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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죽비

[스크랩] 귀신등에 대한 문의 에.

by Borealis 임박사 2013. 3. 6.

아래는 모 사이트에 실린 답글입니다.

어떤 질문자의 3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만,

석연치않는 답변이 많은것 같아 큰 스님의 혜안으로 바른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1. 귀신의 문제...
귀신은 없습니다. 그리고 귀신은 스스로의 마음이 지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은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있고 없다는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물론 없다고 했는데 귀신이 보여서 생각을 고쳐먹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귀신은 미신이야 하고 막연히 없다고 믿고 있었을 뿐,
마음 깊은 곳에는 귀신을 겁을 내는 마음이 있었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귀신이라는 것은 결국 육체가 사라지고 남은 정신을 일컫는데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육체라는 것이 인연으로 어머님 뱃속에서 생겨나면서
뇌가 생기고, 오관이 생기면, 그것과 인연된 바깥의 경계와 접촉하면서
그 느낌을 신경세포라는 것을 통해서 인지하고 또 그곳에 저장을 합니다.
우리의 뇌는 신경세포의 집합체라고 합니다.
그 모든 정보들을 모아두었다가 인연되면 다시 들어오는 정보를 이미 저장해둔 정보에 비추어서 하나의 또 다른 정보를 만들어내고 다시 저장하고 합니다.
이러한 일을 평생동안 반복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은 늘 변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작용은 무엇이 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성이라고 하는 것이 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주의 법칙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주 속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주가 생성되고 유지되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작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리학에서는 네가지 작용, 또는 힘이라고 하지요.
우리 역시 그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힘들이 에너지와 물질을 만들어내고 그 것들을 유지하게 하지요.
그러니 우리의 인연과 생각과 기억과 몸 등이 모두 그것에 의해서 생겨나고 자라고 늙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몸이 먼저 생기고 몸과 바깥 경계의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정보를 뇌에서 분석하고 가장 합당한 정보를 재 창출하는 작업을 정신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몸이 없으면, 즉 뇌가 없으면 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뇌라는 것도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면 사라지지요.
즉, 죽는 것입니다.
죽으면, 우리의 몸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사대(四大)로 흩어지듯, 각각의 원소로 흩어지지요.
그리고 그 속에 든 정보는 마치 장작에 불이 붙었다가 장작이 다타면 불이 그냥 꺼져 사라지듯이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정보가 사라져버리면, 생각도 사라지고
생각이 사라지니 우리가 말하는 나라는 개체의식 역시 사라져버립니다.
(개체의식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스스로 자신이 존재한다고 착각하면서 만들어낸 것 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남아 있어서 귀신이 되겠습니까?

부처님 시절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장작에 불이 붙었다. 어떠냐?"
"장작이 타고 있습니다."
"장작이 다 탔다. 불은 어디로 갔느냐?"
"장작이 다 탔으니 그냥 꺼졌습니다."
"그러면 그 불은 어디로 갔느냐?"
"간 곳을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모르는 일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라고 말입니다.

무릇 모양있거나 모양 없거나 생겨난 것은 모두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멸하지 않는 것은 오직 단 하나 작용만이 있을 뿐입니다.
즉, 자성, 진여... 등등으로 불리는 그것 말입니다.
그러나 그 작용이라는 것은 모양도 없고, 냄새도 없어서 만지거나 볼 수도 없습니다.
만지거나 볼 수도 없는 것이 귀신은 아니겠지요...

어쨋든,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육체가 사라지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들이 모두 함께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사라진 정보는 어디 의지할 하드웨어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데,
이미 개인의 하드웨어가 사라졌으니 기댈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귀신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귀신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가 그렇게 자의든 타의든 귀신이라는 의미를 믿고 자신의 기억속에 집어넣어 놓았기 때문에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뇌는 정보들로 꽉 차있어서
어떤 외부적인 정보가 들어오면 반드시 그것과 연상되는 어떤 정보로 형상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릴 때부터 귀신이라는 정보를 한두번 받습니까?

비견한 예로,
귀신중에 가장 큰 귀신이 바로 기독교에서는 예수님, 불교에서는 보살님과 부처님입니다.
엄밀히 따지만 귀신입니다. 죽은 자가 나타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기독교 신자들에겐 예수님이 나타나고,
불교 신자들에겐 보살이나 부처님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것은 절대로 만들어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만약 님께서 그러한 느낌이 일어나면 그냥 망상일 뿐입니다.
그냥 그러한 한 생각이 일어났나보다 하고 흘려보내십시오.
저도 예전에는 그러한 느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냥 생각이 만들어낸 망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내려두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러한 느낌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2. 최면술에 의한 전생퇴행....

