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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죽비

[스크랩]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 에.

by Borealis 임박사 2013. 3. 10.
 

귀의삼보하옵고 큰스님께 삼배올립니다.

()()()

 

모 사이트에서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글입니다.

장문입니다. 송구하오나 큰스님께 파사현정을 간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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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와 허상

이 이야기는 한 존재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의 중심은 세상을 바라보는 자가 중심이기에,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세상의 중심이다.

그래서 따로 우주의 중심이라고 할 것이 없다는 말도 된다.

(이것은 현대 물리학에서도 증명되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중심인 한 존재에게만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 한 것 같아 보이지만,

모든 존재가 다 중심이므로 모든 존재의 입장에서 본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각자의 존재가 바라본 양상은 다르지만,

그 바라보는 원리는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각자 각자의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한 존재가 바라본 관점에 대한 원리를 이야기함으로써

모든 존재의 관점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


명제 1 :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인식할 때에만 존재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인식할 때에만 존재한다.

인식의 주체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서두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다. 모두가 중심이다.)


내가 어떤 사람과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과의 대화 도중, 잠시 다른 생각에 잠기면, 그는 나의 인식에서 사라져 버리고,

내 인식(생각, 또는 느낌이라 해도 큰 의미 차이는 없다.)엔 존재하지 않는 것 이 되며.

내게는 다른 생각이 존재하게 된다.


그 외 바깥의 모든 것들뿐만 아니라.

내가 직접 입고 있는 옷과 장신구도 역시 그것을 느낄 때에만, 내게 존재함을 느끼게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몸이라고 하는 것도 내가 내 뺨에 손을 대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 스스로 손으로 뺨을 만지고 있다는 인식을 해야만 그것에 존재함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내 속에 있는 내면의 움직임도 마찬가지이다.

고통 역시 그러하다. 슬픔, 기쁨, 등등 모든 감정까지도

내가 그것을 느낄 때에만 내 속에서 감정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즉, 실재한다


그리고,

바깥 대상이나 자신의 내면의 사물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 하는 것 역시

내 안에 있는 옳고 그름의 잣대로 바라볼 때에만

그 사물에 옳고 그름이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지

그 대상 자체에 그러한 것이 없다.

즉,

사물의 옳고 그름이라는 것 역시 사물 자체의 모습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내가,

나만의 관념으로 그것이 그렇다고 규정할 때에만 사물에 옳고 그름이 투영되는 것이다.


이 명제의 결론은

어떤 생각이나 감정들, 그리고 바깥의 모든 사물들은

나라는 인식통로를(手相行識) 통하지 않으면,

절대로 나의 세계에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인식대상이 내가 인식할 때에만 실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마음을 열면 일체가 있고 마음을 거두면 일체가 사라진다는 것을

길게 설명한 것이구려.


명제 2 : 나의 인식만이 실재하는 것이며, 나의 인식 대상은 허상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럼 우리가 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고 의문을 가지는 자가 많을 것이다.

즉, 하늘이나, 땅, 달 별, 태양... 이웃사람, 친구, 가족, 내 몸, 나의 감정 등등은,

내가 느끼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하지 않느냐?

하고 반문한다. 분명히....

그러나 보라,

그것을 알고 느끼는 자가 누구인가?

설사 그것이 내가 인식하지 않을 때에도 역시 엄연하게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인식할 때에만, 비로소 나의 의식 안에 존재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내가 인식하지 않을 때라도 존재하며,

또 내가 인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이가 인식하고 있으니 존재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삶은 누구나 세상을 바라보는 자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이 주인공의 영역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각자가 느끼는 세상은 모두가 다 다르다.

그리고, 잠시 그것이 나의 인식 속에 존재하였다고 하더라도,

나의 인식의 대상이 다른 데로 옮겨가는 순간 그것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느꼈을 때에는 이미 전에 느꼈던 것과 다른 것이 되어버린 후이다.

