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따라 흘러가다.... 나는 일제 시대에 중국에서 출생했다. 모친께서 꿈에 산중왕(山中王)이라는 호랑이가 나타나 앞에 와서 엎드리기에 등에 올라타고 호랑이의 갈기를 두 손으로 붙잡으니, 호랑이가 번개같이 달려 법당 앞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한다.
그 때 법당에서 부처님이 나오셔서 이마를 짚어 주시면서 빙그레 웃으시는 것을 보고 깨어난 뒤, 태기(胎氣)가 있어 낳은 물건이 이 몸이다.
해방이 되자 부모 손에 이끌려 고국에 돌아와 안주(安住)한 곳이 경북 영주였다. 어릴 때부터 모친의 손에 이끌려 절을 찾았고 절에서 주는 음식이 그토록 맛있었다. ‘미션계’ 고등학교를 나오게 되어 성경공부도 제법 열심히 하였으며 장성(長成)하면서 내 스스로 사찰을 찾아본 일은 없었으나, 누가 종교가 무엇인지 물으면 서슴없이 불교(佛敎)라고 했었다.
사회인으로 성장하여 좀 여유가 생기자 객지에서 고학(苦學)으로 학업을 계속한 어렵던 시절을 생각하 며, 사회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넝마주이(양아치라고도 함)들과 3년여 동거하며 선 도(善導)생활도 해보고, 재소자(在所者) 선도 사업 등을 하다가 제법 재력(財力)도 생기고 동아병원 원장으로 세상에 꽤나 알려지게 되자, 어렵게 살아온 성장 과정에서 주위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과 내 앞에서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인생 공수래공수거(人生 空手來空手去)’를 상식이 아닌 가슴 속 깊이 와 닿는 철학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내 힘닿는 데까지는 어려운 분들을 돕겠다고 무료 의료 시혜, 청소년 선도 사업, 군부대 위문, 소년소녀 가장 돕기, 재소자 교화, 무의촌(無醫村) 진료사업 등에 열심인 때였다.
어느 날 만찬석상에서 우연히 민요가수 최정자 보살을 만나게 되었다. 그 때 내 곁에 앉은 최보살이 나에게 말하기를 “선생님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들 하던데 제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하였다. “무엇인지 말씀해 보세요.” 했더니 “우리 불교에는 공부만 하고 계시는 수행스님과 노스님들이 많은데, 그 분들은 돈이 없어요. 기왕 좋은 일을 하시는데 우리 불자들을 위해 은혜를 좀 베풀 수 없나요?” 하였다. 그래서 나는 쾌히 “불가(佛家)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으니,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 아니겠소. 힘닿는 데까지 돕도록 하지요.” 하였다.
이튿날 그녀는 나를 데리고 세검정에 있는 일붕선원, 정능에 있는 경국사 등을 두루 참배(參拜)하게 다. 그 후로 그녀의 가족과 우리 가족은 자주 사찰을 찾게 되었고, 주말이면 사찰과 산천을 찾아다 니며 참배하고, 불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즐거움을 찾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해서 나는 절에 열심히 다니게 되었고, 많은 스님들을 만나 무료 진료 혹은 30% 치료비 정도로 돌보아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던 우엽 비구니 스님의 병실에 들렀다가 그 스님의 은사이신 옥호스님에게 물었다. “관세음보살님은 석가세존처럼 실존 인물입니까? 아니면 가공의 인물입니까?” 했더니 “원장님이 집에서는 가장이요, 병원에서는 원장이요, 애기들에게는 아버지가 아닙니까?” 했다. 나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하여 이 문제로 한참 입씨름을 하다가 화가 나서 “좋소! 그만둡시다. 내일 경국사에 가서 지관스님께 물어 볼 터이니….” 했더니, 옥호스님이 “지금 안국동 선학원(禪學院) 에 주석하고 계시는 우리나라 최고령이신 대선지식(大善知識)으로 혜암선사라는 분이 계시니 내일 거 기 가셔서 직접 그 분에게 여쭈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했다. 말에 마음이 동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이튿날 나는 집사람과 최정자 보살을 데리고, 선학원으로 혜암선사를 찾아가 친견하게 되었다. 예를 올린 후 어젯밤의 의문을 풀고자 그 문제를 여쭈었다. 그러 자 사(師)께서는 “그것을 나에게 답으로 들어 알려 하지 말고 직접 공부해서 깨달아 아는 것이 더 좋지 않겠나?” 하셨다. 이러한 인연으로 수미산화 화두(話頭)를 간택 받게 되었고 그 후로 유발상좌가 되어 항상 노은사 (老恩師)를 찾아뵙게 되었으며, 마침내 가까이서 모시게 되었다. 물론 생활인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틈이 나면 좌선하고 동중(動中)에도 화두를 의심하였다. 이로부터 행주좌와(行住坐臥) 가운데 오로지 화두삼매에 빠져들게 되었다. 우리 노사(老師) 곁에는 항상 공부하는 분위기였고,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법거량이 날카로워 깨어 있지 않고서 는 바보가 되는 오매일여(寤寐一如) 공부하는 삶이었다.