1.의 답을 보면 전생퇴행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태어났다 죽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한 존재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불가(佛家)에서 본래면목을 이야기 할 때에
부모미생전(부모가 생기기 전)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는 자신과 부모, 그리고 그 부모의 부모...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결국 우주의 탄생까지 올라가야 겠지요.
그곳에는 현재의 물리학에서 밝혀나가겠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초강력의 힘이 있었고
그 힘은 우주의 탄생과 더불어 네가지의 힘으로 나뉘었다고 하지요.

아무튼, 전생이 있다면,
왜 부모미생전이라고 하겠습니까?
자신의 현생전이라고 하여야겠지요.
그리고 전생이 있다고 한들..
우리의 인간이 어느 날 다른 우주에서 이런 모습으로 날아오지 않는 한,
우리의 전생은 결국 우주의 탄생까지 올라가겠지요.
그렇다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에는 오직 나만 존재해야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묻고 답할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겠지요.

그러니 전생퇴행이라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이지요.

어릴 때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은 최면으로 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그것은 현재의 뇌속에 과거의 기억을 다 저장해 놓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정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은 인연이 생겨야 생각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과거에 만들어진 기억이,
과거와 꼭 같은 인연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그 기억도 과거와 꼭 같은 기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왜곡되어서 기억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형상은 비슷할지 모르지만, 그 느낌과 감정들은 지금 기억해내는 것과는 다른 느낌과 감정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기억과 인연되는 바깥 환경이 과거와 지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심리치료에서 최면술을 통한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서 현재의 행동상황에 대한 원인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법이 있습니다만,
요즈음 심리학계에서는 그것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뢰하여서, 과거에 원인을 안다고 해서
그 원인으로 생겨난 행동양식을 현재에 고치려는 마음을 먹지 않으면
그 원인을 하는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지금 자신의 행동양식을 그냥 고치는 것이나 별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3. 마음....

마음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에게도 없습니다.
다만, 작용이 모든 것을 관장하여 그 법칙에 의해서 우리는 뇌속에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 정보를 다시 바깥 인연과 정보를 나누면서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 뇌속에 다시 저장을 합니다.
그리고는 어떤 인연을 만나면 그에 가장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생각을 도출해내어서 말을 하거나 감정을 드러내거나 행동에 옮깁니다.
마음은 그냥 텅 비어 있습니다.
어떤 감정이나 행동을 하더라도 그냥 그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라는 것을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그냥 작용입니다.
삼라만상인 우주를 움직이는 작용...
태어나지도 않아서 멸하지도 않는...
그리고 모든 것의 근원인...
그러면서도 지금의 모든 현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있는...
나의 모든 것이 그 작용...
우리의 진정한 본 모습은 바로 작용입니다.
우리의 몸과 생각은 그 작용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질 뿐입니다.
그래서 개체적인 몸과 생각이라는 것은 한낮 물거품일 뿐입니다.
다만, 삼라만상은 매 순간만 존재하기 때문에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치 영속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것은 우리의 기억이 시간이라는 것을 만들어내어서 마치 과거와 현재가 연관되어 있다고 믿을 뿐입니다.
실제로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비록 과거에 있었기에 지금 존재하겠지요.
하지만, 과거에 있었던 그 모습이 현재에 과연 그대로 존재하나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한 개체를 볼 때에는 어쩌면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관이 아주 느리기 때문에 미세한 변화를 눈치 못채니까요.

하지만, 모든 인연속에 모든 것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그대로 존재하나요?
그렇지 않지요?
그래서 과거가 있었다고 한들 지금의 현재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는 이미 흘러가서 잡고 싶어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구요.
그리고 또, 현재...
현재라고 할 때에는 이미 흘러가 버리지요.
그래서 도대체 있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있지요. 매 순간....
그래서 매 순간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존재하는 매 순간은 작용과 한 치도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아니 과거가 존재했지만 흘러가고, 현재도 매 순간 흘러가는 것이 작용이 없으면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실재하는 것은 매 순간에 나투는 형상과 그 작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둘인 것 같지만,
떼어 놓을 수 없는 하나인 것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매 순간 변하고 잡을 수 없고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내것이라고 집착해봐야 허망할 뿐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저도 언젠가는 사라져버릴 것이니까요...
그러나 작용은 언제나 항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를 만들어내었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고 있고,
그것이 없으면 눈에 보이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결국 나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나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있게 해준 작용이 진정한 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삼라만상에 모양 있는 것과 모양 없는
모든 것에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본모습인 나... 이것이 진정한 마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는 마음이 없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겠지요.

