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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명상과 참선에 대해

by Borealis 임박사 2015. 11. 15.

명상과 참선은 비슷한 면이 많이 있습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내면을 바라보아 마음의 평화를 찾는 다는 점에서는 명상과 참선은 비슷합니다.

방법도 앉아서 하는 법, 서서하는 법, 숨을 쉬면서 집중하는 법, 한가지에 마음을 고정시키거나, 한가지를 떠올리거나 하는 등등 방법이 있습니다.

명상은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에서도 하고 기독교에서도 하고 요가학파에서도 하고 뉴에이지 종교에서 뿐만 아니라 건강증진, 심신 안정을 위해 누구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선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마음의 근본을 깨우치고 우주의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 목적입니다.

불교에서는 참선에 들어가기 전에 수행의 깊이가 낮은 사람들에게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방법으로 오정심관을 먼저 가르칩니다.

오정심관五停心觀 이란, 수식관, 분별관, 자비관, 인연관, 부정관 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내적인 마음의 평화와 원만한 인간관계를 방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불건강한 심리상태는 탐욕, 화, 어리석음의 3가지 독성과 자아에 대한 집착(我執), 그리고 분별하는 산란한 마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들 5가지 불건강한 마음을 정화하고 해독하는 방법이 오정심관입니다.

탐욕의 성향이 강한 사람, 색욕이 많은 사람은 부정관(不淨觀·몸의 더러움을 떠올림, 해골이나 시체등을 떠올리기도 함)을 하고,

분노의 성향이 강한 사람은 자비관(慈悲觀·모든 생명들의 행복을 염원하거나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자비심을 생각하는 명상훈련)을 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관(因緣觀·일체 것들이 원인과 조건에 얽혀서 발생)을 하고,

아집의 성향이 강한 사람은 무아를 통찰하는 계분별관(界分別觀·5온, 12처, 18계를 관함)을 하고,

분별심이 강하고 산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수식관(數息觀)을 하면 효율적으로 마음을 다스릴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다스릴줄 알면 참선수행에 들어갑니다. 참선은 참구(깊이 궁구하여 깨우침)할것이 있는 선수행(마음을 집중하여 무념 무상의 공을 체득하는 경지)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좌선, 화두참선, 염불선, 위빠사나(사념처 관법), 사마타(지관 수행법 중에서 마음을 정지하여 삼매에 드는 방법), 등이 있습니다.

선禪이란 무엇인지 그 어의(語義)적 접근을 통해서 알아봅시다. 선이란 선나(禪那), 기악(棄惡), 공덕총림(功德叢林), 사유수(思惟修), 정려(靜慮) 또는 삼매(三昧)라고도 풀이됩니다. 선이란 산스크리트어로 드야나(Dhyana)

라고 하는데 한문으로 하면 선나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이를 젠(Zen)이라고도 합니다.

그 근본뿌리는 부처님의 삼회무언설법(三回無言說法) 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결국 선도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수행방법 중에 하나인 셈입니다. 부처님의 삼회무언설법이란 그 첫째는 부처님께서 연꽃을

들어 보이시자 마하가섭께서 그 뜻을 알아차리시고는 빙그레 웃음(염화미소)이고, 둘째는 부처님께서 설법 중 말없이 탑의 오른쪽에 앉으시니 마하가섭께서 주저함없이 왼쪽에 앉으심이고(다좌탑전 분반좌), 셋째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셔서 관속에 계실 때 마하가섭께 양발을 들어 보이심(곽시쌍부)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 속에서 그 근본을 찾자면, <화엄경>에서 이르시기를 "각수보살이 문수보살께 부처님 경계의 앎(知)을 물으시니, 문수보살께서 게송으로 답하시기를, 식(識)으로 능히 논할 바가 아니며, 또한 마음의

경계도 아니라, 그 성품이 본래 청정하여 모든 군생을 열어 보인다,"고 하셨으며, <화엄론>에서 이르시기를 "인생의 근본무명(根本無明)인 그 분별하는 종자로써 부동지불(不動智佛)을 이루어 선행으로 정진하여 깨달음에 드는 문을 삼는다."고 하신 말씀 속에서 우리는 얼핏 참선, 즉 선이란 것은 우리의 본성을 가지고 그 청정함으로 깨달음을 여는 방법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계,정,혜 삼학의 선정은 가르침의 말씀인 차별교문이요, 선종에서 말하는 선禪은 오로지 부처의 청정한 마음의 뜻이 가섭의 마음으로 전해진 그대로 이심전심의 법인 평등(不二)문이 것입니다.

