약 ⑫속행(速行)의 대상이 강대하고 명확한 것일 경우 그것이 마음에 인상을 남겨 마음속에 간직하게 된다. 그러한 인상을 모아 간직하는 마음작용이 ⑬피소연(彼所緣)이다. 이렇게 해 일련의 활동을 끝낸 마음은 다시 돌아와 ②유분식(有分識)에 침잠한다.
그런데 14단계의 마음작용은 각기 89심(八十九心)의 한 가지에서, 혹은 두 가지 내지 다섯 가지에서 작용하게 된다. 모든 욕계의 선심(善心), 불선심(不善心) 및 유작무기심(唯作無記心) 중 8가지, 색계, 무색계의 선심 및 유작무기심, 그리고 모든 출세간심은 속행(速行)만을 갖는다. 전(轉)은 욕계의 유작무기심 중 두 가지에 있으며, 결정(決定)은 그 중 하나에만 있다. 안식(眼識) 내지 양식(身識)은 욕계의 선(善) 및 불선이숙무기심(不善異熟無記心) 중 각각 다섯 가지에 있다. 영수(領受)도 욕계의 선심 및 불선이숙무기심 중 각각 한 가지에 있다. 결생(結生)과 유분(有分)과 사(死)는 욕계의 선이숙무기심 중 9가지, 불선이숙무기심 중 한 가지, 색, 무색계의 이숙무기심 모두에 있다. 추도(推度)는 욕계의 선이숙무기심 중 두 가지, 불선이숙무기심 중 한 가지에 있으며, 피소연(彼所緣)은 욕계의 선이숙무기심(善異熟無記心) 중 9가지와 불선이숙무기심 중 한 가지에 존재한다.
그런데 이렇게 세밀하고 번쇄한 논의는 상식적인 내용이 아니고 전문적인 연구 없이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번쇄한 내용이다. 따라서 이러한 분석과 서로간의 관계에 대한 논구(論究)는 사람들로 하여금 쓸데없는 번삽함만 느끼게 한다. 무슨 필요에서 이런 세밀한 탐구를 했으며, 과연 과학적으로 합리적인 설명인지도 의심스럽다. 하지만 이것이 일반적인 아비달마 논서의 본래 형태이며, 아비달마를 왜 번쇄하다고 하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3) 24사연(二十四緣)
인(因) ‧ 과(果)의 분류로서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에서는 6인(六因), 4연(四緣), 5과(五果)를 주장하지만 남방 상좌부에서는 <발취론(發趣論, 팟타나(Patthana)>이래 24연(二十四緣)을 주장하고 있다. 그 명칭도 이 부파 특유의 것이 많은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번역어로 표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인연(因緣), ②소연연(所緣緣), ③증상연(增上緣), ④무간연(無間緣), ⑤등무간연(等無間緣), ⑥구생연(俱生緣), ⑦상호연(相互緣), ⑧의지연(依止緣), ⑨친의지연(親依止緣), ⑩전생연(前生緣), ⑪후생연(後生緣), ⑫수습연(修習緣), ⑬업연(業緣), ⑭이숙연(異熟緣), ⑮식연(食緣), ⑯근연(根緣), ⑰정려연(靜慮緣), ⑱도연(道緣), ⑲상응연(相應緣), ⑳불상응연(不相應緣), (21)유연(有緣), (22)무유연(無有緣), (23)거연(去緣), (24)불거연(不去緣).
이것은 너무나도 번삽하게 나열한 것이어서 명칭은 다르지만 뜻이 같은 것도 있고(無間緣과 等無間緣), 정연한 조직성이 결여돼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복잡 다양한 인과관계를 가능한 한 극명하게 추구하려 했던 아비달마 논사들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7. 부파불교의 논서(論書)
(1) 삼장(三藏)의 성립
설일체유부에서는 BC 2세기경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Katyayaniputra)에 의해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 Skt Abhidharma Jñānaprasthāna śāstra)>이 저술됨으로써 그들 교의에 대한 학설 전모가 드러나고, AD 4세기말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에 이르면 그 학설을 정연하게 조직하게 되는데, 체계적인 논서로 완성된 형태는 역시 AD 5세기 초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Abhidharmakosa-sastra)>의 등장으로 이루어진다.
한편 남방 상좌부에 있어서 <구사론>에 상당하는 논서로는 <청정도론(淸淨道論-비숫디맛가/Visuddhimagga)>을 들 수 있다. <구사론>은 설일체유부에서 가장 유명한 학승 가운데 한 사람인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 4세기~5세기 초)의 저작이고, <청정도론>은 남전 팔리어 경론의 대 주석가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 4세기 후반~5세기) 저술이다. 양자가 서로 전후해 세상에 나타난 것은 5세기 굽타왕조Gupta dynasty, 320~550) 중기 무렵이다. 물론 이 시대 인도불교의 주류는 이미 대승불교로 옮겨가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파불교 아비달마가 완성됐다고 하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불교 성전은 경(經)과 율(律), 그리고 논(論)이라는 삼장(三藏)으로 구분된다. 삼장 중에서 경과 율은 이미 불멸 직후 제1차 불전결집에서 성립됐고, 논은 제2차 불전결집 이후에 성립됐다. 즉, 부파불교시대에 새롭게 발전한 아비달마 문헌을 논(論)이라고 불렀다. 각 부파는 독자적인 아비달마를 갖고자 했으므로 그들은 종래의 경과 율에 논을 하나 더해 삼장의 문헌을 갖추기에 이른다. 이로써 근본불교의 경과 율에 각 부파들의 논이 포함돼 불교의 삼장(三藏)이 성립된 것이다. 이 삼장의 완성은 부파불교시대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부파불교시대 삼장은 거의 산실돼버리고, 현재 그 삼장이 비교적 완벽하게 남아있는 것은 팔리어로 된 실론 상좌부계통 <니까야(Nikaya)>를 비롯한 삼장과 산스크리트어 삼장에서 한역돼 보존되고 있는 중국의 설일체유부계통 <아가마(아함경)>을 비롯한 삼장뿐이다. 그 이유는 아소카왕의 명으로 전해진 상좌부불교를 근간으로 스리랑카에서 조성된 패엽경을 비롯한 <팔리어 삼장>이 지금껏 잘 보존해 왔기 때문이며, <아가마(아함경)>의 경우는 북인도에서 번성한 쿠샨왕조에서 보호되다가 중국으로 전래돼 오늘날 동북아시아에서 <대장경(大藏經)>이란 이름으로 보존돼왔기 때문이다. 그 외 나머지 경전들은 인도의 정치적 격변기에 이슬람세력의 침입과 힌두교의 포섭으로 불교가 소멸됨으로써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아비달마교학의 내용을 탐구하려면 남전 상좌부계통의 <팔리어 삼장>과 북전 상좌부계통의 한역 삼장(대장경)이 주요자료가 된다.
그리고 삼장 중 논장의 경우, 부파불교시대에 가장 강대했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아비달마 중 최승의 논장으로 유부 7론이 전하고 있다. 즉, ①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 ②법온족론(法蘊足論), ③시설족론(施設足論), ④식신족론(識身足論), ⑤계신족론(界身足論), ⑥품류족론(品類足論), ⑦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이다. 앞 여섯을 육족론(六足論)이라 하고, <아비달마발지론>을 신론(身論)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발지론>의 이역(異譯)인 아비담팔건도론(阿毗曇八建度論)이 전한다.