즉, 사물을 인식하는 인식의 주체와 객체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는

나의 인식만이 실재하는 것이고

바깥의 외물, 또 내 안에 있는 감정 등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떤 이는 물을 것이다.

그럼 당신을 바라보는 나는 도대체 무엇이냐고?

그것은 당신의 인식에서 나를 바라보라.

그대가 나를 인식하기 전까지 그대의 인식 속에 내가 존재하는지...

그대에게선 나 역시 그대가 인식할 때에만 실재하는 허상일 뿐이다.

또한 이것은 현재의 양자역학에서도 밝혀진 사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있다 없다 하는 것은

결국에는 우리가 인식하느냐 않느냐에 달려있어서,

있다는 것은 내가 인식할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

나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허상이 되어 버리므로

있다고 여기는 그 대상은 항상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명제에선 인식 대상과 인식주체의 관계에선 인식주체만이 실재라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장황한 이말들도 불교에서 이르는 참은 이 진아일 뿐 일체 상은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풀어 설명한 것이로구려.


명제 3 : 바깥의 사물과 내 속의 감정이 있다고 인식하는 나는 허상이다.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인 나"라는 것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을 인식할 때에는 그것을 보고 있는 주체가 나인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때의 나의 인식 속에는 오직 대상만 있지,

'대상을 인식하고 있는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가 나라고 하는 것을 내가 알 때에는

나의 인식 속에는 '내가 인식하는 대상'은 사라져버리고 없다.

이때의 나의 인식 속에는

내가 인식하는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 나' 라는 대상이 들어와 있다.

즉,

대상이 바뀌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인식 한계가 동시에 두 가지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대상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 나'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다시 인식할 수 있는 것 역시,

그 다음 시점, 즉 내가 지금 대상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시점에 가야만 가능하다.

이처럼,

비록 '인식하는 주체가 나'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나라고 인식하는 순간 이미 그 전에 '인식하는 나'라는 주체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인식하는 매 순간 그 시점에는 인식하는 주체가 없다.

그래서 인식하는 나라는 것이 순간에만 존재할 뿐

그것을 인식할 때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아무리 노력하고 또 해도,

인식하고 있는 순간에는 그 인식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스스로 알 수가 없다.

이것은 눈(目)이 눈(目)을 볼 수가 없는 이치와 같다.

나는 나를 볼 수도 알 수도 없으니,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나"라고 규정하는 것은 허상일 수밖에 없다.

내가 대상을 인식할 때 그 순간의 나의 인식 속에는

'대상을 인식하는 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인식함만 있을 뿐이다.

이 명제에선,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주체관계에서

인식의 주체인 내가 실재한다는 명제를 부정하고 인식함만 실재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주객미분이라는 명제가 성립이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잘못된 소견이라 하리다.

인식하는 나는 허상이 아니라 실상이며 다만 보려고 하여도 볼 것이 없는 진공묘유한 것인즉

이것이 인식하며 이것이 보며 또한 보이는 것과 본다는 인식을 동시에 할 수도 있음을

무시하려는 의도는 잘못된 소견이라 할 것이올시다.


명제 4 : 인식은 허상이다.


앞에서 인식함만 실재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의 전개상 이야기 한 것이다.

이 명제를 도출해 내기 위해서 세운 것뿐이다.

아무리 논리의 전개상 한 말일지라도 인식의 대상이 실재한다는 것은 착각일 뿐

인식의 대상은 무엇이든 그 성품이 공하며 또한 필경 공한 것이라 모두가 실재가 아니라

허상인 현상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올시다.


인식한다는 것은,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하는 대상이 존재하여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인식하는 그 순간에는 인식하는 주체인 내가 존재하지 않고,

인식하는 주체가 없는데 인식의 대상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누가 누구를 인식한다는 말이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말 또한 합당한 논리라 하지 못하리다.

인식하는 순간이든 이전이든 이후이든 인식의 주체는 인식하건 하지 않건 항상하는

실재인 것을 알지 못한 소견에서 나온 주장이라 할 것이올시다.