석가세존께서 우주의 근본바탕인 나의 근원과 그 진리를 깨닫고자 명상하신 것이 곧 선禪이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우치신 바를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이 교敎라고 하며, 선과 교가 그래서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규종 종밀선사는 5가지 선을 들어서 그의 저서에 "계교로서 하늘에 나고자 닦는 것은 외도선이요, 인과를 믿으나 싫고 좋은 것이 있으면 범부선이요, 아공我空의 이치만을 깨달아 닦는 것은 소승선이요, 아와 법이 모두 공한 이치를 깨닫고 닦는 것은 대승선이며, 마음이 본래 청정하여 번뇌가 붙을 것이 없고 보리의 지혜가 원래 구족해서 마음이 부처라는 이치를 요달하는 것을 최상승선 또는 여래청정선 또는 일행삼매 혹은 진여삼매라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와 선불교를 편 것으로 많이들 알고 있지만, 실제로 선불교의 역사는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습니다. 다만 그당시에는 여래선 이라고 하여, 위빠사나, 사마타, 수식관, 부정관, 염불선 등 사람들의 근기에 맞춰서 수행방법을 달리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당시에는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할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으며 생활 방식도 아주 단순하고 먹을 것도 얻어 먹으면 되는 지극히 단순한 생활속에서 오직 수행에 전념하는 수행자 집단을 참선 지도 하면 되었기 때문에 복잡하게 수행방법을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고 불교가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뉘고 경전도 많아지고 교단도 확장되고 국가의 지원도 많이 받고 외세의 침략으로 불교기반이 흔들리고 그러는 와중에 중국에 불교가 넘어오면서 상황은 너무나도 많이 변하게 됩니다. 수행방식도 달라지고, 계율도 달라지고, 공부를 엄청나게 많이한 승려들도 나오게 되는 한 마디로 정신 없는 세상이 된것입니다.

달마대사에서부처 육조혜능 스님에 이르기까지의 선풍은 오직 마음을 직접 깨우쳐들어가는 것에만 집중했지 다른 설명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약 400-500 년 정도 흘러서 두개의 큰 선禪 불교의 흐름이 완성되는데 그것이 바로 묵조선과 간화선 입니다.

우선 묵조선은 지극한 마음으로 본성을 관찰하면 밝은 본성이 저절로 묘한 작용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중국 송나라 때 조동종曹洞宗의 굉지(宏智1091~1157)선사가 주창하였습니다.

묵조선법은 본래 '자성청정'自性淸淨의 신념을 기본 전제로 한 수행법으로, 자기 속에 내재하는 본래의 청정한 자성에 의지하는 선禪 수행법입니다. 즉, 묵좌默坐하는 것만이 지혜의 작용을 활발히 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바른 길이라는 것입니다. 굉지선사는 이 묵조법의 원천이 달마대사에 있다고 분명하게 피력하였습니다

간화선은 같은 시대의 대혜(大慧 1089~1163)선사가 주창한 수행법인데, 큰 의문을 일으키는 곳에 큰 깨달음이 있다고 하여, 화두話頭를 수단으로 '자기'를 규명하려 하는 선법禪法 입니다. 그리고 이 큰 의문을 일으키기 위해 이른바 화두란 것을 드는 것입니다. 화두는 글자그대로 '언어의 머리' 라는 뜻으로 어떤 말로 표현하기 이전의 도리 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어느 선사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답 하길 '뜰 앞의 잣나무', 혹은 '마른 똥 막대기'하여 버립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일체의 생각의 논리에서 벗어나 오직 '왜?'라는 의심만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도 가장 애용되는 화두로는 조주趙州 선사의 '무'無 자 화두를 들 수 있습니다. 어느날 한 스님이 조주에게 '일체의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했으니, 개 에게도 불성이 없습니까, 아니면 있습니까?' 라고 묻자, 조주가 없다 즉 '무(없다)' 라고 답한 데서 온 화두입니다.

그런데 이에 화두를 받은 수행자가 만약 '왜 유독 개에게만 없다는 말씀입니까?' 라고 반문한다면 그는 간화선을 하기에는 기본자질 미달감 입니다. '분명히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데 어찌 없다고 답하였을까? 도대체 '왜?' 라는 큰 의문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 큰 의문인 '왜'가 ,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이 화두는 공안公案 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에서도 중국인의 사고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공안' 즉, 공기관인 관청의 결의안은 관청의 문서 라는 뜻으로, 백성이 관청의 문서를 무조건 따라야 하듯이 공안 즉, 화두도 무조건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따라가면 깨달음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이 공안은 1700가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만, 스승은 제자에 알맞는 공안을 내려주며 그때 그때 화두를 만들어 낼수도 있는 것이니 화두가 1700 개만 있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말이며 전해져 내려오는게 1700 개라는 소리지 선사라면 능히 자유자재로 화두를 만들어 낼수 있는 것입니다.