스리랑카(실론)에 대한 불교전도는 전술한 바와 같이 아소카왕(Ashoka, 阿育王) 치세인 BC 3세기에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도 불교를 전했으니, 현재 남방불교는 상좌부계통 소승불교이다. 그리고 스리랑카 상좌부에도 7론이 조성돼 전하는데, ①법집론(法集論), ②분별론(分別論), ③논사(論事), ④인시설론(人施設論), ⑤계론(界論), ⑥쌍론(雙論), ⑦발취론(發趣論)이다.
위의 설일체유부 논장과 실론 상좌부의 논장 이외의 것으로는 법장부의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 정량부의 삼미저부론(三彌底部論), 경량부 하리발마(Harivarman, 250~350경)의 성실론(成實論)이 전한다.
이와 같이 현재 전하는 논장은 설일체유부와 남방 상좌부에 각각 속한 7론이 대표적이고, 다른 부파의 것은 극히 일부뿐으로 모두 산실되고 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부파 논설은 대개 유부와 남방 상좌부 논장에 인용돼 있는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한편 설일체유부에 있어서는 육족론이나 발지론 이후 이들 논서에 대한 주석적 연구가 성행했다. 이들 주석가[비바사사(毘婆沙師)]들의 아비달마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200권이다. 이 논서의 성립으로 유부 교학은 거의 확정됐지만 본론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그 교의를 간추려 요점 정리한 강요서가 저술됐고, 이들 논서를 기초로 해 유명한 세친(世親)의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이 성립됐다. 그리고 스리랑카에서도 1-2세기 경 많은 논사가 배출돼 주석서를 지었는바, 붓다고사(佛音)의 <청정도론(淸淨道論)>이 가장 유명하다.
(2)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논서
설일체유부 논장의 기본은 근본 아비달마로 일컬어지는 7론(七論)이다(이후에 '아비달마'라는 말을 생략). 이 가운데 앞의 두 가지, <집이문족론>과 <법온족론>은 <아함경>에 대한 해설서로서, 이 두 논(論)은 아비달마 논서로 성립했지만 아직 경전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 즉, 아비달마 발전단계로는 초기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성립된 <시설족론> 내지 <품류족론>에서는 <아함경>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각 개념들의 정의나 상호관계에 대해 극단적일 정도로 분석을 했는데, 특히 세우(世友, Vasumitra)의 저술로 알려지는 <계신족론>과 <품류족론>에서는 마음과 마음작용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술어에 대한 분석적 고찰이 더욱 더 발전돼 유부교학의 기초가 확실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가다연니자(Katyayaniputra)가 지은 <발지론(發智論)>은 <시설족론> 등과 함께 설일체유부 중기 논서이면서 유부 아비달마의 획기적인 분기점이라고 할 만한 논서이다. 가다연니자는 대략 기원전 150~50년 무렵의 인물로, 상좌부에서 설일체유부를 분파시켰다고 전한다. 원래 본상좌부는 경장을 절대 무오류로 간주하고, 율장과 논장을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한데 반해, 그는 논장(아비달마)을 위주로 해서 제법유론(諸法有論)을 주장함으로써 상좌부 내 지말분열을 초래케 했다고 한다.
부처님 깨달음의 표준적 근거가 경(經)인가, 논(論)인가 하는 문제는 이미 지경자(持經者)와 지론자(持論者)라고 하는 형태로 원시불교시대부터 제기돼 왔으며, 훗날 유부 내부에서 카슈미르 계와 간다라 계의 논쟁, 그리고 세친(世親, Vasubandhu)과 중현(衆賢, Samghabhadra) 간의 논쟁도 바로 이에 대한 것이었다. 즉, 가다연니자로부터 확립된 유부의 전통은 경전(經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에 직면하게 된 온갖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사색하고 탐구하려는 데에 있었다.
7론 중 앞 6론이 각기 특정의 개별문제를 논의해 유부교학에서 발(足)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발지론>은 유부교학을 전체적으로 조직하고 있기 때문에 몸통에 해당하는 것이라 해서 전통적으로 <발지신론(發智身論)>이라 일컬어 왔다.
유부교학은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가 저술했다는 <발지론>에 대한 방대한 주석서인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서 집대성됐다. AD 2세기 중엽 쿠샨왕조 카니시카(Kaniska)왕 보호 아래 협(脇, Pārśva/파르스바) 존자를 중심으로 해서 세우(世友) 등 논사와 500여명 아라한들이 결집한 <대비바사론>은 <발지론>의 주석서인 만큼 그 구성과 내용은 <발지론>과 비슷하다. 부파불교시대에 불경주석과 연구에 종사한 주석가들을 비바사사(Vibhasika, 毘婆沙師))라고 불렀으며, 이들에 의해 편찬된 것이어서 <대비바사론>이라 했다.
이 논서는 '비바사(毘婆沙, 廣解)'라는 제목에 걸맞게, 원칙적으로 <발지론>의 문구 하나하나에 대해 해설하면서도 중요한 문제로 여겨지는 문구에 이르러서는 많은 분량을 할애해 거기서 논의되지 않은 새로운 문제들까지 논의하면서 설일체유부 학설을 집대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방대했기 때문에 이후 요강서 혹은 입문서라고 할만한 <비바사론(毘婆沙論)> ‧ <입아비달마론(入阿毘達磨論)> ‧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등이 나타나게 됐다.
특히 법승(法勝, Dharmaśri)이 지은 <아비담심론>은 체계나 형식면에 있어 다음에 나타나는 다른 논서의 정형이 됐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석으로 <아비담심론경(阿毘曇心論經)> ‧ <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 등이 찬술됐고, 마침내 이 같은 체계에 기초해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의 최고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구사론(Abhidharmakosa-sastra, 阿毘達磨俱舍論)>이 나타나게 됐다.
그러나 <구사론>은 경량부 입장에서 유부를 비판한 부분도 없지 않아 카슈미르계의 정통 유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중현(衆賢, Samghabhadra)은 <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과 <현종론(阿毘達磨藏顯宗論)>을 다시 지어 이를 비판하고 정통 유부설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중현도 <구사론>의 영향을 받아 이전의 유부학설과 달랐기에 후대로부터 신유부(新有部)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순정리론>과 마찬가지로 작자 미상의 <아비달마디파(Abhidharmadipa, 아비달마의 등불)>가 근래 발견돼 교정 출판되기도 했다. 이상에 거론된 논서들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아비달마디파』는 게송으로 이루어진 「아비달마디파」와 그것의 산문의 주석인 「비바사프라바(Vibhasaprabhavritti)」를 일컫는 일군의 문헌으로 1959년 캘리포니아 대학의 P.S. Jaini 교수에 의해 교정 출간됐는데, 본론의 작자는 스스로를 등불을 밝히는 자(D pakara)로, 세친을 구사논주(Kosakara)로 칭하면서 <구사론>을 비판하고, 카슈미르 정통 설일체유부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다.
①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저자는 붓다 10대 제자의 한 사람인 사리자(舍利弗, 팔리어 Sāriputta)로 돼 있다. <장아함경>에 속하는 경전의 하나인 <상기티수탄타(중집경/衆集經, 산스크리트어 Sangiti suttanta)> 내용을 부연, 설명한 것으로 <상기티수탄타>는 여러 가지 불교술어를 1에서부터 10까지의 숫자에 따라 열거한 경전으로 상당히 아비달마적인 색채가 농후한 경인데, 논(論)에서는 <상기티수탄타>에 열거되고 있는 술어 하나하나에 주석적인 설명을 부가하고 있다. 즉 이것은 아함 가운데 특정한 하나의 경전을 채택해 그것을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초기불교 아함의 직접적인 연장으로 볼 수 있으며, 가장 초기에 성립한 것으로 논장이 경장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는 하나의 원초적인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② 법온족론(法蘊足論)---저자는 붓다 10대 제자의 한 사람인 마하목건련(摩訶目犍連 목갈라나, Maudgalyayana)으로 돼 있다. <집이문족론>처럼 특정한 한 경전에 대해 주석하는 형태가 아니라 아함에서 21가지 주요한 교설을 선정해 교설 하나마다 하나의 장을 할애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즉, 먼저 그 교설을 담은 경문을 첫머리에 게재하고 난 다음, 이에 대해 자세히 해석하는 방법은 요컨대 최초기 아비달마 논서 특징이다.