인식이라는 것은 주체와 대상이 거리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아서

주객미분인데 인식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식이라는 것 역시 허상인 것이다.

그리고 인식할 수 있고 인식 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항상 존재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인식하는 주체인 나라는 것도 인식하는 동안에도 잠시도 머물지 않는다.

대상 역시 인식되어지는 어떤 것으로 머물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되어지는 순간 다른 것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러니 무엇을 인식했다는 것이며 무엇을 인식이라고 하겠는가?

이 또한 논리가 합당하다 하지 못 할 것인즉

인식되는 상대가 항상하지 않더라도 인식하는 순간은

현상으로써 존재하고 있기에 인식하는 것이며

또한 인식하는 주체인 나는 영구불변하며 항시 상주하는 것이기에

변함이 없이 항상 머물고 있음도 모르는 소견임을 지적하여야 하겠소이다.

뿐만 아니라 인식되어지는 상대가 인식되어지는 순간 다른 것으로 바뀌어져 버린다는 논리도 합당하다 하지 못할 것이올시다.


그리고 또,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이 주객미분일지라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서로가 인연되어야만 가능하다.

서로가 인식되어져야 한다는 논리도 합당하다 하지 못할 것인즉

상대가 무의식 가운데 있어도 나는 인식 할수 있는 것이며

무정물도 상대적으로 상호 인식한다 할 것인지 반문 할 부분이라 하리다.


그런데,

인연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바다의 파도에 의해 일어나는 물방울과 같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으로 잠시도 같은 모습으로 머물러 존재하지 않는다.

항존(恒存)하는 실체가 아니다.

그러기에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라 하는 것이올시다.


그처럼 인연에 의해 생기는 인식이라는 것 역시,

인식이라는 개념적인 이름으로 존재할지는 모르지만,(개념 역시 우리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그 인식의 내용은(대상과 주체) 한 번도 머무르지 않으니

실상이 아니다.

이것 역시 바다의 물방울과 같은 것이다.

즉, 인식하는 나라는 주체(나라고 여기는 순간 이미 사라져 버린 나)

역시 순간에만 존재하는 허상이요,

인식되어지는 대상(그것을 그것이라고 여기는 순간 이미 사라져버린 대상)

역시 순간에만 존재하는 허상이니,

주체와 대상이 만난 인식의 상태는 그 순간에만 존재할 뿐,

바다의 물방울과 같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허상일 뿐이다.

이 명제에선 인식 그 자체도 허상임을 밝혔다.

이 논리 또한 비약된 소견이라 할 것인즉

인식 그자체는 작용인 것이라 실상의 존재는 아니나

인식하는 나라는 주체인 그 존재가 순간에만 존재한다는 것은

진아(眞我)의 성품인 자성(自性)을 보지 못한 소견인 것인즉

진아인 자성은 영원 불변하며 항시 머무름 없이 머물고 있음을 모르는 우치라 할 것이며

인식의 대상 또한 순간적으로 존재한다 하나 자칫 잘못 알까 저어된다 할 것인즉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것이라 상대적인 현상이 허망한 것일지라도

생주하는 동안은 현상으로나마 존재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니

자칫 낙무(落無) 낙공(落空)의 치우친 변견(邊見)에 떨어지게 될 위험한 소견이라 할 것이올시다.


위의 명제를 모두 종합해 볼 때에,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허상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은 관념적으로 지어낸 이름만으로 존재할 뿐이다.


명재 5 : 실재하는 것은 애초에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이 실재한다.


그러면,

과연 실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허상조차도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허상은 어디에서 나왔단 말인가?

또 그 허상들이 나왔다고 한들, 어떻게 잠시라도 존재할 수가 있을 것인가?

또 그 허상들이 허상이면 사라질 터인데 어디로 사라진다는 것인가?