자칫 간화선만 바른 수행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달마대사도 간화선을 한 것으로 오해하는데, 초조 달마에서 육조 혜능까지 선불교의 법맥을 전수받은 분들은 간화선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분들은 묵조와 간화의 논쟁 이전 즉, 굉기와 대혜 보다 적어도 500년 전의 분들입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간화선 아니면 사도라 했던 대혜의 한 마디에, 초조 달마에서 육조 혜능(638~713)까지 여섯 분은 졸지에 불법이 아닌 외도 수행을 한 분들이 되어 버리는 심각한 모순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묵조선의 창시자인 굉지선사는 500여 년간 이어져온 전통적 수행법을 이어받았다고 '확신'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이 전적으로 오류였다는 결정적 증거도 없습니다.

같은 시기에 간화선을 주창한 대혜가 간과한 점은 묵조선을 공박할 것이 아니라, 묵조선으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기 힘들어진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굉지스님의 묵조법은 달마시대의 수행법을 원형原形으로 삼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 달마는 대혜보다 500년이나 앞선 시대에 수행한 분이었고 당시는 물질적으로 아주 부족했던 시절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달마스님시대에는 선수행을 할 때 일어나는 번뇌도 본능적 욕구와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해결하는 이외에는 다른 물질적, 사회적 장애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당시에는 선수행을 하던 사람도 없었고 사람들도 순박했고 구도의 열정이 있는 사람들만 지도했으면 되었고 그래서 마음을 바로 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묵조선의 방편이 맞는 말인지 모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마음을 바로 보아 본성을 깨달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게 말처럼 쉬운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심한 경지에서 번뇌가 사라지고 본성을 본다는게 말은 당연하지만, 중생들은 그렇게 쉽게 될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다스릴 능력이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점점 더 세속적이 되어 더 영악해져서 마음을 무심으로 단박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조선이 비실용적이라고 공격을 받게 된것입니다.

반면에 대혜스님는 달마스님보다 500 년 이후에 살았으니 문명이 발달하고 시대가 달라졌으며 사회분위기도 다른 시대에 살던 사람이란 뜻입니다.

단순히 먹고, 입는 것을 걱정하는 것 외에 다소 풍족해진 물질에 대한 상대적 욕심과 정치적, 사회적 변화에 대한 걸리적거림이 비교할 수 없이 많아졌을 것입니다. 자연히 번뇌가 더 많고 복잡해져, '마음대로' 안 되니 번뇌를 조복해줄 강력한 방편이 필요했던 것이고. 대혜스님은 그 방편으로서 '화두'를 선택한 것입니다.

즉, 무심 無心한 경지에서 고요한 마음을 보는 것이 안되는 중생들의 마음을 집중시키는데는 무심보다는 일심 一心 이 더 효과적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을 완전히 비우는 것은 힘들어도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훨씬 더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하나로 집중되어 흔들리지 않으면 그 상태로 삼매에 이른다는 것이 화두선의 요체입니다.

또 한가지 단순히 무심한 경지에 이르면 고요함에만 머무든 단점이 있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화두선은 그에 비해 아무리 삼매에 들어도 의심을 놓지 않게 됩니다. 그 의단이 깨칠때 깨우침이 얻어지는 원리입니다. 묵조선은 관하는 자와 관하려는 대상이 결국 하나가 되어 깨우쳐야 하는데 자칫 고요함에만 머물러 관하는 것을 놓치면 죽도 밥도 안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화두선이 쉽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는 것이 무심보다는 효율적이라는 뜻이지 큰 의단이 들어서지 않으면 결국 화두선도 체질상 맞지 않는 것이 됩니다.

화두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도리가 오롯히 담겨있는 것이니 거기에는 반드시 깨달아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화두를 거량하는 것을 선문답이라고 하는데 선문답이 마치 무슨 말장난으로 알고 아무 소리나 거창하게 가져다 붙이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불교학자들은 화두와 선문답은 쓸데없는 자기들끼리하는 헛소리 정도로 여기고 있는게 현실입니다.

화두를 의심할때는 경전에 있는 말을 대입해서 풀려고 해도 안되며 남의 말을 끌어다가 맞추려고해도 안되고 화두를 풀어헤쳐서 분석하여 맞추려해도 다 어긋난 것입니다. 딸기 라는 글을 읽는다고 입속에 딸기 맛이 느껴지는게 아니듯이, 삼매니 반야니 하는 경전 구절을 읽고 외운다고 해서 당장 내가 삼매에 들어가고 반야지혜가 나타나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아는 것으로 자신의 살림살이를 삼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알고 깨우쳤다면 남이 써놓은 말을 하는게 아니라 자기가 깨친바를 자기 언어로 하면 됩니다. 서로의 안목이 같으면 어떻게 표현을 해도 이해가 가는 것이 바로 화두요 선문답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