그렇게 보면 님께서 제게 물으신 것은 결국 생각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앞에서 누누히 제가 말했듯이
바깥으로부터 들어온 정보를 뇌가 저장해 두었다가
다시 바깥과의 인연으로 어떤 정보가 들어올 때에 이미 들어온 정보가 뒤에 들어온 정보를 검토한 후에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버릴 것은 버린 후에,
다시 재 각색하여서 또하나의 정보를 입력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연상작용들이 생각이라고 보면 됩니다.

동물들도 생각이 있습니다.
다만, 인간처럼 복잡하고 세밀하고 진화된 하드웨어(뇌)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처럼 그러한 생각들을 해내지 못할뿐이지요.
하지만, 그들에게 맞는 용량만큼의 생각은 합니다.
그래서 동물들도 아이큐가 있다고 하지요.

사람들은 자꾸 사람 아닌 것과 자신을 별개의 것으로 떼어놓으려 합니다.
물론 그것도 결국 생각이라는 놈이 하고 있긴 하지만요.
하지만, 내가 사람이란 인연으로 세상에 나온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바깥에 굴러다니는 돌이나, 바람에 흔들리거나 날려다니는 나뭇잎과
하나도 다를게 없습니다.
다만,
각각의 물체에 유전자와 그 유전자로 인해 만들어진 하드웨어가 다를 뿐
그 본질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이렇게 인연이 되어서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냥 사라질 뿐입니다.

이삶에서 무엇을 구하며, 무엇에 목을 매고, 무엇을 이루지 못해 안달을 해야 할 것이 있겠습니까?

천상병씨의 시 '귀천'에서 말하는 것처럼,
한바탕 소풍나와 즐겁게 놀고 가는 것이지요.

즐겁게 놀다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데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려면,
세상은 인연으로 되어 있어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나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나만 주인공이 아니라 모두가 주인공입니다.
그러니 하는 일이 마음대로 안되어서 머리가 아프고, 번뇌가 생기고, 고통이 오고, 미움, 원망, 짜증... 등등이 생겨서
정작 즐겁자고 하는 일이 일마다 고통이 됩니다.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음대로 되어야 맞다고 착각을 하고 스스로 고통과 번뇌를 만들어 냅니다.

과연 즐겁게 놀다 가려면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혹여 이렇게 말하면 운명론처럼 들으실지 모르지만,
운명론은 이미 자신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인연론이지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또한 우리의 인연이 달라지겠지요.
그러면 우리의 삶 역시 달라지구요...
물론 우리가 아무리 그렇게 살려고 해도 인연이 안되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은 운명이 정해져 있어서가 아니라,
모든 인연된 사람들의 의지들이 서로 엮여서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삶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삶을 살면서 무엇을 짓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그렇게 지으면서도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는 인연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생각하면 참으로 재미있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늘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삶....
그리고 새로운 나.....
그냥 그렇게....

질문이 세가지나 되다 보니 좀 길군요.
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공개가 되었으면 다른 사람도 도움이 되었을 것 같은데 좀 아쉽군요...
왜냐하면 이런 궁금함이 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사실 저도 이런 것에 대한 궁금함을 옛날에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럼 건승하시길 빌겠습니다.*^^*

 

장군죽비:

1. '귀신은 없다' 고 주장하며. '귀신이라는 것은 결국 육체가 사라지고 남은 정신을 일컫는다' 하면서도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니

이런 말의 모순이 어디에 있겠소이까? 

정신은 있는데 실제로는 없다니 말이올시다.
'우리의 뇌는 신경세포의 집합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작용은 무엇이 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성이라고 하는 것이 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주의 법칙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주 속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작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말도 모순이 생긴 것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리다.

어쩨서이냐? 하면 자성은 무엇이고 그 작용을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다시 살펴야 할 것이올시다.

자성이 근본이라면 그 자성의 작용이 다시 근본이라 할 수 없지 않는가? 하는 지적이올시다.
물리학이라는 과학은 인간이 궁구해서 진리인 실상에 접근 해 가는 미완성의 논리일 뿐이거늘

이러한 남의 연구 논지를 마치 자기가 스스로 체득한것처럼 인용을 하는 것이

스스로 모순을 모르고 하는 주장이라 할 것이로소이다. 