이 또한 중요한 명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그 실재하는 것을 찾고 또 찾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이름하여,

실체니, 진아니, 자성이니, 참 자아니(참 자아나 진아나 같은 말),

신이니 도, 진리 등등으로 이름 붙여왔다.

신(神)이란 존재를 동일한 명제로 써서는 않될 것이며

도리(道理)라는 것도 이러한 논리를 전개하는 것에는 함께하여 써서도 안될 것임을 지적하리다.


그것은 과연 존재하는가?

우리가 어떤 의미로 근원적인 실재함을 대상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의 논리적 인식으로 알 수 있는 실재하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우리의 존재와 인식이 허상인데 허상이 실체를 볼 수가 없다.

아직 대오견성(大悟見性)의 경계를 꿈에도 증득하지 못한 소견이라 할 것이올시다.

나의 근본존재와 인식은 허상이 아니며 상도 아닌 것이며

항상하는 참나는 불변(不變)으로 머뭄없이 머물며 항사묘용(恒沙妙用)을

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올시다.


인식되어질 수 있다는 것은 어떤 형상으로든 형상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하다.

사고로 상상할 수 있는 형상이나 눈으로 보이는, 귀로 들리는, 코로 맡을 수 있는 등등의

형상이 있어야만 가능한데

그것은,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볼래야 볼 수도 없고,

인식할래야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의 인식능력에서는 실재함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실재하는 것은 애초에 없다.

인식되어지는 대상이 허상인 현상이기는 하나

그 형상이 아예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무리한 논리이며

현상을 이름붙일 수 없고 인식 할 수 없다 한 것도

또한 올바른 논리가 아닌 것임도 다시 살펴야 할 것이로소이다.

인식능력이 대상을 실재함을 알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일체 만유가 현상으로 인식되나 항상하지 못하는

허망하여 환화와 같음을 밝게 아는 것임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며,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인식의 주체인 진성(眞性)은

형상이 없이 존재하는 실상이며 실재하는 실존인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올시다.


실재하는 것이 애초에 없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는 실재가 없다는 말이다.

현상인 일체만유(一切萬有)가 허망하기에 실재 하는 것이 없다 할 뿐

인식능력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님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올시다.


그러나,

참으로 묘하게도,

절대적인 실체는 우리의 인식능력으로 도저히 가능하지 않지만

상대 법으로 허상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 모순 같은 명제가 우리의 세상에 엄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모순이 아니라 인식하는 주체는 형상이 없는 진공묘유이기 때문이며

상대적인 인식 대상은 엄연한 있음으로 나타난 현상이기에 인식되어지는 것이올시다.


실체가 있기에

그것의 그림자인 허상이라는 것이 일어난다.

그래서 비록 인식의 대상이 아니고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 있는 것이지만,

실체는 허상이 일어났다 사라짐의 근원이고,

그것이 잠시라도 존재할 수 있는 놀이터이다.

실체가 있음과 잠시라도 존재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기서 인정하는 논리는

앞서 와는 이설(異說)인 것이라 할 것이올시다.


근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허상이라는 것이 실체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는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 허상이 존재성을 가질 수 있는 바탕이기 때문에 근원이라고 하는 것이며,

놀이터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아이들이(허상들이) 놀러오더라도,

못났다 잘났다 하고 분별하지 않고 놀게 해주고,

그것들이 노는 만큼의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즉,

구름이 일어났다 사라질 수 있는 푸른 하늘과도 같은 것이다.

‘허상이라는 것이 실체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는...’

잘못된 표현이라 할 것인즉

“만유는 허상으로 실체가 없이 들어난 현상이라” 하여야 할 것이로소이다.

마무리 논리는 이 자성(법성)이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라 한 불법의 풀이인 것이구려.


그래서 그것은 허상의 세계에 사는 우리로선 알 수가 없으나.

분명히 우리라는 허상이 존재하고

또, 우리의 존재함을 받아주는,

삼라만상이 존재할 수 있는 터전이 있으니

실재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허상들이 아무리 어떻게 놀다 가더라도,

실재하는 그것은 허상에 영향을 절대로 받지 않는다.