위 두 논서는 아비달마 논서로서 가장 초기에 성립한 것으로 아직 경전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경전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논’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여기에도 이미 설일체유부 특유의 용어나 사상이 일부 나타나고 있지만 여전히 다른 여러 부파와 공통되는 요소가 많이 포함돼 있다.
③ 시설족론(施設足論)---저자는 붓다 10대 제자의 한 사람인 가전연(迦延, Katyayana)으로 돼 있다. 아비달마적인 우주론과 세계론을 서술하고 있으며, 이로부터 아함경전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스타일에 있어 아비달마 논서 특유의 색채가 짙게 나타난다.
저자인 가전연은 해박(該博)한 불교이론과 붓다 교설의 이치를 문답하고 분별하는 데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으므로 붓다로부터 논의제일(論議第一)이라고 칭찬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논리력를 구사해 길은 것은 짧게, 짧은 것은 길게 자유자재로 붓다 교설을 일목요연하게 했기에 후대 불교학자들은 그를 뛰어난 논을 지은 논사(論師)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의 벽을 넘어서 그의 위치를 비약시킨 결과로 시대상에 맞지 않는 설정이다. 붓다 당시 살았던 가전연과 <시설족론>이 성립한 시기는 500여년의 시차가 있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은 부파불교의 핵을 이루는 아비달마 논사들은 가전연을 자파로 수용해 자기네 위상을 높이려고 그랬겠지만 그 결과 시대와 일치되지 않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④ 식신족론(識身足論)---저자가 제바설마(提婆設摩)로 돼 있다. 이는 설일체유부의 교리에서 제기되는 의식의 문제, 즉 마음의 활동, 마음작용에 대한 분석을 집중적으로 논한 논서로서 본격적인 아비달마 연구서라고 볼 수 있다.
⑤ 계신족론(界身足論)---저자는 세우(世友, 바수미트라/Vasumitra)로 돼 있고, 당(唐)의 현장(玄奘)이 번역했다. 이는 마음과 마음작용에 대한 해석을 크게 진전시키고 있다. 이에 이르면, 법수(法數)에 따라 정리된 술어(아가마 이래의 법수 외에 설일체유부의 독특한 법수도 나타남)에 대해 극히 복잡한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개개 술어 사이 관계에 대해서도 극단적으로 미세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어, 아비달마 논의의 번쇄함과 정치함의 도를 더하고 있다.
⑥ 품류족론(品類足論)---역시 저자는 세우(世友, 바수미트라/Vasumitra)로 돼 있고, 현장이 번역했다. 원래 몇 개의 작품을 한데 모아 하나로 만든 것 같으며, 따라서 한 사람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술어에 대한 분석적 고찰이 더욱 더 발전돼 있으며, 동시에 ‘5위(五位)’설이나 ‘98수면(九十八隨眠)설’ 등 설일체유부의 독특한 이론이 확실한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논서이다.
※98수면론(九十八隨眠論)---98근본번뇌(九十八根本煩惱)라고도 한다. 부파불교 설일체유부 학설이다. 여기서 수면(隨眠)은 번뇌를 뜻한다. 근본번뇌를 3계(三界)와 5부(五部)의 측면에서 세분했을 때 얻어지는 98가지 근본번뇌들을 말한다.
⑦ 발지론(發智論)---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카트야야니푸트라/Katyayaniputra)가 저술한 발지론의 출현은 설일체유부 아비달마 역사상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시설족론>에서부터 <품류족론>에 이르는 동안 여러 논들이 주로 각기 특정한 문제를 분담해 고찰하고 있는데 반해, <발지론>에 이르면 비로소 설일체유부 학설 전반에 걸쳐 조직적인 논술이 이루어짐으로써 원시불교에서 유부(有部) 교리가 독립하게 된다.
•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발지론>에 대한 매우 방대한 주석서로서 전술한 바와 같이 쿠샨왕조 카니시카(Kaniska)왕 치하에 파르스바(脇尊者, Parsva)를 비롯한 500명 아라한이 함께 저술했다고 한다. 이 논서가 나타남으로써 문제의 세분화는 한층 더 촉진됐고, 고찰 역시 더욱 더 정밀해졌다. 실제로 이것은 단순히 발지론의 주석일 뿐만 아니라, 만약 어떤 연관되는 부분이 있다면 발지론에서 언급되지 않는 문제까지도 새롭게 채택해 논의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부파 내 여러 가지 이론(異論)이나 다른 학파의 학설을 수없이 인용하고 있어서 실로 설일체유부 학설을 집대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AD 391년, 저자는 법승(法勝, Dharmaśri)이라고 전한다. 이는 작은 논서이지만 유부학설을 조직화하는 데 특기할 만한 공헌을 했다. 이 논서는 모두 10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먼저 게송으로 학설의 요점을 간결이 설한 다음, 산문으로 그것을 해석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복잡하게 발달한 유부사상을 정연하게 조직하고 있다. 그것은 <발지론>에 비해 훨씬 진보한 것이다. 체계나 형식면에 있어 유부 논서의 정형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이후 거의 모든 설일체유부 논서가 이를 답습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논서는 유부의 후기 논서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석으로 <아비담심론경>과 <잡아비담심론> 등이 찬술됐다.
• 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5세기 초에 찬술됐으며, 줄여서 <구사론>이라 하는데, 이의 저자는 세친(世親, Vasubandhu)으로서 아비달마 논서의 완성 형태를 제시한 것이다. <집이문족론> ‧ <법온족론>에서 시작해 발전해온 아비달마는 <발지론>에서 학설 대강의 전모를 드러내고, <아비담심론>에서 그 조직적 논술의 정형을 갖춘 유부 논서는 <구사론>에서 최고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체계적 논서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분량에 있어서도 <발지론>의 한 배반, <아비담심론>의 두 배나 되는 대작이다. <구사론>은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 사상을 상세히 설명해 밝히고 있으며, 특히 많은 불교술어에 대해 명쾌한 정의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이후에 불교교리의 기초가 되는 교과서로서 활발한 학습과 연구가 이루어져 수많은 주석서, 연구서, 해설서, 요약서가 작성됐다. 불교에서 이 작품이 차지하는 위치는 로마가톨릭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神學大全)>이 차지하는 위치에 비견돼왔다 그러나 <구사론>은 유부 학설만을 충실히 서술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때때로 저자 자신의 견해에 따라 전통학설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다른 주장을 세우기도 했다. 그럴 경우 설일체유부의 정통설을 비판하는 저자 입장이 경량부(經量部)의 그것과 상통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유부의 논서라고 단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 순정리론(阿毗達磨順正理論)---<아비달마장현종론>과 더불어 이 두 가지 논서는 중현(衆賢, 상가바드라/Samghabhadra)의 저서로서, <구사론>을 계승하고 있으며, 운문 부분에서는 구사론의 것을 거의 그대로 채용하지만 산문으로 된 해설부분에서는 세친(바수반두)의 학설을 엄격히 비판해 정통파 설일체유부 학설을 선양하려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즉 기본골격은 구사론을 따르되 그 학설의 어떠한 부분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반박하고 있다. 특히 <순정리론>은 그 분량에 있어 구사론의 두 배 이상이고, 그 예리한 비판과 상세한 반론이 두드러진다.