게다가 우리 가족 네 명도 사(師)의 지도를 받아 열심히 공부하였다.심지어 잠이 들기 전까지도 탁마(琢磨)와 의단(疑團) 속에 잠이 들었고 꿈 속에서도 화두의심이었으며, 때로는 꿈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화두의 골자가 드러나기도 했다. 무엇인가 한 가닥 지견이 생기면, 그 것을 사(師)께 참문하여 점검받고 싶은 생각에 날새기가 무섭게 쫓아가 찾아뵙곤 하였다. 잠에서 깨어 눈을 뜨면 가장 소중한 것 챙기듯 의식하지 않아도 먼저 화두 를 챙기곤 하였다. 술자리가 있어 아무리 과음을 하더라도 새벽에는 한 시간 정도 남몰래 일어나 좌선삼매에 들곤 하는 것이 생활이었다. 정말 당시의 내 생활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이 공부였고, 무슨 일보다도 사(師)를 찾아뵙고 모시고 옮겨드리고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사(師)를 그토록 시인하였기에 사(師)가 시키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심지어 불가능으로 느껴지는 일,내키지 않는 일, 벅찬 일이라도 지상명령이요 절대절명의 명으로 생각했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공부하여 사(師)를 모시다가 드디어 청봉(淸峰)이라는 법호(法號)와 전법게(傳法偈)까지 받게 되었으나, 그 당시 나는 법호니 전법게니 하는 것을 그다지 대수롭게 생각하지도 않고 관심도 별로 갖지 않았다. 그러던 중 김종문 처사가 “원장님, 앞으로 노스님께서 입적(入寂)에 드시면 법(法)을 펴셔야 될 터인데, 사람들은 상(相)을 먼저 보니 승적(僧籍)을 갖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간곡하게 권하는 데 이끌려 석천(石泉)스님을 은사로 계(戒)를 받고 승적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온 정성과 정을 다해 믿고 모시던 사(師)께서 이 세상과의 인연이 다해 몸을 벗으시니, 나 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천애고아(天涯孤兒)가 된 기분이었다. 아무리 사(師)께서 법에 의지하고 보임 하라 하셨으나, 나는 쉽게 허전한 마음의 동공을 메우고 달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師)의 생시(生時)에는 그 말씀을 거슬러 본 일이 없다시피한 내가 사(師)께서 입적하시자 당신의 뜻을 저 버리고 국화꽃으로 온통 식장과 상여(喪輿)를 장엄(莊嚴)함으로써 허전한 마음을 달랬던 것이다. 오고 감도 없고 나고 죽음도 없는 도리를 체달(體達)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익혀온 습기(習氣)로 인한 애착(愛着)의 정(情)은 쉽게 끊지를 못했던 것이다. 차라리 조용한 곳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차차 선방(禪房)이나 만들어 도반(道伴)들을 모아 유유자적 (悠悠自適)하게 탁마하며 살겠다고, 경기도 광주에 전원주택을 짓고 거주처를 옮겨 식구들과 별거(別居)하고(식구들은 애들 교육문제로 서울에 그대로 살았음) 혼자 들어가 조용한 곳에서 자연과 벗하였다.