(실체는 그림자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노는 아이들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이 있을지 모르지만,

놀이터는 그러한 개념에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으며,

노는 아이들이 잡스러운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 하더라도,

그 놀이터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것은

구름이 어떤 형상을 띠고 나타났다 사라지고,

또는 먹구름이 일어나 온 세상을 뒤집듯 비를 뿌려도,

푸른 하늘에는 한 점의 티끌이나, 흠집도 나지 않는 것과 같다.

다만, 우리가 인식하고 이렇다고 여기는 그러한 모습의 실재는 애초에 없을 뿐이지,

우리라는 허상이 있기에,

그러한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실체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앞서의 논리의 이설이 되고 있다 할 것이니

논리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해 두리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생각으로 그려진 상처럼

실재하는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면,

그 실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모습과 닮거나 비슷하거나 용인되는 것만 받아들일 것이므로,

이 세상의 삼라만상의 다양한 모습들은 생겨날 수가 없다.

이 주장은  내용이 어지러운 논리라 납득 할 수 없는 소견이라 하리다.


다행히도,

앞의 명제들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이 허상이어서

실재는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으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는 것 아닌 다른 여러 가지의 모습들도,

그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질 수가 있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이 실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리도 다른 사람은 알기 어려운 혼자만의 이해라 하리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명제에서 말하는 실재하는 것이 애초에 없다는 말은,

우리의 인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그러한 모습으로의 실재하는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찰나 간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의 바탕이며

그러한 것들이 일어났다 사라지게 하는 원인인

진정한 실체가 없어서 실재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진정한 실체는

우리의 인식이나 관념으로 그려진 편협된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규정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실체 위에는 모든 허상들이 찰나 간이라도 실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잠시도 머물지 않고 바뀌고 있지만

그러한 것들이 그러한 모습으로 생겨나는 것도 근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고

그러한 것이 잠시도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것 역시 실재하는 것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 진정한 실체의 바탕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삼라만상과 우리네 삶은 그것이 존재하는 그 순간만큼은 실재하는 것이다.

논리의 일관성이 결여된 주장이라 하리다.

그리고 나타났다 살아지는 허상인 현상을 실재라 표현하는 것은 잘못안 소견인 것이올시다.


이것이 다섯 번째의 명제이다.

다섯 번째의 명제의 결론이,

우리의 매 순간 지금 이 모습이 바로 진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바로 실체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실체가 어떤 규정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모습 또한 어떤 규정된 것만 실체의 그림자라고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모습과 삼라만상이 모두 실체의 드러난 현상이어서

그 모든 것이 바로 실체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촛불과 빛이 둘이지만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어서 하나이듯이.

몸과 몸짓이 둘 같지만 하나이듯이

진정한 실체를 알려고 한다면,

우리가 상상하고 분별하여서 알고 있는 그러한 모습으로 실재하는 것은 본래 없으며,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실재함을 알아야 한다.

논리의 모순과 이설임을 알지 못하는 주장이라 할 것이올시다.

이 나퉈진 몸은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올시다.

현상은 실재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허망한 허상이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며

따라서 이 몸 또한 허상인 것이로소이다.

실재하는 진성이 상이 없다하여 일체 허상을 실재라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소견인 것이올시다.


비록 허상의 상대 법이라는 논리상으로 실체라는 것을 우리가 감지할 수 있다고 하나,(논리상으로나마)

그것은 '있다 없다'라는 개념 저쪽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그 실상을 보려고 하는 어떠한 노력도 헛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 자체는 될 수 있어도, (우리가 바로 실체의 드러난 현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자, 보는 자라고 함은 이미 허상이 실상을 보는 것이 되어버리므로....

(앞에서 설명해놓았는데 충분할지는 모르겠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거나 볼 수가 없다.

다만, 그것 자체가 될 뿐이다.