• 장현종론(阿毘達磨藏顯宗論)---중현(衆賢, 상가바드라/Samghabhadra)의 저서로서, 구사론보다 많은 분량으로 돼 있으며, 이는 비판보다 오히려 유부의 정통설을 천명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3) 남방 상좌부(南方上座部)의 논서(論書)
남방 상좌부에서 성전으로 꼽는 논장은 BC 250년 무렵부터 BC 50년 사이 200여년에 걸쳐 성립된 7론(七論)이며, 7론에 대한 세 가지 주석서를 거쳐 붓다고사의 <청정도론(淸淨道論)>에 이르러 하나의 완성된 사상체계를 실현했다. 이 이후 나타난 논서는 <입아비달마론(入阿毘達磨論)>처럼 대개 난해하고 복잡한 <청정도론>에 대한 요강서들이다. 그런데 팔리어 칠론(七論)은 그 성립 연대가 그다지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으며, 그 순서조차 분명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그리고 칠론 외에 <지도론(指道論)>, <장석론(藏釋論)>, <밀린다팡하(Milindapanha)> 등 세 가지 논서가 있다. 이것들은 아비달마 논서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내용상 아비달마적 경향을 띠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로서 특히 중요시된다.
① 법집론(法集論, Dhammasangani)---초기 팔리어 논서이고, 내용은 불교의 여러 주제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으므로 초기불교의 복잡한 사상을 공부하는데 꼭 필요한 설계도 역할을 제공해준다.
제1장에서는 마음과 마음작용(心. 心所)을 선(善). 악(惡). 무기(無記) 삼성(三性)으로 나누고, 그것을 다양하게 분석적으로 고찰했다. 이른바 89심(八十九心)이 여기서 설명되며, 마음작용으로서 40가지 정도가 언급되고 있다.
제2장에서는 물질적 존재(色)를 한 가지 종류에서 11가지 종류로 분류해, 그것 역시 각각 다양하게 분석했다.
제3장에서는 일체존재를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방법 22가지와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방법 100가지[이상 도합 122가지를 아비달마의 논모(論母)에 의한 분별이라고 함], 나아가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또 다른 방법 42가지[이를 경(經)의 논모(論母)에 의한 분별이라고 함], 도합 164문(門)의 분별을 설했다.
제4장에서는 앞장의 그것과 약간 다른 관점에서 다시 아비달마 논모 122문(門)에 의한 분별을 시도하고 있다. 경의 논모(論母)라고 하는 이유는 <니까야>인 <장부경전>의 <상기티숫탄타, Sangitisuttanta>에서 언급되고 있는 술어 가운데 일부분을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점에서 볼 때 북전 논서의 <족이문족론(集異門足論)>과 비슷한 관계이다.
※논모(論母, 마띠까/mātṛkā)---불타법문의 취지나 요의를 추구하면서 다양한 경설을 널리 분별 해석(廣釋)하기도 하고 종합 정리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논모(論母, mātṛka) 혹은 논의(論議, upadeśa)라고 한다. 또한 논점이나 주제를 기억하기 쉬운 방식으로 정리해 둔 목록. 열거되는 연구제목을 논모라 하기도 하며, 더러 논장(論藏)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② 분별론(分別論, 비방가/Vibhanga)---<법집론>을 보충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논서이다. 북전 <법온족론(法蘊足論)>과 비슷한데, 아함 가운데 주요한 교설을 뽑아 그것을 종횡으로 분석 고찰했다. 먼저 그 교설을 나타내는 정형적(定型的 - 그 대다수는 아함에 그대로 나타남)인 언급을 하고, 그것에 대해 정의적(正義的)인 설명(그것을 경분별/經分別이라고 함)을 부가한 다음, 다시 그것을 <담마상가니(법집론)>에서 열거한 여러 가지 논모(論母)에 근거해 다양하게 분류 고찰한(그것을 아비달마 분별/分別 및 물음이라고 함) 것이다.
③ 논사(論事, Kathavatthu)---아소카왕 치하에서 단행된 제3차 불전결집에서 장로 목라리풋타 팃사(Moggaliputtatissa)가 논사를 설했다고 한다. 전체는 시종 문답형식으로 일관되며 주석서를 보지 않고서는 문답의 주객이 누구며, 이론(異論)을 주장하는 자가 어떤 부파 소속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상좌부의 정통설을 세워 다른 부파의 이설(異說)을 깨뜨린다고 하는 독특한 내용을 갖고 있다.
④ 인시설론(人施設論, Puggala pannatti)---이 논서는 불교경전 가운데 '사람'에 관해 언급된 부분을 추리고 정리해서 열 개 항목으로 분류해 설명하고 있다. '인시설(人施設)'이라는 뜻은 편의상 사람의 존재를 가정한다는 것이다. 불교교리는 무아설(無我設)을 표방하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인간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무아이고 오온가화합(五蘊假和合)의 존재이지만 우선 사람이라고 명칭하고 편의상 독립자존의 존재로 가정한다는 뜻에서 '시설(施設)'이라 부르는 것이다. 시설의 원어는 팔리어 Pannatti, 산스크리트어 Prajnapri로 '가(假)'라고도 해석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경전 중에 언급되는 인(人)에 관한 용례의 집성을 '인시설(人施設)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람에 관한 분류는 어떤 것이 있는가. 남과 여라는 분류가 있을 수 있다. 수행자라면 비구, 비구니, 신자라면 우바새, 우바이로 나눈다. 인도인과 외국인으로도 나눌 수도 있다. 그러나 경전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수행의 진보상태(깨달았는가, 아닌가)에 의한 분류다. 이 같은 분류의 기본으로 생각되는 것은 범부인가, 성인인가 하는 것이다.
이 논서에는 한 가지 종류의 ‘인(人)’에서부터 10가지 종류의 ‘인(人)’까지를 각각 몇 가지 세트로 열거해서, 도합 142가지 종류의 ‘인(人)’에 대해 정의적(正義的)으로 설명했다. 142가지의 명칭은 모두 경전에서 언급되는데, 그 대부분은 증지부(增支部) 혹은 장부(長部)의 <상기티숫탄타>에서 채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논서는 경전에 나타난 명칭을 정리 안배해 획일적이고도 정의적인 설명을 부가한 것으로, 칠론 중 가장 초기에 성립한 것으로 보인다.
⑤ 계론(界論, 界說論, 다뚜까타/Dhatukatha)---‘요소(dhātu)들에 관한 가르침(kathā)’으로 번역되는 <계론>은 술어가 나타내는 개념의 내포(內包) ‧ 외연(外延)을 엄격하고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그것들 서로의 포섭 ‧ 피포섭 관계, 상반(相伴)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관계 등을 논하는 극히 형식적이고도 번쇄한 논서이다. 쉽게 말하면, 여러 가지 법들이 무더기(蘊), 장소(處), 요소(界)의 세 가지 범주에 포함되는가 되지 않는가, 관련이 있는가 없는가를 교리문답 형식을 빌려서 설명하고 있다. <법집론>을 보충한 논서이다.