그리고 출근하여 병원에 들르면 결재나 하고 만날 사람들 만나보고 돌아와 보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대한불교청년회의 이건호 거사(居士)가 찾아와 “유상종이라는 분이 장군 출신으로 회장을 맡았으나, 그 분은 대구에 계시고 재정능력도 없어 중앙회 운영에 어려운 점이 많으니, 원장님이 수석 부회장을 맡아 대임을 수행해서 이 나라 불교의 앞날을 위해 젊은 불자들을 좀 키워주세요.” 하였다.
몇 번이고 거절했으나, 그 분의 권유가 간곡했고 앞날의 불법은 결국 젊은이들이 혜명을 이어나가야 일이다 하는 생각에 평소 청년회장들이 찾아오면 운영비에 보태 쓰라고 보시금도 몇 차례 준 일이 생각나 작은 힘이나마 그들을 위해 보태리라 결심하고 응하게 되었다. 내 자비(自費)를 들여 청년회 사무실을 얻고 사무 집기 일체를 준비하고 나름대로 임무수행을 열심히 했으며, 유회장의 뒤를 이어 차기 회장에 피선(被選)되어 불교청년회 일을 맡았다. 여기에서 나는 불교계의 좋은 일면도 보고 많은 견문도 넓혔으나, 불교계의 추한 이면도 보게 되어 실망도 많이 했었다.
불법(佛法)이야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이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중생심으로 추한 욕심과 집착을 일으켜 명리(名利)와 이권(利權) 때문에 권력싸움과 권모술수(權謀術數)가 난무했고, 일각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폭력도 서슴지 않으므로 나로서는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아, 대한불교 청년회의 일도 그만두었다.
그 후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계에 들어가 국회의원 출마를 하게 되었고, 전연 뜻하지 않은 낙선의 고배를 마시게 되었으며, 이 아무개라는 이를 믿고 사업 자금을 맏겼더니, 이 혼망한 틈을 이용하여 거액을 착복하고 부도까지 내는 고통을 겪게 되는 등, 이 시절의 나는 무진한 고통과 참담한 괴로움을 맛보게 되었으며. 더는 견딜 수 없는 가운데 참으로 내가 가야할 길을 찾아야만 하게 되었다.
인생이란 덧 없는 것.. 이제 육신의 병을 고치는 병원원장에서 모든 중생의 병의 근원이 되는 마음병을 고치는 길을 찾아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렇 게 하여 집을 나와 찾아간 곳이 아는 스님이 주지로 있는 절간 이었다. 이때부터 출가생활이 시작되었고, 법당(法堂)에 들어가 하루 한 두 시간 독경(讀經), 기도(祈禱)를 하고 이렇게 시간을 메워 우선 세상사 무엇이든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하기를 3개월쯤 지나니,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이 찾아 들었다. 새벽에 좌선하고, 오전에는 법당 참배하고, 낮에는 절간 살림에 필요한 노동일을 하고 독경을 하고, 저녁이면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고…. 그렇게 하면서 시골마을 농사일을 무보수(無報酬)로 거들어 주고 하는 가운데, 내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가게 되었다. 그 동안 매(昧)해졌던 법안(法眼)이 차츰 밝아지기 시작하였으나, ‘내가 옛날 알고 생각했던 스님상은 이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도 들고 못 볼 것도 보게 되고 하여 그 절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에는 이절 저절 떠돌아 다니며 정진 수행으로 보내던 어느 날,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혜암선사가 홀연히 나타나 준엄하게 꾸짖으시기를 “무릇 세상사 모두가 환(幻)임을 알 터인데 무엇에 집착하며 무엇을 얻고자 그토록 헤매었는고? 이제부터 잘 보임하여 법을 펴도록 하라.” 하셨다. 나는 ‘그 동안 이 모든 시련이 법을 펴게 하기 위한 시험이었구나. 그래 삶이 환인 것을…. 이제 내가 할 일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다.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부처님의 혜명을 밝혀 법을 펴야겠다. 그래야만 노사(老師)의 법을 이어 사은(四恩)을 갚게 되리라.’ 하고 생각했다. 나는 그 날부터 깊은 숲 속 바위 위나 방안 등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앉고 서고 눕는 가운데 화 두를 들어 의단(疑團) 가운데 몇 개월을 지냈다. 그러다가 깊은 산속으로 찾아들어 몇년을 불기 없는 바위동굴을 의지하여 비닐 한 장을 쳐놓고 오직 화두삼매에 들어 정진하며 지내며 처음에는 밥을, 리고 나서는 생식을 나중에는 벽곡을 하며 삼매가운데 시간을 잊고 지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생사업(生死業)을 녹이는 광명을 체득하게 되었고,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나와 둘이 아님을 보게 되었다. 그 법열(法悅)은 마치 벙어리가 꿀을 먹은 것처럼 누구에게 설명할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다. 이같은 희열로 그 동안의 괴로움과 슬픔과 분노가 모두 꿈을 꾼 듯 하라지고 오로지 환희로움뿐이었고, 이제 생사없는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를 얻었(?)으니 더 오래 이 몸을 끌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마저 사라졌다.