그래서 역으로 그것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우리의 허상을 통해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허상이 바로 우리의 에고이다.

(에고라고 분별하는 놈이 아니라.... 하기는 그 분별하는 놈조차도, 실상이 없으면 일어날 수가 없으니...)

아직 진실한 본성을 체달해 보지 못한 소견에서 나온 주장일 뿐이올시다.

그리고 에고는 중생심에서 일어나는 아상이 그 원인임도 알아야 하리다.



비록 허상일지라도,

그 허상이 찰라 간이라도 존재하는 때에는 실체의 성품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그 허상을 통해서 실체(진아)의 모습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촛불이 없으면 빛이 없고 빛이 없으면 촛불을 볼 수가 없고

실체가 없으면 그림자도 없고 그림자가 없으면 실체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논리라면 실체인 성품이 진아인 것이니 앞서의 주장들에 모순된 이설이 되는 것임을 살펴 고쳐 알아야 하리다.


그 찰라간 존재하는 우리의 그 모습,

그것이 바로 진아의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바로 진아요,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우리의 에고가 바로 진아의 참모습인 것이다.

여기에 와서 또 다시 논리가 이그러지고 있다 하리니 에고는 중생심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나퉈 존재하는 이 화신은 참이 아니며 진아의 실상인 모습이 아니올시다.


다시 말해서,

우리라는 모습과 우리가 보고 아는 모든 것들이

찰라 간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물방울 같은 존재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바다에서 나온 것이기에 바로 바다인 것처럼,

우리의 모습이 비록 허상이라고는 하나,

실체가 없으면 우리가 생기지도 머물 곳도 돌아갈 곳도 없으므로,

바로 우리가 실체인 것이다.

이것이 허상을 통해 실체를 아는 것이다.

허상을 통하여 실체를 안다는 말은 옳다 할 것이나 현상을 실상으로 주장하는 것은

큰 모순임을 알아야 할 것이올시다.

어째 말들이 갈지자로 일관성이 없는지 이해가 어렵구려.


진아는,

우리의 편협된 인식의 퇴적물이나 상상으로 그려진 그러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어떤 것도 분별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어떤 것에도 자유롭다. 그래서 자유의 근본이다.

그래서 그것을 아는 자는 자유롭다.

분별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므로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래서 사랑의 근본이다.

그래서 그것을 아는 자는 사랑 그 자체가 된다.

분별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분별치 아니하면 사랑이 생기고 자유로워진다.

진아는 크기가 없고 분별이 없기 때문에,(어떤 규정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어떤 크기이든 어떤 모습이든 그 모양에 맞춰서 자리를 내어준다.

그래서 진아로 부터 나온 허상이자 바로 그 모습인 삼라만상의 우주도 애초에 그 크기가 없이 존재하며,그래서 성스러운 것도 잡스러운 것도 없다.

일체만유가 진이로부터 나퉈진 것이나 그 나퉈진 현상은 허상이며 허상인 현상은

분명히 크고 작음이 있으며, 존재하나 그 존재는 일시적인 것이며 허망한 것일지라도

성스럽고 잡스러움이 없다 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올시다.


양무제가

"무엇이 불법의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첫째가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에, 달마 대사가 대답하기를,

"진리는 확연하여 아무 것도 성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 모든 것을 말하여서 분별이 없다.

그래서 모든 성현들과 조사들이 분별하지 아니함을

첫걸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럴듯하게 논리 전개를 한듯하나 말 가운데 모순을 알지 못하였다 할 것인즉

달마대사가 하신 말뜻을 현상과 일치시켜 알면 그르칠 것이올시다

달마대사가 한 그 말씀은 실상의 본성인 법성을 이른 것이올시다.


깨달으면,

분별이 사라진다.(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말장난 같으나 사실이다.)

그래서 분명 '있는 그대로' 살아가나, 달라진 것이 있다.