⑥ 쌍론(雙論, 야마까/Yamaka)---논장의 모호한 심리현상에 관한 전문술어 중에 애매하고 잘못된 사용을 해결하기 위해서 결집된 논서이며, 문제 제기를 항상 쌍(yamaka)으로 하기 때문에 쌍론이라 했다. 즉, 전물술어나 문제, 개념들을 상반되는 2가지 방식으로 대비해 논의함으로써 주요한 교설 가운데 나타난 용어의 의미. 내용을 여러 각도에서 대비하고 검토했다.
⑦ 발취론(發趣論, Patthana)---칠론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의 논서이다. 그 내용은 연기법의 가르침을 자세히 치밀하게 정리해 놓았다. 즉, 24연(二十四緣)에 대한 설명과 해석이다. 여러 가지 연(緣)은 아함경전 이래 여러 곳에서 산설(散說)되고 있지만 그것을 24연으로 정리해 설한 것은 이 논이 처음이다. 또한 제연(諸緣)의 정의뿐만 아니라 그것들 각각이 서로 관계하는 모든 경우를 아비달마 논모(論母)에 따라 고찰하고 규정하려고 했다. 현재 미얀마에선 가장 중요한 논서로 취급되고 있다.
이 외에 특수한 세 가지 논전(論典)이 있다. 연대적으로는 대개 칠론 다음의 것(혹은 칠론 중 그 성립 연대가 늦은 것보다는 조금 앞선 것인지도 모른다)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 지도론(指導論, 넷티파카라나/Nettippakarana)---AD 1세기 전후 인물이라고 하는 캇차야나(Kaccayana)의 저서로, 경전 이해에 대한 입문서라고 할 만한 것이다.
• 장석론(藏釋論, 페타코파데사/Petakopadesa)---이것은 지도론의 보유(補遺)라고 볼 수 있다.
• 미란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 밀린다팡하/Milindapanha)---BC 150년경 서인도를 지배하던 그리이스인 왕 메난드로스(Menandros, 인도 이름은 밀린다/Milinda)와 불교의 나가세나(Nagasena) 장로 사이에 이루어진 불교교의에 관한 대론(對論) 기록으로, 다른 논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한역 대장경 안에도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이란 이름으로 전하고 있으며, 팔리어 논전보다 오히려 더 오래된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그 원형은 기원전후 무렵에 성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경(經)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닌 일종의 교의학습서이지만 칠론처럼 번쇄하거나 형식적인 논의가 많지 않으며 실제적인 문제에 따른 풍부한 문답으로 매우 흥미 있는 문헌이다.
이상의 세 가지 논서는 경장이나 논장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위치에 있지만 전통적으로 남방 상좌부에서 상당히 중요시하는 것이다. 특히 <밀린다팡하>가 거의 삼장에 속하는 정전(正典)과 같은 정도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은 붓다고사의 주저 <청정도론>에서 이 문헌을 다루고 있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미얀마의 상좌부 교단에서는 이 세 가지 논서를 모두 경장 중의 '소부(小部)'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 칠론(七論)에 대한 붓다고사의 주석은 현재 삼부가 남아 있다.
• 의정월론(義貞越論)---법집론(法集論)에 대한 주석서.
• 제치론(除痴論)---분별론(分別論)에 대한 주석서.
• 오론주해(五論注解)---오론(五論)에 대한 주석서.
이들 논서 모두 상당히 많은 분량으로서, 논서를 축어적(逐語的)으로 해석하면서 칠론 이후 발달한 학설까지 담고 있다. 그리고 앞의 두 가지는 특히 다음에 설명할 <청정도론>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 청정도론(淸淨道論, 비숫디맛가/Visuddhimagga)---붓다고사(Buddhagosa, 불음/佛音)가 AD 440년 경 저술한 <청정도론>은 칠론 이래 전개돼 온 남방 상좌부의 모든 교리를 하나로 정리해 조직적으로 설한, 바로 이 부파를 대표하는 가장 체계적인 논서이다. 붓다고사보다 200~300년 앞선 인물인 우파팃사(Upatissa)는 <해탈도론(解脫道論, 비뭇티맛가/Vimuttimagga)>이라는 저술을 남겼는데, 붓다고사는 그것을 기초로 증보해 이 논을 지었다. <해탈도론>의 원문은 알려지지 않지만, 다만 다소 변화를 받은 텍스트의 역본이 한역 대장경 가운데 전하고 있다.
<청정도론>은 모두 23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계(戒), 정(定), 혜(慧) 삼학의 순서에 따라 붓다 교법을 실천의 도(道)로서 상세히 해설하고 있다. 즉 먼저 스스로 경계해 출가자로서의 생활을 올바르게 가다듬고(戒의 淸淨), 나아가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고요히 한곳에 집중하는 삼매 수련을 거듭함(定의 淸淨)에 따라 깨달음으로 향하는 깨끗하고 밝은 지혜를 획득한다(慧의 淸淨)고 하는 도(道)를 설하는 것이 이 논서의 요강이다. 그러면서 남방 상좌부 특유의 존재론이나 심리론, 인식론을 내포해 다채로운 아비달마적 논의를 전개시키고 있다. 또한 경 ‧ 율 ‧ 논 삼장에서 많이 인용한 것도 이 논서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런데 <청정도론>이 대저이기도 하거니와 대단히 복잡난해하기 때문에 그 후 남방 상좌부 전통 중에는 간명하게 정리한 여러 가지 강요서(綱要書)를 짓는 경향이 나타났다.
• 입아비달마론(入阿毘達磨論)---이는 주로 마음(心) 즉 89심(八十九心), 마음작용(心所) 즉 52심소(五十二心所), 물질적 존재 즉 4대종(四大種) 및 24소조색(二十四所造色)과 열반에 대해 그 명의와 상호관계를 운문으로 해설한 것이다.
• 색비색별론(色非色別論)---이는 초보적인 입문서로서 산문으로 써진 소론이고, 이의 작자는 붓다닷타(Buddhadatta)라고 한다. 그는 붓다고사와 동 시대의 선배라고 전해지지만, 이 이론이 실제로 성립한 것은 훨씬 후세의 일로 추측된다.
• 체요략론(諦要略論)---이는 운문만으로 이루어진 소부로서 <입아비달마론>과 마찬가지로 색(色), 심(心), 심소(心所), 열반(涅槃)에 대해 개설했고, 담마팔라(Dhammapala)의 저작이다. 이 작자는 주석가로서 초기경전에 대한 주석서 등을 지은 유명한 담마팔라와는 동명이인으로 그보다는 후대 인물일 것으로 추측된다.
• 섭아비달마의론(攝阿毘達磨義論)---이의 저자 아누룻다(Anuruddha)는 9세기 이후 인물로 추측된다. 이는 후세까지 오랫동안 이 부파의 아비달마 학습 교과서가 됐던 것으로 그 명성이 대단히 높다. 산문으로 서술하고 운문으로 정리하는 방법에 따라 89심(八十九心), 52심소(五十二心所), 마음이 작용하는 14과정, 28색(二十八色), 여러 가지 실천항목, 12연기(十二緣起), 24연(二十四緣) 등 남방 상좌부 아비달마의 주요학설 전반에 걸쳐 간결하고도 정연하게 해설하고 있다. 이 논서에 대해서는 그 뒤 여러 가지 주석서가 작성돼 새롭게 발전한 교리에 따른 해석도 부가되고 있다.