'우리의 인연과 생각과 기억과 몸 등이 모두 그것에 의해서 생겨나고 자라고 늙고 죽어가는 것이라'

그것을 작용이라 한다면 작용을 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올시다. 

뿐만 아니라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몸이 먼저 생기고 몸과 바깥 경계의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정보를

뇌에서 분석하고 가장 합당한 정보를 재 창출하는 작업을 정신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몸이 없으면, 즉 뇌가 없으면 활동을 할 수가 없다' 라고 주장하니 

정신은 무엇이며 자성은 무엇인지를 모르는 분별심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뇌가 없으면 활동 할 수 없다는 그 생각이 잘못된 상식임을 지적 하지 않을 수 없다 할 것인즉

송장은 어쩨서 뇌가 있어도 활동하지 못하는가?를 사유해야 할 분이로소이다. 

또한
'뇌라는 것도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면 사라지지요. 즉, 죽는 것입니다.
생각이 사라지니 우리가 말하는 나라는 개체의식 역시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면 무엇이 남아 있어서 귀신이 되겠습니까?
'라 하는 주장은 귀신은 없다는 것을 전제한 논리인 것이올시다.

부처님 시절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장작에 불이 붙었다. 어떠냐?"
"장작이 타고 있습니다."
"장작이 다 탔다. 불은 어디로 갔느냐?"
"장작이 다 탔으니 그냥 꺼졌습니다."
"그러면 그 불은 어디로 갔느냐?"
"간 곳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모르는 일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라는 경전을 이용은 잘 하였으나 그 도리는 모르는 자기 주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할 것인즉

간곳을 알 수 없는 것일 뿐 없어진듯 한 그 불은

인연이 결합되면 다시 살아난다는 것도 알지 못한 소견이라 할 것이올시다.

'세상에 멸하지 않는 것은 오직 단 하나 작용만이 있을 뿐입니다.
즉, 자성, 진여... 등등으로 불리는 그것 말입니다' 그것은 개체인 자아 업식과는 별개로 존재하거나

자아인 업식은 없어져버리는 것으로 주장하는 소견이 문제라 할 것인즉

그렇다면 새로태어난다는 윤회도 불신하는 것이 아닐 수 없는 소견인 것이로소이다.
귀신이라 하든 靈이라 하든 神이라 하든 이름을 어떻게 지어 부르든

개체인 업식이 육체가 탈각된후 어디엔가는 머물어야 윤회를 할 인자가 있는 법이며,

그 영이 중음신으로 무주고혼으로 머물면 이를 귀신이라 칭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로소이다.

물론 귀신을 있다 없다로 단정하여 말하기에는 설명이 길어질 것이라 생략하겠소이다만.. 

'정보는 어디 의지할 하드웨어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데,
이미 개인의 하드웨어가 사라졌으니 기댈 곳이 없습니다'하니

귀신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한 말 역시 옳다 할 수 없는 모순인즉

주장하는 하드웨이가 뇌라는 것이며 이 뇌가 살아지니 아예 모두가 살아져 없어져 버린다는 주장은

곧 이생에 머물다가 육신이 탈각되면 모두가 끝나버린다는 자기 주장에 불과 한 소견인즉

이런 소견으로 산다면 남을 의식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자기 만족이나 구하며 살다 가면 되겠다는 결론이겠소이다.

'귀신중에 가장 큰 귀신이 바로 기독교에서는 예수님, 불교에서는 보살님과 부처님입니다.
엄밀히 따지만 귀신입니다. 죽은 자가 나타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기독교 신자들에겐 예수님이 나타나고,
불교 신자들에겐 보살이나 부처님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라면

그 귀신들은 인정한다는 모순이 되지 않겠는가?를 반문 하고자 하는 바올시다.

2.
'우리는 과거에 태어났다 죽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한 존재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라는 주장은

윤회가 아니고 새로운 인간이 태어난다는 것인즉

위에서 말했듯이 이생으로 끝나버릴 인생 아무렇게나 자기 만족만을 구하며 살다 가면

그 뿐이라 하는 소견을 지을만 하다 할 것이로소이다. 

'불가(佛家)에서 본래면목을 이야기 할 때에
부모미생전(부모가 생기기 전)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는 자신과 부모, 그리고 그 부모의 부모...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결국 우주의 탄생까지 올라가야 겠지요' 라니

"부모미생 이전에" 즉 "부모배를 빌려 태어나기 이전에" 내 '본래면목(참자기인 진아)은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이런 식으로 살피니 어찌 법을 알리가 있으리까?

