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화두를 의심하므로써 參禪을 할때면 간절하여 사무쳐야하는 것이올시다.'이뭣고?'를 화두로 드는 분들 가운데
문제가 곧 의심의 落處(의심하여야 할 요긴한 포커스)를 바로 잡지 못하는 것이올시다.
생각도 내가 아니다, 마음도 느낌도 내가 아니다, 육체도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이런식으로
참된 나(본래면목)를 찾아보려고 하는것 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으나화두를 들어 참구해 나갈때는 오직 그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는 간절함으로써만 집중이 되어야 하는 것이올시다.
이러한 수행경계를 우리는 定慧 雙修라 하는 것이올시다.
따라서 간절히 알려고 집중을 할때에는 절대로 계교로써 머리를 굴리는
알음알이로써 꿰어마추는 식으로 답을 알려 하여서는 그르치게 되는 것이올시다.
參이란 궁구한다 의심한다는 등으로 알아내려는 수행을 이르며
禪이란 근본이 되는 그 실상인 '이뭣꼬?'를 의심 해 가는 것이올시다.
물론 확철대오를 하시게 되면 일체가 禪定 가운데인 것이라
일체종지를 증득 하게된 확철대오라 모를 것이 없는 경계가 되는 것이라
參이란 불필요 하게 되는 것이로소이다.
그렇다면 아직 그 근본실상이 무엇인지 모르니 '이뭣꼬?'로 알려고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해 가는데 무엇을 포커스로 의심을 해야 하는 것인가?를 스스로 잡아
꽉 틀어쥐어 일체가 끊어진지도 모르게 끊어진 의심으로 깊이 깊이 定으로 그 疑團이 커가야 하는 것이로소이다.
무엇을 포커스(낙처)로 잡아야 하는 것인가?를 설명 해 드리리다.
흔히들 밥먹는 이놈이 무엇인가? 화내는 이놈이 무엇인가? 걸어가는 이놈이 무엇인가? 팔흔드는 이놈이 무엇인가? 앞을 보는 이놈이 무엇인가? 등등 그때 그때 접하고 생각하는 여러가지의 주인공이 무엇인가?로 의심을 닥치는대로 의심이라고 하는 분들이나
숨을 들이 쉴때 이~~ 하고 내 쉴때는 무엇꼬?를 한다는 등의 '이뭣꼬?' 화두 참구로는 일체가 끊어진
定으로 안으로 파고드는 의심이 되지 못하며
의식 가운데서 밖으로 맴돌 뿐 참으로 정혜쌍수의 화두참구의 바른 공부가 되지 못하는 것이올시다.
따라서 앉으나 서나 무엇을 하든 行住坐臥 끊어짐이 없이 언제나 오직 한가지 의심하여야 할 초점 하나를 잡고
'이것이 무엇인가?'를 틀어쥐어야만 하는 것이올시다.
예를 들자면 부모뱃속을 빌려 나기전에는 내가 어디에 있었나? 또는 나는 무엇이었나?
이렇게 알려고 하는 이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또는 기독교집안과 그 환경에 사신다니 "하나님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분인가?"를
한결같이 알려고 의심 해 가시는 등... 말씀이올시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소이까? 글로써 설명 하기에는 부족 할 수도 있는즉
의문이 풀리지 않으시면 전화를 주셔도 무관하리다.
장군죽비: 예, 아주 훌륭한 화두올시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하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인가? 하는 의심을 해서
그 도리를 투득 하여야 하는 것이올시다.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相이 될 것인즉 그 하나마져 없는 것이 참인 것이로소이다.
만공선사가 견성을 했다고 자부하다가 경허선사에게 점검받고 아직 미숙함을 깨닫고
이 '萬法歸一 一歸何處'를 들어 참구끝에 확철한 화두올시다.()
위에서 자세히 설해드렸다고 생각하는데...
諸法이 無我 無空이라면 하나로 돌아간 그 하나는 무엇이오이까?
그 하나를 세운것이 흔적이요.相이기에 그마저 없는 것이어야 참으로 제법무공이 아니리까?
'이미 마음인 것을 두고'라는 생각이 화두참구에 앞서가는 사량에서 나온 소견인 것이라는 것을 먼저 아셔야 하리다.
화두참구에 가장 금기시 하여야 할 문제는 아느것을 화두의심에 끌어 들여서 계교로써 답을 알아 맞추려 하는 것이올시다.
화두참구는 일체 아느것을 대입시켜서는 그르치는 것인즉
오직 "어떻게?" 라는 의심 하나만을 잡고 간절히 알려고 궁구해 나아가야 하는 것임을 명심 하시기를 당부하리다.()
화두를 의심해서 체하는 일은 없소이다.
오직 마음이 그렇게 생각을 고정하고 있을 뿐이지오.
그리고 화두를 의심할 때 단전호흡 하는 것처럼 단전에다가 화두를 두고
의심한다면 단전을 의식 한다는 것인즉
잘못하는 참구라 하리다.
의심의 골자인 낙처를 잘 잡아 오직 알려고 하는 간절함만이 화두의심의 지름길이라 하리다.
화두의심은 의심의 낙처를 잘 잡아야 하며,
간절히 알려고 하여야 하는 것이올시다.()
'만법(萬法)이 귀일(歸一)이라 하니 一은 어디로 돌아갔는고?'를 의심하였는데, 이 화두는 이중적 의심이라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하나는 무엇인고? 하는 화두를 들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하나는 무엇인고? 의심하여 가되 의심한다는 생각까지 끊어진 적적(寂寂) 하고 성성(惺惺)한 무념처에 들어가야 나를 볼 수 있게 되나니라. 하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요, 이 정신 영혼도아니요, 마음도 아니니, 하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고?
의심을 지어 가되 고양이가 쥐를 노릴 때에 일념에 들 듯, 물이 흘러갈때에 간단(間斷)이 없듯, 의심을 간절히 하여 가면 반드시 하나를 알게 되나니라.'] 하신 것을 화두로 잡는다면
"이 하나가 무엇인고?" 하는 "이뭣꼬?" 화두와 다름이 없는 것인즉
"만법귀일 일귀하처"라는 화두와는 거리가 있다 할 것이며
만약 만공큰스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참으로 하나를 증오했다면
다시 일귀하처를 의심 할 것조차 없다 할 것이올시다.
그러한 까닭에 하나인 空(진空묘유:'상없는 참으로 공하고묘한 있음)으로 돌아갔다면 '그 하나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또는 돌아가는 것인가?'를 알아 투득하라 한 것이올시다.
'장군죽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도(道)에 이르는 길 (0) | 2013.03.06 |
---|---|
열반송 (0) | 2013.03.06 |
숙면일여 (0) | 2013.03.06 |
청봉스님 불교용어사전 (0) | 2013.03.06 |
[스크랩] 淸峯선사님 參禪曲 (0) | 2012.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