8.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흥기
(1) 부파불교의 한계와 재가자들의 움직임
부파불교시대의 학문불교는 전문적인 학자스님들에 의해 주도됐다. 따라서 부파불교는 출가자중심 불교, 재가자자 배제된 불교, 신행과 실천에 소홀한 불교였다. 즉, 부파불교는 법(法)에 대한 연구를 기본으로 한 학문불교요, 전문적인 승원불교였으므로 일반대중과 거리가 멀어지고 실천성이 결여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부파불교, 특히 유부의 사상경향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최소단위의 법은 있다고 보는 실재론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유(有)’사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부파불교에서도 연기(緣起)의 입장에서 사람도 나무도 인연으로 연기된 것이므로 공하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이나 나무를 연기하는 최소한의 요소, 단위들은 있다고 본 것이다. 이에 대해 깨침의 내용인 연기가 진리의 철저한 이해에 미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더구나 교의의 번잡함과 학문화는 불교가 종교로서의 생명을 희석시키고 신앙을 약화시켰으므로 새로운 불교개혁운동, 즉 대승불교 흥기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어떤 연구자는, “<구사론>은 학자의 유희물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혹평을 할 정도로 부파불교 논서들을 폄하했다. 사실 <구사론>과 그 이외 아비달마논서를 읽을 때, 지나치게 형식적이며 너무 사소한 문제에 관해 논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난해한 술어의 나열에 접하면, 아마도 승원 깊숙한 곳에서 세속고뇌를 떠나 오로지 경전의 석의(釋義)와 연구에만 몰두했던 아비달마논사들의 사상적 노작에 감탄하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무의미하고 비현실적이서, 본래 실천적이었던 불교 본뜻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부파불교의 지나친 이론체계는 이론과 실천 간의 괴리를 낳았다. 붓다가 평생 가르친 것은 이론이 아니라, 괴로움을 벗어나 해탈할 수 있는 실천적 삶의 길이었다. 한마디로 불교의 생명은 실천에 있었다. 그러나 부파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불교 본래의 실천적 생명력을 약화시키고 형이상학적 문제를 중시했다. 또한 부파불교는 승원불교, 학문불교, 출가자위주의 불교였기 때문에 재가대중들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붓다의 기존 가르침이 재가자를 위함과 출가자를 위함을 함께 펼쳤다면 부파불교는 출가자위주의 불교를 중시했기 때문에 재가신자들로부터 외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부파불교에서는 엄격하고 세밀한 수행과 계율로 전문수행인만 도달할 수 있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목표로 했다. 따라서 재가신자들은 깨쳐서 부처가 되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출가자들을 경제적으로 돕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만큼 부파불교는 동체대비(同體大悲) 요익중생(饒益衆生)의 측면에 소홀했다.
이러한 부파불교의 한계 때문에 새로운 불교운동을 처음 주도한 것은 스님들이 아니라 재가대중들이었다. 그들은 기존부파불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모든 사람들에 의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중을 향한 가르침으로서의 불교를 강조했다. 그래서 그들은 부파불교를 소승(小乘)이라고 폄하하고, 자기네들은 큰 배란 의미를 지닌 대승(大乘)으로 자처했다.
법을 중심으로 한 교의의 이해와 논의를 위주로 하는 기존승원불교에 만족하지 못한 재가신자들과 이에 동조하는 일부 출가자들은 점차 불탑(佛塔) 주변에 모여들게 됐다. 불탑은 부처님의 유골 즉 사리(舍利, sarira)를 봉안한 무덤으로 ‘포개어 쌓는다’는 뜻의 스투파(stupa)에서 비롯된 말이다. 일반대중들은 붓다에 대한 소박한 믿음으로 예배하고 공양함으로써 구원을 받고 싶어 했고, 그것이 행해진 대상이 불탑이었다. 만약 법 중심, 학문 중심의 출가교단에 반발해 붓다 중심의 교법을 발전시킨 어떤 그룹이 생긴다면 그들은 당연히 출가교단과는 별개로 자신들 교법을 발전시키고 부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종교행위를 실천하기 위한 장소로서 불탑을 선택했을 것인데, 바로 이 같은 불탑교단의 재가성과 신앙적 성격이 대승불교성립의 주요원인이 됐다.
그리하여 기원전후 시기가 되면 불탑건립이 매우 활발해지면서 여기에는 꽃이나 향 등이 바쳐지고, 보물과 귀금속 등이 봉헌됐으며, 춤과 노래가 베풀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일은 기존부파교단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비구들은 승원(僧院)이나 정사(精舍)에 머물렀으며, 그곳은 불탑과는 전혀 관계없는,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고고한 공간이었다. 따라서 불탑조성과 경영은 재가신자들의 몫이었다. 나아가 그들은 붓다 탄생지인 룸비니(Lumbini, 藍毘尼)와 성도지인 붓다가야(Buddhagayā),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의 녹야원(Migadāya, 鹿野苑), 입멸지인 쿠시나가라(Kuśinagara, 拘尸那揭羅) 등을 성지로서 숭배했으며, 그곳에 사당을 세워 순례하기도 했다.
대승불교성립의 또 하나 주요원인이면서 불탑신앙과 밀접히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불전문학(佛傳文學)이었다. 불탑 신앙자들이 생각한 붓다는 이제 더 이상 법의 도사나 아라한이 아니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생애를 거쳐 오면서 초인적 이력을 쌓은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사모와 찬탄은 종래 법 중심의 이론적 교설과는 다른 형태의 문헌을 낳게 됐으며, 그것에는 논리적 설명을 초월한 비유(比喩)와 은유(隱喩), 혹은 우화(寓話)의 성격을 띤 문학적 표현이 사용됐다. 이것이 이른바 불전문학으로서 이 같은 불전문학을 주도한 그룹은 찬불승(讚佛僧)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자타카(Jataka, 本生經)>는 붓다 전생을 설한 불전의 한 장르로서, 붓다의 성불을 가능하게 한 전생과 현생의 수행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의 문헌들은 대개 부파교단의 문헌이었지만, 찬불승들에 의해 이루어진 불전문학들은 부파를 초월해 부처님을 찬탄한 내용상의 공통점이 있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대승경전에도 그대로 계승됐다.
(2) 대승불교의 태동
처음 부파분열(근본분열)이 일어나 대중부가 생겨난 것은 불멸 후 100년경에 있었던 10사(十事)문제와 이에 따른 제2차 불전결집 때문이었다. 즉, 승가가 대중들에게 금전을 받아도 되느냐, 오후에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여러 곳에서 보시를 받아도 되느냐 하는 등 계율 상 문제들이 발단이 됐고, 이러한 10사를 부정하는 제2차 불전결집으로 분열이 일어났다. 즉 10사에 대해 대중부는 현실에 맞게 발전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봤는데 비해, 상좌부는 기존 전통적인 금욕주의 입장을 강조해 불가한 것으로 결정했다. 이에 반발한 진보적인 승려들이 따로 나와 부파를 형성한 것이 대중부였다.
그리고 BC 3세기 제3차 불전결집 시에는 아소카왕(Ashoka, 阿育王)이 기존 상좌부 이론을 반대하는 대중부 승려들을 이단으로 규정해 모두 추방했다. 이들은 아소카왕으로부터 배척당해 기성종단으로부터 밀려났지만 속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승려였기에 불교를 떠나지 않고 자신들을 받아주지 않는 상좌부불교에 대항해 독자적인 교단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대중부의 본격적인 활동이다.
그리고 대중부논사들은 불교계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확립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종교인으로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인도불교계를 이끌어가던 보수적인 상좌부 기본교리를 깨고 자신들 교리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연구를 계속하며 자신들의 논리를 전파해 나갔다.