이러한 본래면목의 실상을 인간의 사고로써 밝혀가는 물리학에서 밝혀 나가리라는 기대 또한

어리석기 짝이 없다 할 것이올시다.
'전생이 있다면,
왜 부모미생전이라고 하겠습니까?
자신의 현생전이라고 하여야겠지요'
라니

이런 무지하기는...'부모미생전'이나 '현생전' 이나 다를바 없는 것을 모르고 시시비비를 하려한다 할 것이로소이다.

 
'그리고 전생이 있다고 한들..
우리의 인간이 어느 날 다른 우주에서 이런 모습으로 날아오지 않는 한,
우리의 전생은 결국 우주의 탄생까지 올라가겠지요.
그렇다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에는 오직 나만 존재해야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묻고 답할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겠지요'
라니

말을 하면서도 무엇이 잘못 된 것인지도 모르는 愚痴라 할 것인즉

우주가 둘이 있다고 생각하며,

나만 있다는 존재를 거론하기 전에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의미와 '일체동근'의 이치조차 모르는

어리석고 무지한 소견에 입을 다물고싶다 하리다.
심리학계에서 이것을 별로 신뢰하지 않든 신뢰하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진실한 싱상은 학문으로 규명 할 것이 아님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로소이다.

3. '마음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에게도 없습니다.
다만, 작용이 모든 것을 관장하여

그 마음이라는 것을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그냥 작용입니다.
삼라만상인 우주를 움직이는 작용...
태어나지도 않아서 멸하지도 않는...
그리고 모든 것의 근원인...
그러면서도 지금의 모든 현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있는...
나의 모든 것이 그 작용...
우리의 진정한 본 모습은 바로 작용입니다'
하니

마음이 곧 작용이라니 작용하기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지론인바

무엇이든 작용을 하는것은 그 작용을 하게하는 작용처가 있어야 한다는 이치도 모르는 소견이라 할 것이며,

그 마음과 자성과 우주의 근원이 각각인것 처럼 위에서 부터 논리를 펴는

그 모순을 스스로 알지 못하면서 잘도 아는체 한다 하리다.

'다만, 삼라만상은 매 순간만 존재하기 때문에
비록 과거에 있었기에 지금 존재하겠지요'
한 말은

그 과거가 모든 것은 살아져 없어져 버린다 한 주장에

스스로 모순된 주장임을 모르는 소견의 주장이라 할 것이올시다.
 
'작용은 언제나 항상하는 것입니다' 한 말도 또한 모순이 있는 것인즉 

작용이 없는 잠들어 꿈도 꾸지 않을 때는 그 작용이라는 작용은

어디에 있다는 것인지 참으로 우수운 주장이라 할 것이올시다.

'그것이 나를 만들어내었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고 있고,
그것이 없으면 눈에 보이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결국 나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나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있게 해준 작용이 진정한 나라는 것입니다'
라 한 주장은

작용을 나의 근원으로 알고 있는 우치에서 비롯한 주장임을 살펴야 하리다.

분명 體性과 작用은  분별하여 살펴야 할 것이로소이다.

'다만, 각각의 물체에 유전자와 그 유전자로 인해 만들어진 하드웨어가 다를 뿐
그 본질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라 한 말은 곧

유전자는 어디로 부터 온 것이기에 다르다는 그 하드웨이인

개체도 전생도 윤회도 부정 하는 것인지?를 지적 해야 할 분이올시다.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는 공개가 되었으면 다른 사람도 도움이 되었을 것 같은데 좀 아쉽군요...
왜냐하면 이런 궁금함이 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사실 저도 이런 것에 대한 궁금함을 옛날에 가졌기 때문입니다'
라니

스스로 증오한바 없는 자가당착에 빠진 알음알이로 이런 소견을지어

누구의 눈을 멀게 하려고

이렇게 돼먹지 않은 주장을 유포시키고자 하는지?

참으로 안타깝고 민망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할 것이로소이다.

이런 현란한 말주변에 여러사람들이 속아 이런한 이들을 마치 깨친양 믿게 될 것을 저어하는 바로

破邪顯正으로 오직 문장만을 살펴 질문에 답 했을 뿐 이렇게 주장한 이를

폄하하고자 한 것은 아님을 해량하시기르 당부하리다,()

출처 : 청봉스님의 장군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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