욕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미워도 하고, 심지어 분별에 매여서 못 견디기도 하지만,

그는 스스로 그 어떤 것에도 영향 받지 않는 그 것임을 안다.

(안다는 말은 머리로 굴려서 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내가 나임을 의심치 않듯이...)

어림도 없는 소리라 하리다.

깨달음이란 그렇게 아는 것만이 아니올시다.

그것을 체득(體得)하였기에 자기 변화는 영향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분별에 매여서 못견디는 그러한 것이 아니올시다.


육조단경에서 말하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의 뜻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는 말에서 첫째의 뜻이란,

바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거하고, 모든 것이 일어나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그러면서도 그 어떤 것에도 영향 받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첫째의 뜻이요 실체의 모습이다.

(모습이라고 하면 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실체와 허상'이라는 제목으로 길고 난해해 보이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이라고 이야기하는 어떤 논리상에선,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그 실체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함이다.

그리고, 삼라만상이 모두 진리의 바다여서 따로 찾을 진리가 없으니

찾으면 찾을수록 진리는 더욱 알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즉,

명확한 어떤 것을 얻으려는 노력과 논리를 따지고 결과를 증명해 내는 것은

바로 그 분별하는 마음이란 놈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분별하는 마음은,

애초에 잡을 수도 없는 것을 자꾸 잡으려 하여

늘, 이것과 저것을 나누고,

실상이니 허상이니 하고 따져서,

자신이 이해될 수 있는 어떤 의미 있는 것을 가지려 한다.

그래서

그 마음을 '집 짓는 놈'(규정될 수 없는 삶과 세상을 규정지으려는 헛된 노력을 하는 놈)이라는 것이다.

그 마음놀이에서 벗어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선사들이 "놓아라!" 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서 또 선사가,

"놓을 것도 없는데 자꾸 쥐려고 하니까 놓으라 하지."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분별하는 마음이란 놈이 진성을 여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님도 마땅히 알아야 하리다.


결론은?

"알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오직 그것만의 삶을 그냥 살아라." 이다.

알아야할 무엇이 있어야, 알려고 하는 노력이 있고 아는 결과가 있지,

모든 것이 다 진리여서 따로 찾을 것이 없는데 알아야할 무엇이 따로 있단 말인가?

알아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은 

곧 이대로 알지 못한 체 알려고도 하지 않은 체 살아가라는 주장인즉

원론에 국집 할 것이 아니라 닦아 증득함이 있음도 알아야 할 것이올시다.


진정으로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지금의 있는 그대로의 삶이 바로 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모든 것을 분별없이 받아들이고 살면 다 알아지는 것이다.

바깥에서 오는 삶이든, 자신의 속에서 일어나는 삶이든.....

분별없이 산다는 것은 말하기는 쉬우나 이류 축생도 그러하거늘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다 하리다.


분별없이 받아들이고 사는 그 마음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본인은 분별없이 살아가며

그러므로써 깨달음을 성취하였다 주장하는 것인지 묻고자 하는바 올시다.


이런 물음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이 글 역시 앎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물론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앎은 분별을 그치고 진정한 존재가 되면 저절로 알아지는 것이지

머리로 인식의 노력으로 알음알이를 굴려서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또 이글을 읽고 이해를 하고 앎이 생길 수는 있으나

분별을 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알음알이 일뿐,

진정한 존재로 살아가는 참 맛을 알 수가 없을뿐더러 자유라는 것은 한 톨도 없다.

먼저 분별을 그치라.

긴 글을 살피면서 감파한 바로는 이 글을 쓴이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꿈에도 참 깨쳐 알아 한 말이 아니며 모두가 본인이 말하는 알음알이라 하리다.

마지막으로 묻건데 본인은 대오견성을 하여서 일체종지를 깨쳤다 장담할 수 있겠는지?

만일 그러하다면 이 산승과 진리를 토론 할 용의가 있으신지 제안 하는 바올시다.()

출처 : 청봉스님의 장군죽비
글쓴이 : 장군죽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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