그런데 초기 부파불교에서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부파의 논사들은 「무상 ‧ 무아 ‧ 연기 ‧ 공」이라는 새로운 개념들을 정립했고, 이러한 개념들은 부처님이 최초로 본 실상법과 인과법이라는 근본 가르침과 충돌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그래서 대중부 논사들이 문제 삼은 것은 초기불교의 기본교리였던 실상법(實相法)과 인과법(因果法)이었다. 정통적인 불교교리였던 유부(有部)의 이론에 대해 고도의 철학적인 힌두적 관념과 논리를 활용해 비판을 가했다. 그들은 부처님의 모든 사실적인 가르침인 유위법에 대해 마야(환, 공, 무실체성)성을 확장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즉, 힌두교의 마야(māyā, 幻, 空)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기존불법에 대한 과감한 변형을 시도했다.
이와 같이 그들이 의욕 하는 것은 부처님법의 실체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이 공하고 허망하다는 공성(空性)으로 대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 법에 공성을 확대하는 노력을 계속해 나갔던 것이다. 인도불교사에 있어서 무위법(無爲法)의 확대는 바로 이러한 대중부파의 기본적인 입장과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하여 부파불교간의 논쟁에서 대중부는 일체 법(현상)의 실체를 부정하는 무위의 범위를 확대해 나갔고 그것이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이 바로 용수의 중론사상(中論思想)이다.
대중부 논사들은 부파불교에서 강조하는 실체법은 붓다가 방편으로 가르친 낮은 가르침에 불과하고 진실로 전하고자 한 고차원적인 가르침은 모든 것이 없다고 하는 공(空)이라 주장했으며, 무위(無爲)의 범위를 확대해 기존불법의 유위성(有爲性)을 약화시키고 인과법의 상의성(相依性)을 강조해 제법의 실체성(實體性)을 부정함으로써 마침내 불교를 사실적인 진리가 아닌 관념적인 공(空)철학으로 변형시켜나갔다. 그리고 이들은 비주류이므로 기성교단과 달리 주로 음성적인 활동을 했다. 결국 이들의 영향으로 대승불교가 일어나고 각종 대승경전들이 저자 없이 만들어진 이유의 하가 바로 이러한 데에도 있었다.
그리고 부파불교시대 아비달마 논서들은 전문가인 논사들의 일이었고, 대중인 재가신도들에게는 그 중요성이 알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번쇄한 이론이 낯설기만 했다. 대중과 멀어졌다는 것은 너무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모색이 지나치다가 보니 출가승려가 돼 전문적으로 학습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불교가 돼버렸다. 이러함에 대한 반성으로 일반대중을 위한 불교라는 새로운 기치를 들고 일어난 운동이 곧 대승불교였다.
번쇄한 이론중심, 학문중심의 부파불교에 반발해서 대두된 대승불교는 공사상(空思想)을 바탕으로 붓다 당시의 근본불교정신을 계승하자는 운동이었고, 대승경전은 그 근간이 근본교설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대승경전이 특별히 붓다 교설이 아니라고 할 이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북방 불교권에서는 대승경전을 붓다 가르침, 내지 그 근본취지를 더욱 선양해 확장 발전시킨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높이 숭앙했다.
기존 붓다 가르침은 실상을 보는 눈으로 밝힌 것으로 모든 것이 사실적으로 존재하며, 한 치의 어김없는 인과관계로 이루어져 있어서 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 속에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길과 해탈(解脫)에 이르는 모든 길이 있음을 밝힌 것이었다. 그러나 부파불교 논사들은 이러한 경향과는 동떨어진 심오한 학문불교에 몰두한 나머지 부처님 가르침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부처님 곁으로 다가가자는 것이 대승불교 흥기의 배경이었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붓다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정통성을 주장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 대승불교가 흥기함으로써 보수성향의 상좌부(上座部)교단은 소승불교가 되고, 반면에 혁신적인 성향의 대중부불교가 대승불교가 됐다. 이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일반적인 이론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대승불교 흥기의 정확한 전모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정확한 출현 시기, 그리고 주도자들이 누구였는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소승불교라고 지칭한 부파도 어느 부파였는지는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밝혀진 사실이 없다. 기록문화가 빈약한 인도문명의 특징으로 인해 이런 궁금증들이 아직 시원하게 풀리지 않고 있다.
어떻든 대승불교는 소승교단이 안고 있는 여러 모순을 지적하면서 ‘부처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라고 하는 새로운 불교운동에서 비롯됐고, 결국 나가르주나(Ngrjuna, 용수/龍樹)에 의해 중관론(中觀論)이 펼쳐짐으로써 이에 의해 일체현상이 모두 공(空)이라는 관념적인 결말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 출현의 근본배경이며, 대승불교철학의 중심으로 중관론이 성립하게 된 사유였다.
이러한 새로운 불교운동을 이끈 경전이 바로 <반야경>이었다. 그리고 대승불교사상이라는 것은 부처님 근본사상을 이어받아 사상적으로 부단히 발전해 가는데, 이러한 불교의 새로운 사상이 태동될 때마다 새로운 경전조성은 불가피했다. 즉, 소수 개혁파인 대승론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학적으로 전개해 완벽한 이론체계와 관념체계를 갖추어가며 남몰래 경을 만들어 세를 확산해 나갔다. 그 결과 AD 1세기경에 반야(般若)계통의 대승경전이 나타났고, AD 2세기경에 <화엄경(華嚴經)>, AD 4세기경에 <법화경(法華經)>, 이렇게 대승경전이 차례로 조성됐다.
그러나 이들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결집됐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AD 3세기를 전후해서 나가르주나(Ngrjuna, 龍樹)의 출현으로 이론적 뒷받침을 받게 되면서 대승불교가 확립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즉,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多)의 이념 아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도를 지향하는 대승불교 이론은 용수(龍樹)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됐다. 그는 대승불교 최고의 논사로서 제2 붓다로 칭송됐는데, <반야경(般若經)>의 공사상을 논리적으로 밝히기 위해 수많은 논서를 저술했다. 특히 그의 주저인 <중론(中論)>에서 불교 근본진리인 ‘연기(緣起)’를 생멸(生滅) ‧ 거래(去來) ‧ 일이(一異) ‧ 단상(斷常)의 차별적인 대립을 넘어선 것[팔부중도(八不中道)]으로 해석해 어떠한 견해에 대한 집착도 부정했다. 현실세계에서 경험되는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할 뿐,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일체는 공하다고 풀이했다. 그리하여 「연기 - 무자성 - 공」의 이론을 확립해 대승불교기반을 다졌다.
용수에 의해 일단 종합 정리된 대승불교는 교리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경전제작이 요구됐다. 이들 새로운 경전에서는 앞 시대에 수립된 공사상에 입각하면서, 미혹과 깨달음의 주체문제로서 마음의 본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즉 마음은 한편으로는 깨달음의 세계를 낳는 원천이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혹의 세계를 낳는 씨앗이 되기도 하며, 마음은 보리(菩提)의 바탕인 동시에 윤회의 주체이기도 하다고 했다. 전자는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하는 이상적 측면에서 고찰한 여래장설(如來藏說)이고, 후자는 마음의 현실적 기능분석에서 출발하는 유식설(唯識說)이다.
(3) 대승불교의 성격
대승불교는 자리이타(自利利他) 정신을 기린다. 즉, 개인의 완성뿐만 아니라 이웃과 남(중생)의 완성, 나아가서는 사회와 국토의 완성까지를 이상으로 한다. 부파교단의 자리행(自利行), 즉 자기완성이 중심이 됐음에 대한 반성을 통해 붓다 가르침은 자리(自利, 자기완성)뿐만 아니라 이타(利他)를 함께 실현하는 것이고, 이야말로 바른 불교의 실천이라고 봤다.