그러나 문득 혜암선사의 준엄한 꾸짖음이 나를 경책하는 것같아 의식을 다시 정리하여 “법을 펴자! 법을 펴는 데 있어서는 속인(俗人) 열 명, 백 명을 눈 밝도록 지도하느니 스님 댓 명만 혜안(慧眼)을 갖추도록 지도하자. 그렇게 되면 그들이 여러 중생들을 제도할 것이요, 그 여럿이 더 넓게 많은 중생 을 제도할 것이다.” 하는 생각으로, 이제 스님들을 지도하는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법기를 찾아 이 절 저 암자를 돌아다녔으나 과연 그럴 만한 그릇은 좀체 없었다. 법거량을 하려들면 먼저 겁부터 집어먹고 “아이구,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예불이나 하고 경(經)이나 읽어 교학이나 논할 뿐 선(禪)은 엄두도 못내니, 저에게는 선문답(禪問答)을 하지 마세요.” 하는가 하면, 도리도 알지 못하는 ‘할’, ‘방’ 이나 함부로 쓰거나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 하며 입만 열면 큰 일 이나 나는 것처럼 뜻도 모르고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언설(言說)로 미치지 못한다.”라며 말에 얽매여 입을 뗄 줄 몰랐다. 또 턱없이 권두(卷頭)나 하는 등 제 나름대로 아는 체 집을 짓고 그 집 안에 들어앉아 담판한이 되어 그 벽을 허물려 하지 않으며, 승려라는 아상(我相)에 꽉 차 있어 도대체가 벽창호들이었다. 한편 개중에 그런 대로 좀 쓸만한 스님 몇 분이 있어 안거(安居) 중에 함께 좌선하고 법거량도 해 보았으나 잿밥에 관심이 더 많았다.
‘이제 이렇게 될 바에는 승속(僧俗)에 관계없이 내가 직접 법을 펼 수 밖에 없구나’ 생각하고, 경술 년 보각사에서 동안거를 지내며 선실(禪室)에 주석하며 납자(衲子)를 제접(提接)하고 초하루 보름 결제, 해제, 상당법문(上堂法門)을 하게 되었다. 극한 상황은 차라리 공부에 도움을 주었고 처절하게 아픈 만큼 정진으로 한 생각을 쏟을 수 있 게 되었으니, 보임하는 데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내가 이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 동안의 괴로움 을 견딜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솔직한 내 심경을 피력한다면 세속에 두고 온 처자식들에게 못다한 내 책임이 생각날 때면 세존(世尊), 효봉스님, 성철스님 그 분들의 그 때 심경은 어떠했을까 하고 가늠해 보게 되며, 세속에 남겨둔 정리되지 못한 나머지 부분이 때로 산란함을 일으킨다. 그럴 때면 머리를 젓고 한 생각 돌려 공아(空我)의 삼매(三昧)에 든다.
세속에 살 때 근면하고 성실했던 내 삶과 경영능력을 인정하여 막대한 재산을 기증할 터이니 환속(還俗)하여 사업을 재개하라는 권유도 받았지만, 뜬구름같이 왔다 가는 인생에 무엇을 집착 하라? 온 곳도 없으니 갈 곳도 없는데, 이 몸 받아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고 이제 남은 생에 걸 릴 것이 있으랴?
[출처] 청봉선사 행장기, 경책문|작성자 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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