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거사는 "마음이 여여하면 경계 또한 여여하여 실實도 없고 허虛도 없다. 有에도 상관하지 말고 無에도 얽매이지 않아서 성현이 아니라 일대사를 마친 범부이다"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일대사를 마친 범부라면 석가와 달마는 무엇이겠습니까. 진흙 뭉치 흙덩이입니다. 삼승과 십이분교는 무엇이겠습니까. 갑자기 놋쇠 그릇이 뜨거워 질때 쩍!하고 나는 소리입니다. 그대는 이미 참선하는 이 문중에서 스스로가 믿어 공부를 의심하지 않으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낯이 설은 공부를 익히시고, 잘못 익힌 나쁜 버릇을 점점 멀리 하셔야 비로소 생사를 해결하는 이 일과 조금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선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혹은 일문일답을 하다가 맨 끝에 한 글자를 더 많이 이야기한 것으로 선을 삼는 자가 있습니다. 혹은 '옛 어른께서 도에 든 인연'을 머리 맞대고서 생각하여 "이 곳은 허이고 저 곳은 실이며, 이 말은 현玄이고 저말은 묘이다"라고 한다거나, 혹은 비껴가는 대답으로 선문답을 한다거나, 혹은 똑 같은 물음에 대해 답변을 달리하는 것으로 선을 삼는 자가 있습니다. 혹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삼계가 유심이요, 만법이 유식'이라는 데서 알았다는 것을 선을 삼는 자가 있습니다. 혹은 말이 없이 캄캄한 산 아래의 귀신 굴에 앉아서 눈을 꼭 감고 있는 것을 위음왕 저쪽이나 부모가 아직 나를 낳지 않은 때의 소식이라 말하기도 하고, 또 말없이 언제나 비친다고 말하여 그것들로 선禪을 삼는 자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오묘한 깨침을 구하지 않고 깨달음을 두번째 경계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사람 속이는 것으로 보며 깨달음을 만드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들이 이미 스스로 깨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깨달음이 있다는 사실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납자들에게 '세간의 정교한 기예도 깨친 곳이 없으면 오히려 그 묘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하물며 삶과 죽음의 문제를 벗어나려고 다만 입으로 고요만을 말하여 바로 깨달음을 거둬들일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합니다. 이는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고 달리면서 서쪽에 있는 물건을 취하려는 것과 크게 비슷합니다. 구하며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서둘면 서둘수록 더욱 늦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무리는 불쌍하다고 할 만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이들을 '대반야를 헐뜯고 부처님의 슬기로운 생명을 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많은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더라도 그들의 참회는 통하지 않습니다. 비록 좋은 인因이라도 호히려 나쁜 결과를 불러들입니다. 차라리 이몸을 티끌처럼 부술지언정 끝까지 부처님의 법을 가지고 인정人情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기어코 삶과 죽음의 문제를 풀자면 모름지기 이 먹통 같은 생각을 깨야합니다. 삿된 무리들이 살살 얼렀다고 그 소리에 넘어가서 실속없는 허망한 말로 문득 "내가 모두 알아서 해결했다'라고 말하는 짓은 절대로 삼가하셔야 합니다......
영명선사는 보살계 서문에서 "차라리 수미산만큼 계를 깨트릴지언정 삿된 무리의 잘못된 생각을 하나라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만약 중생의 마음 가운데 겨자씨만큼이라도 잘못된 생각을 두게 되면 밀가루에 기름이 베어 들 듯 끝내 거기에서 빠져나올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화두 위에서 화두를 챙길 뿐입니다. 화두를 챙겨가다 어떤 실마리나 재미가 없어서 마음이 답답할 때가 바로 힘을 쓰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남의 이야기를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이 답답한 곳이 바로 부처님이 되고 조사 스님이 되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앉은 채로 천하 모든 사람의 혀를 끊는 곳입니다. 이자리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대혜종고스님의 서장 중에서>
요즈음에는 선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혹은 일문일답을 하다가 맨 끝에 한 글자를 더 많이 이야기한 것으로 선을 삼는 자가 있습니다. 혹은 '옛 어른께서 도에 든 인연'을 머리 맞대고서 생각하여 "이 곳은 허이고 저 곳은 실이며, 이 말은 현玄이고 저말은 묘이다"라고 한다거나, 혹은 비껴가는 대답으로 선문답을 한다거나, 혹은 똑 같은 물음에 대해 답변을 달리하는 것으로 선을 삼는 자가 있습니다. 혹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삼계가 유심이요, 만법이 유식'이라는 데서 알았다는 것을 선을 삼는 자가 있습니다. 혹은 말이 없이 캄캄한 산 아래의 귀신 굴에 앉아서 눈을 꼭 감고 있는 것을 위음왕 저쪽이나 부모가 아직 나를 낳지 않은 때의 소식이라 말하기도 하고, 또 말없이 언제나 비친다고 말하여 그것들로 선禪을 삼는 자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오묘한 깨침을 구하지 않고 깨달음을 두번째 경계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사람 속이는 것으로 보며 깨달음을 만드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들이 이미 스스로 깨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깨달음이 있다는 사실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납자들에게 '세간의 정교한 기예도 깨친 곳이 없으면 오히려 그 묘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하물며 삶과 죽음의 문제를 벗어나려고 다만 입으로 고요만을 말하여 바로 깨달음을 거둬들일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합니다. 이는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고 달리면서 서쪽에 있는 물건을 취하려는 것과 크게 비슷합니다. 구하며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서둘면 서둘수록 더욱 늦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무리는 불쌍하다고 할 만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이들을 '대반야를 헐뜯고 부처님의 슬기로운 생명을 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많은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더라도 그들의 참회는 통하지 않습니다. 비록 좋은 인因이라도 호히려 나쁜 결과를 불러들입니다. 차라리 이몸을 티끌처럼 부술지언정 끝까지 부처님의 법을 가지고 인정人情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기어코 삶과 죽음의 문제를 풀자면 모름지기 이 먹통 같은 생각을 깨야합니다. 삿된 무리들이 살살 얼렀다고 그 소리에 넘어가서 실속없는 허망한 말로 문득 "내가 모두 알아서 해결했다'라고 말하는 짓은 절대로 삼가하셔야 합니다......
영명선사는 보살계 서문에서 "차라리 수미산만큼 계를 깨트릴지언정 삿된 무리의 잘못된 생각을 하나라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만약 중생의 마음 가운데 겨자씨만큼이라도 잘못된 생각을 두게 되면 밀가루에 기름이 베어 들 듯 끝내 거기에서 빠져나올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화두 위에서 화두를 챙길 뿐입니다. 화두를 챙겨가다 어떤 실마리나 재미가 없어서 마음이 답답할 때가 바로 힘을 쓰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남의 이야기를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이 답답한 곳이 바로 부처님이 되고 조사 스님이 되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앉은 채로 천하 모든 사람의 혀를 끊는 곳입니다. 이자리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대혜종고스님의 서장 중에서>
출처 : 청봉스님의 장군죽비
글쓴이 : 미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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