그리고 부파불교가 아라한(阿羅漢)을 이상적 종교인상으로 봤다면 대승의 이상적 종교인상은 보살(菩薩)이다. 보살이라는 말은 보리살타(菩提薩陀)를 줄인 말로 본래는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국한돼 쓰였다. 그러던 것이 이타의 실천을 강조하는 대승에서는 누구든지 진리를 향해 굳은 발심을 하고 육바라밀행((六波羅蜜行)을 실천하면 다 보살이라 부르게 됐다. 즉 ‘석가보살’에서 ‘범부보살’로 보살의 의미가 확대적용된 것이다. 이 보살은 깨달음과 중생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그래서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일체 모든 생명을 제도하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이념에 산다.
따라서 부파불교가 아라한의 불교라면, 대승불교는 보살의 불교이다. 대승경전은 오로지 보살의 이념과 실천에 대해 설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보살이란 상세하게는 ‘보디삿트바 마하삿트바(Bodhisattva Mahasattva)’라고 한다. 보디삿트바란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그리고 마하삿트바란 위대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며, 불타가 되겠다는 커다란 서원을 세우고 고된 수행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보살에게는 자기가 불타가 될 수 있는 소질을 갖추고 있다는 신념이 없으면 안 된다.
그러나 부파불교는 아라한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해 교리가 조직돼 있다. 제자가 붓다와 똑같은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자기에게 붓다가 될 수 있는 소질 즉 불성(佛性)이 갖추어져 있다는 인식도 없었다. 성불할 수 있는 것은 붓다와 같이 위대한 사람뿐, 아라한까지가 자기 한계였다. 이 자기인식의 차이가 바로 대승불교와 부파불교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사상적으로 대승은 깨친, 하나인 바탕에서 설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대승 이전의 불교에서는 깨침을 향해 가는 입장에서 가르침을 설했다면, 대승은 깨친 자리 즉, 하나인 자리에서 설하고 있다. 번뇌를 끊고 보리를 증득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가 곧 보리임'을 분명히 아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생사와 열반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을 둘로 볼 때 생사를 버리고 열반을 추구하려 하지만 대승은 생사와 열반이 본래 둘이 아님을 보라고 한다. 중생과 부처 또한 다르지 않다. 중생이 변해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불은 중생이 그대로 부처라는 사실에 눈뜨는 것일 뿐이다. 중생과 부처가 본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부파불교가 법(法) 중심 불교였다면 대승은 붓다 중심 불교이다. 일단 대승은 출발부터 부처님 사리를 모신 불탑으로부터 시작됐고, 뿐만 아니라 중생 모두 성불해서 부처가 되자고 하는 염원에서 출발했다. 모든 중생은 처음부터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인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고, 그를 꽃피우고 실현시키는 것이 종교적 실천이다. 따라서 부처는 중생 수만큼 많을 수 있다. 또 많은 생명을 제도하려면 많은 부처가 요청될 수밖에 없었다.
대승은 문자 그대로 큰 수레, 큰 배로 폭넓은 가르침을 수용하고 있다. 대승불교 발달사를 보면 아주 다양한 사상을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종교사가 종교적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이단을 색출하고 처단한 과정이라면, 불교역사는 다양한 사상과 이론, 심지어는 힌두교, 그리고 근본불교와 반대되는 입장까지도 불교라는 울타리 안에 포용해 온 역사이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상당히 이질적인 요소나 전통까지도 넉넉하게 포용하는 방향으로 발달했다. 대승불교는 다양한 면들을 포용하는 것은 사람의 능력이나 소질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소질에 맞는 가르침이 요청됐다. 가르침은 방편이며 대승은 아주 큰 방편문(方便門)이다.
(4) 부파불교의 완성, 그리고 대승불교의 발전
북방 불교권에서 소승이라는 말을 쓰지만 부파불교를 계승하고 있는 남방불교 자신들은 결코 소승이라 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일컬어 테라바다(Theravada)라 한다. 이는 장로의 가르침을 계승한 교단이라는 뜻이다. 즉, 자신들이야말로 붓다의 정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자부심의 표방이라 하겠다. 실인즉 부파불교시대에 대중과 동떨어진 길을 걸었던 적은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불교정통을 이은 것은 자신들이라 생각한다.
불멸 후 200년경 아소카왕에 의해 전해진 남방 상좌부불교는 팔리어로 결집된 삼장을 근간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대승불교는 불멸 500년 이후에 나타난 불교이므로 전통의 계승은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파불교에 반발해서 나타나기 시작한 대승불교에 대해서 부파불교 당시에도 대승불교경전들을 붓다 교설이 아니라는 반박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각 부파들마저 재가신도들의 바램을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교의 면에 있어서는 대중부의 승리로 돌아가게 돼 대승불교가 흥기했고, 대승불교에서는 출가수행자나 재가신자들이 다 같이 성불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
그런데 불교 발전이 초기불교 - 부파불교(아비달마불교) - 대승불교라는 시대적 구분에 따라 초기불교가 일어나고 부파불교가 일어나며, 그 후 기존의 전통(성문/聲聞)불교와는 별도의 계통으로 대승불교가 일어났다고 여긴다. 혹 어떤 경우 부파불교가 일어나면서 초기불교는 끝나고,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부파불교는 끝난 것이라고 도식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 권오민.
또한 초기불교는 경장(經藏)불교이고, 부파불교는 각각의 부파에 의해 산출된 논장(論藏)불교라고 엄격히 구분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부파불교는 단순 명료한 초기불교를 제멋대로 현학적으로 해석해 붓다의 근본취지를 상실한 불교라고 한다든가, 혹은 부파불교 이후에 일어난 대승불교 경전은 비불설 운운하며, 이를 당연한 상식처럼 여긴다.
그러나 불교가 이와 같이 도식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부파가 완성돼가는 시기는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나는 시기와 겹친다. 그리고 대승불교운동은 부파불교와의 공방 속에서 자란다. 부파불교도 대승운동과 더불어 발전해나간다. 따라서 부파불교와 대승불교는 시기적으로 엄밀하게 나눌 수 없다. 부파불교에 있어서 논장체계가 공고히 된 것은 AD 4세기경이 돼서의 일이다. 부파불교는 대승불교가 출현해 세력을 확산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존재했고 진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따라서 3세기 용수(龍樹)의 중관학파(中觀學派)가 흥기하고 난 후. 다시 유식학파(唯識學派)가 성장해 세친(世親) 등이 활동함으로써 대승불교의 꽃이 활짝 필 무렵인 4세기를 지나면서 부파불교도 최고의 지적 완성에 도달했고, 7세기 이후까지도 존속했다.
따라서 세친이 활약한 시대보다 200여년 후 인물인 현장(玄奘, 602~664)이 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따르면 그가 인도로 유학을 갔을 때도 여전히 정량부(正量部, 산스크리트어 Saṃmitīya) 등 부파불교 부파들이 상당한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까지도 인도에 존속했으나 더 이상 큰 진전은 없었다. 그러나 인도대륙 남쪽으로 건너간 상좌부불교(소승불교)는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해서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에 남방불교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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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작성함에 있어서 성철 스님, 마성 스님, 무비 스님, 무여 스님, 일야 스님, 권오민 교수, 이태승 교수, 길상초님, 허경구님을 비롯한 많은 분의 글을 일고 인용했으며, 위키백과, 시공불교사전을 비롯한 많은 자료들의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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